발표자: 박 양 수 목사
서론
오늘날 자유주의와 현대신학자들과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매우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등종교로 전락하고, 장로교회는 복음주의란 미명아래 교파를 초월한 신앙연합으로 장로교회가 가지고있는 교리와 정치원리가 퇴색해가고, 가장 성경적이고 개혁된 교리(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가지고 있으며, 개신교 역사의 중요한 원심력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장로교회가 복음주의에 휩쓸려 정체성을 상실하고 허둥되고 있는 이 때에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을 통해서 위대한 청교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남겨놓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 정체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이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1. 성경에 타나난 장로교회의 기원
장로(Presbytery)라는 말은 손윗사람, 연장자,노인 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상징적으로 지혜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잠20:29, 17:6,) 성경에 나타난 장로의 기원은 모세오경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백성중에 재덕이 겸함자를 뽑아 천,백,오십,십부장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였다. (출18:13-)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70인의 장로를 데리고 하나님앞에 나갔던일(출24:1-9)등으로 보아 장로란 바르게 다스린다는 성격을 부각시키는 직분이다. 신약에서도 70인역에서 장로를 손윗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영광을 얻을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장로라는 말은 교회와 연관되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직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장로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말이 파생된 것이다. 장로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Episcopos라는 말로 “감독하다” “치리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장로교제도의 근본 취지와 정신이 사라져가고 정치제도에만 힘을 쓰고 있다. 즉 민주적 제도인 투표권에 있어서 동등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적인 장로정치가 무너진다.
2. 초대교회의 조직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전무하고 구제와 봉사할 사람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데 말씀과 지혜와 덕행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 이들은 구제하는 일을 담당했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일도 했다. 로마서12장에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권위하는자, 구제하는자, 다스리는자, 긍휼을 베푸는자, 잘 가르치는자, 병고치는자, 능력행하는자, 영을분별하는자, 방언하는자,통역하는자들이 있었다.(고전12장 참조) 오늘날 직분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은사에 따라서 직분자를 세워야 한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은사보다는 개교회의 과시용으로 혹은 돈과 직업의 유무에 따라 직분을 세우는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선물이다. 은사를 통해서 직분을 세워야 지체된 교회가 골격이 반듯한 교회로 세워지고 반석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세속화는 직분 남발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 교회의 직분
그리스도의 몸된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직분을 주시는데, 직분에 따라서 행해야 할 기능이 있다. 직분을 맡겼어도 기능을 잘 못 사용하면 직분이 마비되고 혼란이 온다. 교회는 유기체이다. 직분은 유기체중의 하나의 위치(Position)이다. 기능은 위치에 머물러 그 위치에 맞는 소리(일)를 하는 것이다. 여러개의 위치가 모여서 각각 자기의 기능의 일(소리)을 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온전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은사(Gift)를 주어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것이다.
1)장로직분
장로직은 행11;30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안디옥교회 구제헌금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갔다. 행14:23에 장로를 세운다. 장로직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교회의 지도적인 직분임을 보여준다. 신약교회에서 장로직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장로라는 말은 5가지 직무를 포함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다(행20:28, 벧전5:2)둘째는 감독자이다(행20:28, 빌1:1,딤전3:2) 셋째, 치리자이다(딤전3:5,5:17,벧전5:3,히13:7) 넷째, 청지기이다. (딛1:7) 다섯째, 교사며 권위자이다(딤전3:2, 5:17, 딛1:9) 딤전 5:17절에 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라 하여 한 직분에 기능이 분리된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임직식 권면에도 잘 인용됨) 그러나 다른 기능을 가진 두사람이 이니고 여기서는 한 장로직에 두가지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Presbyteros)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장로(Episcopos)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딤전4:14에 보면 디모데도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안수는 신령한 은혜와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직분을 수행하는데 담대하게 수행하고 그리스도를 반대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전하기위해서 안수를 주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도 안수는 장로회에서 받은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2)집사
집사란 말은 종이라는 개념이 있다. (요12:26,롬13:4, 고전3:5, 고후6:4, 11:23, 엡3:7, 살전3:28,딤전4:6)집사(Diaconia)직은 추상명사에서 독특성을 찾는다. 이 단어는 잘 섬기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딤전3:10,13) 바울은 딤전3:9절에 집사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제2장 칼빈과 낙스의 교회관
1. 칼빈과 장로회 제도
칼빈의 장로회 제도는 칼빈의 독자적인 고안이 아니라 그가 불란서 스트라스부룩에 잇을 때 (1538년 8월-1541년 9월) 개혁자인 마틴 부써(M, Bucer)와 카피토(Capito)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당시 스트라스부룩을 7교구로 나누어 각 교구마다 3명의 모범된 성도를 세워 목사의 치리사역과 심반사역을 도와주도록 짜여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키르켄플래커 라고 하며 평신도 사역자를 말한다. 칼빈은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돌아와 “제네바교회의 교회서식서”(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즉, 교회헌법조항을 만들었다. 이 법 조항에 칼빈은 12명의 장로를 세웠는데 이들은 모두 제네바 시 의회에 속해있는 공직자들로 모범된 평신도들이었다. (p36 참조) 이들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의해에서 해임시켰다. 이 법 조항 문헌에서 장로라는 말을 게속 사용하고 있는데 장로직은 사도적 사역자가 아니라 의회의 감독과 혹은 대표자로써 장로협의회에 위임된 자들임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그들의 임무는 언제나 종교적이였고, 도시의 여러 구역에서 선출하여 행실이 선하며 영적지혜가 충만한 자라야 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생활을 항상 감독하며 사랑으로 훈계하며 필요시에는 상부에 보고했다. 칼빈이 잘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를 잘 보좌하기 위해서 장로제도를 세운것이다. 칼빈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는 엄격히 구별되며 장로는 치리하는일에 전담하며 목사를 보좌 했다. 칼빈은 장로의 자격은 선하고 정직하며 도덕적으로 무흠하고 하나님을 두러워하고 영적으로 충실한 사람이어여 한다고 규정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날 목사와 함께 모여서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무질서와 방종을 살피고 그 치료책을 토론했다. 여기서 성경에 근거하여 권징을 다루며 출교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당회제도이며 장로정치 제도이다. 제네바 교회에는 두 종류의 집사직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제품을 분배하는 집사요, 하나는 병자를 돌보는 집사였다. 집사의 선출은 장로의 선출과 같았다.
2. 존 낙스(1505-1572)와 장로 제도
마틴 부써가 장로제도의 기초를 이룩 했다면 존 칼빈은 장로제도의 이론을 체계화 시켰으며 존 낙스는 장로교 제도를 구체화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낙스는 위스하르트(1513-1546)의 설교를 듣고 개신교로 개종하여 위스하르트가 순교한날 스코트랜드를 떠나 잉글랜드에서 지내다가 메리영왕의 학정으로 제네바에가서 칼빈을 만나 1555년에 제네바에서 공중에배 지침서를 작성했다. 1559년 5월에 에딘버러 남동쪽 리쯔항을 통해서 입국하여 1560년 스코트랜드 교회를 개혁했다. 1560년 의회는 스코트랜드의 개혁교회에 맞는 최상의 교회정치제도를 만들라고 교회에 부탁하여 만든 것이 “제일 치리서”이다. 이 치리서는 총9장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 3장은 교리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다음 3장은 교회직분을 다루고 있고, 1장을 의무교육과 학교설립 대학교육의 강화을 명시하고, 나머지 2장은 교회의 권징과 복지정책에 대하여 논하고, 노인과 연약한 사람들과 압제받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게으른자들과 부랑자들을 징계하도록 했다.
이 치리서를 성경적인 장로회 정치제도로 보고 여기에서 당회 ,노회, 대회, 총회를 설립했다. 1572년 11월24일 낙스가 죽고, 그 후계자인 앤듀류 멜빌(Andrew Melille, 1545-1622)이 30여명의 개혁동지들과 함께 낙스의 정치원리를 구체화사켜 장로교의 체계를 정착시켰다. 이것이 1578년에 작성된 “제이 치리서”이다. 이 치리서는 1581년에 총회에서 인준을 했는데 이 치리서의 특징은 국가 정치와 교회정치를 분리시킨것이다. 교회정치는 교리교육과 권징 및 성례로 구분을 짓고 교회 공직에서도 항존직을 세그릅으로 구븐하고, 처째 그릅은 목사, 감독, (설교자)이며, 둘째는 장로 혹은 치리자이며, 셋째는 집사 혹은 분배자로 구분했다.
제3장 스코트랜드 교회개혁의 필요성
1. 개혁이전에 모습
개혁 이전의 스코트랜드 교회는 교황정치 체제하에 있는 하나의 교회였고 교황의 권위가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만 사용되었다. 모든 교리 예배의식 교회정치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교회가 제정한 성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 가르첬고 따라서 제왕이나 군주들 귀족들과 평민들 모두는 교회를 적대시 하거나 거역하는 것을 생각 할 수도 없었다. 교회의 전통이 성경말씀보다 더 우선했다. 교회는 국가에대한 정치적인 우위권을 강조 했고 국가와 시민의 모든 생활과 활동을 다스렸다. 또 교회는 성직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을 위해서 대학을 설립했다.
2. 개혁의 여정
신대륙이 발견되고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평민들의 힘이 강해지고 화약의 발명으로 평민들도 무장을 하고 기사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게되었다. 코페르니쿠스(1543)의 가르침으로 교육과 학문 사상적 발달이 급진전 했다. 종교적인 변화가 일어나 외형적인 것보다 실재적이고 내적인 것을,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을 강조했다.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이이때 1526년에 틴데일의 영어번역 성경이 출판되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출판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 성경을 설명해 주기를 원했다. 즉, 설교사역을 강하게 요청한 것이다.
3. 개혁의 태동
위클리프, 존 후스(1373-1415) 프라하에서 화형당했다. 실제로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버그 대학 게시판에 95개조항이 나붙었을 때 부터이다. 그리고 칼빈(1509-1564)이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출판 하면서부터 제네바에서부터 개혁된 교회가 프랑스, 네델란드, 항가리, 스코트랜드, 미국등 개혁된 교회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다.
4. 개혁전야의 스코트랜드교회
개혁 이전의 스코트랜드 교회는 대륙의 어느 국가처럼 로마교의 체제아래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을 자랑하며 엄숙한 제단과 향불 화려한 예식행열 감미로운 멜로디로 가득찬 교회였다.
1)성직자들은 무지하고 무능했다. 대 주교 하밀톤에 의해서 교리 문답서가 발행 되었는데 이 문답서는 평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성직자들을 위한것이였다. (P55참조) 2)성직자들의 설교부재이다. 중세교회는 설교가 거의 없었다. 설교의 자리에 거대한 예식과 의전이 자리를 잡고, 미사를 집전하고, 그 때 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희생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 있는 제단은 굉장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신부는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살과 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기 때문에 말 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 젔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니의 은혜가 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렇게 말씀이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처지지 않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경건미는 찾아 볼 수 없엇다. 3)성직자들의 윤리 도덕이 타락 했다. 대주교에게는 서자가 11명 딸이 3명 이고, 어 떤 신부는 자녀를 20명이 거느린 독신 신부였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결혼 하면 처형을 했다. 노만 신부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1534년 처형 당했다. 4)성지 수여권을 악용했다. 성직을 임명하는 뒤에는 거액의 비자금이 따라갔다. 제임스 5세는 자기의 서자들에게 최고의 성직을 주었다. 그는 그의 아들 6명을 6-7세때 스코트랜드 최고의 성직자의 자리에 앉혀 막대한 교회 자금을 거둬 들였다. 교회가 개혁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였다.
제4장 스코트랜드 장로교의 개혁 원리
장로교 개혁의 제일 원리는 “오직 성경”이다. 교회 개혁자들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신앙과 삶의 근원이 될 수 없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믿어야 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신구약 성경은 인간의 구원 문제와 생활 규범에 유일한 규칙이요 이생의 지침서러써 최고의 가치를 갖는것이다. 하난미의 말씀만이 교회가 교회되게하고 모든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다.이러한 성경 제일 주의 사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절실히 요구된다. 교단의 전통이나 교회의 외적 성장이 성경보다 앞서가는 경햐이 농후하다 성경의 최고 권위는 뒷전으로 물러가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비 성경적 요소가 한국 교회안에 다분히 넘처나고 있다.
1. 교회의 직분자들
1556년 낙스가 작성한 제1 치리서에 보면 교회의 직분자들을 목사, 장로, 집사, 박사로 나누었다. 여기서 박사는 교수직에 해당하는 직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였다. 제2 치리서에서는 이 직책이 제거 되었다. 1)제일 치리서 4장에는 지교회는 지교회 목사를 선출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했다. 목사를 선출 할 때 성경본문 해석을 얼마나 잘하는지 교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지 설교는 잘 하는지 생활은 경건한지 등을 살펴서 목사를 청빙했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하지 못하면 목사가 될 수 없다. 2)감독관과 독경사는 정기적으로 자기의 관활지역을 주 3회씩 방문해야하고 목사가 없는 곳에서 성례식을 거행하고 권징의 시행을 감독하였다. 감독관의 주된 임무는 설교하는 것과 독경사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목사가 청빙되면 감독관은 불 필요하게 되어 이 두직분은 나중에 사라졌다. 3)장로직은 교회의 모든 공적인 일에 목사를 도와야 한다. 장로는 당회의 회원이었고 임기는 1년이였으나 재선도 가능했다. 재선이 가능했지만 3년을 넘기지 못하게 했다.
2. 메리여왕과 낙스의 최후
1560년 교회개혁 이후 이듬해 8월 불란서에서 돌아온 19세의 메리 여왕이 스코트랜드를 카토릭 교회에 충성하는 국가로 되돌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미사없이 살바에야 차라리 불란서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주일에 궁에서 사적인 미사를 드리게 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낙스는 “전국에서 최상의 강단이 있는 ” 성자 일레스 교회에서 외치기를 “한번의 미사는 개신교를 없애려고 침공해 들어온 일만명의 군대보다 더 무서운 것이이다” 라고 외첬다. 미사는 개혁된 스코트랜드를 오염시키는 우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낙스는 메리를 만나 천주교를 옹호하는 메리에게 “양심도 지식있는 양심이여야 합니다 당신의 양심은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낙스와 메리는 4차례나 만나 담판을 지웠으나 해결점은 없었다. (p80참조)
2. 제임스 6세와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앤드류 멜빌은 1545년 8월 1일 발도비(Baldovy)지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낫다. 12살 때 부친을 잃고 같은 해에 모친도 잃었다. 그는 큰 형인 리챠드 멜빌 목사 밑에서 성장했다. 몽트즈르 문법 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를 배웟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 성 메리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요, 시인이요, 헬라어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게되어 파리 포이티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동안 위그노와 천주교의 전쟁으로 제네바로 옮겨 칼빈의 제자인 베자의 추천으로 제네바 아카데미의 교수로 봉직하게 된다(1567년) 1574년 그는 스코트랜드로 돌아 와서 글라스코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된다. 1582년 에딘버러에서 총회가 열릴 때 멜빌은 교회를 간섭하려던 군주를 통열히 비난 했다. ‘그는 말하기를 위정자들은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왕관을 끌어내라며 그의 손에 홀을 탈취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그의 두러움 없는 용기와 결단력은 낙스 이후의 교회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힘이 되었다. 그는 자기를 위협하는 사람에게 “ 당신의 신하들이나 위협하시오 내가 하늘에서 썩든지 땅에서 썩든지 매 마찬가지요 이 땅은 주님의 것이요 선행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내 아버지의 땅이오 하나님의 진리를 매달거나 추방하는 것은 당신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했다. 1589년 제임스6세는 덴마크 공주와 결혼을 해서 돌아오면서 성 자일레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국민에게 사랑 받는 왕 신실한 군주가 되며 교회를 위하여 보다 나은 조치를 취해줄 것을 약속했다. 1590년 8월 총회 석상에서 제임스는 스코트랜드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신실한 교회” 라고 하면서 “내가 살아있고 왕좌에 앉아 있는 동안 스코트랜드 교회를 지키겠오”라고 했다.
그러나 스페인 왕 필립이 잉글랜드를 침공해오자 헌트리, 에롤, 앵거스등은 필립과 손을 잡았다. 제임스 왕은 이들을 귀향 보냇다가 풀어줬다 이 때 장로교인들의 의심을 받게되고 1596년 3월 총회에서 안드류 멜빌은 제임스를 가르켜 “하나님의 바보같은 봉신”이라고 비난 하면서 스코트랜드에는 두왕과 두 왕국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 왕국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께 복종 해야 할 왕 제임스와 스코트랜드가 있습니다. 왕은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의 왕도 아니며, 주인도 아니며, 머리도 아니라 단지 회원에 불과 한 것입니다. 왕도 보좌에서 내려와 무릅을 꿇고 만왕의 왕앞에 머리를 숙이시오“ 라고 했다. 그는 왕의 잘못된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교회지도자 였다. 그의 노력은 1581년 제2 치리서가 채택되어 교회정치 문제를 매듭지은 것이다.
3. 17세기 스코트랜드 언약도 운동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는 제임스 6세의 교회 통일 정책은 장로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스코트랜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왕의 측근이였던 몰튼 백작은 교회를 왕의 수하에 두기 위하여 감독제를 추진하였다. 이 때 앤드류 멜빌은 “두 왕과 두 왕국 론”을 제기 하면서 교회의 영적 권위는 국가의 세속적 권위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 교회는 국가를 간섭 할 수 없고, 국가도 교회를 간섭 할 수 없다는 것이다. 1625년 제임스6세가 죽고 그의 아들 챨스1세가 즉위한후, 교회 통일 정책은 스코트랜드 장로교인들을 격분 시켜 종교정책을 반대하는 거국적 항거가 일어났다. 이 놀란 당국자들은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 프라이어 교회에서 수 많은 지주들과 목사들이 모인 가운데서 “국가 언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언약도”라 부른다. 이 문서는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저 나갔고 온 국민의 지지를 얻어 낸다. 그해 11월 글라스고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끝까지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 때 총회의 안건은“스코트랜드 교회의 머리가 누구 인가?”였다. 제1개혁은 천주교로부터 개혁이고, 제2개혁은 성공회 감독으로부터 개혁이다. 이들은 이 언약 문서에 서명하면서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이 언약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았고 죽기까지 충성한 사람들이다.
1651년 크롬웰에 의해서 찰스1세가 처형을 당하고 그의 아들 챨스 2세가 왕이 되었다. 물론 언약도들에게 국가 언약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에서 공화정치를 하는 크롬웰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었다. 크롬웰과 전쟁을 벌였으나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결과 크롬웰은 스코트랜드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그후 10년간 교회역사는 침묵을 한다. 1660년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왕정복고 운동으로 챨스2세가 두나라이 왕이 된다. 1662년 챨스2세가 발부한 서신에 의하면 왕이 임명한 샤프 주교를 포함한 4명의 감독들의 승인이 없이는 공식적으로 장로교의 어떻한 모임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성공회 감독주의로 교회를 통일 시키려는 왕의 그와 같은 조서는 언약도들을 격분케 햇다. 당국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하지 않는 목사들을 추방하며 모든 옥외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했고 추방받은 목사들은 자기가 시무한 교회로부터 20마일 이내로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주일날 성공회식 감독주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과다한 벌금을 물렸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와 교회간에 무력 충돌을 불러 왔다. 추방된 목사들과 서민 농부들이 1660년 11월에 펜틀랜드 집결하여 스코트랜드 교회역사상 최초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이 일로 1669년 7월에 왕의 종교자유령이 발포되었다. 이 내용은 왕권신수설을 깔고 있었고 이 내용을 받아드리는 목사는 복권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였다. 이에 많은 언약도들이 타협의 길로 가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종교정책에 반발하여 핍박을 받고 있는 언약도들은 소수이며 신분은 일반 평민들이였다. 이는 무었을 시하는가? 하나님의 진리는 대중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소수의 신실한 성도들에 의해서 수호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언약도드의 신앙운동은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폭군 챨스2세는 1682년 2월 6일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제임스7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2세)가 즉위한다. 왕은 1687년 두가지 칙령을 내려 하나는 장로교인들이 예배 할 수 있는 처소를 오직 가정에 국한한다. 둘째 옥외 집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적 집회를 허용한다는 것이였다. 이 식령을 언약도들만 받아드리지 않고 모든 목사들이 받아들렸다. 왕의 이같은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1688년 11월 5일 윌리암 오렌지 공이 화란으로부터 귀국하여 장로교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곧 왕위에 올라 제임스 7세는 망명을 가야 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스코트랜드 교회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와 윌리암 고은 스코트랜드에 장로회주의를 정치적으로 복원시켜주엇다. 1661-1688년까지 언약도들의 순교자는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8,000명이였다. 언약도들은 죽어가는 시대에 살아있는 진리였다.
4. 웨스트 민스터 회의에서 스코트랜드 대표단 역할
잉글랜드 대표단은 120명이고, 스코트랜드 대표는 6명이였다. 그러나 스코트랜드 대표단이 웨스터민스터 회의의 중심역활을 했다는 것이다. 1643년 9월에 런던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알렉산더 핸더슨 목사와 조지 길레스피 목사 였다. 핸더슨은 나이가 많았고 길레스피는 30세의 가장 어린 목사였다. 잉글랜드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스코트랜드 대표단과 핸더슨을 파문하자는 발언을 하자 길레스피는 앞으로 나아가 1시간 반동안 반대자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의 개혁 작업은 많이 조성되었고 사리가 분명하고 주장에 힘이 있으며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뒤어난 논리가였다. 다음으로 도착한 대표단은 로버트 베일리 와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였다. 웨스터민스터에서 베일리 목사는 배후에서 로비 활동을 하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여 스코트랜드에로 보내는 서신 연락자였다. 루터포드 목사는 길레스피 목사와 더불어 종교회의 석상에서 정기적으로 논쟁에 참여한 20명중에 속해있었다. 그의 탄력있는 언어 사용과 불같은 열정에 생동감이 넘첬다. 나중에 장로 두명이 도착했는데 메이트란드와 아키발스 존스톤이였다.
웨스터민스터 회의는 1643년 7월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22일동안 계속되는데 핸더슨 목사는 1646년에 런던을 떠났고, 베일리 목사는 1646년 말까지 머물렀고, 길레스피 목사는 1647년 7월에 떠났으며, 루터포드 목사는 1647년 11월에 떠났다. 루터포드 목사는 의장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웨스터민스터 회의에서 가결된 것은 “공 예배 지침서” 였다. 신앙고백서와 대소리 문답서이다. 윌리암 케벨은 “웨스터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스코트랜드 교회 주장의 승리” 라고 결론 지었다. 이 문서들의 정치형태는 임 스코트랜드에서 존재하고 있는 교회 형태였고 그것이 처엄으로 스코스 대표단들에 의해서 종교회의에 소개된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리 문답서가 장로회주의와 일치하게 된 것은 스코츠 대표단들의 성공적인 활약 때문이다. 19세기 장로교 학자들은 웨스터민스터 총대들이 잉글랜드에서 장로주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독립교도들의 완고함과 올리버 크롬웰과 더불어 그들이 획득한 정치적 권력의 부상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정치가 하나의 도그마로 승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5. 17세기 스코트랜드 교회 생활
17세기는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에 영적가치가 고조에 달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장로회주의가 재성되면서 스코트랜드는 오늘날까지 장로교 국가로 남게 되었다. 이른 아침에 종이 울리면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두 번 울리면 오전 예배에 참석하기위해서 집을 나서야 한다. 예배는 악가나 찬양대도 없이 회중은 시편 찬송을 불렀다. 세 번째 종이 울리면 검은 가운을 입은 목사가 등단하여 기도하고 설교했다. 설교는 아주 길었고, 신중하게 준비하여 대체로 원고 없이 요약설교를 했다. 설교 본문은 특별 행사를 제외하고는 매주 이어서 강해설교를 했다. 교회당은 산뜻하지 못했고, 예배 의식도 간단했다. 시편찬송을 부를 때는 자리에 앉아서 부르고 대표 기도 할 때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 했으며 목회기도는 긴 기도 였으며 내용은 성경적이고 즉흥적으로 기도 했다. 성찬예식은 매우 특별했으며 일년에 1-2번 했고 성찬식이 가까워 오면 목사는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영적상태를 점검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목사는 주중에 잘 못된 행동을 하여 당회에 보고된 사람들에 대한 공개적인 책망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예배시간 내내 참회석에 앉아서 에배를 드렸다. 교회는 가정예배를 권장했다. 대체로 성도들은 교회가 지도하는 대로 가정에서 예배 했다. 총회는 1647년에 가정에배 지침서를 발간하여 장로들에 의해서 각 가정에 배포되었다. 17세기에 스코트랜드의 강단 사역은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예배시간 하면 설교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설교는 예배의 핵심이였다. 교회의 ytlr으로 말씀선포, ekda은 올바른 성례, 정당한 권징이어다. 목사는 사제의 기능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라 설교장로(Preaching elder)로 인식하게되었다. 예배는 3시간 정도 드려젔는데 1시간은 독경사들에 의해 성경을 읽었고, 목사는 기도와 찬양을 맡아 인도 했다 설교는 대체로 1시간 정도 했으며 2-3시간 설교를 하기도 했다. 에딘버러 초대 가독인 포버스는 6시간 강론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며 받아 적었다. 설교자의 능력은 교회의 부흥에다 두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지식과 교리적인 지식이 어느정도냐에 두었다. 설교는 삶에 적용시키도록 했다. 오늘날 말씀 선포가 점점 사라지고 죄악의 포승줄에 매여 끌려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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