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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1 (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2. 1. 25. 09:30

본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조나단 에드워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알아야 하는 분량의 성경적 칭의 체계는 어쩌면 매우 단순하여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칭의와 관련하여 그 이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칭의 교리는 인간의 타고난 이성을 빛을 초월하는 순전한 계시이며 또한 칭의교리야말로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가장 분명하게 입증되는 곳임을 모두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천사들도 사람들도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놀라운 화해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친히 생각해 내셨음을 모두 인정합니다.  

1. 로마서 4장 5절의 본문관찰과 교리도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관찰 1. 칭의는 사람을 ‘경건치 아니한 자’로 간주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말씀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는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함을 얻게 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기 전에는 단순히 그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피조물로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은 칭의의 근거가 되어 그 사람의 칭의에 선행(先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시력의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긍휼의 행위보다 먼저 있었고 또 그것이 긍휼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듯이 말입니다.

또는 어떤 부자가 관대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가난한 그 사람에게 그와같은 관대함이 베풀어진 이유와 가난한 그 사람이 그와같은 관대함을 얻게 된 자격은 그 사람의 재산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매하듯 말입니다.

관찰 2. 이 구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은 의식법(儀式法)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일을 아니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는 분명 동의어 표현임이 명확합니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경건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 ‘경건치 아니한 자’라는 표현을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 바로 다음에 덧붙여 쓴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4절 말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는 말씀에 드러난 요점은 무엇입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관찰 3. 본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 일련의 순종이나 의로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해석하되, 율법에 대한 일련의 순종을 이행하는 것, 율법을 범하는 일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장 명확한 의미를 살려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롭다 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율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관찰 4. “그것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본문의 표현을 볼 때 명백히 드러나 있는 요점은, 칭의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 안에 의로움이 전무(全無)한 사람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이 명백하게 시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원대로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전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다루심에 있어서 아무런 의도 없는 그 사람을, 결과적으로는 마치 그 사람이 실제로 의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실제로 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과 죄인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나오는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의 취지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 교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2.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교리의 의미 

질문 1.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질문 2.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질문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변 1.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실 때, 즉 그 사람이 죄로 인해 응당받아야 할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인 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 판사가 어떤 사람을 소극적인 의의 소유자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의 소유자로도 인정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형벌 받을 이유가 전무한 사람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의로우므로 오히려 적극적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의롭다함을 얻다’는 말 역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같은 방식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 단어의 어원과 본래 의미를 생각할 때 가장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말은 어떤 사람을 의롭다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사용된 취지를 보아도, 이 단어를 그와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칭의’라고 할 때 이 단어가 의도하는 뜻은 오직 죄 사함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칭의의 본질을 숙고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규례나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어그러짐 없이 올바르게 행하고 있다는 판단을 받으려면, 죄책(罪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보증인이었던 아담은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기도 전에 또는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증하는 시험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치르기도 전에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적극적으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일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의롭다함을 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은 것만으로,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나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담이 온전한 순종을 성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의롭다함을 얻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그의 칭의는 단순히 소극적인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보증으로 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칭의 안에서 실질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우리의 두 번째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직무를 완수하시고 모든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준수하시기까지는 의롭다함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일을 이루신 이후에 부활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는데(벧전 3:18),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그 분은 바로 그 때 영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딤전 3:1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의롭다하실 때,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굴욕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풀어 주시고 죄로 인한 더 이상의 수난이나 비하로부터 그리스도를 방면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하고 불멸하는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인도해 들이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상급인 승귀의 시작으로 그리스도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참으로 신자의 칭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머리요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 바로 이것이 신자의 칭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받으시되 개인의 자격으로 형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고, 바로 그 때 그 부활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모든 사람들의 보증인과 대리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사도가 로마서 8:34에서 말하는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나 이런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교훈해 주는 성경구절은 따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칭의가 단순히 죄 사함이나 죄에 합당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한 상급인 내세의 영광도 얻게 되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로마서 5:1-2과 요 5:24에 좀더 직접적으로 교훈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답변 2. 두 번째 질문은 칭의가 결코 우리 자신의 어떤 미덕이나 선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질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질문 2-1. 어떤 이유로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까?
질문 2-2. 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

답변 2-1 어떤 측면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믿음도 칭의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믿음은 구원과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칭의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보면, 칭의와 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조건 명제 안에 그것들(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 파생되는 것들)이 다양하게 조건의 자리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 형제들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선한 자격들과 행위들입니다.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음 이외에도 우리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할 것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거나 성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성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면,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과연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칭의를 살 수 있는 값을 치르지 못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적당하고 합당한 일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된 법을 따라 신자를 의롭다하시는 이유는 틀림없이, 신자가 의롭다함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를 이 믿음이라는 자격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이 자격 안에 신자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 때문에 신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와 함께 죄 사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하는 표현을 보게 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대해서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사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요, 현재 다루고 있는 칭의 문제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우리를 칭의 은혜의 적법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로구나!”라고 해석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도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로 하여금 칭의 은혜를 얻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답변 2-2. ‘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적당하거나 합당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룩이나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믿음 못지않게 탁월하고 믿음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있으며 믿음 못지않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다른 부분들은 왜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을 주지 못하고, 왜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자격이나 그 어떤 행동의 탁월함이나 선함을 고려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있는 그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관계나 연합은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권리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연합에 비유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연합되어 있는 것. 몸의 지체들은 머리에 연합되어 있음으로써 머리에 있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 있는 것. 나뭇가지가 나무의 수액과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무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 아내가 남편과 모든 소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율법에 보면 남편과 아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 몸으로 간주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법적인 연합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온 우주의 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둘을 하나로 여기십니다.

믿음은 그 사람 편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위에서 말한 연합을 이루게 만드는 바, 그 사람에게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획득하신 모든 은혜를 누릴 권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거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한 결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있는 어떤 자격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과, 그 자격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을 보시고 또는 그 자격의 탁월함에 대한 일종의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제자들은 특별한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그 관계로 인하여 성경은 그들을 일컬어 어떤 의미에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그리스도와 이런 관계나 연합을 맺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려고 행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 저는 믿음이 이런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정의하거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지를 단정지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곧 이전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분리되어 있던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될 수 있는 것,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이전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전에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즉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와 관계나 그리스도의 연합과 무관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친밀함을 형성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자 하는 영혼의 적극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또는 믿음 자체가 믿는 사람들 쪽에서는 연합의 실제 행동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지적이고 활동적인 두 개의 존재나 인격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그들이 하나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방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연합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상호행동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서로 연합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고 그들 사이에 실제로 있어야만,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여기시는 일이 비로소 적법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성질의 어떤 행위나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간주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이 합법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행동이나 자격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믿는 사람들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곧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가 믿는 사람들 자신의 속죄와 공로인 것처럼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지대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말이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 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람을 구주와 연합된 사람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 결과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바로 도덕적 적합성 때문이 아닌 특성적 적합성(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이 도덕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의 특성과 그 지위의 특성이 서로 일치하고 조화되고 동일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단코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일이 없으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도 않습니다. 행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행위를 기뻐하시거나 그 사람의 순종에 내재되어 있는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행동을 그 안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영혼의 적극적인 모든 행동, 또는 소위 그리스도께로 나아감과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행동은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무리 다른 것들이 믿음만큼 탁월하다 하더라도,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은혜나 그 어떤 미덕도 그 일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justifying faith)의 구성 요소에 들어가고 그 믿음의 특성에 속하는 것뿐입니다.  

논증 1. 그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구주의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합당한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유 1. 죄인이 실제로 의롭다함을 얻기 전까지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무한한 죄책(罪責), 곧 죄의 무한한 사악함이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생기는 무한한 죄책을 생각할 때, 그런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죄의 무한한 사악함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무한한 존재를 대상으로 범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사악함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은 그 대상이 되는 존재 안에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손실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느냐에 비례하여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히 존엄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이와같은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까닭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우리의 비천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불순종은 한없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이룬 순종의 가치로서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말끔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가치한 것만큼 위대하고 가치있는 분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아직 받지 못한 죄인의 인격을 어느 정도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의롭다함을 아직 얻지 못한 죄인을 어느 정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불쾌함과 진노를 덜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이런 일이 하나님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실제로 소유하지 못하고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죄책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한한 죄책은 죄 사함을 받지 않는 한 결단코 제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죄책이나 무한한 비열함에 비할 때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죄책에서 유한한 선함을 빼서 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람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 이전에도 영적으로 선한 것이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의롭다함을 얻은 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경건함이나 탁월함으로써 인정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칭의에 있어서 사람(자연인)은 전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로 고려됩니다.

이유 2. 구주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일보다 먼저 앞서는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속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인을 자유케 하시는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정죄된 상태 가운데 계속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율법의 공의로움으로 어떤 사람을 정죄하신 후에 아직 그 정죄가 제거되지 않았는데도 그 죄인에게 있는 어떤 것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걸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맨 처음부터 속해 있던 옛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를 긍휼히 여기사 엄격하고 호된 옛 율법을 폐지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법 아래 두셨다. 좀 더 관대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 자체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을 만족시키고 성취하신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매우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대적하는 힘을 계속 발휘합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 자체가 폐지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이전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위한 사전단계이든지 그 사람을 효과적으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증 2.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은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조건적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조건적으로만 죄 사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나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영원한 비참함에서 죄인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죄 사함을 얻고 그와같은 비참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최종적인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앞으로도 남아있는 몇몇 조건들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에 실질적인 자유가 유보되어 있다면, 그것은 조건적으로만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런 경우는 철저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가 지속적으로 순종한다면 결국 죄 사함을 받을 것이고 지옥으로부터도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건부 죄 사함은 결코 죄 사함이나 칭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모든 인류에게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진실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생각은 중보자의 영광을 훼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속하는 것을 사람의 미덕으로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을 대신 올려놓고, 사람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답변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넓은 의미로 쓰일 경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만 하는 완전한 내적 의로움으로 대신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완전한 순종을 이행한 것처럼 그에 따르는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에 대한 권리가 이렇게 전가된 의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가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사람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 18절에서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형벌로부터 건짐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일이 꼭같이 필요합니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과 똑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틀림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까닭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 대신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책을 제거할 뿐이고, 그럼으로써 처음 창조된 처음 순간에 아담이 처해 있던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형벌을 감당하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타당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담이 아무런 순종을 하지 못한 상태인데도 사람으로 존재하자마자 영원한 생명과 확고부동하게 행복한 상태를 그에게 상급으로 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아담은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상급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적극적으로 순종을 해야만 상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있어야만 상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우리의 죄책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신 것도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형벌을 감당하는 것 외에도 무엇인가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적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곧바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는 먼저 검증해 보시는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지와 행동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인의 죄가 속해졌을지라도 적극적인 의로움이 죄인에게 없는 상황에서, 영원한 생명을 죄인에게 하사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영광은 결코 충분하게 옹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순종의 조건을 채우지도 않은 상황에서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을 철회하셔야만 할 것이고, 약속된 상을 주셔야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율법에 굴복시키시고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크게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진실한 순종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판장 앞에서 불완전한 의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규범을 충족시키는 것 대신에 규범에 미달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공정한 행위나 재판관다운 행위가 아닙니다.

재판관에게는 오직 법에 일치하는 것만이 의입니다. 법은 재판관의 규범입니다. 만일 재판관이 죄로 성립하는 것을 은폐하고 용서해 준다면, 그럼으로써 사실상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재판관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잘못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가 없는 사람을 결코 의롭다 하실 수 없습니다! 칭의의 선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칭의 선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또 다른 칭의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사람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의 칭의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죄가 없고 결백하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법과 관련하여 올바른 상태에 있고 생명을 상으로 얻기에 합당할 만큼 완전히 의롭다고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의 보증인이셨기 때문에 사람의 죄책을 짊어지신 후에 고난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면될 수 없으셨고 순종을 하시기 전까지는 상을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사면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사면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면 안에서 사면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순종에 대한 상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상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은 두 가지 모두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 대신 짊어지셨던 죄책으로부터 놓임받으셨다는 것과, 우리 대신 순종하신 일에 대한 상으로 승귀(乘歸)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믿는 즉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이런 의롭다하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등하셨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고, 사람의 법 아래 굴복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었으며, 어떤 상태로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언약이 먼저 체결되었고,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율법 아래 처하기로 책임을 맡으셨고, 순종하고 고난받으시기로 책임을 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기로 책임 맡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실제로 행해진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행동하신 것을 보면 이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이 실행되기 한참 전에도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실행된 것처럼 행동하시며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신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하고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증인 또는 대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의 행위는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순종 가운데 중심적인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없이 큰 어려움을 수반하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가장 중대한 시금석인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입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경외는 그 순종에 수반하는 어려움만큼이나 위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까닭은 주로 이런 순종의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우리의 구원을 획득한 유일한 순종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서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 구원의 공로가 되는 순종 행위를 이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화목을 이루는 유일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에 걸쳐 한 순간도 빠짐없이 당하신 모든 고난이 화목을 이루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렇게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무한히 존귀하기 때문이요, 동시에 그런 순종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대가를 자원하여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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