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2 (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2. 1. 25. 09:31

본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2 (조나단 에드워드)

3. 복음적 순종과 칭의의 관계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나 복음적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의 경우 선행이라는 자격으로나 그 안에 있는 도덕적 선함 때문으로는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행위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자격으로나 도덕적 탁월함이라는 자격으로나 그것의 일부분이라는 자격으로도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이유와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들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유로든 칭의와 관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 그리스도인다운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칭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답변. 이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의 맨 처음 작용한 직후에 나타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는지, 또 믿음 안에서의 견인(堅忍)이나 믿음의 지속적이며 갱신된 행위들도 칭의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칭의는 특별한 방식으로 믿음의 첫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하는 그 즉시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그 첫 행위에서 견인에 관하여 비록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여러 가지 혜택들 중에서 견인에 관한 권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의 사건에서 믿음의 견인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견인은 칭의와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근거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앞에서 칭의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에 의지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자격이기 때문에, 또는 그 안에 적합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격이기 때문에, 칭의는 믿음에 의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견인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은 이와같은 적합성과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견인과 이와같은 적합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주고 사신 영원한 은혜들을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현재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적합합니까? 먼저, 영혼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거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은혜들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유하는 것은 그 안에 특성적 적합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적합성은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되 지속적으로 연합해야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이유 때문에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뿌리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포도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하시는 은혜와 은총 등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6-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에 필요했던 그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한번이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영혼이 지금 현재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전에 한 번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는 안됩니다.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8에서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이 내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 이루어지기 위해서 믿음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되기 위해서도 그 연합을 가능케 해주는 자격인 믿음이 변치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맨 처음 실행하자마자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지만,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한 요소로서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처음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칭의의 행위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견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에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시되 마치 믿음의 견인이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고려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신자는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견인은 믿음의 첫 행위에 들어있는 한 가지 속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첫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처음 믿을 때에 믿음의 견인을 그 믿음의 속성으로 생각해 주십니다. 그래서 칭의는 믿음의 견인이 완성되는 때까지 보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의 견인을 이와같이 생각해 주지 않으신다면, 칭의는 죄인이 실제적으로 믿음 안에서 견인하기 전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 곧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칭의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의 견인과 믿음의 장래 행위들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더 명확해집니다.

즉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칭의 안에는 죄인이 영원토록 받아 마땅한 형벌과 관련하여 죄 사함이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데,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첫 칭의는 결정적이고 완전한 칭의이기 때문에, 이 죄 사함은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장차 범하게 될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까지도 포괄하시는 죄 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칭의 행위 안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순리대로 보자면 ‘죄 사함’이라는 것은 ‘범죄’가 성립한 이후에 그리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와 관련된 회개와 믿음의 행위 이후에 오는 것이 맞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도 그렇고 성경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령 시편 32편을 보십시오. 시편 32편 첫 부분에서 다윗은 죄 사함에 관해서 말합니다. 이 때 다윗은 자신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차에 범했던 죄에 대해서 말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다윗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한 다음에, 그리고 그 죄와 관련하여 자신이 회개하고 믿은 다음에 죄 사함이 베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윗이 말한 이런 죄 사함을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실례로 사용합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언급한 죄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시편에서 언급한 죄 사함은 선지자 나단이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했던 것을 볼 때, 죽음 곧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만 시간 순서상으로 다윗의 범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죄가 용서된 일자체도 순리대로 그 죄와 관련된 다윗의 회개와 믿음이 있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시편 32편에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맨 처음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에 영원히 의롭다함을 얻고 죄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이후에 범하는 죄들에 대한 회개와 그런 죄들과 관련하여 구속주를 믿는 믿음, 또는 그와같이 실제적인 회개와 믿음을 본성과 기질로 소유하고 있는 마음 안에 그런 습성과 원리가 지속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회심 이후에 범해진 죄에 대한 용서 자체는 그 죄들이 범해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 행위 다음에 순리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가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되는 것과 똑같이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들도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된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회개와 믿음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맨 처음 회개와 믿음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치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로부터 신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이 맨 처음 칭의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의 첫 행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입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의 첫 행위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파생되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닌 다른 행위로는 절대 칭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런 믿음의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은 칭의의 일부분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를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이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떤 복을 얻고자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 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복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라고 했으므로, 결국 그런 복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또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런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께서 잘못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이미 회심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도 제목을 사용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 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때 염두에 두고 계셨던 ‘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응당 받아야 하는 형벌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일만 달란트 빚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케 해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빚을 모두 탕감해 주는 것은 칭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전제한 것에 의하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생각과 그렇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을 영원히 단절시켜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분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신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 사함을 얻게 되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신자들은 의롭다하는 믿음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로부터 그와 같은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믿음의 행위였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실제로 기쁨과 평안을 얻었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해결책은 그와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다는 정당한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해결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이미 회심을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이미 회심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그와 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바로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 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 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믿음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결코 합당하게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참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매우 연약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습니다. 또 회심 이후의 믿음의 행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첫 행위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최초 태동처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굉장히 연약한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그것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아무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참으로 믿음의 행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정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과 많은 경험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참된 믿음의 행위였는지를 확정짓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만족했던 사람들까지도 크게 퇴보하고 타락할 경우 쉽게 영원한 형벌에 대한 큰 두려움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은 회개를 통하여 죄를 버리고 죄로 인하여 응당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지금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얻어질 수 없다면, 그 방법은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 어떤 문제들이 생기는 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훨씬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위대한 약속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행사했던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6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행사한 이 믿음의 행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 전체와 갈라디아서 3장 전체에서 이신칭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확증하면서 정말 매우 강력하게 역설하는 중요한 실례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 이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 행위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와 친척을 떠난 지 오래 후에 행해진 것이었고(히 1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탁월한 친구로 인정을 받은 지 오랜 후에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할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회심한 이후에 행한 모든 일에서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추구했는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획득하고자 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여기에서 ‘부활’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대로 특별히 칭의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칭의였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와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은 스스로를 이미 얻은 자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계속해서 달려가야 할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해줍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믿음의 견인은 칭의의 적합성에 꼭 필요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죄인이 믿음의 첫 행위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의 견인이 약속된다고 해서 믿음의 견인이 칭의의 적합성에 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칭의에서 믿음의 과거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미래 행위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약속과 아직까지는 자기 자신의 약속 안에서만 보여지는 자격의 적합함까지도 고려하십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의 견인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 곧 단순히 구원의 전반적인 부수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근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으로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 볼 때 명백한 사실로 보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서너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 3: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결정적인 칭의의 적합성이 믿음의 첫 행위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견인에도 달려있기 때문에 흔히 ‘양심 안에서의 칭의의 표명(表明)’은 믿음의 첫 행위보다는 그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행위가 칭의와 관련을 갖게 되는 독특한 차이점은 소위 부수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고려하시거나 믿음의 첫 행위가 우리 구원의 일에 있어서 특별한 성격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이 아니라. 시간적인 상황 때문에 즉 시간상 믿음의 첫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먼저 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이고 순수하며 믿음있는 순종은 우리의 칭의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도 때때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의 순종에 관하여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인 순종을 일컬어 유일한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견인하는 믿음의 증거라고 종종 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고, 그 결과 칭의에 적합성을 부여합니다. 믿음은 그저 싸늘하게 식어 있는 원리로 마음속에 남아있음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존재하고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것이 참으로 복음적인 순종이며 마음속에 보내심을 받은 아들의 영으로 이행되는 순종이라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순종은 그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모든 복음적 선행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이룬 선행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고 영혼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모든 복음적 순종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광의 구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새롭고도 유력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가르칩니다(골 3:17).

한편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견인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까지도 함께 고려하신다는 사실은 로마서 1:17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브리서 10장 38-3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순종은 오직 믿음의 증거라는 자격으로만 칭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자격으로는 순종은 절대 칭의와 무관합니다.

http://thevine21.hompee.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