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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라 1 (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2. 1. 31. 09:28

본문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6)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세례 요한의 소명과 사역이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예비하는 임무였습니다. 본문에서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받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요한까지만’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가 요한 때부터 쓸모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계시를 기초로 설립되고 통제되었던 교회의 상태가 요한까지만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때에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받은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빛을 주로 의지하였습니다.

요한은 가장 먼저 신약시대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교회의 복음 상태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교회의 복음상태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신령하고 영원한 특권과 복락들을 동반하고 있는 교회의 복음적인 상태를 일컬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흔히 부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전파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가장 먼저 전파하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니라” (마 4:17). 제자들도 그렇게 전파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라” (마 10:7).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고 실제로 건설하신 이는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옛 세대가 폐해지고, 새로운 세대가 점차적으로 들어오는 일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점차 낮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듯이 말입니다. 먼저 계명성이 떠오릅니다. 그 다음에 태양빛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새벽의 여명의 빛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밝게 비칩니다. 지난 밤 동안 빛을 밝혀주던 별들도 차차 사라져가고, 그 빛이 이제는 필요없게 됩니다. 결국 태양이 떠오르고 세상은 그 태양의 직사광선으로 밝혀집니다. 그 태양 빛도 지평선 위에 더 높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더 밝게 빛나고, 결국 계명성도 점차 사라져 버립니다.

대낮의 전조는 여명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습니다. 낮과 같은 복음의 전조였습니다. 마치 아침의 계명성이 태양의 선구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오실 그리스도를 예고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그를 소개했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공생의 엄숙한 시작을 알리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에 앞서 왔던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마 11:11). 마치 계명성이 모든 별들 중에 가장 밝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계시하시고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도록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마3:7)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의 사역이 성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 사역을 시작한 이래 각 사람마다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왔습니다. 그의 직무가 크게 성공했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국면에서 나타납니다.

1) 직무상의 성공을 보였던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볼 때 세례요한의 성공이 컸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마다’라는 하나의 보편성의 어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개인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보다 모든 유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흔히 특이한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었습니다. 비상한 각성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온갖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는데도 말입니다.

극한 교만과 자기 만족감에 취해 득의양양해 하며,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을 조소하던 바리새인들도 왔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 마저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이나 어떤 내세에 대한 것을 부인하는 일종의 불신앙자들이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서 그에게 나오는 것에 매우 놀란 것 같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7).

그밖에 세리들이 왔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자기들이 구원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인들도 왔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방조하며, 일종의 방탕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자기들의 구원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었을 하리이까 하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 3:12,14)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2) 그가 전파하는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방식에서 그의 사역이 성공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왔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가리켜 하늘나라로 침노하여 힘으로 그것을 빼앗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라고 하였습니다.

교리

우리가 본문 말씀 속에서 주목할 수 있는 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 나라를 얻을 각 사람에게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Ⅰ. ‘하나님 나라로 침입한다’는 표현이 제시하는 바 구원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1. 소원과 갈래와 정도의 차이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한다’는 표현이 제시하는 뜻은 소원의 힘‘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빛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지옥에 가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삶에서 별로 염려도 하지 않고, 무심히 세속적이고 무분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성령이 각성시켜주시는 어느 정도의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보다는 차원이 높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해 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나면서 가진 본능적인 조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기를 보다 강력하게 소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재의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얻어야 할 긴박한 필요성을 인식하여 온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구원을 얻는 것을 더욱 소원합니다. 이 관심이 너무 큰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은 아예 차단시켜 버립니다. 그들도 전에는 다른 것들을 향한 욕심에 따라서 기도했습니다. 혹은 이 구원과 다른 것들을 향한 욕심 사이에서 그 마음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단호히 결심하고 열심히 추구하라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는 것’에 합당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것에 관한 관심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은 다른 것들을 밀쳐뜨리고, 그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의 영혼이 다른 것들과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을 꼭 필요한 한 문제로 추구되어야 합니다(눅 10:42). 시편 27장 4절에서 그 기자가 표현하는 대로 소원하는 오직 한 가지 일로 여겨져야 합니다.

2. 결심의 간절함과 단호함

천국으로 침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결심의 간절함과 단호함’을 제시합니다. 힘있게 갈망하는 것과 힘있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일에 쏟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병행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열망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이 선을 추구하려는 간절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전력투구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며, 모든 의무를 감당하고, 죄의 모든 방식을 거스려 싸워야하며, 그런 추구하는 자세를 계속 견지해야 합니다.

이런 강한 결심을 위해서 그 사람이 취할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긍휼을 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긍휼을 얻을 기회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긍휼을 구하기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결심의 세력은 하나님께서 이 일들에 대해 마음에 주시는 지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지각이 없는 사람들도 결연한 결심의 자세를 스스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자신을 향해 “내가 살아있는 한 추구할 것이고, 내가 얻기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속이고 맙니다. 그들 스스로 그런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결심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결심이지 마음으로 하는 결심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강한 소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결심의 확고성은 해내겠다고 결심하는 바로 그것을 하려는 마음의 충만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자는 필요한 모든 것을 할 마음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자기들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의 이끌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절함뿐만 아니라 결심의 단호함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결따라 이리저리 요동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그런 변덕스런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영원히 부단하게 그 나라를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3. 열심의 대단함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열심의 대단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서 9장 10절에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미리 언급한 사항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강한 소원과 확고한 결심이 있는 곳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열심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 들의 실제 생활은 잠언 2장에서 지혜자가 권고하는 것과 부합할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1-5).

여기서 간절한 소원과 힘있는 결심을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명철에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인다는 말은 큰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은을 구하는 것같이 지식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 열심의 대단함을 함께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원과 결심, 그런 열심히 함께 갑니다.

4. 적극적으로 뛰어듦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것은 ‘간절함과 직접 일에 뛰어드는 것’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그 일을 직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큰 연단을 받고 있고 마음에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크게 염려하며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마음이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않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직접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행사가 구원을 추구하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편들을 부지런히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마음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일들에 관해 관심을 가지든지 은밀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고 있든지, 그런 것들의 비밀을 캐내려고 애를 쓰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자기들이 어떤 것을 결정하기 위해 표적들을 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들이 성취한 것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추측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두려움으로 마음을 괴롭히거나, 아니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들의 날이 다지나갔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법정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을 받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의향아 전혀 없으시다고 생각함으로 자기들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죄나 자기들의 이해를 훨씬 능가하는 다른 신비로운 교리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괴롭히곤 합니다. 내세의 영원한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크게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들로 자신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처사를 많이 합니다. 그런 경우에 그런 것들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침노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 은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힘쓰고 있다면 자신들을 ‘얽매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고, 자기들의 지레 스스로 거침돌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으로 전진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아니 그이상의 더 나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거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맞붙어 싸우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시간만 허비하면서 길옆에 드리워져 있는 자기들의 그림자와 싸우느라 힘을 소진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사코 가야 할 나라,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따라서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 크게 염려하고 괴로워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길이 소망스럽다고 판단하거나 구원을 추구하는 데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레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나을 뻔한 불필요한 괴로움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나쳐서 우울증의 이상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자주 그렇습니다.

물론 영혼의 역경이 큰 유익을 가져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정신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가 있고 그들 영혼의 모든 성향이 하나님의 방편에 기울어져 있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시고 지시하신 것을 행할 마음을 가질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고전 9:26)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정말 짧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대처하고 싸워야 할 난제들과 원수들이 정말 많습니다. 허상과 싸우느라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5. 돌파하여 승리를 쟁취함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하는 것을 여기서는 ‘모든 대적과 난관들을 뚫고 이겨’나가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 표현 속에는 분명히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대적이 하나도 없고 그 길이 깨끗하게 열려있다면 침입하여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세움을 받았으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진행해 나가 그런 것들을 극복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은 난관에서 용기를 잃고 주저앉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하려 할 때는 어떤 방도를 통해서든지 그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면 소유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방편들이 어렵거나 쉽거나, 또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때는 그 일이 어려우랴 쉬우냐를 저울질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본성적인 성향과 맞는지, 흥미가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불가결한 방편이 아닌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표현을 통해 자기가 겪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말하면서 모든 것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극히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하여 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보통 그 길에서 만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멈추지 않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그의 본성적인 기질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그가 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지겹습니다. 자기 위상에 손해를 감수 하지 않고서는 그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또한 그 일을 하자면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고 괴이하게 보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조롱과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또는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마음에 맞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성적인 소유욕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고통과도 같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그는 ‘그러한 모든 난관들을’ 뚫고 나갑니다. 자기가 경주를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모든 것을 다 벗어 버립니다. 그것이 금이나 진주 마큼의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그를 방해하는 것이 오른손이라면 그는 그것을 잘라버리고 오른 눈이 방해한다면 그 눈을 뽑아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을 철저하게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런 것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들입니다. 그들이 결단코 넘어갈 수 없는 거침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안일한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기 전에 오랜 동안 그 양심을 달래거나 논박하기 위해 채용해 왔던 것들을, 하나님 나라로 침입해 들어가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유보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육신적인 일을 동원시켜 여러 가지 구실과 논증을 만들어 양심을 무마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이 끝없는 논박과 논증을 통해 양심을 잠잠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난관들을 뚫고 나갑니다. 그가 나가는 길에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그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이 그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그는 시험도 만납니다. 마귀는 자주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며 그 앞에 여러 가지 미끼를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어려우니 그만 포기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런 난제들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여 그의 용기를 꺾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주셨고 유지시키시기 때문에 마귀가 그의 길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귀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만큼 한가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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