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도의 실제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도에 대하여 심각한 혼돈에 빠져 있다.
아니 오늘날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실용주의 마케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전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왜냐하면 전도란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가 전도에 대하여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도를 효율성(실용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도를 했더니 잘 됐다거나, 이렇게 하면 잘 되지 않는다는 식의 효율성, 또는 실용성을 언급하길 좋아한다.
그 결과 전도를 하면서도 ‘도(道/십자가의 도)’는 없어지고 말았다.
'도(道)가 없는 전도(傳道)'는 더 이상 '전도'가 아니다.
전도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개혁교회가 이 시대의 전도를 향해서 이렇듯 날카로운 비판을 하게 될 때면, 사람들에게서 항상 쏟아지는 일종의 비아냥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비판을 잘 하는 너희는 특별한 대안이 있느냐?”는 것이다.
대안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전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전도가 오늘날 사영리나 전도폭발과 같은 도식화 된 전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특정한 전도 내용을 암기하여 지식을 전달해 주거나 특정한 매뉴얼(manual)을 따라서 어떤 내용을 전해주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전도가 아니다.
성경의 어디로 보아도 이렇게 전도를 했다는 근거는 없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도를 가르치시면서 한 번도 우리처럼 매뉴얼을 제시하신 적이 없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도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전(傳)했을 뿐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는 그 여인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를 전했고, 바리새인들에겐 바리새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를 전했다.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매우 유연하게 나타났다.
이런 전도의 방식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전도 방식과도 그대로일치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언급된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유연성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 개역성경에서 ‘전도’라고 번역된 부분의 원 의미는 ‘설교’(preaching / 행 5:42; 8:4,5)라고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도 전도라고 번역되거나 전도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부분을 보면 ‘가르치다’(행 5:42), ‘논쟁하다’(행 6:9; 9:29), ‘변론, 또는 설득’(행 17:17; 18:19), ‘토론하다’(행 17:18)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언급하는 전도란 특정한 내용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언급된 전도란 꼼꼼하게 십자가의 도를 풀어주거나, 대화를 통해서 설명하거나, 때로는 논쟁이나, 설득을 해서 도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전도는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데반과 같은 집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방식이었다(행 7장).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전도는 우리 한국 초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방식이었다는 점은 한국 교회사를 읽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우리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전도를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자.
그 첫째는 바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제적인 경험이다.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 그리고 우리 한국 초대 교회의 전도는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복음의 효력을 경험한 것이다.
옛 말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을 백번 배우는 것보다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는 이론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능력이다(롬 1:16).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도를 경험해 보지 않고 이론으로만 아는 사람은 결코 십자가의 도를 열정적으로 전할 수 없다.
아니 십자가의 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도리어 미련하게 여겨져서 부끄럽게 여겨질 뿐이다.
오늘날 이 시대 전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적인 지식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 말을 바꾸어서 한다면 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찌 전도(도를 전함)를 기대하겠는가?
이런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예배당 자랑이나, 담임 목사 자랑,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고 병 고침 받는다는 기복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 밖엔 없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전도 매뉴얼이 전도폭발이고, 사영리다.
나름대로 도를 전하도록 하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계적인 전도 매뉴얼은 교리적으로도 그 내용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사람에게 기계적인 방법을 적용했다는 점 자체가 모순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전도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는 머리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전도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도란 주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영혼을 찾는 행위이다.
고로 전도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일 뿐이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우리는 단지 누가 구원을 받도록 작정된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할 뿐이다(딤후 4:2).
특히 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전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성부께서 구원을 받도록 작정하신 사람을, 성자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성령님의 적용하심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전다.
그러므로 전도는 오로지 성령님의 주권으로만 이루어진다.
즉 성령께서 구원하기로 작정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게 하신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바울이 루디아를 전도 할 때 잘 나타난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그러나 성령님의 주권은 듣는 자의 마음을 열어 듣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령님은 한 영혼의 구원이 발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입술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하신다(엠 6:19).
성령님의 이런 전도 과정에서 전도는 ‘가르침’이나, ‘설명’이나, ‘변론’, 또는 ‘설교’라는 방식으로 나타나난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모든 방식을 성령께서 결정하시고, 성령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도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주권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에베소 교회에게 요구했던 것을 보게 된다.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엠 6:19)
그러나 전도의 이러한 방식만을 너무 절대시 한 나머지 성령님의 은총을 등한시 하면 전도가 불신자들과 말싸움이 될 수 있다.
또는 교회의 분열과 다툼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고로 개혁주의 전도의 방식으로서 가르침이나, 설명이나, 변론, 논쟁이라는 방식은 쉐퍼의 표현처럼 사랑을 따라 진리를 전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교회가 교회사 안에서 전통적으로 추구했던 전도의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 개혁 교회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
성도들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거나 변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는 전도를 강조하면서도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변증할 수 없다.
무조건 성령의 역사만 의존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만 의존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고로 말씀(교리)을 가르치지 않고 전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개혁주의 전도는 말씀과 기도라는 이 두 기둥을 염두에 두고 성경적인 전도의 흐름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글쓴이: 인천)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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