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의 변질을 경계하자
[김재성 목사,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교단 설립 30주년을 맞아 교단의 현 위치를 점검하고 향후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교단설립 30주년 기념논단을 준비했다. 이에 “각성을 촉구하는 소명 의식을 분명히 하자”는 주제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① 지난 30년 ‘각성의 사명’을 감당하다
② 다시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③ 역사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자
④교회론의 변질을 경계하자
⑤ 영혼에 꿈을 불어넣자
마치는 말
필자가 한국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던 십 수년 동안 항상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21세기 현대 교회론”에 적합한 교과서가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교회론을 다룬 책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지금 사용할 이 시대 한국교회의 지침서가 되어야 할 실전적인 매뉴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좋은 교회론 교과서가 나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들른 어떤 목사님께서 나의 얘기를 듣고 나더니 이번 여름까지 빨리 ‘현대 교회론’ 교과서를 써서 원고를 보내달라고 간절한 부탁을 하셨다.
내가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론 교과서를 걱정하는 이유는 현대 신학의 흐름 가운데 교회를 경시하는 신학적 변질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공동체로 모이는 “교회”는 온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이 과거에 거의 모든 신앙생활을 교회에 모이는 것으로 생각하던 패턴에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1. 혼란에 빠진 현대의 신학사상
우리 모두가 교회 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하자는 뜻에서 교회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와 경건의 연습을 하되, 일상생활로 연결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대신학은 완전히 교회를 뒤집어 놓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며,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이다.
20세기 현대 신학사에서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 등은 새로운 사유방식과 논리적 신학으로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파괴성에서 벗어나는 듯 했으나 여전히 교회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상아탑 내에서 정통신학에 대한 논쟁과 새로운 이론모색으로 분주했다. 루돌프 불트만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신비로움을 벗기고자 노력하면서 현대신학은 결과적으로 성경에 의존적이던 교회를 혼돈 속에 몰아넣었고, 마침내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다.
‘나는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풍조가 영국 성공회를 망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만들어낸 헛된 구호였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르트 신학이 낳은 모순이요, 변질된 신학이다. 그는 소위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세운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완전히 분리시켰다.
사회복음의 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 과정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등 여러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비판받고 소홀히 취급한 것이 교회였다. 이런 신학들은 교회의 소중함을 과소평가했고, 건전하게 성경적인 균형을 유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예배를 소홀히 하여 생명력을 상실했다. 교회 안팍의 문제를 함께 균형있게 다루기 보다는 교회 밖에서의 문제를 붙잡고 해결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과소평가하는 가운데 성경적 교회론의 변질이 초래되고 말았다.
더구나 전혀 정체성을 알 수 없는 교회성장 방법론이 대두되어서 목회자들이 무분별하게 추종하게 되었다. 교회를 마치 세상의 기업과 동일시하는 영업주의, 결과주의, 상업주의가 교회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교회 내에서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기호와 편리함이 더 중요시 되었고,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요구나 명령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또 다른 교회론의 혼란은 과연 교회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르고 말았던데서 초래되었다. 교회론의 혼란은 일부 은사주의자들의 열광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자신만이 간직하는 아주 신비롭고도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은 건전한 부흥신학의 토대 없이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개인의 신비적인 치유와 은사체험으로 변형시킨 여의도 집회들, 카나다 토론토에서 일어났던 빈야드 운동을 모방하고 따랐던 즉흥 운동가들, 귀신론과 연계된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일부 침례교회와 다락방 전도총회, 종말론을 왜곡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신천지 집단 등은 역동성을 상실한 장로교회의 목회역량을 무차별하게 유린하고 말았다.
마침내 이런 현상주의에 미혹된 요청들이 교회 현장으로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다. 여성의 목사안수 제도는 ‘포용주의’자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여권운동’이라는 정치철학이 범람하면서 나온 ‘절충’이자 ‘관용’이 아니었다면 과연 여성 목사제도를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2. 교회는 CEO 체계가 아니다
국가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규범만을 지키도록 하는 느슨한 조직체가 영국 성공회이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에서 시작된 것이 ‘신학적 관용주의’다. 영국식 적당주의가 지금은 마치 온건하고 중용적인 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영국은 국가교회 체제로서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에 성공회는 좌우로 대립되는 신학을 모두 다 수용하고 말았다. 영국 성공회는 ‘중용’과 ‘중도’를 택하고 있으며 기초적인 것 외에는 모두 다 허용하고 있다. 지금은 ‘호모 섹스’하는 사제들도 허용하자는 입장이다.
신학적 관용주의는 결국 부실한 신앙도 용납하게 되고 말았다. 성도들이 참된 성경적 교회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교회론의 중대한 변질이 초래되고 말았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인 시무장로를 근간으로 하는 당회, 노회, 총회의 역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을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인간적인 지도력의 개발과 세속적인 행정방법과 효과위주의 목장제도가 더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대행기관인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한 회사처럼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신약성경에서 나온 바대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장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유일한 교회체제이자 제도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성경에 입각한 장로교회가 바르게 서야 만 소망이 있다. 사도적인 가르침을 따라서 세워진 장로교회의 건전한 재정립과 개혁주의 신앙을 아름답게 펼치는 목회사역을 통해서 한국의 희망이 되어야 하겠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회중이다. 신약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였는데,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이다. 복음서에는 단 두 번 예수님이 사용하였는데(마 16:18; 18:17),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교회 안에 스며든 죄의 개입으로 인해서 방해를 받기도 하고, 무지한 자들로 인해서 곤경을 당하기도 하지만 교회에 알려진 것들을 처리하는 능력을 주시며, 순결을 지켜나가도록 보호하신다.
개혁주의 교회론의 정론이자 핵심은 무엇이며, 어떤 부분을 유념해야 하는가? 교회라는 단어와 아주 밀접한 용어가 ‘하나님 나라’인데, 보다 더 큰 개념으로서 내적인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종족에만 한정된 모임이어서도 안 되고,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이나 조직으로서 눈에 보이는 형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민족으로 널리 퍼져나간다(마 28:19).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기관으로서 어느 장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마 8:11; 21:43; 눅 24:46-47; 요 10:16; 11:52).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큰 것을 포괄적으로 통치하고 다룬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사역과 기대들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헤르만 리더보스 박사는 주장한다.
메시야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은 왕이시며, 교회는 메시야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진다. 메시야는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그들의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마 1:21)에게 나아간다. 메시야는 자신에게 속한 자들로 교회를 가지고 계시며 친히 교회를 세우신다.
3. 작은 교회라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나라를 제자들에게 주신다(눅 12:32). 시간과 그 진행에 따라서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고 계시며, 가르치시며, 목자로서 그의 양들을 목양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발전과 전망은 모두 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진다.
사도행전 이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이끌었는지 우리는 소상히 알 수 있다. 교회의 뜻은 공개적인 장소에 모인 ‘회중’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9장 41절에 ‘집회’ 혹은 ‘모임’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오직 메시야를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교회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에베소 앞바다 애게해의 작은 섬, 파트모스(한국 성경에는 밧모섬으로 번역됨)를 방문하였을 때 엄청난 충격과 깨우침을 받은 일이 있다. 사도들의 순교가 이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남아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 요한이 디오크레시안 황제의 박해를 받고 이곳에 유배당했다. 그런데 그가 머물던 동굴현장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위대한 계시의 장소가 아니런가!
그런데 그가 살던 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은 겉으로는 위대하게 커나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교회의 중요성을 알려주셨다. 당시 초대 교회는 매우 미미한 존재였다. 아주 허술하고,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요한이 머물던 밧모섬 저 건너편의 아주 작고 미성숙한 일곱 교회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음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내는 일곱 금 촛대와 그곳을 지키시며 살아서 역사하시는 일곱 영, 즉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다. 교회야 말로 역사의 중심에 있으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권세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딤전 3:15).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엡 3:10).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소형 교회들이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힘을 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미미하고 보잘 것이 없어 보이는 작은 교회들이 많다. 지역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정도이고, 때로는 목회자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할 정도로 작고 어려운 공동체일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바로 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을 다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은혜를 주시고, 교회를 지키고 계시며, 복음역사를 일으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사람의 눈에 작게 보이는 교회라 하더라도 지켜나가야 한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page=5&document_srl=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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