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자
< 김재성 목사,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
<교단 설립 30주년을 맞아 교단의 현 위치를 점검하고 향후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교단설립 30주년 기념논단을 준비했다. 이에 “각성을 촉구하는 소명 의식을 분명히 하자”는 주제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① 지난 30년 ‘각성의 사명’을 감당하다
② 다시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③ 역사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자
④ 교회론의 변질을 경계하자
⑤ 영혼에 꿈을 불어넣자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현대 문화의 도전 앞에서 흔들리 않을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뿌리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기억을 상실한 사람과 같다”고 마틴 루터가 설파한 바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말씀과 신앙고백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붙잡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길과 다르다(사 55:8-9). 교회가 가진 신앙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요약한 신앙고백을 문서로 만들어서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분명한 성경적 신앙고백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공동체인가 너무나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교회는 분명한 신앙고백에 서야 하고, 그 근거가 명백하고 뚜렷하게 세워나가야 할 때이다.
1. 역사적 신앙고백 위에 서 있어야 할 교회
나는 2009년 7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세계대회에 참여하여 “아시아에 끼친 칼빈과 칼빈주의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다시금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었다.
전세계에서 모여온 많은 개혁신앙의 동지들이 “어두움 후에는 반드시 빛이 온다”(라틴어로는 Post tenebras lux. 영어로는 After darkness, light)는 구호로 집약된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칼빈과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심지어 칼빈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렇게 박해하던 그의 출생지 프랑스 느와용 사람들마저도 칼빈 탄생 500주년을 축하는 대형 프랑카드가 거리마다 걸어 놓았다. 오색 찬란한 화단으로 그의 얼굴을 새겨놓아서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은 여전히 살아있다. 성경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선진들을 계승하고 역사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세워나가면, 견고하게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한국 교회의 혼돈과 정체는 좀 거시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의 혼란과 혼돈에서 초래된 것이다. 특히 이단들이 난무하고, 각종 사이비 기독교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현대 장로교회가 역사적 신앙고백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의 기초가 무너진 장로교회는 그 위상과 영향력에 있어서도 일대 혼란과 혼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한국 장로교회는 12신조를 간략한 기초로 제정하여 놓았다. 성경의 무오와 영감성,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성령의 인격과 적용사역, 믿음으로 인한 구원,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칭의와 성화, 선택과 언약, 재림 신앙 등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장로교회는 이런 핵심의 신앙노선을 외면하고 있다. 개혁신학의 건전한 기초가 견고하지 못한 까닭에 성령의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자들에 의해서 혼란을 겪고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학적인 혼돈을 극복하려는 선진들의 노력들이 담긴 신앙고백서들을 기초로 할 때에만 우리의 토대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의 신앙고백서들을 충실히 소화하고, 지켜 나가며, 간직하지 못하면 과연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놓치고 만다.
우리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 조항들은 성경을 믿고 살아갔던 선진들의 역사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초대 교회는 콘스탄틴 대왕의 시대, 325년 니케야 신경을 제정하여 아리우스파를 분별해 냈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더욱 상세히 삼위일체론의 기초가 세워졌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와 칼세돈 신경 등은 오늘의 교회를 세우는 헌장이 되었다.
신앙은 전통과 역사 속에서 형성된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칼타고의 키프리안에게서 큰 신앙을 물려받았다. 키프리안은 역시 터툴리안의 신앙을 통해서 성장했으니, 이런 신앙의 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여야 하겠다.
2. 견고한 성경적 안목을 주는 신앙고백서
나는 아프리카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안의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닮고자 한다. 그는 고난을 참고 견디다가 순교한 믿음의 사표가 되는 분이다. 늦은 나이인 45세에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다. 곧바로 귀족의 삶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은 이러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이웃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 인내심과 균형잡힌 경건의 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립과 갈등 속에서 교회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수도에 전념하고 싶어 했지만 시민들의 설득으로 칼타고에 남아서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의 박해를 벗어나서 잠시 신앙의 자유를 맞이한 초대교회는 곧바로 어려움을 직면하고 말았다. 249년 데키우스 황제 시대에 다시 고난이 닥쳐오자 그는 피하지 않았다. 키프리안에게는 노바투스와 그를 따르는 노바티안이라는 무리가 대적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감독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로마에 건너가서 음해하고 그의 감독 직위르 흔들고 비난하였다.
또 다시 로마 제국 전체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찾아왔다. 키프리안이 10년간 감독으로 헌신하던 때였다. 주후 258년, 발레리안이 황제 숭배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잡아들이자 키프리안은 하나님 외에는 결코 다른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순교의 길을 갔다. 그는 58세로 하나님 앞에 몸을 바친 것이다.
그 후로 모진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성도들에게 마침내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인정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388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모든 종교를 폐지하고 오직 기독교만을 국교로서 인정하는 위세를 떨쳤다. 30만개나 되었다는 로마의 신들과 싸우며, 각종 이단들과 다투는 이교도들과의 갈등이 많았다.
중세 천년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 하에 모든 교회가 복종하는 교황권의 시대였다. 어거스틴의 은총교리와 인간의 선행을 결합시킨 신인협력설이 각종 폐단을 만들어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하여 일어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신앙고백을 봇물처럼 만들어냈다. 초대교회의 신앙을 계승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요한 칼빈의 성경적 개혁주의 신앙을 계승하고자 만들어진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프랑스 개혁신앙을 담은 갈리칸 고백서(1559), 스위스 개혁신앙을 담은 헬베틱 신앙고백서, 요한 낙스의 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의 제도를 정착하여 발전시킨 영국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 네델란드에서 나온 돌트 신경(1618),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48)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여러 차례 신학 논쟁으로 다루어진 문제점들을 해소하는 답을 집약해 놓은 것이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다짐하는 교회들은 시대마다 공헌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신앙고백은 견고한 성경적 안목을 주며, 자신감과 영적인 지도력을 겸비하게 한다.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면,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다.
3. 우리 교단이 개혁주의 신앙의 모범이 되자
뉴욕 할렘가에서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도 수 천명이 모이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훌륭한 목회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 던컨 박사는 최근 그 도시의 유서깊은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적인 전망과 대안을 내놓고 있다. 칼빈주의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죤 파이퍼 목사나 존 맥아더 목사 등도 역시 개혁주의 신앙에서 나오는 뛰어난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합신 교단과 합동신학대학원은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의 초창기 평양신학교의 경건과 신앙을 계승한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을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가?
고 박윤선 박사의 믿음과 경건한 개혁주의 신앙을 기초로 하였고, 그 후에 함께 개혁주의 신학을 세워나가면서 목회일선에서 노력하는 동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개혁주의 신학에의 구체적인 이해가 흐려지고, 목회자들의 개혁의지가 빛을 잃고 있다면 내일에의 희망은 없다.
사탄이 미혹하고 있는 현실은 어둡고, 목회현장의 문제는 목회자들의 능력보다 더 크게 보이는 현실이다. 여기에 다시금 초창기의 열정과 모진 가난 속에서도 박해를 견뎌낸 선조들의 의지가 불꽃처럼 피어나야 한다. 우리의 학창시절, 가슴에 뭉쿨하면서 뛰쳐나가게 하던 그 열망이 되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단들이 분열을 거듭한 나머지 지금은 장로교회 내부에서도 통일성을 제공하던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뿌리를 제공한 스위스 개혁교회가 18세기 이성주의 시대와 세속화를 거치면서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네델란드에서 국가교회로까지 영향을 미쳤던 개혁주의 교회들도 17세기부터 내부적인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다가 교세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고, 전통적인 신앙을 간직한 교회는 극히 소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청교도들이 건너가 세운 미국에서는 독립의 정신을 지키려는 회중교회보다 거의 한 세기 늦은 1710년에 장로교회가 결성되었지만 남장로교, 북장로교회 시대를 거쳐서 여러 장로교단들로 분열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교회가 장로교회였고, 최초의 신학교가 장로교 신앙고백으로 세워진 평양신학교였다. 1900년대 초반기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으로 선교사들과 공동체를 이루어서 전체 개신교회를 압도적하였고 주도하는 위치였다. 숫적으로 볼 때,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절반을 넘어서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교회 간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명칭이 당연하게 보였고,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역사성과 전통성을 달리하는 한국 내에서도 장로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장로교단 내부적으로도 자체의 악취들을 정화하는 힘이 떨어지면서 정체불명의 장로교단들마저 생겨나고 말았다. 지금 교회연감에 등장하는 한국 내 장로교회 총회는 줄잡아 100여개가 넘는데, 자생적 군소교단이 하도 많아서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의 기초를 세운 평양신학의 후예들은 해방과 한국 동란의 혼란기에 한국신학대학과 부산 고려신학교 측의 분열, 그리고 주류를 형성해온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또 다시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이 되었고, 연이은 정치적 대립과 신학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어느 장로교회가 가장 바르게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다. 장로교회의 제도와 체제를 따르지 않는 독립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주도적인 행사에서 신생교회들이 물량적으로 기여하게 되면서 장로교회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장로교회의 신앙적인 정통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감각적이고 현대화된 예배에 미혹되어 버렸지만 정작 장로교회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깊어지고 있다. 이제라도 분명한 개혁주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말씀 중심의 기초에 견고히 서야 할 때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page=6&document_srl=2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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