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 김재성 목사,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
<교단 설립 30주년을 맞아 교단의 현 위치를 점검하고 향후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교단설립 30주년 기념논단을 준비했다. 이에 “각성을 촉구하는 소명 의식을 분명히 하자”는 주제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① 지난 30년 ‘각성의 사명’을 감당하다
② 다시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③ 역사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자
④ 교회론의 변질을 경계하자
⑤ 영혼에 꿈을 불어넣자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돌아 볼 때에 지난 30년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 지난 30년 동안 갱신의 열정으로 달려온 합신 교단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가 세속화의 격랑을 헤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인류 사회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며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건전한 교회의 역할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확실하다. 세상이 혼돈 속에 있고, 온갖 사이비 기독교가 난무하더라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든든히 서 있는 참된 교회의 생명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게 되어 있다.
1. 대각성 운동에서 배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있어야만 은혜의 샘물이 생수로 흘러내린다.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과 믿는 자들을 통해서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신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귀양생활을 하면서 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운행을 남겼다. 하나님은 일곱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운영하고 계심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이다. 그리고 요한은 일곱 교회의 갱신과 철저한 사명의식을 촉구하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요청하였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각성하게 된다.
나는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현장의 하나로 미국 청교도 시대를 항상 생각하곤 한다. 영적으로 잠을 자던 청교도의 후예들을 향한 깨우침은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요나단 에드워드(1703-1758)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773년 그의 대각성 운동는 미국교회의 사표가 되었고, 한 세대 후에 일어난 미국독립의 정신적인 제공자가 되었다. 1776년에 선포된 미국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생의 제한성을 깨달으면서 느슨해진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의 후손들을 일깨웠다. 복음이 신대륙에 들어간지 약 백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갱신과 각성은 어쩌면 종교개혁에 못지 않을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요나단 에드워즈의 각성운동”을 공부하였다. 그래서 여러 차례 에드워즈의 현장들과 무덤을 방문했다. 그의 목회현장이던 제일장로교회를 찾아가서 마음에 일어나는 감동을 교감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왜 요나단 에드워즈의 회개와 열정적인 설교를 “대각성운동”이라고 연결시키는가? 그 이유는 각성을 불러일으켜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점점 세속주의적인 즐거움과 일상에 물들어가던 젊은이들을 깨우고, 저녁이면 술집으로 모이던 시골 농부들을 흔들었다.
매샤추세츠 주 노스햄튼 제일교회에 모이던 약 1천 여명의 성도들은 남녀 노소할 것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깨달음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죄악을 회개하면서 은혜를 체험했고, 여성들은 말씀을 읽기 위해서 글을 깨우치며, 받은 은혜와 회개의 제목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감동적인 교제와 사랑을 나누었다.
한국교회, 특히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역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회개와 반성이 수반된 ‘대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열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부흥케 하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결코 사람의 프로젝트나 목회 방법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성과 부흥, 개혁과 갱신을 함께 꿈꾸며 기도할 수 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데, 교회의 대처 방안은 새롭고 신선하지 못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신선한 활력소 제공한 한국교회
지금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중심적인 젊은 세대의 생각이 상당히 바뀌었다. 젊은 세대는 보다 가정 중심적이고, 관계 중심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문화와 언어가 달라져 버렸다. 근대화, 서구화,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쳐서 디지털 혁명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모든 것이 영상세대의 이미지화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오래된 타성에 젖어있다. 목회자 세습과 현세주의적 기복신앙과 양적인 교회성장론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지금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보수적인 교회의 예배와 회의(공동의회, 당회, 노회, 총회)가 감동을 주지 못한 채 답답하다. 한국교회가 세속의 변화에 따라서 발맞추어야 하고 함께 춤춰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보다 앞장서서 내부의 갱신과 철저한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꿈을 심어주는 미래 지향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에 모이면 뜨거운 심장과 박동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전체 진행이나, 찬송을 부르는 태도와 자세, 기도에 임하는 엄숙함과 진지함, 감동적인 설교, 깊은 성도의 만남과 사귐 등등 새로운 분위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불타던 역동성이 디도에게 전달되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부어져야 할 때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5-7)
고난과 무지를 깨우는 복음을 전파하여 왔던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각성과 변화를 가져왔다. 돌이켜 보면 봉건제도로부터 계몽, 독립운동과 해방, 그 이후 현대 한국이 한반도의 남쪽이나 붙잡고 국가를 지탱하면서 오늘의 국력과 각 분야의 약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눈물과 피로 기도해 온 분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다.
수많은 학교, 병원, 고아원은 장로교회의 신앙이 펼쳐진 사랑의 공간들이었고, 육신의 양식과 영적인 만나를 공급하여서 오늘의 한국을 이끌어나가는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소개하고, 미신과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도록 참된 소망을 불러넣어 주는 유일한 에너지 공급원이었다.
1960년대말 월남전쟁 이후로 근대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일약 성장할 때에도 묵묵히 믿음으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땀을 흘렸고, 교회에 나가서 슬픔과 고통을 달래며 꿈을 키웠다. 시골의 중심 마을마다 세워진 장로교회는 성경학교를 통해서 신앙의 에너지를 공급하였고, 각급 학교를 통해서 성장해 나간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국력을 갖추게 하는 자원이 되었다.
한국의 경제적인 성장과 비약적인 기술산업의 혁신에는 근면하게 일하면서 저축하고,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전념했던 기독교 신앙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한국 현대화 과정에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신선한 희망을 불어넣어준 활성 에너지의 공급소였다.
3. 장로교회 역사적 정통성 회복하자
장로교회는 한국 초기 기독교 선교의 주역으로 모든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조국의 독립과 인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에 모여든 가련한 백성들이 눈을 뜨고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현실참여보다는 교회 성장과 복음전파에 집중했던 보수주의 장로교회는 영혼의 성장과 말씀 중심의 건전한 인격성장을 도모하여 중요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내는 건전한 리더쉽을 발휘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잘살게 된 꿈을 이룬 이후로 2천년 대 한국 사회는 물질문명에 포로가 되어서 도덕적 타락과 가족파괴, 급격한 이혼율 증가와 출산율 저조 등 각종 오염된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과거 일제하와 한국동란, 군사 독재 시대에 교회가 사명을 감당했던 것과 같은 신선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교회가 공급해야 하는 절체 절명의 요청에 직면해 있다.
아울러 현재 한국 장로교회는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과거를 부정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눈물을 통해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금 한국사회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특히, 내부적으로 노회와 총회는 완전히 환골탈퇴를 선언해야 한다. 지금의 회의 방식이나 사고구조로서는 디지털 세대를 선도할 수 없다. 대형교회 위주의 천박한 상업주의에 빠진 허상을 벗어나게 하고, 크고 화려하게 보여주려는 모임을 그만 두어야 한다.
교회들끼리 경쟁해서 마치 천민 자본주의자들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경쟁적인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개교회주의라는 세속화에 감염되어서 무감각해진 존재감을 빨리 털어버리고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긍지를 회복하고, 신학적 역동성과 자존감을 회복해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움직여야 할 때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page=6&document_srl=2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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