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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굿윈: 독립교회의 대들보

토마스 굿윈

by 김경호 진실 2012. 6. 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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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굿윈: 독립교회의 대들보
(Thomas Goodwin:'The Atlas of Independency')

ian Hamilton / 최승락 역

올해는 가장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굿윈의 탄생 400주기를 맞는 해이다.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는 굿윈을 가리켜서 바울에 대한 역대 최고의 '강단 주해가'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굿윈의 설교 '우리의 마음에 믿음으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영어로 쓰여진 두 편의 가장 위대한 설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어떤 면으로든 굿윈은 '위대한 신학자'였고, 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이다.
굿윈은 1600년 10월 5일에 노포크 지역의 롤스비(Rollesby)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굿윈 자신의 기록에 근거해서 그의 아들이 작성한 그의 전기에 보면 굿윈은 여섯 살 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가벼운 증거들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해준다. '죄를 인하여 울었던 일'이라든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으로 기쁨이 솟구쳤던 일'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기의 영적 경험들은 좋은 교육의 영향 하에서 생겨난 양심의 자연적 발동에 의한 것일 뿐 영혼을 일깨우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뒤에 가서 굿윈은 결론짓고 있다. 이 시기와 관련해서 굿윈이 뒤에 기록하고 있는 말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방문객과 같았다. 와서 하룻밤 머무는 사이 나에게 종교적 자각을 일깨워 놓고는 다시 나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굿윈의 부모들은 자기 아들이 최선의 교육을 받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굿윈은 겨우 열두 살의 나이에 캠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존 밀턴이 이 학교에 들어오기 11년 전이었다. 이 대학에서의 형성기 동안에 굿윈은 '천상의 박사'라 불리는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고, 또한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의 여러 부분을 읽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던가! 진리를 이와 같이 견고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 모른다." 캠브리지 대학은 당시 '청교도들의 온상'이었다. 굿윈이 전하는 말처럼 '도시 전체가 퍼킨스(William Perkins)의 능력 있는 사역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하지만 다음 몇 년 동안 굿윈은 깊은 영적 퇴조와 침체를 맛보았다. 그러다가 1620년에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굿윈은 한 장례식에서 눅 19:41-42의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듣는 가운데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된다. 윌리엄 바커(William Barker)의 {청교도 인물들}(Puritan Profiles)이라는 훌륭한 책에 보면 이 일의 의미에 대해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이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굿윈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자연적인 양심과 성령의 영향 아래 하늘로부터 난 심령의 정서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구별하게 되었는데, 이런 점이 이후로 그의 설교와 사역을 특징짓는 한 뚜렷한 요소가 되었다."
1620년에 석사학위(M.A.)를 받고 굿윈은 이미 그 전 해에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옮겨와 있던 세인트 캐더린스 홀(St Catherine's Hall)의 펠로와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때로부터 약 7여년에 걸친 기간은 그가 개인적인 믿음의 확신을 위해 몸부림쳤던 시기였다. 킹스 린(King's Lynn)의 경건한 사역자인 프라이스(Price) 목사의 영적 지도를 통해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길, 그로부터 성화를 위한 생명과 힘을 얻고, 믿음을 통한 각양 위로와 기쁨을 얻는 길'의 필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 기간의 투쟁에 대해 굿윈은 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수년 동안 그리스도를 떠나 내 자신 속에서 은혜의 징표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거의 7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또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사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굿윈의 체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무엇보다 먼저 신자의 제일의 초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굿윈은 프라이스 목사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제 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추구했던 저 징표들은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의 확신을 위해 습관적 은혜에 너무 많이 의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만이 전적으로 가치 있는 분이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경험을 거쳐온 굿윈에게 십스 박사의 시의적절한 조언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 충고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젊은이, 그대가 뭔가 유익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복음과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설교해야만 할 것이오."
굿윈은 1626년에는 대학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았고, 또 1628년에는 십스와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의 뒤를 이어서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았다. 굿윈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사건 중의 하나가 1633년에 일어났다. 필립 나이(Philip Nye)와 존 데이븐포트(John Davenport)와 더불어서 굿윈은 존 코턴(John Cotton)을 만나 그로 하여금 신대륙으로 가지 말고, 또 국교회의 의식들 가운데 몇 가지 신앙의 본질에 '상관없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타협을 하도록 종용할 셈이었다. 그러나 코턴을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코턴의 회중교회 정치에 대한 견해가 성경적이라고 세 사람이 모두 설득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회심'의 사건으로 인해 굿윈은 트리니티 교회 설교자의 자리를 사임하고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대주교 라우드(Archbishop Laud)의 고교회 정책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몇 년간의 삶의 조각들은 꿰어 맞추기에 어려움이 있다. 굿윈은 런던에 살면서 독립교회 목사로 사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1639년에 그는 화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은 회중교회의 원칙을 실험에 옮기기에 보다 자유로운 여건이 허락되는 곳이었다. 거의 2년에 걸쳐서 굿윈은 안헴(Arnhem)에 있는 영어권 회중교회를 섬기다가 1641년에 잉글란드로 돌아왔다. 장기 의회(Long Parliament)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교회적, 신학적 개방화의 새로운 기류에 따라 굿윈은 런던에 있는 독립교회 회중을 위한 목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1643년 6월 12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일원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굿윈은 그의 학식과 또 그의 경건으로 인해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 회의의 매일의 논의된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 기록이 분실되고 말았다는 것이 우리 후대들에게 큰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아들이 쓴 굿윈의 자서전(Memoir of Dr Thomas Goodwin, DD)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매일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간단한 기록들을 남겼다. 옥타보 판으로 14권 내지 15권에 이르는 그의 친필 원고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
굿윈의 이 매일의 관찰 내용이 남아 있었더라면 베일리(Baillie), 질레스피(Gillespie), 라이트풋(Lightfoot) 같은 다른 사람들의 기록과 비교해 볼만한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굿윈은 이 회의에서 독립교회파의 주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흔히 '의견을 달리하는 다섯 형제들'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주도파인 장로교파에 저항했다. 1644년 1월에 그들은 "변호의 변}(An Apologeticall Narration)이라는 글을 출판함으로써 자기들의 독립교회 정책을 발표하였고, 1645년에는 약 6개월 동안 이 회의로부터 철수해서 교회 정치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굿윈은 1647년에 존 코튼으로부터 뉴 잉글란드로 건너와서 목회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처음에 그는 여기에 매우 매력을 느꼈다. 뉴 잉글란드의 뜻이 맞는 교회적 환경 가운데서 일해 보겠다는 전망과 함께 이사를 결심하고 그의 서재의 책들이 거의 배에 선적이 된 시점에서 "몇몇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와 충고에 못 이겨서 그의 결심을 바꾸고 말았다". 크롬웰이 권좌에 오르자 굿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높고도 중요한 직책에 오르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649년 11월에 그는 국가최고회의를 섬기는 목사로 임명을 받았고, 1650년에는 옥스포드 모들린 칼리지(Mag- dalen College)의 학장이 되었다. 학장으로 있는 동안 그는 '경건과 학문을 동시에 증진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그의 아들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크롬웰의 집권기 동안에 굿윈이 존 오웬(John Owen)과 더불어서 이룬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1658년에 호국경을 설득해서 사보이 궁에서 회중교회들의 회합을 후원하도록 한 일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로 나타난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기본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내용을 가지나 교회 정치의 면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은 영국과 미국의 회중교회의 정신을 표방하는 하나의 기초문서가 되었다.
차알스 2세가 1660년에 왕권에 복위함에 따라 굿윈은 모들린의 학장 자리를 내어주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를 따르는 옥스포드의 몇몇 무리들과 더불어 페터 레인(Fetter Lane)이라는 곳에서 한 독립교회를 시작했다. 죽기 전 잠시간 몸져 누운 자리에서 굿윈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이 땅에서 함께 교통하였던 삼위께로 갑니다. 그들이 나를 취하였지 내가 그들을 취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욕정과 부패가 제거되어질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이 꺽꺽거리는 두꺼비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제 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
굿윈은 1680년 2월 23일에 죽어서 번힐 필즈(Bunhill Fields)라는 곳에 매장되었다. 그는 매우 탁월한 그리스도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또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학자였다. 그는 높이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였다. 그는 청교도 경건을 드높이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무엇 보다 굿윈은 청교도주의가 냉랭한 지적 정신을 가졌고 좁은 분파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그 개인으로서는 독립교회 원칙의 신봉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참다운 보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651년에 그는 독립파와 장로교파 사이에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우주적 피스메이커로서의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이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뿜어내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시는 것보다 더 잘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나 또한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삼키웠다."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많은 독서로 시간을 보내었다고 그의 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어거스틴, 칼빈, 무스쿨루스(Musculus), 잔치우스(Zanchius), 파레우스(Paraeus), 고마루스(Gomarus), 아메시우스(Amesius), 등을 즐겨 읽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성경이 그가 가장 깊이 연구한 책이었다'. 독서를 통해서 굿윈이 추구했던 것은 단순히 학문적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값없이 주시는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영광, 이것이 그의 정신이 가장 깊이 즐거워하고 있던 진리였다. 이 즐거움은 단순히 사변적 즐거움이 아니었고, 이 진리는 그의 영혼의 생명이요 양식이 되던 진리였다. 그의 마음이 이런 것들로 감화될 때마다 그는 이를 영적 따뜻함이 깃들인 필체로 글로 옮기곤 했다. 이 따뜻함은 그의 글들 속에 단순히 표현되어 있기 보다 오히려 느껴지고 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청교도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살아 있는, 실험적인 기독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죽었으나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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