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란 무엇인가?
교리란 무엇인가? 교리(敎理)는 ‘신앙의 체계, 원리, 이치’를 말한다. 교리를 ‘요리’(要理)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요리’는 ‘중요한 교리’, 혹은 ‘요긴한 교리’라는 뜻이니 ‘교리’와 크게 다른 말은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이라는 용어 가운데 ‘요리문답’은 ‘카테키즘’(catechism[catechismus])의 한국식 의역이다. 대체로 교리가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카테키즘’이 ‘요리문답’이라고 번역되지만, ‘카테키자러’(catechizare)라는 라틴어는 ‘교육하다’(가르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요리문답’을 제대로 번역하자면 ‘중요 교리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리의 의미
교리는 ‘지도’와 같다. 지도는 넓은 지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간결한 그림으로 잘 표시해 준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곳에 쉽게 찾아가려면 지도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요즘 웹 지도는 대단히 유용하다. 어떤 사람이 놀이동산에 놀러간다고 하자. 놀이동산이 너무 넓어 처음 방문한 사람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이때 지도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한다. “왜 귀찮게 지도를 만들지?” “지도는 창의력을 떨어뜨려! 마음대로 모험도 해 보지 못하고......” 이런 사람은 지도 없이 닥치는 대로 도전해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혜로운 방법은 아니다. 지도가 있으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즐겁고 유익하게 놀이동산에서 즐길 수 있다.
교리는 참고하기 위한 ‘보조도구’이다. 지도가 있지만 직접 놀이동산을 다니며 실제로 놀이기구를 즐기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도만 보고 “다 봤다! 뭐 별로 재미없네!”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도는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 단지 실재를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교리는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지도의 역할을 할 뿐, 성경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경을 직접 읽도록 해야 한다.
지리학자는 실제로 여행을 하며 현장을 탐사한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그 내용을 지도에 그려 넣는다. 그리고 다시 현장으로 나간다. 이런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 좋은 지도책을 낸다. 그러면 다음 세대가 그것을 기초로 해 더 좋은 지도를 만든다. 인생은 짧고 세계는 넓다. 한 사람이 스스로 지구의 표면을 연구한다면 지구의 표면 중에 매우 작은 부분밖에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에 의해 이런 지식이 축척되면 좋은 지도를 만들 수 있다. 지도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매우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직접 세계를 다니지 않고도 빠른 시일 내에 세계 지형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 이것을 참고로 직접 지구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지도가 정확한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믿음의 선배들이 오랜 세월동안 연구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리’이다. 이 교리를 영적인 지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다. 특별히 종교 개혁가들이 세운 교회가 이 교리를 잘 만들고 보존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 귀한 교리를 교회가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지도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교리가 대부분 정확할지라도 틀릴 수 있다. 만약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조사하고 검사한 후 결론을 내리고 절차에 따라 수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리는 실재 자체가 아니고 보조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교리를 꼭 가르쳐야 하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이유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말라고 권고한다. 교리를 먼저 가르치면 아이들이 편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교리를 먼저 가르치면 아이의 자율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을 방해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리는 상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면서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죄와 비참 가운데 살고 있으며, 나 자신도 원죄 가운데 태어나 죄로 멸망할 처지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사역이 이루어졌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믿음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신앙적 질문,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질문이 생길 때 비로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어린 아이 때부터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옳다. ‘질문’과 ‘의문’은 쉽게 ‘의심’의 단계로 넘어간다. ‘의심’은 불신앙에서 시작되는데 이미 사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의문’과 ‘의심’이 생기면 그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교리를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이 질문과 의문이 생기기 전에 미리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맞다. 왜냐하면 교리교육은 진리, 곧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교육을 가능한 늦추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미리 수영을 가르쳐 물에 빠졌을 때 헤엄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교리교육의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리를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다. 다른 외국교회의 예를 살펴보면 좋겠지만, 그들과 우리는 역사와 환경과 여건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만이라는 반응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교리교육을 해 본 필자의 경험을 소개해 본다.
1) 연령대를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필자가 섬기는 다우리교회는 매주 토요일에 모여 아이들에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친다. 대상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로 여러 연령대가 섞여 있다. 부모들도 함께 참여한다. 부모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교리교육을 받는다. 아이만 교리교육을 시키고 부모는 밖에서 수다만 떨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사실 부모도 교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좋다. 물론 교육은 아이들의 수준에 맞춘다. 아이의 연령대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신앙교육은 연령대를 너무 세밀하게 나누지 않아도 좋다. 어린 아이의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일 수 있다.
2) 교리를 암송하라!
교리교육의 꽃은 역시 암송이다. 암송하지 않고 이해만 하면 자기의 것이 되기 쉽지 않다. 암송은 성경구절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리를 암송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는 성경의 요약이다. 한 마디로 핵심내용이다. 따라서 이 성경의 중요내용을 암송하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암송은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수학 문제를 잘 풀기 위해 공식을 열심히 외운다. 구구단은 암송하면서 교리를 암송하면 안 될까? 암송은 좋은 교육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교육을 시작하면서 배울 요리문답을 암송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보자!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질문과 답을 모두 다 암송하게 한다. 큰 소리를 내 암송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암송해 보고, 몇 사람씩 앞에 나와 암송해 보도록 하고, 한 명씩 체크하기도 한다. 이렇게 암송을 점검하는 시간은 적어도 10-15분 정도 걸린다. 반복을 통해 아이들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3) 단순하고 명료하고 쉽게 설명하라!
복음은 복잡하지 않다. 교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인간이 복잡할 뿐이다. 불신앙으로 가득 찬 인간이 진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현실을 가지고 복음을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은 분명하고 명료하고 단순하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쉬워야 한다. 무식한 자나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르쳐야 한다. 만약 지식인이나 어른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친다면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리문답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면 훌륭한 교사이다.
4) 가정예배를 통해 요리문답을 가르치라!
교회에서 요리문답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교리를 배울 수 있다. 가정예배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읽는 것도 좋은 교육 방법이다. 필자도 가정예배를 하면서 교리를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복음의 진리가 잘 요약된 진술을 읽으면서 신앙을 튼튼하게 세워갈 수 있다. 설명이 더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요리문답 내용이 그 자체로 명료하고 단순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2문만 하더라도 그렇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가 죽을 이유가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보자.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 죄값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신자의 죽음은 죄를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문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명료하고도 단순한 가르침이며 배움이다. 이렇게 가정예배를 통해서도 아이들에게 요리문답교육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요리문답 교육을 멀리 있다고 할 수 없다.
필자는 최근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정예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자가 운영하는 ‘가정예배카페’(http://cafe.daum.net/family-worship)에 매일 올리고 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365일 분량으로 나눠 쓴 것이다.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5) 아이들에게 적실성 있게 가르치라!
요리문답은 대체로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아닌 주제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 그리스도, 구원, 칭의, 성화, 재림 같은 내용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대한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고민과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 배운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질문을 하고 바로 답을 읽으면 재미가 없다. 질문을 하고 여러 가지 가능한 답을 생각하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궁금한 것이나 의심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나이 수준에 맞는 질문과 적용을 해야 하는 데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다.
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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