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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가서 서론> 아가서에 나타난 혼인제도에 대한 이해 / 송영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9. 1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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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에 나타난 혼인제도에 대한 이해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구약성경은 토라(הרות, 오경), 네비임(םיאיבנ, 선지서), 케투빔(םיבותכ, 성문서)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보통 모세오경으로 불린다. 오경은 천지창조에 이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비임은 전선지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와 후선지서로 나누어지며 출애굽 이후 전개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후선지서는 대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와 소선지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이들을 12소선지서< Dodecapropheton>로 부른다)로 구별하는데, 이는 선지서들의 내용에 따른 구분이 아니고 단지 분량에 따라 부르기 쉽게 하기 위한 구분일 뿐이다.

케투빔은 크게 시가서(시편, 욥기, 잠언)와 다섯 두루마리책(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로 이 5책들은 메길롯<Megilloth>으로 불린다) 그리고 역사서(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상하)로 구별된다. 이중에서 욥기, 잠언, 전도서를 지혜서 또는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아가서도 지혜문서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서는 히브리 성경의 세 번째 책인 성문서에 속한다. 그리고 시가서와 역사서 사이에 있는 다섯 두루마리책’(Megilloth) 중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이 다섯 두루마리 책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여러 축제 때에 그들의 절기에 맞추어 하나씩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가서는 유월절, 룻기는 오순절, 애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추모하는 전승적인 기념일(the Ninth of Ab.), 전도서는 장막절, 에스더는 부림절에 각각 낭독되었다.

다섯 개의 두루마리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나름대로 각각의 주제를 통한 일련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다. 아가서는 남녀의 신실함을 통해 보여주는 사랑을, 룻기는 그 사랑의 결정체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애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도서는 인생의 도모에 대한 경고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촉구하며,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될 이스라엘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혼인제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의 혼인제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는 것은 역사적 경륜가운데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발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아가서에 대한 기본적인 탐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혼인제도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교회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1. 아가서의 저자와 연대 문제

 

그동안 학계에서는 아가서 이해를 위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그만큼 아가서의 해석에 대한 논쟁 또한 치열했다고 보여진다. 그 가운데서도 아가서의 저자와 연대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제목(םירשׁה רשׁ)노래 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라는 말로 가장 훌륭한 노래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제목에 근거하여 70인경(LXX)에서는 아스마 아스마톤’(Ασμα Ασματων)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며 전도서 다음에 위치한다. 개신교 및 로마 천주교 성경은 이 70인경 순서에 따르고 있다. 불가타 역본에서는 칸티쿰 칸티고룸’(Canticum Canticorum)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며 영어 역본들은 이를 번역하여 칸티클스'(Canticles)라고 제목을 붙였다. 한글 개역의 제목 아가’(雅歌 : 풍류스러운 노래)는 다소 의역적인 번역이다.

아가서가 솔로몬의 작품이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 표제(1:1)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המלשׁל)란 말에서 전치사(ל)가 실제 저자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to, for, concerning, in the manner of’라는 다양한 뜻으로도 번역되기 때문에 이 단어만으로는 솔로몬이 저자라고 주장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아가서에는 솔로몬의 이름이 6번 등장하며(1:5; 3:7, 9, 11; 8:11, 12) 왕과 관련된 세 가지 사건들(1:4, 12; 7:6) 역시 솔로몬을 지시하고는 있지만 이것들이 직접적인 솔로몬 저작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탈무드(Bab. Bath. 15a)에서는 히스기야와 그의 신하가 아가서를 썼으며 솔로몬의 다른 작품도 이들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참조 잠 25:1). 현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가서가 솔로몬의 작품이라는 전승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와 장소 때문이다. 아가서에는 아람어 형태가 많이 등장하는데 희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보이는 단어들뿐 아니라 전치사 ’()을 관계 대명사 아쉐르’(רשׁא)를 대신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관계대명사 의 사용이 후기 연대를 입증한다고 할 수 없다. 때로는 아가서에 등장하는 아람어 풍의 외래어들은 저작 연대가 페르시아 시기이거나 후기 유대 율법학자들이 편집했을 가능성을 높인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반면에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러 지방들인 예루살렘, 갈멜(Carmel), 샤론(Sharon), 레바논(Lebanon), 엔게디(Engedi) 등이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전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로몬의 저작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 왕국의 전성기를 기억하게 한다. 특히 디르사가 영광과 미의 도시로 언급되며 예루살렘과 같이 등장하고 있는데(6:4) 이것은 디르사가 다윗 왕조의 권위를 부인하고 북쪽 왕국의 초기 수도로 정해졌었던 역사적인 사건 이전에 아가서가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BC 885-874년 사이에 오므리 왕조가 수도로 세운 사마리아에 대해 아가서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이 점을 확인하게 한다. 사마리아처럼 큰 도시를 아가서 저자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가 BC 9세기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초기 왕국 시대에 솔로몬 왕국이 근동 지역의 무역 거래를 장악하고 있었던 점에서 볼 때 아가서에 등장하는 외국산 물품들에 대한 묘사들과 아람어 형태의 언어들 역시 전혀 거북스럽지 않다. 나도(1:12), 몰약(1:13), 유향(3:6), 화려한 이동용 침대(3:9)를 비롯해 비단, 상아, 녹주석 등 아가서에 등장하는 왕궁의 사치품과 값비싼 수입품들은 이 사실과 잘 부합된다. 더불어 아가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과 식물에 대한 자세한 지식들과 20여종의 진귀한 식물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 역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구사했던 솔로몬의 저작 사실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아가서가 솔로몬이 지은 1005개의 노래들(왕상 4:32, 33)에서 나타나는 솔로몬의 지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 역시 솔로몬의 저작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아가서는 다른 어떤 노래들보다 고상하고 그윽하며 아름답다. 이런 정황들은 아가서가 솔로몬의 배도 사건(왕상 11:3-4)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게 한다.

 

2. 아가서의 신학적 위치

 

전도서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아가서에서 신학적인 가치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아가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성경으로서 그 권위를 가진다. 때문에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계시로서 고유한 영향력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가 말하고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혼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신학적 교훈의 근본을 추구해야 한다.

아가서는 혼인을 통한 부부간의 사랑 나눔에 대한 순수하고 고상한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혼인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이 혼인을 통해 세워진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서 부부간 육체적인 결합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라는 말씀은 혼인제도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혼인제도는 창조 질서에 해당되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유효한 제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는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혼인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창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혼인제도를 통하여 한 몸이 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고 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다스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만이 가지는 독특한 기능이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만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세우게 될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함에 있어 가장 유효한 제도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통해 인류를 발생시키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했던 것처럼 모든 인류는 가정을 통해 다스림이라고 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류만이 누리는 고유한 권세이다.

따라서 혼인제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는 동시에 다스림이라고 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혼인제도의 정신은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뿌리가 되며 이로써 언약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고 하신 말씀과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9:6-7)는 말씀은 이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는 약속은 노아 언약의 갱신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후에 이 언약 공동체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로 발전되었고 국가 단위로 확장되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5-6)는 약속을 통해 하나님은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친히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음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혼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가정이 궁극적으로 국가 단위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후에는 이 개념이 교회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이 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로 확장되어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지역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공동체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인 속성이 발견되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는 시, 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발전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혼인제도는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와 더불어 혼인제도를 이룸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2:22-23)는 기사는 혼인의 기본 정신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비로소 혼인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혼인제도는 남자와 여자의 일체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아가서의 주인공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상징하는 바 솔로몬(המלשׁ : 쉘로모)은 평강이라는 의미의 샬롬’(םולשׁ)에서 나온 단어이며 술람미 여인(תימלושׁ : 슐람미트) 역시 쉘로모의 여성형으로 솔로몬의 여인이라는 의미이다. 아가서에 등장하고 있는 이 두 주인공들의 이름이 상징하는바 샬롬(םולשׁ), 즉 평강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남녀사이에서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묘사를 통해 혼인제도의 근본 개념과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사랑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혼인제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8:6 참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34:14)고 말씀하신 것에서 이미 확인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과의 관계를 혼인제도라고 하는 정신에 따라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사랑을 통해 이 정신을 가장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혼인제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이유에서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의 배도를 타도할 때에 혼인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였다(54:5,6; 2:2; 16:8-14; 2:16-20). 사도 바울은 이 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고후 11:2; 5:22-25).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9:7-8)는 사도 요한의 묘사는 마지막 날에 있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승화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혼인제도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발생하는 일체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는 창조 원리가 확장되어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인류인 교회가 한 몸을 이루는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의 극치를 이루게 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바울의 지적은 깊이 생각할 가치를 가진다(고전 10:16; 12:27). 특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지칭할 때 성찬식과 연결 짓고 있는 것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혼인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가서는 구속사의 긴 흐름 속에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에 나타나는 상호간의 사랑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E. J. Young하나님께서 아가서를 정경에 포함시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정하신 혼인의 순결성과 그 고귀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가서는 인류에게 사랑을 심으신 하나님 자신의 순결하심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임이 분명하다.

 

3. 아가서의 구조와 메시지

 

아가서의 제목(Canticles)이 암시하는 것처럼 아가서는 각기 크기가 다른 13개의 칸토(canto :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성악곡, 소리의 높낮이가 길이나 리듬과 서로 어울려 이루어지는 음의 흐름)로 구성된 노래들로 되어 있다. 그 사이에 비슷한 후렴(2:7; 3:5; 8:4)이 등장하고 예루살렘 여자들(3:3; 5:7), 파수꾼들(3:3; 5:7)과 같은 보조 그룹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함축적인 후렴들(2:17; 4:6; 5:16; 6:3; 7:10)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 구조가 아가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아가서의 흐름을 읽는데 있어 13개의 칸토를 중심으로 할 때 다음과 같은 외형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

 

책의 제목(1:1)

<1부 시작>

(A) 칸토 I. 입장 / 합창단의 노래(1:2-4)

(B) 칸토 II. 여자의 노래(1:5-6)

(C) 칸토 III. 사랑하는 자를 찾음(1:7-8)

(D) 칸토 IV. 남자와 여자의 사랑 노래(1:9-2:7)

<1부 끝>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2:7)

 

<2부 시작>

(E) 칸토 V. 솔로몬의 청혼(2:8-17)

(F) 칸토 VI. 혼인식의 세 노래들(3:1-4:15)

(Fa) 신부의 염려(3:1-5)

<2부 끝>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3:5)

 

<3부 시작> <이는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3:6)

(Fb) 신부가 신랑에게 나아감(3:6-11)

(Fc) 신부의 순결함(4:1-15)

(G) 칸토 VII. 신랑과 신부의 합일(4:16-5:1)

<3부 끝>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5:1)

 

<4부 시작>

(F) 칸토 VIII. 혼인식 밤의 세 노래들(5:2-6:10)

(Fa) 신부의 염려(5:2-8)

(Fb) 신부가 신랑을 만나다(5:9-6:3)

(Fc) 신부의 순결함(6:4-10)

<이는 누구인가>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6:10)

(E) 칸토 IX. 솔로몬의 왕비가 된 술람미 여인(6:11-7:1)

(D) 칸토 X. 신랑과 신부의 사랑 노래(7:2-8:4)

<4부 끝>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8:4)

 

<5부 시작><이는 누구인가>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6:10)

(C) 칸토 XI. 사랑의 언약(8:5-7)

(B) 칸토 XII. 여자의 노래(8:8-12)

(A) 칸토 XIII. 피날레(8:13-14)

<5부 끝> “나의 사랑하는 이여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8:14)

 

이상의 외형적 구조는 일곱 번째의 칸토인 신랑과 신부의 합일’(4:16-5:1)을 중심으로 내용적인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큰 틀로 볼 때 아가서는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가지며 혼인을 통한 남녀의 합일이 그 중심 주제로 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는 혼인을 통한 남녀의 결합을 축하하고 혼인의 신성함과 신비로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아가서는 한 쌍의 인물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그들이다. 술람미 여인(6:13)은 이스르엘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므깃도 평야 근처에 있는 수넴 마을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남녀의 혼인 정서를 서정적인 분위기로 담아내기 위해 목가적인 풍경을 그 배경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아가서의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한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맡겼다. 술람미 여인의 가족은 어머니와 오빠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이었다(1:6; 6:13; 8:8).

술람미 여인은 이 가정에서 신데렐라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정결한 시골 처녀였다(1:5). 아마 그녀의 오빠들은 이복형제들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시켰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1:6). 술람미 여인은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고 작은 여우들을 잡는 덫을 놓고 양떼를 치며 온종일 밖에서 일을 하느라고 햇볕에 그을릴 정도였다(2:15).

그러던 어느 날 솔로몬이 그 포도원에 나타나서 술람미 여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목자로 생각하고 그의 양떼들에 대해서 물었다. 솔로몬은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그녀에게 사랑에 찬 몇 마디를 던지고는 값비싼 선물들을 증표로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1:8-11). 그리고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얻고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구애에 대한 번민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과연 한 남자의 아내로 성숙한 상태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심리적 갈등이었다(3:1-5). 그렇지만 마침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3:6-11).

아가서는 마치 하나의 잘 짜인 극본과 같이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의 희곡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실상 아가서를 희곡의 대본으로 사용하기에는 급작스런 배경의 변화와 반전들이 자주 등장함으로써 많은 제약이 뒤따른다.

한편 이처럼 복잡하고 급변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해석 방법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동안 아가서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 방법들로는 풍유적인 해석, 문자적 해석, 예표적 해석, 모형론적 해석 등이 있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아가서를 해석하기 위한 작업들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아가서는 먼저 단순하고 우아한 인간적 애정시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들은 본 시가가 인간의 영과 성령의 영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제의 기쁨을 노래한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드러낸 것으로 승화시켜 이해해야 한다”(Campbell Morgan)고 주장하는 모형론적 해석 방법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모형론적 해석 방법에 따르면 아가서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을 통해 승화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의 주제는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자연히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긴밀하게 밀착된 교제를 갈망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고대 근동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성창제도(聖娼制度)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혼인의 신성함을 왜곡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아가서는 혼인 관계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7:10)는 여자의 고백으로 순화되고 결국 남편과 아내가 혼인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혼인제도의 본질을 되찾게 해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인류로 하여금 가정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부부 관계의 순결함과 신비함 속에서, 나아가 가족 관계의 신실함과 끊임없는 자기 희생의 아름다움 속에서 에덴동산의 회복을 구현하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게 한다. 이로부터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가정을 원세포로 가지고 있는 교회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6)고 웅변함으로써 사랑이야말로 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결과와 그 죽음의 파괴적인 영향력보다 더욱 강력한 건설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아가서의 강력한 호소는 아가서를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사랑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들의 복된 상태를 찾고 사모하게 만든다. 그 결과 아가서의 사랑에 대한 표현들은 우리들의 헌신을 그리스도에게 고백하는 헌신의 언어들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순결하고 순수한 가정을 통해서만 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4. 계시로서 주어진 아가서의 신적 권위

 

아가서의 해석사를 보면 아가서 해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만큼 아가서는 성경 중에서도 어렵고 신비스러운 책임을 반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가서는 우화, 확대된 상징 또는 혼인식 노래들의 모음, 이교적인 다산문화의 제사의식들의 모음,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단편적 노래집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아가서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방법들이 제시되어 왔었다.

미쉬나, 탈무드, 탈굼 같은 유대 전승들은 아가서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우화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힙폴리투스, 오리겐, 제롬,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버나드 같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우화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이후 대부분의 성경해석자들이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혹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아가서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아가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필요 이상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초래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검게 된 술람미 여인’(1:5-6)은 죄 때문에 교회가 추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회개 후에 영적인 아름다움을 되찾았다는 식의 해석은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해 주지 않는다. 이러한 우화적인 해석 접근 방식은 심한 주관적인 직관을 요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상의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심지어 상당수의 학자들도 아가서를 확대된 상징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솔로몬을 그리스도로, 술람미 여인을 교회로 형성화시켜 이해하고자 했다. 이런 상징적인 관점은 비록 알레고리 해석 방법과 구별된다 할지라도 솔로몬이 실제로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며, 아가서 자체 역시 솔로몬의 다양한 생활 방식이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또한 아가서를 드라마로 간주하는 것 역시 이스라엘에는 드라마와 같은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가서를 드라마나 연극의 각본으로 치부하는 행위 역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밖에도 아가서를 혼인식 노래들의 모음집, 이교적인 다산문화의 제사의식들의 모음집,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단편적 노래집 등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다채로운 등장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이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혼인의 순결과 신성함을 주제로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아가서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남녀를 지으셨고(1:27; 2:20-23), 그들이 혼인을 통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으며(2:24), 이로써 가정을 이루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해 가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비록 아가서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할지라도 순결한 사랑 나눔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이 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경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가서 안에서 다채롭게 진행되는 두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혼인제도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솔로몬의 아가라”(1:1)는 한글 개역의 번역은 단축된 형태이며 노래들 중의 노래니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KJV)는 번역이 원어에 근접한 번역이다. 이 표제어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1)고 밝힌 잠언의 표제어를 연상케 한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은 솔로몬이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독특한 비중을 함유하고 있다.

먼저 다윗의 아들다윗의 자손은 다윗 언약을 계승한다는 정통성에서 그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13)고 하신 여호와의 약속에 따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인물이 솔로몬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다윗을 계승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었고 선택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솔로몬을 통해 다윗 왕국을 견고하게 하셨고 당대 최고의 권좌를 누리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는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이 약속은 여호와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연속선상에서 다윗을 통해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친히 아브라함이 소망하는 모든 것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는 말씀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더 구체화되었다.

후에 이 약속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는 새 언약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에 의해 성취되었다.

우리 주님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하신 왕국 언약의 계승자이시며 동시에 완성자이시다. 신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1; 9:27; 12:23; 15:22; 20:30, 31; 21:9, 15; 22:42; 10:10:47, 48; 12:35; 18:38, 39; 20:41).

또 하나 솔로몬의 독특한 위치는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들을 다스리는 왕과 근본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신정국가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스라엘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6)는 시내산 언약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이며 다윗 왕국에 의해 실체화되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과 다윗 왕국의 언약의 연속선상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나라이며 그 나라의 왕은 제사장 나라의 통치자와 같은 권위를 가진다. 이 개념은 후에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음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과 그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가르침은 모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솔로몬의 가르침 역시 계시로서의 고유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잠언과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가 솔로몬의 이름에 저작권을 부여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곧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상대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성격을 담아주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가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는 여전히 아가서를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아가서를 대할 때 다른 성경 계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의 교회에게 하시는 메시지에 대해 항상 열려 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와는 달리 아가서를 하나의 문학작품인 것처럼 대하고 분석, 비판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전 3:16-17)고 선언하는 것처럼 성경을 주신 근본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파괴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가서는 서정시로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는 현실주의적인 표현법을 사용하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묘사들을 통하여 비유 또는 은유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낱말들을 해석하려고 하기보다는 두운법이나 동음이의어 또는 각운법이나 반복법 혹은 언어유희나 리듬 등의 음악적이며 문학적인 특징들에도 주의를 기울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려고 해야 한다. 이처럼 독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아가서의 문학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피조물로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오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특별히 아가서는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인간의 타락과 범죄라고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랑이라고 하는 속성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에덴동산의 회복을 구현하고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혼인제도를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되찾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2:24).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다(8:6)는 아가서의 결론부에 나타난 진술은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풀려나 죽음의 파괴적인 영향력 못지않게 건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가서에는 여호와의 불’(8:6)이라는 말로 하나님과 관련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전도서나 에스더서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아가서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종합적인 계획에 담긴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낸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유월절을 후대에 기념하면서 아가서를 낭독하게 된 것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5. 이 시대의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

 

노래 중의 노래이며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하는 책 이름이 이미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통상적으로 아가서는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관점을 확장하여 부부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그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사랑의 본질을 보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혼인 정신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부부 관계가 지닌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 혼인의 신성함과 순결성이 가정을 통해 보존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한 연합 역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는 히브리 역사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직접 서술하여 말하고 있지 않지만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랑의 속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또한 선지서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예표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구현되어야 할 에덴동산의 회복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맺어지는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 에덴동산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새창조의 완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궁극적인 새창조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이 땅에 건설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인 교회(5:22-25)를 통해 구현되며 마침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구현될 것이다(19:7-8).

나아가 아가서는 에로틱한 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하여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풍부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숭고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아가서를 문자적인 해석을 앞세워 저급한 성애의 행위에 대해 묘사하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정욕과 탐욕이 인간을 강렬하게 유혹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혼인의 참 뜻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가서는 진실한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순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부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며 순결한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성경해석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위해 처음으로 만드신 것이 에덴동산이었다. 하나님은 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아담을 심으셨다(2:8). 이것은 이 동산을 기반으로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룸으로써 장차 큰 민족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결국 이 동산으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이후 인류는 결코 에덴동산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 되었다(3: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라고 하신 혼인제도는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자신이 하와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노래한 것처럼 비록 에덴동산에서 뽑혀 버린바 되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유일한 반려자인 하와와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세워나감으로써 장차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혼인과 가정 제도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귀한 선물이다. 인류가 비록 에덴동산에서 떠나 있다 할지라도 이 혼인제도를 통해 인류는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와 버금가는 가정을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아담에게는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취할 수 있게 하셨지만 이로 인하여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최상의 선물인 가정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세워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그만큼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그 원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나아가 이 가정을 통하여 인류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길이 열리게 됨으로써 온 땅에 번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고 하신 말씀이 여전히 가정제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가정제도는 원 복음(proto 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최초의 복음이 구현되는 유일한 제도라는 점에서 매우 이상적이고 독특한 제도이다. 이런 점에서 인류는 그 어떤 위협이나 공격 앞에서도 결코 무시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가정의 신성함을 보존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전쟁이나 사회의 구조악 또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한 힘없는 자들의 착취, 그밖에 수많은 위해 요소들로부터 가정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 역사의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제도는 인류를 이 땅에 내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유일한 제도이며, 그 가정을 유지하고 세워나가는 원리로 제시하신 혼인의 정신이 살아있는 단 하나의 제도이다. 이 가정은 오로지 혼인의 질서에 따라 세워지며 보존되어야 한다. 만일 혼인의 정신이 변질되거나 파괴된다면 그 바탕 위에서는 가정을 세워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혼인제도가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론

 

예나 지금이나 가정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온갖 요소들이 호시탐탐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위세를 떨치고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 더 그러하듯이 혼전 성교, 동성애, 간음, 불륜, 매음 등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쉽게 이혼을 조장하게 함으로써 수많은 가정들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성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는 악습이 만연되면서 성적 난교(蘭交)가 확장되고 성범죄와 가정 파괴를 비롯해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확산 등 오히려 인류를 도탄의 굴레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그와 같은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인생의 도탄이라고 하는 굴레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아가서는 혼인 관계 안에서의 올바른 사랑만이 인류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며 이에 근거하여 가정 안에서 진정으로 성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세속적 경향에 따르는 성의 자유가 아닌 오직 혼인 관계 안에서만 진정한 성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가정은 단순히 인류를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를 통하여 새 창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제도라는 점에서 언제나 순수하고 순결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한 가정들로 구성된 교회를 보존하고 충만케 하는 일에 신자들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실질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아 그 구성원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지상의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보존될 때만이 신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가정은 필수적으로 언제나 교회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는데 그 가정을 온전히 세워나가기 위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혼인제도는 언제나 순전하게 보전되어야 한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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