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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살후 3장> ‘주의 말씀’을 봉사하는 교회가 누리는 평강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4. 1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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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

주의 말씀을 봉사하는 교회가 누리는 평강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사 편집국장

 

 

 

 

외부로부터 지속적인 박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그 박해를 용기와 믿음으로 견디고 있다는 사실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참된 순종일 뿐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차지할 기업에 대한 확실한 증거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서로 반전될 것이며, 박해자들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되겠지만 성도들은 안식과 보상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이어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 즉 그리스도의 나타나심(顯現)은 갑작스런 심판의 때가 될 것을 선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만의 특권이었던 심판이 신약에서는 인자이신 예수님에 의해 실행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친히 성자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구약에서 증거한 하나님의 현현과 같은 성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시는 타는 불은 심판의 상징이다(4:1; 12:29). 그날은 하나님을 따름으로써 박해를 받는 성도들에게는 승리와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8:19)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신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어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종말론적 전망을 담은 삶의 윤리를 강조한다. 이때 종말론적 전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환난을 인내하도록 하는 자극제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목적에 맞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자신의 백성을 불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하나님(살전 2:12)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하시며,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러한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하신다. 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벧전 2:9)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며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박해의 성격과 이해를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한 바울은 2장에서 성도들이 주의 날에 대한 오해로부터 벗어나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바울이 전한 우리 복음위에 견고하게 설 것을 권면하였다. 이 권면은 앞선 서신에서 바울이 경고한 임박한 주의 날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다는 바울의 말을 오해하고서는 자신들이 지금 주의 날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은 몇몇 성도들에게는 임박한 미래 위기와 절정에 대한 소망이 강화되면서 그들이 실제로 마지막 때에 사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음을 파악하고, 성도들이 거짓된 소망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 대대적인 배도의 사건과 불법의 사람이 등장할 것이라고 밝히고 지금은 불법의 비밀을 억제하는 힘 때문에 이 적대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시대임을 밝히고 있다.

종말의 때에 나타날 이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에 맞서 대대적인 반역을 일으킬 것이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 칭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행위가 억제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시점이 되면 불법의 사람을 억제하는 힘은 그를 따르는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옮겨지게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불법의 사람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인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반역은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곧바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도 사탄의 술수에 속아넘어간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 성도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진리곧 복음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면서 종말을 앞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교회의 생활에 대해 그리고 복음의 확장과 관련된 내용들을 3장에서 다루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보호하시는 능력을 확신하는 가운데(살후 3:5) 바울 자신과 실라와 디모데가 사역에 충성하며 박해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기도를 당부함으로써 이 내용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계속해서 신실성을 유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켜주실 것을 기도한다(살후 3:1-5). 그리고 주의 날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생활에 균형이 깨지고 있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권면을 전개한다(살후 3:6-15). 이어 간단히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한 후에, 바울이 친필로 이 편지를 썼다는 확인을 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이 서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고서 은혜를 기원하는 말로 이 서신을 마치고 있다(살후 3:16-18).

 

1. ‘주의 말씀전파의 성격과 교회의 사명

 

지금까지 바울은 미래에 발생할 상황들을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과 그에 앞서 그 일을 알리게 될 적그리스도의 반역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비록 불법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현재 억제되고 있지만 세상에서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음도 지적했다(살후 2:7).

이 불법의 비밀이 막는자에 의해 저지됨으로써 수면 아래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종말이 되면 분명히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의 비밀이 그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현재의 긴장 상태와 최종적인 종말의 날을 고려해 볼 때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2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내용들을 3장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1) ‘주의 말씀이 활동하는 현 시대

2장 말미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 2:15)고 당부한 바 있다. 이것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사명을 깨닫고, 악에 직면하는 가운데서도 강인함을 유지하며,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규모 없는 삶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마지막 권면에 앞서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살후 3:1-2). 이 요청의 초점은 주의 말씀이 속히 전파되어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서와 같이 어디서든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요청은 불법의 비밀’(살후 2:7)이 현재 활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앞서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장차 있을 대대적인 배도와 불법의 시대 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비록 지금은 그러한 종말론적 특징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의 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긴장의 시기에 살고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침으로 주의 말씀을 주셨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진리를 믿는 것(살후 2:1, 10-12)과 그의 가르침을 굳게 잡는 것(살후 2:13)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에서 주의 말씀은 사도에게 맡겨진 것이긴 하지만(살전 2:4) 바울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복음을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복음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신자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살전 2:13).

이 복음을 유전’(παραδοσις)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부활하신 주의 영을 통해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 안에서 계속 보존되고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살전 4:1).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2)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을 주께 받았다’(고전 11;23)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교회에 전한 유전은 주의 말씀또는 말씀이나 와 같이 모두 신적인 계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인 현재의 시기를 말씀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말씀의 시대는 불법의 비밀이 그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기간 동안에는 온 세상에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 신자들의 삶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영광스럽게되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외적 성장과 그 복음에 순종하는 내적 성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라고 한다.

 

2) ‘주의 말씀을 수종드는 사도와 교회들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의 활동성에 따라 전파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라는 표현처럼 여기서 달리는 것은 복음 전달자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다. 이 구절은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147:15)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 이때 바울은 복음을 따라 달려가는 사역자, 즉 복음을 위한 봉사자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 사역을 가리켜 달음질이라고 묘사한다(고전 9:24; 2:2; 2:16).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역시 복음 전달자가 아닌 그 복음 자체이다. 본문의 영광스럽게 되고’(δοξαζηται)라는 말은 영광으로 영접되고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은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13:48)에서 확인된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11:18). 이때 사도들은 복음을 수종드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누가는 이 상황을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13:49)고 보도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 전도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아닌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쉐키나를 따라 가나안에 입성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복음이 가는 그 길을 따라 갈 뿐이다. 이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복음이 달려가는 것을 수종드는 것처럼 그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 역시 복음을 위해 수종드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주의 말씀은 아무런 저항 없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장수처럼 그 앞에는 무수한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살후 3:2)라는 바울의 말 속에서 확인된다.

사실 복음을 통해 믿음의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나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적들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일이 끝날 때까지 그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바울에게 맡겨진 복음의 수종자로서 충성하는 일의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지금 바울이 이들 악한 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한 방해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대적자의 정체는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앞서 1장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는 실체와 2장에서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자들, 특히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복음을 수종드는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 이유만으로도 이들 대적자들을 상대해야 하며 이미 그것들로부터 오는 고통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3)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주의 말씀

이미 바울은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 대해 심한 반대와 박해를 경험한 사실이 있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군중을 선동해서 자신들을 방해했던 세력들이 있었다(17:5). 이 세력은 복음 전도를 거스르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세력은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권세를 가진 자나 괴악한 사람중 어떤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계획이나 행동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을 방해하고 복음 전도자들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과 그와 유사한 환경이나 세력들은 모두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 속해 있다. 이들이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 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울은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로 직역할 수 있으며,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고 의역할 수 있다. 믿음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 않고 특별히 주의 백성들에게서만 발견된다는 말씀은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그 믿음’(η πιστις)은 복음에 대한 믿음의 응답을 지시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할지라도 모두에게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반응을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적대심을 가지고 반응한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반대와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이유도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고 말한다. 많은 이들에게서 믿음을 찾을 수 없지만 주께서 미쁘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자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한결같은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실하심을 결코 변치 않으신다.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들은 하나님은 미쁘시다혹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살전 5:24; 고전 1:9; 10:13; 고후 1:18)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미쁘시다고 표현함에 있어 그 내용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미쁘심’(πιστος : faithfulness)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보장되었다. ‘하나님의 미쁘심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헌신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여진다. 특히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있다(삼상 3:19; 1:12; 55:11).

 

4) ‘주의 말씀전파와 그 대적자의 정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교회의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에 순종하며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음 전도와 기도 배후에는 신실하신 주님 자신, 즉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의 영으로 확증하심으로써 그 말씀이 그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도록 하시는(살전 1:5; 2;13)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고후 1:20)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는 말은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또 다른 방법이며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된다.

바울은 여기에서 2절의 피스티스’(πιστις : 믿음)3절의 피스토스’(πιστος : 미쁘심)라는 말의 언어 유희를 통해 주님의 미쁘심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에서 믿음 없는(faithless) 자들은 그리스도의 미쁘심(faithfulness)을 위협하는 대적자들이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πιστις, 믿음)는 곧 그분의 피스토스(πιστος, 미쁘심)이다. 이에 반해 대적자들이 보이고 있는 믿음 없음’(아피스티스, απιστις)은 곧 그들의 불신앙’(απιστια)이다. 그 결과 대적자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미쁘심을 믿지 못한다. 반면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의 미쁘심을 믿게 된다.

그리스도의 미쁘심때문에 또는 하나님의 미쁘심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고 굳게 하신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굳게 하시는 것은 주의 말씀을 통해서이다(살후 2:17). 주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또한 악한 자로부터 성도들을 지키신다. ‘너희를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는 구절은 주기도문 중에서 다만 악(του πονηρου)에서 구하옵소서’(6:13)를 연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악한 자’(του πονηρου)가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지 비인격적 존재(중성)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악으로부터 신자들을 지키시는 분이 주님(ο κυριος)이시라면 그 상대적 존재인 ’(του πονηρου) 역시 인격적 존재인 그 악한 자’(ο πονηρος)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2절에 등장하는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의 이면에서 그 악한 자’(ο πονηρος)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악한 자’(ο πονηρος)는 바로 사탄을 가리키고 있다(13:19; 6;16; 요일 2:13, 14; 5:18, 19).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은 마지막 때에 있을 사탄의 격렬한 활동을 암시하는 것(살후 2:9)으로 볼 수 있다.

영적인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신자들의 진정한 적은 단 하나의 존재에게 집약된다. 그는 바로 그 악한 자인 사탄이다. 이 악한 자인 사탄은 무리하고 악한 자들을 앞세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과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게 한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전쟁은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핍박과 죽음과 환난과 고통과 같은 극악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사탄은 주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일을 방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미쁘시기에 자신이 친히 보이신 복음의 메시지를 지키실 것이며, 전 세계에 계속 그 복음을 전파하실 것이고,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나 자신의 교회가 실패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에게는 결코 궁극적인 패배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주의 말씀과 교회 역시 결코 그 악한 자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틀림없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굳게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극악한 사탄의 모든 술수를 이겨낸 신자들은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베푸시는 승리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살후 3:1) 되는 일이 마침내 성취되는 것이다.

 

5)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교회의 사명

이상에서 언급한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살후 3:1) 되는 일과 관련하여 바울은 세상에서 말씀을 전파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교회 안에서 말씀에 대해 순종해야 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 전도에 대한 순종과 그 말씀에 대한 주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그 말씀 안에 있는,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한 주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교회의 사명 의식을 다시 한번 고취시키고 있다.

i) 바울은 먼저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살후 3:4)는 말로 우리의 명한 것을 행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주 안에서’(εν κυριω) 발견되는 확신이다. 사도들은 성도들이 주 안에서주님과 그들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이미 시작하신 선한 일을 주님 스스로가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그 선한 일을 성취하실 것을 믿고 있다(살전 1:6-8; 2:13, 14; 4:9).

사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박해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의 말씀으로 굳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사도들이 명한 것을 행하고 또 계속해서 행할 줄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여기에서 행하고 그리고 행할 줄을이라는 말은 현재와 미래 시제를 혼용함으로써 확신이나 권면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법이다. 본문의 우리의 명한 것’(α παραγγελλομεν)전에도 말로나 글로 명했고(살전 4:11) 지금 다시 새롭게 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에 완성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교회는 사도들이 명한 것’(παραγγελια)을 주의 깊게 받아 들여야 했다. 특별히 이 명한 것은 공동체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때 사도들이 전파한 것또는 명한 것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복음과 그 복음에 근거한 신자들의 삶을 지시한다. 바울이 이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었던 명령과 또한 잠시 후에 전달하려는 명령(살후 3:6-15)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지금 영적으로 굳게 해주심과 지켜주심을 얻게 할 뿐 아니라 미래에도 또한 얻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ii) 이러한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악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라는 말 속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성도들이 주의 말씀곧 사도들이 전파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계속해서 순종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규례를 자신들의 임의대로 결코 정할 수 없으며, 주님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를 따르는 것은 절대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iii) 여기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해야 할 사명 의식을 각성해야 한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오염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이 복음에 근거해 성도들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하며, 복음에 도전하는 모든 종류의 불의와 불법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올바른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과 권징을 복음의 권위 아래에서 행사해야 한다.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참된 교회의 3대 표지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과 권징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 시행된다면 거기에 더 이상 교회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세 가지 교회의 표지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말씀 선포 안에는 성례의 집행과 권징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성례의 집행 안에 말씀 선포와 권징이 있는 것이며, 또한 권징 안에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며,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일이며,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의 순종과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일과 관련하여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하지 아니하는일부 신자들에 대해 교회가 단호한 자세를 취하도록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음(살후 3:6-15)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6) ‘주의 말씀을 행하는 교회의 덕으로서 사랑과 인내

교회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과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일을 위해 바울은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아무리 신자들이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복음이 명하는 바를 준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초두에 밝혔듯이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살후 3:1) 되는 일이란 처음부터 전적으로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항상 보여주시는 바 그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행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세상 가운데서 실행해 보여 주셨던 그리스도의 인내가 성도들의 본이 될 때 비로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행하게 되고 계속해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들의 사랑과 인내가 아니라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을 언급할 때 대부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하고 있다. 특히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을 받는 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살후 2:13, 16).

신자들의 사랑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부어 주신 그 결과일 뿐이다(5:5).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신자들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내역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내를 근거로 신자들은 다른 윤리적 덕목과 함께 인내를 가지게 된다. 특히 바울이 인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에 대한 적대적 행위나 적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성도들이 견디지 않으면 안될 고난이나 역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확고부동한 인내를 가지고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고 수치를 무릅쓰면서 자신의 길을 경주하신 것같이 성도들은 또한 예수를 바라보며고난 가운데서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것과 같이(12:3) 신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여야 한다. 인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소망의 확신에 의해서만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2. ‘주의 말씀에 근거한 징계의 의미

 

바울은 주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가 성도들에게서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하지 아니하는일부 신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전개시키고 있다.

 

1) ‘규모 없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이 교훈을 시작함에 있어 먼저 서론으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παραγγελλομεν)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명령또는 명한 것은 군사적인 용어로 장교가 자기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과 같이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이 명령은 우리의 명한 것’(α παραγγελλομεν, 살후 3:4)에 포함된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이 명령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이 명령의 권위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음을 지시한다.

이 명령의 권위는 그리스도께서 파송한 사도들에게 위임되었으며 그분의 뜻대로 행사되어야 한다(고전 5:4). 이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임을 받은 대표들이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서 떠나라’(στελλεσθαι)는 말은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의미이며(고후 8:20) 다른 곳에서는 경외하다, 두려워하다’(2:5)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규모 없는 자들을 교회에서 공적으로 추방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적인 교우 관계에 있어서 그들 부류들과 친분 맺는 것을 금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규모 없는 자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찬정지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도들은 잘못을 범한 사람과의 교제를 일정 기간동안 멀리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기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결과는 잘못을 범한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교만한 무관심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회개하게 될 것이다.

이 징계는 차별이나 오용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잘못을 범한 모든 형제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들 역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형제들에 속해 있기 때문에 추방이나 제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징계를 명했으며, 죄를 범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 징계의 목적이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징계 대상은 규모 없이 행하는 모든 형제들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앞선 편지에서도 자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살전 4:9-12; 5:4).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규모 없는 자들과 관련해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이라는 조건이 첨부되었다. 이것은 이들 규모 없는 자들이 고의적으로 바울이 교회에 전해준 유전을 거부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앞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살후 3:5)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으로부터 그들이 떠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유전(παραδοσις)은 신앙과 행위와 모두 관련된 것으로(살전 4:1-2)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사명을 깨닫고, 악에 직면하는 가운데서도 강함을 유지하며,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규모 없는 삶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살후 2:15).

이 가르침을 주신 목적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2)고 밝혔던 것과 같이 성도들의 부르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규모 없이 행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박해(살후 1)와 잘못된 종말 사상(살후 2)과 더불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혼란케 하는 주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2) 규모 있는 삶에 대한 사도들의 모범

바울은 이제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친히 보였던 규모 있는 생활에 대한 모범을 기억하게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유전을 명령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친히 모범적인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유전을 전했다.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물러 있던 동안의 행적(살전 2:3-12)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살전 2:12).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교회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살전 1:6; 고전 4:16; 11;1; 4:9).

이에 바울은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7-8)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은 앞 절에서 제시한 것처럼 유전을 따라 사는 것과 그 모습의 하나로 규모 있게 사는 것을 지시한다. ‘규모 없이’(ατακτω)라는 말은 군사적 용어로 대열을 이탈한 군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규모 없이 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탈영병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이 단어가 교회 공동체와 관련될 때에는 교회의 규범적인 삶으로부터 이탈한 상태를 지시한다.

분명히 일부 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하고 섬기고 있는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살후 2:2)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는 핑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들은 일하는 것을 너무 천하고 영적이지 않으며 보화를 하늘이 아니라 땅에 쌓는 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살후 3:11). 그리고 교회 안에서 부유한 회원들이 자신들을 부양해 줄 것이라고 기대함으로써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을 것이다(살후 3:12). 나아가 이들은 남의 일에 대한 참견과 간섭으로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살후 3:11). 쉽게 말하면 여기저기 말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불난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바울의 눈에 분명히 자신들의 믿음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 야손의 집에 머물면서 음식과 숙박료를 직접 지불했다(17:7). 사도들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오직 자신들이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 도시에 신자들의 몸인 교회를 세우면서도 생계를 유지함에 있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도들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해결했다.

분명히 사도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여러 차례 환대 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살전 2:9). 이와 관련해 바울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9)고 말하고 있다.

바울과 사도들은 메시지를 전한 대가로 기거할 곳과 음식을 대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10:7; 고전 9:7-14). 당시 사이비 순회 철학자들조차도 대부분 청중들의 호의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의 진보를 방해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바울은 수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신자들이 본받고 따라 올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단지 말씀으로만 전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대로 삶으로써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모 없는 이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자신의 생업을 위해서도 전혀 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무위도식하며 기생충같이 성도들에게 붙어 기식(寄食)하고 있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행을 방해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3) ‘주의 가르침에 근거한 징계의 원칙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 신자들에게 규모 없이 사는 것에 대해 주의를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각인시킨 바 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다.

이 교훈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3:19)라는 보편적인 삶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인 삶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일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이신 보편적인 생존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울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령한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도라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자기를 스스로 희생시키신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형제들에게 누가 되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궁핍한 형제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정의감을 가진 성도라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공의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지혜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신자의 생활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그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있는 규모 없는 자들을 향해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살후 3:11)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만 만드는 자들’(μηδεν εργαζομενους αλλα περιεργαζομενους)이라는 구절은 미묘한 표현의 뉘앙스를 담은 일종의 언어 유희 형식으로 자기 일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일을 염려하다또는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과 관련하여 바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말은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또는 빈둥거리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의 배경에는 종말론적 광란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적인 행동(responsible behavior)을 포기한 결과이다. ‘주의 날이 이미 임했다’(살후 2:2)고 광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을 해야 할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종말에 대한 열광적인 선포와 경고를 위한 시간에 할애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미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곧 심판이 주어질 것이고 그에 따른 상급이 눈 앞에 있는데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느냐고 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형제들까지도 일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2)고 명령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주어진 이 명령은 주께서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살전 4:1). 이때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 명령은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분명히 기독교 유전의 일부였다(딤전 2:2 참고). 본문에서 조용히는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과 대조적인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유익한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반면에 바울은 규모 없는 이들과 달리 열심히 일하는 신자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고 권면한다. 이 문장이 그러나 여러분, 형제들이여로 시작된다는 것은 규모 없는 자들’(ατακτοι)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살후 3:5)를 위해 사는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서 선을 행하다는 말은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국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행한다는 의미이다(고후 13:7; 6:9; 7:21). 특히 성경에서 을 언급할 때에는 그 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등한히 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신자들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4) 교회가 행하는 징계의 목적

선하고 영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사도들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어지럽히는 규모 없는 이들이 있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이들을 경계한 바 있다(살후 3:10). 그리고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디모데 역시 이들에 대해 경계하였음이 분명하다(살전 2:9; 5:14 참고). 또한 첫 번째 서신에서도 바울은 이들을 권계했었다(살전 4:11-12). 이제 두 번째 서신에서도 역시 이들을 향해 훈계하고 있다(살후 3:6-12). 이들은 바삐 일하는 자들(busy worker)이 아니라 일만 만드는 자들(busy bodies), 즉 부산하게 자기 몸만 바쁠 뿐이지 실지로는 교회의 형제들과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바울은 이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이들을 상대로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살후 3:14-15).

이 서신에서 유일하게 순종을 요구하는 바울의 말은 유전을 지키라”(살후 2:15)는 것이었다. ‘유전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도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킨다는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전체 메시지를 가리키는 압축된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을 때 교회는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 사람을 지목하여너희들 스스로 그 사람을 지목하라(note)’는 의미이다. 본문의 지목하다’(σημειουν)는 말은 살피다, 주시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교회가 규모 없는 자들을 계속해서 살피고 주시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들과 일정 기간동안 사귀지 말라고 권한다. 이 말은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의미로 바울은 그들을 친구로 영접하거나, 그들과 뜻을 같이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용인하지 말라고 경계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그 규모 없는 이들을 교회가 도와주거나 먹을 것을 주지 않아서 그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실질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신자들로 하여금 무정하거나 냉정한 사람들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교회에서 출교를 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경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야 할 것은 바로 교회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미 바울은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이들에게 충분히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제는 물리적인 행동을 통해 이들에게 경고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징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치 못한 것을 깨닫고 그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함으로써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문장은 그리고 그렇지만’(και νη ως)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순서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후에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한 형제처럼 대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진정한 권징의 의미가 담겨 있다.

교회는 범죄한 사람을 교회의 사귐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한 불신자로 간주하기 이전에(고전 5:11) 그들을 잘 인도해서 그들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의 한 책임을 지는 구성원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때까지 교회는 사랑과 인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보임으로써 교회가 그들을 얼마나 극진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자기들에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교회는 범죄했던 형제라 할지라도 원수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들이 언제든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단지 범죄한 형제가 자신의 심각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교회의 권면과 가르침을 부정할 때에는 비로소 출교라고 하는 권징(고전 5)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까지 교회는 이 형제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로 여기거나 원수의 목록에 올려놓지 않아야 한다.

 

3.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강

 

이방인들의 도시에서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무를 수반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 도시에서 인기가 없는 소수였으며 그들을 싫어하거나 그들의 세력 확대를 막으려 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성도들의 행동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좋지 않은 소문을 실천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변증적인 삶은 본 서신을 포함해 신약 서신들의 주된 관심이었으며 사도들이 윤리적인 덕목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박해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1)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2)과 마땅한 삶을 살지 않는 규모 없는 신자들(3)로 인하여 삼중고를 치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잘 처리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감당할 때 계속 강건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주의 말씀대로 신자들이 이행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살후 3:16)라고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본문은 바로 그 주님’(αυτος δε ο κυριος)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평강을 이루셨다. 평강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평강을 부여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가리켜 평강의 나라를 시작하실 평강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9:6-7). 실제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서로 화평케 하셨으며 이들을 또한 하나님과 화목시키셨다. 그 결과 온 우주에 평강을 나타내심으로써 친히 평강의 주가 되셨다(2:14-15; 1:20).

평강의 주’(ο κυριος της ειρηνης)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본문에서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ο θεος της ειρηνης)으로 표현한다(살전 5:23; 15:33; 16:20; 4:9; 13:20. 고후 13:11에서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으로 표현).

앞선 편지에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는 말로 서신을 마무리 한 바 있다.

본문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평강의 주를 앞세우고 있는데, 이것은 앞선 서신과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평강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상 평강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평강의 원인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2)에서 이미 선언된 바 있다.

주의 평강은 때마다, 일마다혹은 때마다, 곳마다’, 즉 신자들이 생활하는 삶의 모든 상황에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평강은 화목을 받은 상태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걷혀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너희에게 그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함으로써 여기 표현된 평강이 아주 특수한 성격의 평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 평강의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평강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강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로 화목의 복된 상태를 보장받은 신자의 마음 속에 이미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대제사장의 축복,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6)에 나타난 대제사장의 축복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성취된 하나님의 평강이 과거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했던 그 평강으로 이제 친히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성도들에게 임재해 있음을 바울은 선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단지 갈등이 없는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14:27; 16:33).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현재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이미 주께서 주신 바로 그 평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강의 주인이신 바로 그 주님도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평강의 주는 당신의 성령으로 친히 신자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선언의 대상을 너희 모든 사람이라고 함으로써 조금 전에 심각하게 언급했던 규모 없는 이들도 포함시킴으로써 그들 역시 교회의 회원이며 형제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살후 3:1) 될 것임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바로 성도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증거된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하나님(살전 2:12)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와 성도들의 삶이다.

 

4. 바울의 친필 서명과 사도의 임재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선포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주의 말씀을 친히 보존할 것과 행할 것을 권하는 인사말로 이 서신을 마치고 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살후 3:17)는 양식은 고대 서신 양식에서 발신자의 친필을 적는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비록 고대 서신 관습에서 발신자가 자신의 서명을 첨가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바울의 친필 서명은 이 서신의 내용을 승인하고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써 이 서신을 보증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이처럼 친필을 강조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본서와 동일한 친필 양식은 고전 16:21; 4:18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갈 6:11과 몬 19에서도 약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개 바울은 더디오(16:22)를 대서인으로 하여 서신서들을 교회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대체적으로 서신 초두에 자신이 서신의 발신자임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과 더불어 발신자임을 확증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의도가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도의 서신은 교회에 친히 사도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도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게 자신의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바울의 지도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발송했다. 때문에 바울의 편지는 교회들에게 공식적이고 명령적인 임재(presence)의 기능을 수행했고 비록 바울이 그 교회를 방문중에 있다 할지라도 그 편지는 여전히 사도의 임재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별히 본 서신에서 자신이 친히 친필 서명을 하는 것을 강조한 것에는 아마도 본 서신이 보내졌을 무렵 바울로부터 왔다고 하는 가짜 서신이 나돌고 있었다(살후 2:2)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주의 말씀을 친히 보존할 것과 그들이 행함으로써 친히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참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거할 것을 요청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5. 사도의 축도

 

바울은 비교적 짧은 이 서신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격려, 기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신자들의 장래 소망, 규모 없는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징계 등 교회가 당면한 실제적인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주의 말씀으로 교회에 주어졌으며 이제 교회는 이 주의 말씀을 받아 보존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받은 주의 말씀은 세상 곳곳에 달음질함으로써 영광스럽게 되는 일과 교회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에 봉사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그분의 말씀에 헌신함으로써 주께서 주시는 그 평강을 소유하게 되며,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며, 그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도가 제시한 이러한 내용의 가르침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은 규범으로 삼아 행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3:15)라는 본서의 축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5:23)와 그 의미가 같으며 단지 너희에게대신에 너희 무리에게로 바뀌게 됨으로써 무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이 축도에서도 무리’(all)를 강조함으로써 외부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종말에 대한 신학적 이해 차이로 발생한 어려움과 더불어 규모 없는 자들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총체적으로 그들이 받은 주의 말씀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릴 것을 선언하고 있다.

특별히 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백성으로 무리를 이룬 교회 가운데 확인되는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바울은 이 축도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누리는 주님의 은혜야말로 주의 말씀으로 인해 그들에게 약속하신 언약, 즉 평강의 주께서 주시는 그 평강을 교회가 소유하게 되며, 주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주의 말씀은 스스로 영광을 받으신다(살후 3:1)는 놀라운 사실을 교회에 증거하신다. 그리고 주의 말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는 바울의 기도를 성취하시는 원인자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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