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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살후 1장>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이해와 성도들의 각성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4. 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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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1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이해와 성도들의 각성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사도들이 동일한 회중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둘째 서신의 내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첫째 서신과 유사하며 첫째 서신의 내용이 괄목할 정도로 반영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서신은 독자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이 서신의 독자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은 외부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서신에서 중요한 것으로 고려된 세 가지 영역, 즉 믿음과 사랑과 인내(살전 1:3)에 있어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살후 1:3-4). 그리고 독자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곧장 박해받는 자들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전개된다.

그런데 그들이 처한 고난의 상황은 그들이 고백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하여 실제로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잃을 수 있는 처지였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피상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상황은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실 때의 고난받는 처지(살전 2:14-16)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성도들이 이러한 고난에 동참하는 현실은 이미 예고되었으며 바울 역시 친히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증거한 바 있다(살전 2:2).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임한 박해의 양상은 그 짧은 기간에 의외로 심각해지고 예전보다 훨씬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과격한 추측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서신에서는 고난을 견딘 유대의 신자들(살전 2:14)뿐 아니라 사도 자신들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살전 1:6; 2:14; 3:3)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심판(살전 1:10; 3:13; 5:2-10)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그 중심이 급격하게 이동되어 박해의 실체로 향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박해를 통해 신자들을 박해하고 있는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살후 1:4, 6).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배도하고 불법하는 자들에게 올 마지막 날의 전조였다(살후 2:3-12). 그리고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무익하고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했다(살후 3:2-3).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로부터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할 필요성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중고를 주고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살후 1:8)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정확하고 확실하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권능의 왕국에 속한 교회와 그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제시하고 있다.

고난을 이겨낸 성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친히 참여함으로써 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박해자들이 가한 악행은 박해자들에 대한 형벌로, 고통당하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각기 다른 보상을 통하여 의로운 결말을 맞게 된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권능의 왕국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2)는 바울의 기도에 근거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구현해야 한다.

 

1. 고난가운데서 교회가 누리는 은혜와 평강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와 달리 후서는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는 실체들에게 다가올 심판과 그들로부터 주어지는 박해의 대상인 교회 공동체에 대한 보상을 예견하게 한다.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구원과 악한 자들에 대한 응징을 선언하고 있는 본 서신의 분위기는 전서의 분위기와는 상대적으로 무겁고 단호하기만 하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본서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1-2)라는 전형적인 인사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1:1)고 하는 전서의 문안과 사뭇 다른 뉘앙스를 보이고 있다.

 

1) 신앙고백 공동체로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

전서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후서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확장되고 있다. 이로써 이 서신을 보내는 사도들과 수신자들은 하나의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후서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구절 앞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가 첨가됨으로써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서에서는 이 은혜와 평강의 근원으로써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사실, 즉 교회가 그 안에 있고 여전히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되었다. 반면에 후서에서는 이 사실을 보다 더 명확하게 밝혀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장황하면서도 불분명한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후서의 인사말은 전서의 인사말보다 그들이 처한 형편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안에 있는 교회라는 사실이 더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적 역시 하나님의 적임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성도들을 위협할 수 있는 이방 종교들이 많고 문화적 영향력이 강했던 데살로니가에 세워졌었다.

신약에서 최초로 사용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클라시아’(교회, εκκλησια)라는 용어는 데살로니가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모이는 회합(assembly)이라는 바로 그 단어였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인 데살로니가인들의 회합이었으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모임이라는 점에서 다른 여타의 회합들과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다른 회합 혹은 집회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이질적 요소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세속적 집회와 구별된 독특한 데살로니가인들의 집회인 교회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였으며,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였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이시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세와 지기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4:4-7).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이 신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가족을 형성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과 하나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동시에 고백하는 신앙 고백의 핵심 사상이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 우리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다른 세속의 집회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신앙 고백 공동체라는 점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주변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박해를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살전 1:7-10).

이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를 가리켜 칼빈은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으로 신앙의 깃발 아래 함께 모인 교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이 교회가 아버지와 그리스도, 즉 이 두 분의 일이자 건축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자신에게 입양시키시고 중생시켜 주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2)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

사도들은 이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를 향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은혜와 평강은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דסח)평강’(םולשׁ)을 대신하며 이때 은혜는 모든 실제적인 복의 근원이며 평강은 그 복의 종국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개입 없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은 깨어진 인간의 상태에서 회복되어 온전함을 이룰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성품과 자아를 개발하고 성숙하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구원받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바울의 기원은 아론의 축복(benediction, 6:24-27)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일종의 선포 행위를 동반한다. 아론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복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제로 임하였던 것처럼 바울의 문안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실제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 즉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임재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성격을 가진다.

이후 전개되는 내용과 관련해 볼 때 사도들이 선포하고 있는 평강은 계속해서 교회에 가해지고 있는 박해와 그에 따른 보응으로 볼 때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서신은 평강으로 시작해서 평강으로 끝맺고 있다(살후 3:16). 이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사도들의 강력한 소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은혜와 평강의 제공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나란히 위치시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가장 큰 복의 형태로 그리고 어떤 난관이나 핍박들까지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의 형태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정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인 평강을 주신다.

그 결과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경험함으로써 믿음이 강해지고,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도시들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바울은 기꺼이 이들의 모범적인 모습에 감사하고 있으며(살후 1:4) 환난에 처한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앙과 인내를 다른 모든 교회들에 자랑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3절에서 시작된 감사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12절까지 이른다. 특히 3-10절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11-12절을 시작하는 이러므로’(to this end)10절과 직접 연결시킨다. 반면에 그 내용은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3-4절은 감사기도의 주제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핍박과 환난을 제시하고 있으며 5-10절은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석 작업이 뒤따르고 있다. 이 감사기도는 이어지는 11-12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지속시켜 달라는 간구와 함께 끝나고 있다.

 

1)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한 데살로니가 교회

앞서 보낸 서신과 마찬가지로 이 서신에서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쁨에 찬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 소식들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에게도 널리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장에 대해 다른 교회들에게 계속해서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자랑은 인간의 재능과 업적이거나 혹은 사도들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었다. 이 자랑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에서 하신 바로 그 일을 선전하고 있다(고후 8:1).

이에 바울은 본 서신을 시작함에 있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살후 1:3-4).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가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라는 말은 감사하지 않고 달리 어찌할 수 없다는 주관적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감사의 이유에 대한 강조는 객관적인 필연성으로 동반된다. ‘이것이 당연함은에서 당연함’(αξιον)은 일종의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나타내는 관형적인 형식, 언제 어느 때나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합당하고 올바른 우리의 본분이다는 제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감사의 형식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후 2:13)는 구절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

앞선 서신을 받아 본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을 지나치게 칭찬했다고 하며 자신들의 겸양을 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 계속해서 성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칭찬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도들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으로 부단히 증가하고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2) 고난 가운데서 성장한 데살로니가 교회

앞선 서신에서 사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깊어지고 그들의 사랑이 자라고 넘치기를 위해 기도한 바 있다(살전 3:10, 12; 4:10).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들이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가 되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세 가지 미덕 중에서 믿음과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미덕을 언급하고 있다. 나머지 한 가지 미덕인 소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해 5절에서 다루고 있다.

본문에서 더욱 자라고’(υπεραυξανει)라고 번역된 단어는 발육이 알차고 넘친다는 의미로 커다란 떡갈나무와 같이 건강한 나무가 성장하는 모습처럼 결여된 부분 없이 완전한 모양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나무의 성장과 같은 내적이고 유기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또한 풍성하다’(πλεοναζει)는 말은 부단히 증가한다는 의미로 홍수가 땅을 범람하는 것처럼 널리 퍼지고 확장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완전한 믿음은 건강한 나무처럼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들의 외적인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홍수처럼 널리 퍼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핍박을 당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언이었다.

앞서 디모데가 처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바울에게 보고할 때에도 매우 고무적이었지만 최근의 소식들은 더욱 바울을 기쁘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전에는 그들의 믿음이 훌륭한 상태였음에도 그 가운데서는 고쳐야 할 부족한 점이 더러 엿보이고 있었다(살전 1:3; 3:10). 그러나 지금 그들의 믿음은 더욱 성장하여 있었다. 앞선 편지에서 사도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되기를 기도했었는데(살전 3:12) 이제는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살전 1:4)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확실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가리켜 사도들은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살전 2:20)으로 삼을 정도였었다.

때문에 본 서신에 와서 그들의 믿음 생활에 대해 사도들은 침묵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살후 1:4)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랑은 몇 년 뒤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고린도후서, 56년경)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후 8:1-5 참고).

 

3)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특별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을 두고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를 사도들이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것이 데살로니가 사회에서 풍성하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믿음은 박해와 다양한 형태의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인내는 결국 소망의 인내혹은 인내하는 소망’(살전 1:3)과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발전되기 마련이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은 현재 바울이 머물고 있는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앞선 편지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때 하나님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모교회로 전도나 분산에 의해 형성된 교회들을 포함하는 유대인 교회를 지칭하고 있었다(살전 2:14). 회심하기 이전에 바울이 박해했던 하나님의 교회역시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1:13; 고전 19). 그러나 이제 복음이 전파되면서 또 다른 하나님의 교회들이 발생했는데 특별히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교회들은 이방인의 교회들을 가리킨다(16:4).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εκκλησια)라는 용어는 칠십인역이 이스라엘의 종교 공동체에 적용했던 단어였다. 이 용어는 처음에 예루살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붙여졌던 바로 그 호칭과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 지역에서도 회심한 성도들에게 이 단어가 쉽게 전용되었다. 이로써 과거 이스라엘 공동체인 에클라시아는 이제 온 세상에 널리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는 교회를 대신하는 용어가 되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인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통해 계속해서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핍박과 환난 중에서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는 정적이거나 평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역동적이며 생산적이었다.

바울은 앞선 편지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의 증거라고 한 바 있다(살전 1:4). 따라서 고난 가운데서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진보는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비록 여기에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고난가운데서도 성장하고 있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성도들이 받는 고난의 성격과 하나님의 공의

 

1) 핍박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진보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맹백한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또는 의로운 심판을 나타내는 명백한 표상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나타내 보이고 있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통해 분명히 증거되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전 1:5)고 정의하고 있다. 본문에서 ’(ενδειγμα)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과 그들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실한 증표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1:28 참고).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고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고난은 영광을 향하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8:31-38; 24:26; 12:24-43). 바울 역시 많은 고난을 통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14:22),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아야만 그의 영광도 함께 받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8:17). 이처럼 고난과 영광, 환난과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난을 받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받는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광이 약속된 보장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은 상태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신앙의 진보를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불굴의 정신을 보상으로 부여하신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표(ενδειγμα)가 된다.

이 표는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포할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 공의를 명백하게 나타내실 것이라는 증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심판의 표라고 말한다.

 

2) 고난 가운데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스리시고 그의 주권이 기쁘게 인정되고 복종되어지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환난을 즐겁게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앞선 서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이야말로 그들의 믿음이 순전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임을 밝힌 바 있다(살전 2:14; 3:4, 4). 환난 중에 오래 참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한다(살전 2;12). 이런 점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한 바 있다(살전 5:4, 5, 9).

이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신 뜻, 즉 고난을 통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로 여기신다는 뜻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죄인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순종에 보응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받는 성도들의 고난은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받는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기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고난을 통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 속에 더 나은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뜻으로 신자들 속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파괴하신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떤 박해나 환난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여겨질 정도로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영생의 가치를 보여주시며 아울러 고난을 수단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할 것을 배우도록 하신다. 이런 이유에서 신자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영생에 대한 확증()으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비록 하나님께서 핍박자들에게 어느 정도 활동의 범위를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은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하며 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1:28). 이때 하나님은 성도들이 받는 핍박을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개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이것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편견과 분노와 신랄함이 더해지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현상이다. 이들 핍박자들은 자신들의 이기심에 눈이 멀어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갈수록 악한 박해를 가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이 악한자들의 악행을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박해까지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합당하다고 간주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의 유업을 이미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그들을 적절하게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4.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강림

 

1)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의 근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하며 감수하는 모습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따라 그들이 천국의 영광에 합당한 자들로 여겨졌다고 선언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사실이 그러하다면)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신다”(살후 1:6)고 말한다. 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이 구절은 만일 사실이 이러하다면이라는 의미의 접속사인 에이페르’(ειπερ)로 시작하고 있다.

이 접속사는 신자들이 참는 환난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확실한 표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환난받는 신자들에게는 안식을 주시고 신자들로 하여금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상성(condignity)의 가치라기보다는 적합성(congruity)의 가치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고난은 신자들을 강건케 하여 주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범죄한 자들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원칙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 때문에 성도들의 정당함을 공개적으로 입증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의 그 자체이시기에(32:4; 대하 19:7)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도 공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실 때에도 공의로 시행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은 먼저 자기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죄의 대가를 담당케 하셨으며 그 십자가 사실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구원케 하셨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3:36). 이때 하나님의 공의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보복적이다. 즉 신자들로 환난받게 하거나 신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신다(16:33; 살전 3:9). 다른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보수적(報酬的)이다. 하나님은 환난받는 신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때 안식은 진리를 위한 용감한 투쟁으로 인하여 그들이 겪었던 모든 역경으로부터의 휴식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하나님과 결합한 신자들은 악한 세상과 결합되지 못하게 됨으로써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환난받게 한 자를 환난으로 갚아주심으로써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될 때 하나님은 박해와 고난을 가한 이들에게 반드시 그보다 더 심한 박해와 고난을 받게 하신다.

악인들이 자신들의 행악에 대해서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직 벌하시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심판을 기대하는 가운데 침착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곧 무서운 파멸로 뒤바뀌고 말게 될 불경건한 자들의 일시적이며 근거가 박약한 행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그 행악자들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들의 악행을 증거하는 증거로 작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공의

환난과 고난을 받은 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위로와 안식을 주신다. 이에 바울은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7)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안식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라고 심판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는 날로 해석하는 베드로의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과 자기 동료들을 데살로니가 신자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안식에는 두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이 신자들은 고통을 통해 강건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에 예속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안식을 누린다는 점이다(살후 1:5). 다른 하나는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때 그릇된 것은 곧게 되고, 심판이 선포되며, 악이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누리는 안식이다.

따라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안식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증거를 가지고 이 땅의 현상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한 자의 악의, 잔인함, 권세, 교만 등을 보게 됨으로써 정의가 실패한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반대를 받고, 조롱당하며, 배척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며, 투옥 당하고, 고문당하며, 살해당하는 고난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없다. 마치 현상적으로는 악한 자가 번영하고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늘 나라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도록 허용하신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 악한 자들에게 내리실 것이다.

바울과 사도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우리와 함께라고 덧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 역시 각자 자기가 당할 고난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거기에 합당한 영광의 보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4:9-13).

결국 파루시아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16:25)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정한 응보와 보상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루시아는 악한자들을 심판하시며 성도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주신다는 점에서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 주님의 강림

하나님의 공정한 응보와 보상은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살후 1:7) 성취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주님의 파루시아를 가리켜 나타나실 때’(εν τη αποκαλυψει)라고 묘사함으로써 주의 강림을 계시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고전 1:7; 벧전 1:7, 13; 4:13). 문자적으로 이 단어는 포장을 벗긴다는 의미이며 바울은 이 말을 가리웠던 진리의 나타남(a disclosure of divine truth)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2;5; 16:25; 고전 14:6, 26; 고후 12:1, 7; 1:12; 3:3).

따라서 주님의 나타남은 재림시에 있어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40:5)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성취된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그동안 주님을 가리우고 있는 휘장이 그때에 제거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서 장엄하게 내려오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살전 4:16). 이 계시적 사건은 구약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즉 신의 현현(顯現)과 같은 동질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현상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현현 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문구이다(3:2; 19:6-20; 29:6; 66:15-16; 50:3; 97:3). 여기에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라는 구절은 그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를 뜻하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은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103:20). 그리고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시중드는 존재들이다(7:10; 8:38). 주님께서도 강림하실 때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13:41-42; 25:31. 14:19 참고).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모으실 것이다(13:27).

특히 불꽃 중에라는 추가적인 바울의 묘사는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66:15-16)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 예수라고 함으로써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인 ’(ינודא, κυπιος)를 예수님께 연결시키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과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κυπιος)로 호칭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최후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 자신임을 가리킨다.

이로써 바울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의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언한 것처럼 주님은 많은 천사들에 옹위되어 친히 강림하신다. 이 그리스도의 강림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시는 강림이다. 이것은 단순한 묘사가 아닌 사실이며 현실이다. 불덩어리가 화염을 튀기면서 사면 팔방으로 솟아 올라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다. 오히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하늘과 땅이 피하여 없어졌다고 묘사한다(20:11). 베드로 사도는 그날에 우주가 큰 불에 타서 완전히 소멸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벧후 3:7, 11-12).

이러한 묘사들은 주의 재림시에 있을 심판 때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날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을 초월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재림이 패역한 자들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강림은 모든 불의의 종말을 고하며 신자들을 핍박하던 이들에 대한 심각한 보응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불의를 제거함으로써 주의 거룩한 나라가 새롭게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영광

 

주 예수의 강림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나타나는 신현(神顯)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주의 강림은 하나님의 심판 사건을 지시하며 그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이다(2:5). 그때까지 하나님은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하늘에 숨겨 놓으시지만 그날이 오면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실 것이다.

 

1) 심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의 강림

예수님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하시는데 이때 천사들은 예수님의 공의와 자비의 사자들로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법정으로 소환하고 택하심을 받은 신자들을 따로 구별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 심판의 위엄과 확실성을 암시한다. 그 불꽃은 그리스도 앞에서 진행하며 모든 원수들을 불태울 것이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살라지고 그 뜨거운 열에 녹아 내리게 될 것이다.

이 불은 시험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행위를 시험하게 된다. 이 불은 단련하는 불로서 성도들을 단련시켜 순결에 참여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복을 차지하게 한다. 반면에 이 불은 소멸하는 불로서 악인들을 소멸시킨다. 이 불꽃은 그 날에 쭉정이로 발견될 모든 사람들을 관통하고 능력으로 그들을 불태워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심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를 주는 것으로 묘사한 다니엘의 묵시에서 유래되고 있다(7:13, 14). 주님께서는 인자됨을 인하여아버지가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다(5:27; 8:38. 10:42; 17:31 참고).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79:6). 신약에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17: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생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그분의 피조물들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망했던 바로 그 지식을 가리킨다(4:1, 6; 살전 4:5).

이 두 부류는 복음을 들은 일이 없는 이방인들과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각기 다른 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구원의 말씀에 접하지 못했던 눈 먼 이방인들은 여기에서 암시되지 않았고 고의로 복음에 복종치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살후 1:4, 6, 9)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될 자들은 고의로 복음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한 부류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좀더 정확하게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로 규정된다. 이때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란 바울 시대에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53:1)라는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성취로 간주해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이방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2:9). 특별히 여기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고난과 연관지어 볼 때 사도들의 마음 속에는 형벌을 받을 대상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박해하는 바로 그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나님과 복음을 미워하는 자들을 포함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에게는 실제로 종식되지 않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3:16). 영원한 멸망이라는 말은 실존으로부터의 사라짐이 아니라 주의 얼굴과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제외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며 끝이 없는 죽음을 뜻한다. 이것은 영원한 삶이 주의 얼굴을 앙모하는 복과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통, 주님과 가까이 함, 주님과 함께 있음을 포함하는 것(22;4; 17:15; 5:8)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마치 에서가 그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에서 나타나고 있는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27:39)이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벌인 영원한 멸망은 그리스도로부터 떠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영원히 추방된 영원한 실존이다.

이 상태를 가리켜 시편 기자는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73:27).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으로부터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바 그의 능력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추방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의로운 심판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영광

주님의 얼굴과 그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무서운 결별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그날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바울은 버림받는 자들이 당하게 될 영원한 멸망에 대한 장황하고 경이로운 표현과 달리 상대적으로 성도들이 받을 것에 대해서는 안식을 얻게 된다는 간략한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살후 1:7)은 참으로 의외의 표현 방식이다.

악인들이 당할 형벌과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받게 될 보상에 대해서 바울은 그다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바울은 그런 보상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을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께 돌리고 있다. 이때 성도들은 주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목격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서 종말과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 비추어 종말의 환난과 주의 날을 보게 될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관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전략적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인다. 때문에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를 입고 예수를 전폭적으로 믿는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담긴 의미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신자들이 누리게 될 안식조차도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영광 안으로 흡수되고 있다.

그가 오실 때에라는 구절은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96:13)에 묘사된 신현(神顯)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이때 재림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으시는실제적인 주인공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의 성도들이 시중드는 모습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시는 것(살전 3:13)으로 묘사된 바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성도들’(αγιοις)이라고 지칭하는 것(1:7; 고전 1:2)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살전 4:7).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켜 성도들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을 가리켜 성도들이라고 불렀다(고전 16:1; 고후 9:1; 9:13). 후에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받아들여진 자로서 성도들이라고 불렀다(2:19). 이들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이방 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성도들이라고 불렀다.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는 이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계실 때 당하신 고난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결합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나라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게 되는 날 성도들을 모두 불러모아 자신과 동일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이 사실은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세상의 모욕에 내맡겨져 있는 성도들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지만 그때 가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성도들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게 되신다. 여기에서 성도들모든 믿는 자들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때 성도들은 기쁨과 놀라움그리고 감사와 이상히 여김이라는 경이로운 심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게 부어주신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찬양을 드리게 된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걸작품에 속한다(2:10). 따라서 모든 믿는 자들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기술이 담겨 있어서 그것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심지어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3:10)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그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기이히 여김을 받는다’(θαυμασθηωαι)는 묘사는 구약적 배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놀랍게 여겨서 찬송함을 의미한다(8:1-9; 68:35; 92:4). 그리고 마침내 그 찬송은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으로 성취된다.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이 복음의 증거를 통해 성취된다는 점에서 또 한번 감격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는 말처럼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성도들’, 모든 믿는 자들은 바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증거를 그들이 받아들이고 믿은 신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그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바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정당성을 확증해 주는 증인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사실은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 속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6. 주께서 받으시는 영광과 성도들의 각성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 강림하시는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믿는 자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기 위해 그 앞에 모인 성도들은 주께서 받으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8:19)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따름으로써 이 땅에서 박해를 받는 신자들에게 있어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살후 1:7)는 승리와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 주님에게는 죄인 되었던 사람들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의 희생을 통해 구속함을 받고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주와 더불어 영광을 누릴 것이고, 주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부름받은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약속되어 있다. 성도들로 하여금 결국에 가서는 변화될 것이라는 이 사실은 신자들이 현재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며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은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안에서 장차 영광 받으실 것을 소망하며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 기도는 미래를 현재와, 그리고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비전을 현재 있는 현실과 각각 연결시키고 있다.

주의 날에 있을 영광의 완성은 지금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하나님은 현재의 거룩한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의 거룩한 삶과 장래의 영광을 위해 성도들을 부르셨다(살전 2:12; 4:7; 5:24). 이에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살후 1:11)라고 기도하고 있다.

앞선 편지에서도 바울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 예수 앞에서 사도들이 자랑하고 즐거워할 존재라는 확신을 표명한 바 있다(살전 2:19-20).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들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는 말과 같이 하나님은 기꺼이 그들을 합당하게 받아주실 것이다.

사실 심판의 날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기에 합당한 자들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된 것이다. 이 은혜는 신자들의 행위에 선행하기 때문에 그 뒤에 따르는 신자들의 행위에 따른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모든 과정에 있어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가치 없고 하찮은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써 그들을 합당하게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미 신자들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부름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신자들 안에서 시작한 신앙의 건축을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해당된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모든 선량한 결심과 모든 믿음의 행위를 말하며 누구의 목적과 누구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고 해석한 바 있다. 비록 그 행위의 주체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선을 기뻐함모든 믿음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해서 그들 안에서 능력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5:22-23).

사람은 자신의 힘 또는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부르시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을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조차도 행동에 옮길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선에 의해 고무된 결심과 믿음에서 비롯된 역사를 행함에 있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God`s good pleasure)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 속에 창조하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선한 결심믿음에서 비롯된 역사가 성취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능력, 즉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2) 영광을 받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자신의 백성을 불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살전 2:12) 하나님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를 성도들에게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 행위들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제공해 주신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미 신자들 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고 성도들의 선한 결심믿음에서 비롯된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을 기도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영광에 대한 것이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아야 하듯이(살후 1:10) 주님은 성도들의 현재의 삶의 방식 가운데서도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사야는 일찍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43:21)고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찬송은 입술만의 찬미가 아니라 성도들의 삶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바울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2)고 기도하고 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 받으시는 영광과 현재 성도들 가운데서 받으시는 영광 사이에는 원칙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사자들이다(고후 8:23). 따라서 교회의 회원인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명예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해 주님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고,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시인할 때 주의 이름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그리스도와 연합함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성도들의 진정한 인간됨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은혜는 성령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미한다. 특별히 바울은 너희도 그 안에서란 표현을 통해 주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 있는 밀접한 친교를 강조하고 있다(17:10, 22).

따라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주님의 역사는 성도들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반사케 한다. 이 영광은 인간의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기준에 따라 주어지게 된다. 이 은혜는 은혜의 원천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어진다(살전 1:1).

종말이 오기 전에 심지어 현재에도 이러한 이중적 영화(glorification)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 할지라도 놀라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은혜와 영광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영광의 수단이며 영광은 은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은혜가 없다면 영광도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성도들은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벧전 4:16). 그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손상시키지 않는 생활을 함으로써 실현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는 말씀처럼 성도들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현재 여기에서 한 걸음씩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은혜의 계시와 공급에 근거하고 있어야 하며 이 은혜는 결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분리되지 않는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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