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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가서 6장>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9. 14. 09:30

본문

아가서 6장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5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남녀의 인격적인 만남에 근거하여 솔로몬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과 신분의 격차를 뛰어 넘은 솔로몬과의 혼인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축하(5:1b) 속에서 부부로 거듭 태어난 내용을 보여주면서, 술람미 여인이 부부가 되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지난날들의 과정을 돌아보며 현재 자신의 모습과 대조되었던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완숙한 여인으로 성숙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심적 갈등을 탐구 모티프’(search motif)와 문학적 복선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5:2-6:3).

이 과정에서 술람미 여인은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까지의 성장을 통해 에덴동산의 회복을 구현해야 한다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5:10-16).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은 여자들 중의 여자로서 남자들 중의 남자인 솔로몬을 남편으로 맞이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가서 6장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여인들의 합창(6:1) :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과 함께 솔로몬을 찾아 나섬으로써 솔로몬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애정이 표현된다.

술람미 여인의 독창(6:2-3) :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쉽게 대할 수 없는 솔로몬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이 온전히 솔로몬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솔로몬의 극적인 등장(6:4-9) : 혼인식 이전에 있었던 솔로몬과의 갈등을 묘사함으로써 혼인식에 이르기까지 복잡했던 술람미 여인의 심적인 부담들은 홀연히 등장하는 솔로몬의 웅장한 모습으로 모두 사라지게 되고 동시에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사랑이 다시 생동감 있게 그려짐으로써 대 반전이 시작된다.

 

이어 혼인 이후 변화된 술람미 여인을 통해 온전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부 생활의 아름다움이 묘사되는데(6:10-8:4)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여인들의 합창(6:10) : 아침의 붉은 햇살이 떠오르는 모습으로 술람미 여인의 신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선포한다.

술람미 여인의 노래(6:11-12) :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왕의 수레를 타고 있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왕국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존귀한 위치에 서 있음을 노래한다. 이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이동성 침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술람미 여인의 모습(3:6)을 재조명해 주고 있다

여인들의 합창(6:13-14) : 예루살렘의 모든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며 솔로몬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열정적인 사랑이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이어 술람미 여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노래하며 신비한 부부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솔로몬의 노래(7:1-9), 사랑의 고백과 함께 신비한 합일을 이룬 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답가(7:10-8:4)로 전개된다.

 

1. 솔로몬을 향한 술람미 여인의 애정 확인(6:1-3)

 

6:1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6:2 나의 사랑하는 이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필자역)

여인들의 답변(합창)

너의 사랑하는 이가 어디로 갔을꼬?

여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아.

너의 사랑하는 이가 어디로 향하여 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그를 찾아보리라.

 

술람미의 노래(독창)

나의 사랑하는 이가 그의 동산, 향나무 화단으로 내려갔구나.

그 동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거두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들 사이에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시가서 문서인 아가서의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볼 때 아가서는 서술문을 주로 사용하는 드라마도 아니며 더욱이 대범하게 듬성듬성 간결체로 기록하는 역사도 아니다. 아가서가 시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가서를 대할 때 실제 사실과 비유로 묘사되는 주인공들의 심적인 상태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주인공들의 말을 실제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술로 보아야 할 내용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혼재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앞장에서 술람미 여인을 찾아 온 솔로몬이 애타게 구애를 하였지만 술람미 여인이 뒤늦게 반응하게 되자 솔로몬이 가버리고 난 후 그때서야 술람미 여인이 사라진 솔로몬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묘사된 내용(5:2-6)은 실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술람미 여인이 성안에서 파수꾼들에게 매를 맞는 내용(5:7)도 자신의 심적 상태에 대한 비유적인 이야기를 기술한 것과 같다.

특히 파수꾼들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가리켜 마치 술람미 여인이 초야에 처녀성을 잃은 것에 대한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고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혼인식을 마친 신부가 첫날밤에 사라져버린 신랑을 찾아달라고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함께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도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5:9).

이러한 아가서의 시문학적 특성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6:1)는 합창단의 노래조차 엉뚱한 상상력의 산물로 말미암아 본의를 놓치게 된다.

이 합창단의 노래는 앞서 솔로몬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고백에 대한 응답이다. 바로 앞에서 술람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자들 중의 남자인 솔로몬의 성품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5:10-16). 따라서 이 합창단의 노래는 술람미 여인이 잃어버린 신랑을 함께 찾아 나서자는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이 합창단의 노래는 술람미 여인이 묘사한 솔로몬의 품성에 대해 동의하면서, 술람미 여인이 묘사하고 있는 솔로몬의 인품에 대해 동의를 표하는 인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이러한 신문학적 흐름은 술람미 여인이 점차 솔로몬에게 매우 가깝게 다가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다음절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의 답변에서 찾을 수 있다. 술람미 여인은 거침없이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6:2)라고 말한다.

앞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찾아 나선 것은 실제로 없어진 사람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탐구 모티프’(search motif)를 통해 묘사한 것이다. 분명히 합창단의 질문에서도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5:9)라고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의 과정을 통해 술람미 여인은 자신에게 있어서 남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을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솔로몬은 자신에게 있어 남자들 중의 남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합창단이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6:2)고 노래한 말의 요지는 술람미 여인의 고백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함을 표하기 위함인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표현은 술람미 여인의 내적인 경험을 겉으로 보여주고 하는 시문학적 복선 기법이기도 하다. 즉 아가서는 이러한 복선 기법을 사용하여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으며 자신 또한 솔로몬에 대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일깨워가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한 남자의 아내로 완성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6:2)라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는 이제 기꺼이 솔로몬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온전히 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동산으로 내려갔다는 말은 그림 언어로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이었다. 일반적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동산은 성으로부터 약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데 동산으로 갈 때는 내려간다고 말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는 올라간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에서 그의(그 남자의) 동산은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가리켜 잠근 동산’(4:12) 또는 나의 동산’(5:1)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용어이다. 이 사실은 이 동산이 계단식 모양의 향기로운 꽃밭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묘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글 개역성경은 대부분의 영어역 성경을 따라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양떼라는 말이 없이 먹으려고’(תוערל)라는 표현만 있다. 먹는다’(הער)를 단어를 취하여 양떼를 먹이며라고 의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 먹는다’(הער)는 단어는 사귄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 두 가지 의미는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먹는다는 행위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귀는 차원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 먹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되기도 하며 사귄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양떼를 먹이며라는 식의 의역보다는 그의 동산, 즉 향기 나는 꽃밭으로 장식된 동산에 솔로몬이 사귐을 나누려고술람미 여인을 찾아 온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 사실은 바로 이어 등장하는 백합화를 꺾는구나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앞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2:1)라고 하였고, 솔로몬 역시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있는 백합화’(2:2)라고 묘사한 것처럼 백합화는 술람미 여인을 상징하는 그림 언어이다.

따라서 솔로몬이 백합화를 꺾는다는 표현은 이 단어가 거둔다또는 취한다’(to gather)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거둠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소속을 밝히고 있는데 앞서 술람미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는구나”(2:16)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거기에서는 솔로몬이 자기에게 속해 있다는 점을 앞세운 반면에 여기에서는 자신이 솔로몬에 속해 있음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이 내용을 반전시켜 곧바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6:3)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두 번의 표현이 어느 일방적인 소속을 말하지 않고 상호적임을 반영하고 있다 할지라도 앞에서는 그가 나에게 속한 점을,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속한 점을 각각 앞세움으로써 그녀가 이제 애정과 헌신으로 솔로몬에게 완전히 소속되었고 그가 술람미 여인을 소유한 것처럼 그녀 또한 솔로몬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서는 일부일처 이외에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랑도 언급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표현은 위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상징하는 동산에서 사귀며, 또한 술람미 여인을 상징하는 백합화를 거두어 모으는 것과 연결됨으로써 결국 술람미 여인이 앞서 묘사했던 심적인 갈등(5:2-7)을 극복하고 이제는 서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되었으며 솔로몬의 바람이 마침내 술람미 여인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처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아내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보다 심도 있게 강화시켜주고 있다.

2. 흠 없는 신부에 대한 노래(6:4-9)

 

6:4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6:5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6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6:7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6: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6: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필자역)

솔로몬의 등장(독창)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고우며

깃발들을 든 군대처럼 위엄이 있구나.

네 눈이 나를 압도하니 그 눈을 내게서 돌이켜다오.

네 머리채는 길르앗산에서 뛰어 내려오는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씻는 곳에서 올라온 암양 떼 같으니

모두가 쌍둥이를 낳아 새끼 없는 것이 없구나.

네 뺨은 네 너울 뒤에서 석류 조각 같구나.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순진한 비둘기는 오직 하나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외동딸이니

그녀를 낳은 자에게 귀하도다.

여자들이 그녀를 보고 복되다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녀를 칭찬하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성숙한 여자와 남자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는 말씀처럼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건설하고자 했던 온전한 형태의 가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처녀 술람미 여인은 이 점에 있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성장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녀가 느끼고 있던 모든 심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5:2-7). 이 사실을 증명하듯이 완숙한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노래는 술람미 여인의 성숙한 인격적 성품과 자태를 찬미하고 있다.

이 단락은 앞서 솔로몬의 와스프(Wasf, 4:1-5, 8-15)의 주제와 은유가 상당히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등장하는 와스프는 비슷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와 주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특별히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술람미 여인이 다른 모든 여인들에 비해, 심지어 최상류층인 궁중의 여인들보다도 월등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6:8-9). 따라서 이 와스프는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찬사와 헌신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6:4)로 시작되는 솔로몬의 찬사는 술람미 여인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6:1)라는 표제어는 술람미 여인을 여자들 중의 여자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한 가정을 이룸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반복적으로 알리는 모티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 아가서는 탐구 모티프’(search motif)를 통해 변화되어가는 술람미 여인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3:1-5; 5:2-8; 6:2-3). 이제 아가서는 그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최고 등급의 찬미를 등장하게 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이 완성된 여인임을 최종적으로 인증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2:16)에서, 그리고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6:3)에서 확인된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속했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어여쁨을 디르사 같다고 하며 그 고움을 예루살렘 같다고 묘사한다. 이 두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로 술람미 여인의 어여쁨과 고움이 모든 여자들을 대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디르사는 기쁨, 달콤함, 매력적인의 뜻을 가진 이름으로 주전 880년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기 전까지는 예루살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상의 성읍이었다.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샬롬에서 나온 말인 완전하다, 안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 온전히 아름다운 곳’(50:2; 2:15)이었다. 이 두 성읍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을 대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나아가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깊은 위엄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종종 군대가 깃발을 펼쳐들고 전진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엄하고 당당하다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심지어 그 모습, 즉 군대가 행군하는 엄위한 광경은 한편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이러한 표현은 혼인식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 술람미 여인이 타고 온 솔로몬의 침대행렬이 얼마나 장엄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3:6-11). 비록 이 표현이 술람미 여인이 아닌 디르사나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라 할지라도 결국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은 술람미 여인에 대한 찬사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불리고 있는 여자들 중의 여자로 성숙한 술람미 여인은 이미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아름다움과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다 더 정교하게 묘사하기 위해 솔로몬은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6:5)고 할 정도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때 포도원지기였던 처녀 술람미 여인은 이제 솔로몬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당당한 신부로 성장한 것을 솔로몬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속하였다”(6:3)고 노래하면서 온전히 솔로몬에 속해 있다는 술람미 여인의 어엿함이 결코 솔로몬의 위용에 압박을 당하여 어쩔 수 없는 비굴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통해 성장한 결과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술람미 여인은 더 이상 포도원지기도 아니며 어머니의 품안에 갇혀 있는 나약하고 가녀린 처녀도 아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여자들 중의 여자로서 그리고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로 성숙하여 당당하게 솔로몬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묘사는 술람미 여인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이제 솔로몬과 함께 한 가정, 나아가 한 나라를 세워나가는 의젓하고 당당한 아내라고 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혼인을 통한 남자와 여자의 지위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는 것은 가정의 경영자이며 통치자가 되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돈독한 위치에 서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 이제 솔로몬의 와스프(Wasf)가 다시 등장하면서 아가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6:5b-9).

솔로몬은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의 어여쁨과 고움을 상세하게 표현한다(이와 관련해 아 4:8-15의 와스프와 비교하라). 술람미 여인의 머리털은 길르앗으로부터 누운 염소 떼 같으며, 치아는 배열이 매우 고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희고 깨끗하다. 그 뺨은 너울 속에 가려져서 살짝 보이는 석류 한 쪽 같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러한 솔로몬의 노래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술람미 여인에게 얼마나 깊이 속하여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을 육체적 관점, 즉 남자들의 성적 본능을 자극하는 정도의 미적 감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은위엄을 갖춘 대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왕후, 비빈, 시녀와 같은 궁중의 여인들을 예로 들어 비교함으로써 아무리 그들이 상류층 출신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최상의 교육을 받고 세상의 지혜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결코 술람미 여인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과 비교하기 위해 등장하는 궁중 여인들은 실제로 솔로몬의 여인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무리 많은 궁중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여자들 중의 여자인 술람미 여인 하나와 결코 비교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 기법으로 등장할 뿐이다.

실제로 솔로몬에게는 많은 궁중 여인들이 있었다.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왕상 11:3)고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배도의 길을 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이곳에 언급된 궁중 여인들이 솔로몬의 여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또한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그 여자의 어머니에게 소중한 딸이며, “여자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고 축복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녀를 칭찬한다고 하는 솔로몬의 표현을 볼 때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내용(1:5-7)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찬미는 상당히 과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과장이 섞인 표현들은 솔로몬이 상당수의 왕비, 비빈, 시녀들을 언급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다”(6:9)라고 하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보아야 한다.

아가서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은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던 존재였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을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귀하고 소중한 딸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후와 비빈들로부터도 칭송을 받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의 부조화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더욱 아름답고 존귀하게 높이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으로 표현한 바 있는데(1:4) 여기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왕후들보다 더 귀한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나의 완전한 자는 단 하나뿐이다라는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가장 완전한 자’(5:2), 즉 자기의 전부이며 자기 자신처럼 여기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하였던 감동과 동일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복선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가리켜 아담’(םדא)이라고 부르는 언어유희에서 암시되었던 내용(5:10)에 대해 솔로몬의 마땅한 응답이기도 하다.

 

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6:10)

 

6: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필자역)

여인들의 축복(합창)

이는 누구인가?

동이 트는 것처럼 비추고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정결하며

깃발들을 세운 군대처럼 위엄 있는 이.

 

이제 장면이 바뀌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혼인식을 마친 이후에 시작된 가정생활을 통해 발휘하게 되는 불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6:10-8:4). 아가서는 이러한 흐름의 변화를 독자들이 새롭게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혼인식을 알리는 합창단의 소리였던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3:6)와 흡사한 내용의 웅장한 합창으로 시작하고 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6:10)라는 합창단의 웅장한 소리는 앞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6:4)에 대한 인증 절차와 같다.

솔로몬은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라고 하며 술람미 여인을 난공불락의 도성으로 비유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그 솔로몬의 노래를 이어받아 여기에서 합창단은 훨씬 웅장한 스케일로 천체의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을 앞세워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누구인가?’(תאז ימ)라는 질문(3:6을 참고하라)으로 시작되는 본문은 점점 더 웅장함을 강조하기 위한 점진적 과장법으로 진행된다. ‘아침 빛은 어둠이 거치고 새벽이 열림으로써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게 하며, 보름달의 밝은 빛은 여인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המח는 밝은 이 아닌 따스한 을 강조한다)처럼 정열적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기치를 벌인 군대들’(תולגדנכ המיא)은 하늘에 가득한 군대로서의 천상의 무리들인 별들을 가리키며 결코 그 어떤 침략도 용납하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새벽에서 보름달로 그리고 태양으로 점점 고조되면서 마침내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로 술람미 여인의 존재가 확장되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디르사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깃발을 나부끼는 땅위의 군대들(이 표현은 난공불락의 도성들을 가리킨다)로 묘사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거부할 정도로 확장되고 웅장하며 장엄하게 확장됨으로써 오히려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찬미가 지나치게 겸손하게 표현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는데 이로써 상대적으로 솔로몬의 찬미(6:4-9)에 대한 진실성을 인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가서는 합창단의 노래에 등장하는 천체들에 대한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새벽’(רחשׁ)은 당시에 시간을 알리는 단위가 아니라 일종의 천문학적 용어로 새벽의 여신이라든지 밝은 기호가 표시되는 새벽과 같이 우주를 구성하는 천체의 일부였으며, 달과 태양과 별들 역시 천상의 존재들로 당시에는 신적 존재를 상징하거나 신앙의 대상인 으로 섬겨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가서는 이러한 신적 존재 또는 신들로 여겨지는 천체들에게 그 어떤 인격적인 경외감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것들이 아무리 웅장하고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결코 신격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천체들을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품성이나 인격의 지배 아래 놓아두고 있다. 동시에 술람미 여인을 여신으로 치켜세우지도 않는다.

나아가 이 합창단의 노래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지나치게 축소되었으며 오히려 술람미 여인의 진면목이 이렇다는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1:5-6)라고 하면서 자신은 검고 거칠고 구박을 당하며 포도원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묘사한다. 반면에 합창단들은 술람미 여인이 새벽빛처럼 또렷하고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열정적이며 솔로몬이 말한 난공불락의 도성들조차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천상의 군대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가서는 이 한 절의 노래를 통해 술람미 여인 자신의 자존감(1:5-6)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고 있으며, 바로 앞에서 말한 솔로몬의 찬미(6:5-9)조차도 술람미 여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평가 절하되어 있음을 밝힘으로써 여자들 중의 여자가 상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명쾌한 선을 긋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상상하는 정도에서 일컬어지는 여성에 대한 찬미 또는 와스프(Wasf) 정도로서는 감히 넘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자들 중의 여자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요구하고 있다.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를 제외하고서는 이만한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여자를 인류 역사상 찾을 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합창단은 기꺼이 술람미 여인에게 이처럼 찬사를 보냄으로써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2:23)고 한 아담의 노래가 얼마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이로써 아내의 위치가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여성의 존엄성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고 있다.

 

4. 완숙한 여인 술람미 여인의 노래(6:11-12)

 

6: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6: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필자역)

술람미 여인의 노래(독창)

내가 골짜기의 열매들을 보려고,

포도 넝쿨이 무성한지 석류나무가 싹이 났는지 보려고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갔도다.

내가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암미 나디브마차들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아가서에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가서의 배경은 포도원이 있는 한적한 시골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거쳐 에덴동산을 넘나들고 있다. 실제로 아가서는 에덴동산 모티프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이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나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예루살렘은 에덴동산의 또 다른 모형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가서가 매우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술람미 여인의 포도원이나 솔로몬의 동산조차도 아가서의 목가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만든다. 나아가 아가서는 포도원이나 동산으로 상징되는 완숙한 술람미 여인의 여성상을 제공함으로써 그 아름다움뿐 아니라 생명의 잉태와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강력하게 활성화시키고 있다.

앞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는 말속에 담겨 있는 여성의 경이로움에 대해 합창단의 노래로써 설명한 것(6:10)처럼 이제 술람미 여인은 완숙한 여성으로서 생명의 잉태와 탄생을 예고하기 위해 그 자신이 직접 동산으로 입장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6:11-12). 언급한 것처럼 이 장면들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발생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가서가 시문학적 특성으로 짜여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의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 새 생명의 잉태와 탄생을 위한 위치에 서 있는 술람미 여인으로서는 여자들 중의 여자라고 하는 최상의 여인상으로 변화되어 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2:7)와 병행하고 있는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3:5)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준비가 될 때까지는 사랑의 열정을 일깨우지 않겠다는 술람미 여인의 바람처럼 마침내 솔로몬과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서 골짜기의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의 싹이 났나 보려고,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나 보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라고 묘사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술람미 여인이 호도 동산에 왜 내려가야 했는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표현 속에는 술람미 여인이 무언가를 예감했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기대하고 내려갔다는 뉘앙스가 주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이미 예감하거나 기대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동산으로 내려갔음을 암시한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는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문맥의 흐름에 따른다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의 사랑을 주려고 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5장에서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5:1a)라는 솔로몬의 노래에 대한 기대감의 연속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술람미 여인은 이제 사랑하는 남자인 솔로몬에게 자기의 사랑을 주고 그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랑의 사귐, 즉 사랑 나눔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고 있는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7:12)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간절한 사랑의 열정은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6:12)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부지중에’(יתעדי אל)라는 표현은 술람미 여인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솔로몬과의 사랑 나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다. 그녀는 무의식중에서라도 솔로몬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이런 열정을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해석은 참으로 난해해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조차 서로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다. 본문의 수레(תובכרמ)는 복수형으로 마차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러 말들이 끄는 많은 무리의 수레들, 즉 왕이나 고관들이 행차할 때 수행되는 여러 수레들처럼(삼상 8:11; 삼하 15:1) 술람미 여인의 행차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마차들로 보아야 한다. 이 마차들은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한 수레, 즉 병거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반면에 이 마차들을 묘사하는 내 귀한 백성으로 번역된 암미 나디브’(בידנ ימע)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암미나디브’(히브리 원문에서는 띄어 쓰지 않는다)를 단순히 고유명사로 처리한다면 내 영혼이 나를 암미나디브의 마차들 가운데 이르렀다또는 내 영혼이 나를 암미나디브에 있는 마차들 가운데 이르게 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KJV). 이때 암미나디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아미나답으로 바꾸어 읽는다(한글 흠정역). 하지만 아미나답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이 문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되지도 않는다.

이보다는 좀 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암미나디브’(בידנ ימע)나디브 암미’(ימע בידנ)로 단어 순서를 바꾸어 해독함으로써 존귀한 내 백성들또는 내 백성은 귀족이다는 의미로 번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는 암미 나디브임미 나디브로 음역을 바꿈으로써 왕자다운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는 식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새번역, 공동번역, NIV).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해독 방식이 본문의 뜻을 충분히 전해주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에 대한 해결의 열쇠는 암미 나디브를 솔로몬에 대한 별칭으로 보는 방법이다. 사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서로에 대하여 별칭으로 자주 호칭해 왔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나의 사랑’(יתיער)으로 불렀으며,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나의 사랑하는 이라는 특별한 호칭인 또띠’(ידוד)로 각각 부르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또띠’(ידוד)암미’(ימע)는 모두 나의 삼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단어들은 특별히 사랑하는 남자를 부르는 애칭이기도 했다. 따라서 술람미 여인이 또띠’(ידוד)를 이곳에서 암미’(ימע)로 바꾸어 부른다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와 연관지어 다음에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바드 나디브’(בידנ תב ; 왕자의 딸 / 존귀한 자의 딸)라고 부름으로써(7:1)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암미 나디브’(בידנ ימע)로 부른 것에 응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암미 나디브’(בידנ ימע)존귀한 나의 사랑또는 왕같은 나의 사랑또는 나의 왕자님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칭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용어를 술람미 여인이 앉아 있는 이 마차들을 부르는 별명인 고유명사로 여긴다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즉 이 문장을 나의 존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차들, 혹은 내 사랑 왕자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차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렇다면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6:12)라는 본문은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나의 사랑 왕자님’(또는 존귀한 나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마차들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6:12)로 번역할 수 있으며 본 문장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한다. 특히 이러한 묘사는 이집트의 사랑 노래에도 자주 표현되는 내용으로 준마들이 끄는 마차에 왕과 왕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를 태우고 백성들 앞에서 행진함으로써 그 둘의 사랑을 공개하며 과시하는 장면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 문장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서라도 그러한 사랑의 열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큼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의 이름, 나의 사랑하는 이는 왕이다는 이름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솔로몬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의 원인이며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열정적으로 불태우게 하는 이가 솔로몬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합창단이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라고 인증한 것(6:10)과 동일한 문맥을 이루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2:23)는 아담의 노래에 술람미 여인이 가장 잘 어울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예루살렘 여인들의 환호(6:13-14)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6: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필자역)

여인들의 노래(합창)

-, -비 술람미 여인아

-, -비 우리가 너를 좀 보자꾸나.

 

솔로몬의 노래(독창)

왜 너희는 마하나임의 춤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을 보려하느냐?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함을 표현한 술람미 여인의 노래(6:11-12)에 대해 예루살렘 여인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한글 개역성경의 613-14절은 영어 역본에서는 13절로 되어 있으며 히브리 성경에는 이 내용이 71절로 되어 있다. 이 합창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은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인아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6:13)며 술람미 여인이 노래한 사랑의 열정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환호하고 있다.

본문에서 돌아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בישׁ)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는 용어로 계속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은 히브리어 음가로 볼 때 연속되는 -, -’(יבושׁ יבושׁ)가 두 번 연속해서 등장함으로써 박수갈채가 동반된 군중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소리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들은 박수와 함께 -, -소리를 내면서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담겨 있는 술람미 여인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아마도 그 모습은 술람미 여인을 가운데 두고 예루살렘 여인들이 두 줄로 원을 그리면서 술람미 여인을 향해 박수갈채와 함께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독려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다음에 등장하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6:14)고 말하는 솔로몬의 말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하다.

이 장면에서 여인들은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하며, 점점 그 열정이 훨훨 타오르기를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술람미 여인의 내면에 담겨 있는 사랑의 열정이 얼마나 활기차게 피어오르고 있는가를 강조함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일시적이지 않으며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어오르고 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자야’(תימלושׁה, 하슐람미트)라고 부르는 호칭은 심미적인 언어유희가 담겨 있다. 슐람미트(תימלושׁ)라는 단어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쉘로모(המלשׁ)의 여성형으로 솔로몬의 여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반면에 이 여성형에 정관사(ה)를 붙임으로써 고유명사로 부르고 있는데, 이러한 기법은 좀 전에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암미 나디브’(בידנ ימע)라 호칭하는 언어유희와 병행을 이룬다.

이 장면은 잠시 후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바드 나디브’(בידנ תב)라고 호칭하는 것(7:1)과 어울려 독자들에게 잔잔한 미소를 선물하고 있다. 이러한 아가서의 기법은 진지함 가운데서도 진부하지 않게 하는 문학적 요소에 충실한 것으로 아가서에 대한 흥미를 더욱 북돋아주고 있다.

이어 등장하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 여자를 보려느냐”(6:14)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치 않다. 여인들이 자문자답을 하기 위한 말일 수도 있으며 혹은 솔로몬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아마 솔로몬을 화자로 보는 것이 문맥의 흐름에 더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은 의미상으로 두 무리가 회전하면서 추는 즐거운 춤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15:20; 32:19; 21:21; 삼상 29:5). 아마 이 춤은 아가서의 독자들에게도 매우 익숙하였을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겉옷을 들어 올리고 양치는 목동이나 포도원지기가 입는 가벼운 옷을 입고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인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 그들의 흥을 돋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가서의 흐름을 볼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할 때 이 말의 요지는 술람미 여인의 내면에서부터 타오르는 사랑의 열정이 마치 춤을 추듯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들이 계속해! 계속해!”라는 의미의-, -’(יבושׁ יבושׁ)를 외치면서 필요 이상으로 반응을 하거나 그로 인해 술람미 여인의 내면에 담겨 있는 사랑의 열정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이 고조된 분위기를 억제함으로써 이 장면을 숙연하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보인다. 사랑의 열정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화려하고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하나임의 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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