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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중간시대 요약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1. 29. 09:12

본문

2편. 중간시대

 

1장. 서론

 

1. 중간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남 유다 멸망 ~ 예수님 탄생 전까지(주전 587 ~ 5년)

2) 포로귀환 ~ 예루살렘 붕괴까지(주전 538 ~ 주후 70년)

3) 말라기 선지자 ~ 세례 요한까지(말 4장 ~ 마 1장)

 

2. 명칭

 

1) 교회사적 관점: 신구약중간기

2) 구속사적 관점: 침묵의 세기들(Silent Centuries)

3) 은혜적 관점: 암흑시대

 

3. 역사적, 정치적 배경

 

1) 동방의 지배권이 서방으로 이동: 동방의 페르시아제국에서 서방의 헬라와 로마제국으로 세계패권질서가 이동되었다.

2) 동 서양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었다.

3)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가 통용되고 중간사문헌들이 기록되었다.

 

2장. 포로가 된 유대인들

 

1. 바벨론 유수

 

1) 주전 605년, 597년, 587년 세 차례에 걸쳐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가 되었다.(왕하 24:14-16, 25:11-12). 이주자들은 점차 그들의 새로운 바벨론의 집을 즐기게 되었고 그들의 농경과 상업상의 근면함으로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2) 그러나 이들은 국제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하였다. 이때 유대인들은 선지자(다니엘, 에스겔 등)들과 장로, 서기관 등의 지도하에 율법을 배우고 회당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다.(겔 37:1-14, 느 8:1, 13:1)

3) 바벨론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지방에서 사용된 셈족언어로 수리아족의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페르시아

 

1) 주전 535년~330년까지 유대인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예레미야(주전 626-587)의 예언대로 주전 538년에 고레스(Cyrus)왕은 유대인 포로귀환을 허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2)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인의 귀환이 세 차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전 538년 고레스왕 때(스1:5, 2:67), 주전 457년 에스라가 인도하였고, 주전 444년에는 느헤미야가 인도했다. 인구는 약 5만 명이었고 제사장은 4,229명이었다(스 2:2-67)

3) 귀환한 백성들은 대부분 유대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부근에 정착했다. 이 거주지역을 예후딤(Yehudim)이라 부른다. 그러나 거의 폐허가 된 지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의 생활은 곤궁했다.

4) 유대인들은 귀환한지 일곱째 달부터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거주자인 사마리아인, 아라비아인 암몬족 및 여타 족속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고레스왕은 공식교서를 내려 주전 537년에 성전건축이 중지되었다. 그후 15년 도안 백성들은 농사와 가옥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5) 점차 형편이 안정되면서 백성들 사이에 종교적열정이 식어갔다. 이때 주전 520년경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가 나타나 백성들의 무뎌진 영적 상태를 깨우치며 성전재건을 다시 시작하여 주전 515년에 완공했다. 성전재건의 총지휘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요슈아였다.

6) 이후 주전 457년(성전재건후 약 57년의 역사기록이 스가랴서에는 생략되어 있음) 학사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1세(주전465-424)의 허가를 얻어 약 1,700명의 백성들과 함께 귀환했다. 이때 황제는 에스라가 요청한 물품과 자금을 그의 내탕고에서 내어 주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여자들과 통혼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홀로 기도하며 백성들의 죄를 고백했다. 그는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아내들을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7)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야간순행을 했는데 성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건축을 시작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대리자격인 산발랏과 사마리아주민, 기타 인접 족속들의 방해(느2;10, 4:2)에도 불구하고 2개월 만에 완공했다.

8)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상호 협력하여 백성들의 신앙과 생활을 증진시켜 나갔다. 특히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느 8:4-8) 느헤미야는 결혼풍습을 개혁하고(느13:25), 안식을 범하는 것을 금했다(13:21). 그는 페르시아로 귀환하였다가 왕으로부터 재차 휴가를 얻어 예루살렘에 왔는데 이때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제사장 엘리아십의 무관심 속에 성전 안에 방을 꾸민 암몬사람 도비야의 방을 성전 뜰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 도비야 일행은 그리심 산으로 도피하여 그곳에 신전을 건립하였고, 사마리아오경을 만들었다. 주전 408년 대제사장 요하난은 자기 동생을 살해했다.

9) 아닥사스다 2세(주전404-358)때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리비아출신의 아밀타우스는 애굽에서 페르시아군대를 물리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후 약 40년간(주전378-340)동안 애굽은 자유를 누렸다. 주전 401년에는 왕의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

10) 주전 350년 아닥사스다 3세(주전358-340)가 애굽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수리아가 반란을 시도했다.

11) 페르시아 왕조의 마지막왕인 다리오 3세는 주전 334년 애굽을 재정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으로 평가받는 알렉산더대왕이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3장. 헬라제국

 

1. 마케도니아 왕국

 

1)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 필립왕의 주도로 하나의 동맹체제를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이 동맹의 힘으로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쳤다.

2) 필립왕은 헬라(그리스)문화에 대해 상당히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들 알렉산더를 어릴 때부터 그리스문화를 배우게 했다. 알렉산더는 13세 때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맞이했다.

 

PF. 그리스문명

- 그리스문명은 주전 2,000년경 9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크레타섬에서 발전했다. 대표적 유적들은 궁전벽화들로서 ‘미노아의 미녀’가 유명하다. 그리스문명은 소아시아(터키 서부)의 이오니아 문화로 발전했다. 중심도시들은 에페소스(에베소), 서머나(이즈밀), 트로이였다. 이오니아인들의 언어인 테오테린(theorein:관찰하다)과 히스토레인(historein:탐구하다)이 훗날 theory(이론)과 histiry(역사)라는 학술용어를 낳았다. 서양 문학의 창시자인 호메로스(Homer, 주후 700년경)와 페르시아전쟁을 기록한 역사학자의선구자인 주전 5세기경의 헤로도투스(Herodotus)도 이오니아 출신이다.

- 주전 500년 이후 그리스문명은 이오니아에서 아테네로 바뀌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를 위해 주전 440년에 신전을 세웠다. 이 여신은 처녀였기 때문에 ‘파르테논’(parthenos, 처녀신의 집)으로 불리어졌다.

 

PF. 트로이전쟁(Trojan War)

- 주전 1,194년부터 약 10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Iilliad)와 오디세이(Odyssey)에 의해 유명하다. 한동안 역사성이 의심되었지만 1870년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함으로서 실제 역사임을 증명했다.

-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바다 건너 스파르타 왕국을 방문했다가 왕비 헬레나의 미모에 반해 함께 도망을 쳐 트로이로 돌아왔다. 이에 메넬라우스 왕은 아킬레스와 오디세이 등 그리스 영웅들과 함께 트로이로 진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전쟁의 영웅들 중 아킬레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용맹을 떨쳤지만 전사했다. 반면에 오디세이는 헬레나의 처녀시절 약속한 맹세로 인해 타의로 전쟁에 참여하여 토로이 목마계획을 세우고 직접 트로이성에 침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전쟁을 떠나기 전 아들 텔레마코스를 친구인 멘토에게 맡겨 가르침을 받게 했는데 여기서 조언자라는 뜻의 ‘멘토’(mentor)라는 말이 생겼다.

 

PF. 그리스 철학

-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는 하나의 진리를 얻기 위해 많은 질문과 답을 제기하는 변증법적 탐구방법을 가르쳤고, 플라톤(Plato)은 이데아론, 즉 눈에 보이지 않은 초월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스승 플라톤에 반해 현실적 철학을 표방했다.

 

2. 알렉산더(Alexander, 주전 356-323)

 

1)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았다. 그는 1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국가들을 정복했다. 특히 주전 335년에 테베를 항복시킨 이후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연합체제를 구축했고, 드디어 주전 334년부터 아시아정복을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

2) 그는 맨 처음 트로이에 도착하여 페르시아의 지방영주들과 귀족들을 패퇴시키고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해 나갔다. 334년이 지나기 전에 그의 수중엔 에베소, 밀레도, 할리카낫수스가 떨어졌다. 이듬해에는 소아시아 남부지역이 정복되었고, 드디어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와 마주쳤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에 비해 수배에 달하는 군사 수에도 불구하고 패전했다. 다리오는 도망을 쳤다.

3) 알렉산더는 다리오를 추격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지중해 동편 연안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시돈, 비블로스, 아라두스 등이 싸움한 번 하지 않고 백기를 들었지만 섬에 자리 잡은 두로는 끝까지 저항했다. 알렉산더는 두로를 공략하기 위해 해변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둑을 7개월에 걸쳐 쌓았다. 주전 332년 두로는 마침내 바다 물 가운데 던져졌다(겔26:4-5, 12-14). 8천명이 살해되었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어 저항하던 가자도 두 달 뒤에 두로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음으로 알렉산더는 항복하기를 거절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유대인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4)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는 애굽을 침공했는데 페르시아를 증오하였던 애굽인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아몬신전에서 바로의 법적인 아들로 선포되었다. 331년부터 그는 두로를 능가하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별도의 거주지를 허락받고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누리도록 특혜를 받았다.

5) 331년 10월 1일, 앗수르로 진격한 알렉산더는 그곳에서 백만 대군을 거느린 다리오 왕을 다시 만났다. 페르시아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6)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번엔 바벨론으로 향했다. 총독 바재우스는 순순히 항복을 하고 그 성의 통치자로 유임되었다. 이어 엘람의 소도인 수사로 진격하고 엄청난 보물을 획득했으며 이후 325년까지 전 페르시아지역을 모두 정복하였으며, 이후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로 들어갔다가 323년 바벨론으로 귀환했다.

7) 바벨론에서 그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국제결혼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새로운 헬라문화를 이식시키기 위해 70여개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8) 그러나 그의 이런 융합정책은 곳곳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제결혼을 반대하던 마케도니아를 비롯, 오랜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리스사람들이 도주하기까지 했으며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9) 주전 323년 그는 남부 아라비아, 아프리카, 서부 유럽을 점령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3. 알렉산더 사후

 

1) 알렉산더 사후 헬라제국은 네 명의 장수에 의해 분리되었다. 마케도니아는 카산더장군이,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와 수리아지역은 리시마쿠스 장군이, 바벨론을 비롯한 페르시아지역은 안티고누스 장군이, 이집트는 헬라인 출신의 톨레미장군(프톨레미왕조)이 통치하였다.

2) 톨레미 장군의 수하였던 셀류커스가 장군의 명을 받고 안티고누스를 침공하여 그를 추방한 뒤, 자신이 바벨론의 왕위에 올랐다. 이에 격분한 톨레미는 셀류커스를 징벌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이 바로 150년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3) 알렉산더 사망(주전 323년)후부터 주전 200년까지 유다는 이집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4장.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

 

1. 주전 320년에 톨레미 장군은 애굽을 침공했다. 이때 예루살렘도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주전 315년에 잠시 안티고누스에게 복속되었으나 주전 312년 가자전투에서 톨레미가 승리함으로서 다시 애굽에 복속되었다. 주전 305년에 톨레미 장군은 애굽의 왕이 되어 프톨레미 1세(주전305-285)가 되었다.

 

2. 주전 301년 입수스(Ipsus) 전투에서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었다. 이때 셀류쿠스(주전 305-280)가 안티고누스를 대신하여 수리아의 왕이 되었다.

 

3. 프톨레미의 애굽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물론 그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하긴 했지만 상당수는 프톨레미에 의해 이주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능했기에 애굽에서도 자치권을 누리며 살았다. 프톨레미 2세(주전283-247)는 세금납부에 1등인 유대인들을 존중하여 일체 그들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유대인사회는 애굽에서도 대제사장이 통치하였다.

 

4. 점차 애굽은 헬라세계의 학문과 문화예술 등 지적인 중심지가 되어 갔다. 프톨레미왕조는 본토인보다 그리스인들을 더 우수한 민족으로 여겨서 그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박물관과 도서관에는 연간 14,000명의 학생들이 드나들었다. 동물원과 식물원이 세워지고 생체해부와 천문연구기관이 설립되었고, 과학적 발전이 일어났다.

 

5. 알렉산더 대왕 사후부터 주전 200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조금씩 헬라문화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애굽과 수리아의 오랜 전쟁기간동안 양진영의 군대와 말발굽에 짓밟혀 수난을 겪었다.

 

6. 특히 프톨레미 4세(주전221-203) 때에 유대인들은 혹독한 박해를 당했다. 이후 유대인들은 주전 198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가 스코푸스 장군이 이끄는 애굽군과 요르단 계곡의 파네아스에서 전쟁을 벌일 때 수리아군을 도와줌으로서 수리아군이 승리하는데 일조를 한다. 전쟁에 승리한 안티오쿠스는 로마의 주선으로 애굽과 정략결혼을 통해 평화협정을 맺었고 자연히 팔레스틴은 수리아에 복속되었다.

 

7. 이후 애굽왕조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프톨레미 7세(주전145-117)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5장. 셀류커스 왕조

 

1. 셀류쿠스 니카터(주전 312-280)는 원래 알렉산더 휘하에서 주전 321년 바벨론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주전 316년에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러다 톨레미 장군의 도움을 받아 주전 301년 입수스 전투 때 애굽의 프톨레미 1세를 도와 그로부터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그러나 그는 애굽에 등을 도림으로서 기나긴 150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2. 셀류쿠스 1세는 안디옥을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알렉산더를 모방하여 그들에게 투항한 지역들을 헬라화하여 약 40개의 성읍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훗날 사악하고 부패한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3. 팔레스틴을 수리아에 복속시킨 사람은 안티오쿠스 3세(주전 222-187)이다. 그는 애굽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팔레스틴을 복속시켰으며,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건설한 성읍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켰다. 가장 많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진 시기가 이때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의 평화는 길지 못했다. 주전 190년 점점 세력을 확장하던 로마군과 서머나에서 만나 격전을 벌였지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후 소아시아의 상당 부분의 영토가 로마로 넘어갔다. 그리고 약 5,000달란트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에 왕은 나라 안의 모든 보물들을 압류하고 강탈했다. 드디어 신전에 있는 재물을 강탈하다가 어느 날 한 신전에서 살해당했다.

 

4. 일명 에피파네스(혹은 에피마네스, 미친 사람)로 불려지는 안티오쿠스 4세(주전175-163)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강압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매우 사악한 왕이었다. 그는 팔레스틴의 도시들마다 체육관과 신전, 경기장, 대중목욕탕들을 세웠고, 예루살렘에는 체육관을 세워 유대인들의 신을 조롱했다. 이때 오니아스 3세가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안티오쿠스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헬라식인 야손으로 개명하고 440달란트의 뇌물을 바쳤다. 이어 뇌물을 바친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을 물려받았다. 두 대제사장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마카비 2서 4:34-35).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는 성전기물을 약탈하고 유대인의 야웨를 모욕하고 일체의 신앙행위를 금하였으며 항거하는 유대인들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그는 또 네 차례에 걸쳐 애굽과 전쟁을 벌였다.

 

5. 이때의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참고: 마카비 2서 7:1-5)

 

6장. 마카비 가문

 

1. 에피파네스의 학정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이때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반란을 주도했다. 처음엔 산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전을 일삼다가 하시딤(Chasidim)이라 불리는 율법의 열성분자들이 가세하자 점점 세력이 커져갔다.

 

2. 마타디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Judas, 주전 165-161)가 지도자가 되었다. 유다는 수리아를 상대로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에피파네스는 본국에 리시아스를 남겨두고 동부지역으로 가서 페르시아군과 아르메니아군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주전 164년 리시아스는 유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보병 46,000명, 기병 7,000명을 이끌고 유다를 급습했으나 유다는 이를 격퇴했다. 드디어 유다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회복했다. 다시 종교의 자유가 쟁취되었고 새로운 제사장이 임명되었다. 이어 유다는 네게브에 거주하는 아랍계열의 베드윈 족속들을 물리쳤고, 영토를 에돔과 필리스티아(블레셋)까지 확장했다.

 

3. 1차 전쟁에서 패한 리시아스는 곧 10만의 보병과 2만의 기병, 32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침공을 했다. 유다는 급히 예루살렘으로 도피했다. 바로 이때 본국에서 리시아스의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나타나 리시아스는 급히 유다와 협정을 맺고 귀국해야 했다. 이협정으로 인해 유다는 명목상으로는 수리아의 통치를 받았지만 완전한 자주 독립을 쟁취했다.

 

4. 독립 후 하시딤은 유다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다. 이때 아론의 후손으로 새로운 제사장이 된 야킴은 하시야킴은 하시딤의 편에 섰다. 이에 유다가 야킴을 축출하자 야킴은 수리아의 도움을 받아 유다를 축출했다. 이후 유대사회는 마카비파와 하시딤파, 헬라파의 세 그룹으로 재편되었다. 마카비우스의 다섯 아들 중 요나단과 시몬은 사막지대로 피신했고 유다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주전 160-142)이 계승했다.

 

5.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다시 빼앗긴 도시들을 하나씩 탈취했다. 이때 수리아는 데메트리우스와 에피파네스의 아들인 알렉산더 발라스(Balas)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요나단은 로마를 등에 업은 발라스를 지원하여 승리하는데 일조하고 발라스에 의해 유대의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었다. 요나단은 유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어 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그는 안티오쿠스 6세의 휘하장군인 트리포와 협상을 하던 중 살해당했다.

 

6. 요나단에 이어 마타디아스의 마지막 생존자인 둘째 아들 시몬이 뒤를 이었다. 그는 먼저 헬라파와 하시딤파, 마카비파를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주전 142년 수리아와 협정을 맺고 정치적 독립을 약속받았는데 유대인들은 이 해를 독립의 해로 정하고 있다. 시몬은 자국의 주화를 만들어 경제적 독립도 이루었다. 마카비 1서는 시몬의 통치하던 때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시몬은 주전 135년 왕위에 욕심을 낸 그의 사위 프톨레미에 의해 살해되었다.

 

7.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을 하던 30여년의 기간은 조그만 도시국가인 예루살렘이 오랜 속국의 신세를 벗어나 독립된 왕국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성전은 이교도들로부터 정화되었고 대제사장과 세습군주의 전통을 되살렸으며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기초가 되었다.

 

7장. 하스모니안 왕조

 

1. 프톨레미의 쿠테타로 인해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주전135-106)는 급히 도피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대제사장의 직임을 받았다. 그는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7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나라의 안정과 독립을 지켜나갔다. 나아가 사마리아와 이두매까지 군사원정을 감행해 영토를 솔로몬시대처럼 확장했다. 한편 하시딤파는 그들끼리 분파를 계속하여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로 나뉘었다. 힐카누스는 이런 하시딤을 홀대하여 국내적인 긴장이 초래되었다.

 

2. 힐카누스에 이어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주전 104-103)는 잠시 아내 살로매를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다가 2년 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를 감금하여 굶어죽게 만들고 형제들을 살해하는등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사두개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으며 친헬라적인 정책을 펼쳤다.

 

3.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Alexandra)가 왕위에 올라 시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Yaneus, 주전 103-76)와 결혼하고 그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바리새파와 수차례의 충돌을 빚었고 바리새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6,000명을 살해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라가 다시 왕위에 올랐으며(주전 76-67), 이어 아리스토불루스 2세(주전 67-63)가 반란을 성공시켜 왕위를 승계했다. 이때 이두매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Herod Antipater)가 대제사장 힐카누스와 연합하여 왕을 감옥에 감금하자 이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로마는 폼페이(Pompey) 장군을 파송하여 유대사회에 개입을 하게 된다. 폼페이 장군은 유대에 도착하여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고 성안에 갇힌 아리스토불루스를 3개월의 공격을 감행 한 끝에 예루살렘성을 함락한다. 성은 완전히 불태워졌고 12,000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힐카누스 2세는 로마의 도움을 받아 대제사장과 통수권자가 되었으며 안티파터는 주전 43년 암살당하기까지 유대총독으로 통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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