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교회사-로마제국과 예수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1. 29. 09:13

본문

3편. 로마제국과 예수의 나라

 

1장. 로마제국

 

1. 초기 로마

 

1) 1세기 로마 역사가 베르길리우스(Virgil)는 대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장군 아이네이스가 라티움에 와서 로마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도시 왕국으로 바꾼 것은 주전 753년 로물루스(Romuslus) 형제에 의해서다.

2) 초기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한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들은 광물을 잘 다루어 금속공예에 뛰어났고 그림과 도예에도 탁월했으며, 로마 귀족들이 입던 ‘토가’(toga)는 이들의 복식이었다.

3)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한 것은 주전 326년 ‘삼니움’과의 50년에 걸친 전쟁을 승리하면서부터이다. 로마는 연합도시들에 일정 부분 자치권을 부여하긴 했지만 도시마다 개별적으로 차별화된 조약을 맺어 그들이 공통된 이해관계로 단결하여 로마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2. 공화정

 

1) 주전 509년부터 왕정이 폐지되고 300명의 원로원과 두 명의 집정관에 의한 공화정이 시작되어 주전 1세기의 황제 통치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2) 비록 로마의 체제는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대의민주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3) 주전 387년 갈리아족(Gallia, 골)이 침공했다. 갈리아족장은 이때 로마 귀족들을 붙잡아 그들의 긴 수염을 잡고 희롱했다. 이때 로마를 구한 사람이 집정관 카밀루스(Camillus)였다.

4) 전쟁 이후 로마는 귀족과 평민들간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카밀루스는 두 명의 집정관을 귀족과 평민의 대표로 선발하는 중재안을 성공시켰다. 주전 365년 전염병으로 카밀루스가 죽자 로마시민은 그를 제2의 로마설립자로 추앙했다.

3) 로마는 자유민들만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으므로 인문학을 ‘Liberal Arts'로 불렀다. 로마의 저력은 그리스를 능가하는 교육열이었다.

4) 로마의 가장 경쟁국은 카르타고(Carthage)였다. 고대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으로는 나일강 하류 삼각지, 초생달지역인 하란평야, 메소포타미아지역,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오늘날 튀니지)였다. 카르타고는 유ㅜ럽진출을 꾀하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로마와 대결할 수 밖에 없었다. 주전 264년부터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3차에 걸친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이 그 유명한 포에니(Punic=페니키아)전쟁이다.

5) 공화정은 라틴어로 res(사물)와 publica(공공)의 합성어로 원래 공공재산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the Republic이 되었다. 즉 리퍼블릭은 국가가 한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공동재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로마의 대의민주주의 체제인 공화정은 초법적인 군부 독재자들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 이들은 대개 정권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승리한 장군들이었다.

 

3. 독재정

 

1) 로마공화정은 주전 100년경 마리우스(Marius)와 술라(Sulla)라는 두 독재자들에 의해 마감되었다. 마리우스는 로마시를 공격한 게르만 야만족들을 막아내어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시민들로부터 ‘제3의 로마설립자’로 추앙된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군에서 출세하여 집정관이 되었지만 출신배경으로 인해 원로원의 조롱을 받았고 이에 저우건을 잡았을 때 독재정치로 그들에게 보복했다. 마리우스의 실정에 힘입어 술라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주전 86부터 10년동안 로마를 통치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측근들과 가족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때부터 정적들을 잔인하게 보복하는 잘못된 전통이 시작되었다.

2) 술라 이후에는 세 사람이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하는데, 크라수스는 재정을,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장악했고, 카이사르(시저, 케자르)는 정치를 담당했다. 크라수스는 경제를 통해 로마를 지배했다. 그에게 돈을 꾸지 않은 정치가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젊은 장군인 카이사르를 지원했다.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도 군사적 용맹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동부의 파르티아제국을 치러갔다가 포로가 되어 죽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한편 3년에 걸친 아시아와 아프리카 원정을 통해 로마국경을 동쪽 유프라테스강가지 확장하여 명실상부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총 1천 개의 도시를 정복했고, 22명의 왕들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와의 권력투쟁에서 실패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망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카이사르는 주전 100년 수도 로마의 외곽에서 태어났다. 주전 5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서북유럽 갈리아(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원정에 성공하였고, 로마를 위협하던 게르만족을 굴복시켰다. 9년의 원정기간동안 800개의도시와 300여 부족을 항복시켰다.

3) 크라수스 사망 후 권력이 두 사람의 대결로 압축도자 원로원은 자신들에게 유익한 폼페이우스를 최고지도자로 선택하고 갈리아 원정 중에 있던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주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4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인이 로마로 쳐들어가는 반란을 일으켰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도망쳤고 카이사르는 로마에 무혈입성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으나 이집트 왕 프톨레미 13세는 그의 목을 잘라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집트 원정을 끝내고 귀환하는 길에 카이사르는 폰토스왕국을 점령하고 로마원로원에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짧은 전문을 보냈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러나 주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던 그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주동이 된 암살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4) 카이사르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기원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10개월을 12개월로 바꾸고 1년을 365.25일로 삼았다. 또 4년에 한 번씩 2월에 하루를 더하는 윤년을 사용했다.

5)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정세는 세 사람에 의해 권력이 분산되었다. 이를 두고 “제2차 삼두정치”라고 부른다. 카이사르의 부관출신으로 군사령관이 된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주전 83-30), 집정관이자 북아프리카의 통치자인 레피두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사랑받는 양자로서 암살자인 브루투스를 처형하고 서방지역(이탈리아, 스페인, 갈리아)을 관장한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 주전 63-주후14)가 주인공들이었다. 주전 41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낳았고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허락도 없이 그녀와 아들에게 많은 영토를 할당해 주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주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서부 해안도시 악티움에서 결전을 벌이고 이들을 격퇴했다. 두 사람은 자결했다.

 

4. 황제정

 

1) 아우구스투스

- BC 509년부터 400년이 넘도록 로마는 공화정( the Republic)의 나라였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44)의 집권으로 군부 독재정권이 출현하였다. 이에 원로원들은 카이사르의 손에서 로마를 구하겠다며 암살 음모를 꾸몄다.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던 카이사르는 수십 명의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그중에는 그가 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도 있었다. 마치 드라마 ‘무신’에서 몽고의 침략에 맞서 항복을 거절한 채 끝까지 항거하던 실세 김준이 양아들 임면의 칼에 찔려 암살당한 것처럼 카이사르도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그 유명한 “에트 투 브루테”(브루트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원로원에 세워진 폼페이우스 입상 아래 쓰러져 죽었다.

-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지자 시민들은 술렁거렸다. 암살자들은 로마를 구했다고 소리쳤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분위기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로 바뀌고 드디어 암살범들을 처단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암살자들은 급히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인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3~30)와 옥타비아누스(Gaius Caesar, BC 63~ AD 14)가 그리스의 빌립보까지 추격해 그들을 처형하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두 사람은 즉시 로마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로마는 세 사람에 의해 권력이 나누어졌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지역(발칸반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을 관할했고, 집정관인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지역(이탈리아, 스페인, 갈리아)를 관하랬다. 이를 두고 ‘제2차 삼두정치’라고 부른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실각하고 안토니우스는 사랑하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지만 결국 주전 31년 그리스 서부 해안도시 악티움에서 패배하고 최후를 맞았다.

- 드디어 로마의 권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BC 27년에 로마 역사상 첫 황제가 되어 이후 AD14년까지 약 40년간 로마를 통치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지극히 존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이때부터 이 이름은 로마 황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는 로마 26개 군단의 통수권을 가진 절대 권력자였다. 그의 통치영역은 실로 방대했다. 유럽의 브리튼(영국), 이베리아(스페인), 갈리아(프랑스), 아가야(그리스), 달마티아(크로아티아) 등과, 아시아의 소아시아(터키), 시리아, 아르메니아, 팔레스티나(이스라엘, 요르단)과, 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이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들 지역은 분봉 왕이나 총독을 두어 관리했으며, 이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지상의 주인’(Dominus)의 대접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통치자였다. 그로 인해 로마는 번영하고 부흥했다. 제국 내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농업과 상업 등이 안정화 되었으며 로마법을 공포하고 제국내의 체계와 질서를 갖추었고 헬라문화와 로마문화를 잘 조화시키고 실용적으로 운용하였다. 또 그는 제국내의 모든 도시들을 정비하는 일을 열심히 추진했다. 모든 도시들마다 신전과 회의장, 도서관, 공연장, 경기장, 기념문, 목욕탕을 건설했고, 도시를 계획적으로 정비하여 중앙에는 직로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아고라(agora)시장을 건설하여 이곳에서 시민들이 상업 거래와 토론을 자유롭게 행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워낙 대리석 건물을 좋아해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일러 ‘평화시대’(Pax Romana)라 부른다. 그의 이런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후임 황제들은 대부분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 AD 14년 아우구스투스는 76세의 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기 전 그는 아내를 향해 “만약 인생의 연극에서 내가 맡은 배역을 잘했고 즐거웠다면 당신의 박수로 무대를 내려가게 해 주오. 리비아, 이제 안녕이고 우리의 결혼을 기억해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불행히 그는 아내 리비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에게는 양아들인 티베리우스가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황제의 자리는 이 양아들에게 돌아갔다.

2) 티베리우스

-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Tiberius, 14-37)는 58세에 재위에 올랐다. 이 때문인지 그는 불만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잔인한 살인마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는 거의 매일 재판을 열고 판결을 내리는 것을 즐겼는데 모든 고소에 대해 죄목도 자신이 붙이고 사형판결을 수시로 내렸다. 정적들은 물론이고 무고한 시민들과 심지어 어린이까지 사형판결을 받아 목에 베이거나 산 채로 테베레 강물에 내던져졌다. 늘 의심이 많아 곳곳에 정보원들을 배치하고 몰래 남들의 얘기를 엿들은 다음 밤새 분노를 사이고 다음날 이들을 붙잡아 재판을 열고 사형선고를 내린 다음 즉시로 처형했다. 살인은 황제가 즐기는 유희에 가까웠다.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서 빨리 티베리우스가 죽기를 기다렸다.

- 이 잔혹한 살인마는 세금도 증액시켜 시민들의 생활을 압박했다. 로마제국의 백성이면 모두 사유재산이나 수확물을 팔아 로마의 주화를 구입하여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때 대중들이 사용한 주화는 황제의 초상이 담긴 데나리온(denarius)였다. 그는 자신의 초상이 담긴 주화의 한면에는 ‘황제, 티베리우스,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글귀를 넣었고 반대편에는 ‘최고 사제’라는 글귀를 넣었다. 티베리우스는 공용화폐인 이 주화를 특별한 곳에서 제조했는데 그곳은 로마 최고의 신 주피터의 아내인 주노 여신을 모신 ‘모네타’(moneta)라는 신전이었다. 이 이름에서 머니(money)가 유래했고 오늘날 돈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 동전을 보이면서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타당하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주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동전의 주인공이 바로 티베리우스 황제이다. 유대인들은 형상을 금지한 가르침과 배치되는 이 주화를 몹시 혐오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따로 통용되는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를 질문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카이사르와 야웨의 것을 구분하여 하늘나라가 근본적으로 세상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 티베리우스의 충복이었던 유대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당시 티베리우스는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그는 자신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그는 로마시를 떠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 평안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나폴리 아래의 아름다운 카프리 섬이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자식이 없어 양자를 삼았는데 그가 세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른 칼리굴라이다. 칼리굴라는 늙은 양아버지가 잠든 사이 조용히 다가가 베개로 티베리우스의 얼굴을 눌러 질식사시켰다.

3) 칼리굴라

- 살인자가 살인자를 낳는 것인 양 또 하나의 살인마가 25살의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칼리굴라(Caligula, 37-41)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였다. 족벌로 보면 그는 양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친척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때 칼리굴라는 나이가 어려 겨우 처형을 면했다. 이후 그는 생존을 위해 일부러 바보짓을 하며 살았다. 군인들은 바보 같은 그를 놀리기 위해 그에게 한 쪽 발에만 긴 장화를 신기고 뛰게 했는데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고 모두 파안대소하며 즐거워했다. 이때 ‘긴 장화’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는데 그 이름이 바로 칼리굴라이다. 이 모욕적인 별명은 칼리굴라를 더욱 악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의 이름을 칼리굴라라고 부르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서 처형시켰다.

- 그는 아버지에 이어 학살극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죄인을 야수에게 던졌을 뿐이었다. 그는 기행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자신이 마치 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복장을 기괴하게 꾸몄으며, 신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신하들은 그런 그에게 굽실거리며 아부를 하고 그를 진짜 신처럼 추앙하고 받들었다.

- 그러나 방탕한 황제로 인해 로마의 창고는 날로 비어갔고, 마침내 41년에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황제의 근위대원들이 젊은 학살자의 침실로 쳐들어가 무려 서른 군데나 찔러 살해하였다. 재위 4년 만에 또 하나의 살인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4) 클라우디우스

- 클라우디우스(Claudius, 41-54)는 칼리굴라 황제의 삼촌으로 집정관이었다. 그러나 22살이나 어린 조카는 수시로 클라우디우스를 모욕주고 괴롭혔다. 스트레스로 인해 그는 깡마른 사람이 되었다. 조카가 암살당했을 때 그는 무서워서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에 장애를 가졌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친척들을 모두 죽일 때 그는 부모에 의해 시골에 보내어졌는데 이로 인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조심성이 많고 유약한 사람이었다. 군인들이 자신의 방으로 왔을 때 그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결국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자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군인들은 유약한 그를 반 강제적으로 황제로 옹립했다.

- 51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집권초기엔 군인들의 위세에 눌려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로마인들은 드디어 살인의 행진이 끝난 것만으로 환호했다. 황제는 건축하는 일로 소일했다. 예술적인 안목이 있어서 로마시는 그의 의도대로 잘 정비되어 갔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로서의 권력을 쥐고 주무르게 되자 그도 재판을 즐기고 사형판결을 내리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살인마가 되어 갔다. 그런데 그는 유약하면서 실수도 많았고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판결로 사형을 당한 신하들이 누구인지 또 왜 죽었는지를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내인 메살리나를 처형하고도 연회장에 왕비가 왜 늦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 아내를 죽이고 그는 조카인 아그리피나와 재혼하여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녀 또한 초혼이 아니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바로 네로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만들기 위해 서서히 모략을 꾸몄다.

- 51년경에 로마시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었다. 귀부인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야간 집회에 참석을 하는 것이 붐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황제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다. 황제는 즉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시켰다. 이들 중에는 소아시아 폰토스 출신인 유대인 아퀼라와 프리스길라도 포함되었다. 추방된 뒤 이들 부부는 코린트라는 항구 도시에 정착하여 천막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다 어느 날 메부리 코에 대머리의 한 스승을 만나 그로부터 예수의 도를 배웠는데 그가 바로 바울이었고 이 부부는 바울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5) 네로

- 황후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네로(Nero, 37-68)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교육했다.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세네카를 선생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네로는 스승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늘 행동했다.

- AD54년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버섯을 먹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의붓아들 네로가 즉위했다. 아직 어린 네로 대신 어머니 아르기피나가 섭정을 했다. 그러나 네로는 청년이 되자 어머니를 살해하고 전권을 쥐었다. 아그리피나는 그런 아들을 낳은 자신을 자책하며 “나의 자궁에 침을 뱉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이어 스승 세네카도 강요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 네로는 음악을 너무 좋아해 광기 넘친 연주회를 곳곳에서 열고, 자신이 최고의 가수인양 아무 때나 노래를 불렀다. 청중들은 네로가 로마 최고의 가수라고 무조건 칭찬하고 감동의 박수를 쳐야 했다. 반응이 약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네로는 황금 궁궐을 짓고 도시에 새 건물을 지어 로마를 화려하게 단장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수립했는데, 새 궁궐이 들어설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어 이것이 눈에 거슬린다고 하여 AD 64년에 로마시 14개 구역 중 무려 10개 구역을 불태우고 말았다. 수많은 인구가 화마로 목숨을 잃고 생업의 터전을 잃었음에도 네로는 화재현장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 정신병자 같은 황제에 대해 드디어 백성들이 분노했다.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당황한 네로는 이재민에 급식을 주고 구호소도 지어 주는 등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황제가 방화범이라는 소문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네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바로 그 대상이 로마시민들에게 눈총을 받던 기독교인이었다. 하루아침에 방화범으로 몰린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잡혀 온갖 방법으로 처형을 당했다.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붙잡혀 노리개처럼 희롱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동물 가죽을 덮어쓰고 개에 물려 죽었고 십자가형도 당했다. 일부는 어둔 밤을 비추는 횃불로 몸이 태워졌다. 신도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잔학함 때문에 죽었다.”

- 네로의 박해 시에 베드로와 바울도 함께 처형되었다.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로마시를 빠져 나가다가 도중에 주님을 만났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하고 묻자 주님은 “네가 버린 로마를 위해 내가 다시 십자자에 매달리러 가노라”는 대답을 듣고 다시 발길을 돌려 로마에 입성하고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현재,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난 자리에 쿼바디스교회가 서있고, 처형당했던 테베레강변에는 성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한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압송되어 도끼로 목이 잘리는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바울의 목이 땅에 떨어지면서 ‘예수’를 세 번 외치며 세 번 튀었는데 훗날 피가 묻은 그 장소에서 우물이 솟아 세우물교회가 세워졌다.

 

5. 로마제국의 이모저모

 

1) 종교

- 세 주신은 주피터(Jupiter), 주노(Juno), 그리고 주피터의 딸인 미네르바(Minerva)였다. 곳곳에 이들을 숭배하는 삼신전이 세워졌는데 언덕에 세워졌다는 뜻에서 캐피톨(capitol)이라 하였고 이 이름에서 미국의회의 이름이 유래했다.

- 그리스의 신들은 로마의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리스의 최고신 제우스는 주피터와 동일시되었다. 이외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세라피스, 시리아의 바알, 페르시아의 이슈타르, 게르만족의 토르 등도 숭배되었다.

- 로마시대에는 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경건’(piety)이라 불렀다 이를 실천키 위해 황제들은 매년 최고사제로서 주피터신에게 제사를 바쳤다.

2) 군사

- 로마군대는 네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정규군인 레기온(Legion), 정복지에서 차출한 외인부대, 말이라는 라틴어 에쿠스(equus)에서 따온 기병대인 에퀴테스, 그리고 황제의 최정예 친위대가 그것이다.

- 로마군은 16세에서 45세까지 복무했고 강제징집은 아니었지만 시민권과 좋은 대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했다. 비시민권 출신자는 25년을 근무하면 로마시민권을 획득하고 퇴역병사가 되었는데 여기서 베테랑(vateran)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복무중에는 결혼이 금지되었고 탈영이나 반란시에는 무조건 처형되고 가족까지 몰살했다.

3) 시민권

- 로마시민권은 여러 특권을 누렸다. 권위의 상징인 토가를 입을 수 있었고, 관리에 임명되고 투표권이 주어지며 상업도 제약이 없었다. 고문이나 구금을 함부로 당하지 않고 재판받을 권리가 있었다. 많은 종류의 노역과 세금 등을 면제받았으며 각종 오락행사와 서커스 등의 관람과 빵을 무료로 배급받았다.

- 예수의 사도 바울의 집안도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시민권자들과 달리 위세를 드러내는데 사용하지 않았고 토가도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로마 시민권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 하늘의 시민권을 사모하라고 가르쳤다. 또 바울은 로마 군대를 비유로 들며 이 땅의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불렀다.

4) 팍스 로마의 명암

- ‘로마의 평화’의 이면에는 장기간의 정복전쟁과 학살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전쟁만 해도 9년 동안 약 100만 명의 인명이 살상되었고 인구 1/3은 노예가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30%는 노예로 채워졌다. 부유한 평민이나 귀족들은 모든 영화를 누렸지만 노예들은 오리, 건축, 시중, 경비, 관리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다. 단 주인은 재량으로 노예에게 자유를 허가할 수 있었다.

- 로마시민들은 검투경기를 즐겼다. 수도에는 티투스(titus)황제가 5만 명을 수용하는 콜로세움 경기장을 건설했고 곳곳에 원형극장들이 세워졌다. 검투사(gladiator)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주전 73년에 스파르타쿠스라는 노예가 로마의 학대에 맞서 7만 명의 노예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군에 포로가 되어 검투사가 된 인물이다. 로마는 2년간의 노예들의 반란을 철저히 짓밟았다. 주후 100년경엔 기독교신자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검투사들의 상대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 로마제국이 한 해에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양은 엄청난 것이었다. 피정복지들은 매년 수확물의 절반을 로마에 납부해야 했다. 세금은 금이나 은의 무게를 달아서 냈고 무게단위는 달란트(1달란트= 약 26kg)를 사용했다. 시리아는 1,000달란트, 유대와 사마리아는 600달란트, 이집트는 2,000달란트, 갈리아와 에스파냐는 각각 500달란트를 부담했는데 전체 세금징수액은 1만 달란트에 육박했다고 한다.

- 로마의 법은 잔인했고 조그마한 잘못에도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가 간 전쟁은 사라졌으나 귀족들 간의 자리다툼과 황제의 권좌를 놓고 벌인 암투는 극심했다. 거리마다 십자가형틀이 나열되었고 그곳에는 많은 죄수들이 매달려 죽었다. 한 마디로 로마의 번영과 평화는 억압과 학살로 이루어진 것이다.

 

2장. 예수의 탄생

 

1. 인구조사

1) 지상의 군주 아우구스투스(성경에는 가이사 아구스도 Caesar Augutus 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눅 2:1)는 주전 4년경 처음으로 제국내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백성들에게 황제로서 통치권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적정한 세금부과와 징집, 그리고 로마군의 효율적인 배치 등을 위한 것으로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각자 본적지에 돌아가 신고를 해야 했다.

2) 이때 나사렛에 살던 목수 요셉과 정혼녀 마리아도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에 내려갔다. 이곳에서 약속된 메시야가 탄생했다. 성경에는 예수가 탄생할 당시에 큰 별이 출현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예수가 세상의 빛 되심을 의미한다. 17세기 경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케플러는 이 별에 대해 연구했는데 주전 7년경에 목성과 토성이 겹쳐 사람 눈에 큰 별로 보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2. 탄생

 

1)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으로 그가 ‘생명의 빵’임을 상징하며, 또 탄생 시에 큰 별이 출현한 것은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의미한다.

2) 특별히 마구간이 선택된 것은 예수님이 ‘어린 양’임을 말함이다. 역사에는 천출 출신으로 대왕이 된 인물들이 많다. 로마의 설립자 로물루스는 동굴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고,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젖도 떼지 않은 채 버려졌다. 그러나 세상의 영웅들은 마구간 같은 낮은 곳에서 태어나 화려한 왕궁에서 삶을 끝냈지만 예수님의 삶은 시종 마구간의 연속이었다.

2)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예수님께 경배한 것은 그가 인류의 목자이며 지혜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선물인 황금과 유향, 몰약은 각각 왕과 제사장, 글이고 치료자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이 모든 상징들은 예수께서 진짜 주인이며 동시에 세상의 구주로서 종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3. 헤롯대왕

 

1) 팔레스타인 동편에 자리잡은 이두메(구약의 에돔)지역은 당시 안티파르 족장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시저를 살해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지원했는데 이것이 옥타비아누스를 분노케 하고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2) 안티파르에게는 영민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BC 39년경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많은 선물을 제공했다. 이에 황제는 그를 팔레스타인지역의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했다. 바로 그가 헤롯대왕(Herod, BC 73-4)이다. 헤롯은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카이사랴로 명명했다.

3)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시도했다. 먼저 본부인을 버리고 유대 왕족의 미리암과 재혼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했다. 그리고 베들레헴 근처의 해로디온과 요단강 동편의 마케루스 등에 요새를 지었다.

4) BC4년 헤롯왕에게 동방으로부터 박사(마구스)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고대의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였고, 페르시아의 조언자들이었다. 영어의 magician(마술사)은 이 마구스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예수 탄생 즈음에 큰 별을 발견하고 이를 메시아 탄생의 징조로 해석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페르시아 에스파한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약 2,000km의 거리를 여행했다고 한다. 또 이들은 오는 도중 요르단 동편의 무역도시인 페트라에서 황금과 유향, 몰약을 구입했다고 한다.

5) 이들로부터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은 긴장한 나머지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모든 아기들을 학살했다. 아기 예수는 이집트(애굽)로 피난 갔지만 아기들의 희생의 빚을 자신의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운명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갚은 것은 유아들의 목숨 값만이 아니라 인류의 목숨 값이었다.

6) BC 4년경 헤롯은 내장이 썩는 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자 왕국은 세 아들들에게 나뉘어졌다. 북북 갈릴리와 베레아지역은 안티파스가, 유대지역은 아켈라우스가, 요단강 동편은 빌립이 다스렸다.

 

4. 예수의 삶

 

1)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했던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다. 아버지 요셉은 목수로 일하다 예수님이 청소년 때(약 17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도맡아 목수로서 공생애 전까지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부양했다.

2) 예수의 첫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천국,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3) 예수의 가르침과 선포는 충격적이었다. 예수는 창조주를 자신의 아버지라 소개하고 노예를 포함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왕들에게만 부여된 신의 자녀라는 개념이 완전히 묵살되는 선포였다. 복수가 당연한 권리라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도 돌려대라고 가르쳤다. 로마사회는 가난을 추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예수는 천국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선포했다. 가난하여 천대받고 신분 때문에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복음, 기쁜 소식이었다.

4) 점점 왕과 사회지도층과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에게 예수는 눈에 가시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도저히 같은 배에 탈 수 없는 이들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 AD 30년경,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고발했고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5. 예수에 대한 일반기록들

 

1) AD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예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 시대에 예수라는 지혜의 사람이 살았다. 그는 놀라운 일을 행했고 제자들은 그를 진리로 믿고 추종했다.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그를 메시아로 여겼다. 그는 3일 만에 부활했으며 그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2) 타키투스(53-120)는 <연대기>에서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빌라도 유대총독에 의해 사형을 받았다고 적었다.

3)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반기독교적인 랍비 문서에도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4) 1961년 해안도시 카이사랴에서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빌라도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다. 

728x90

'최더함목사(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사상논쟁  (0) 2012.12.03
신론-작정과 예정  (0) 2012.11.30
교회사- 중간시대 요약  (0) 2012.11.29
개혁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0) 2012.11.27
청교도운동의 역사  (0) 2012.11.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