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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논쟁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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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ed Theology

   

目次 Contents

 

1. 一般啓示(恩寵)과 特別啓示(恩寵)

 

2. 自由意志와 奴隸意志

 

3.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4. 啓蒙主義

 

5. 敬虔主義

 

6. 浪漫主義

 

7. 自由主義

 

8. 新正統主義

 

9. 根本主義

 

10. 宗敎多元主義

  

 

 

1장. 啓示 Revealation

 

1. 두 가지 종교

 

1) 종교를 크게 나누면 인간이 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수도종교> 또는 <상승종교>와 신이 인간에게 찾아오는 <계시종교> 또는 <하강종교>가 있다.

 

2)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와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믿는 계시종교에 속한다.

 

2. 두 가지 계시

 

1) 일반계시

-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자연계시), 역사의 변천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이신 것이다.

-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일반계시가 질적으로 저하되고 그 영향력이 축소되었으나 하나님이 본래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주신 계시로서 오늘날에도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 일반계시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① 미약하나마 창조물은 하나님의 여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드러낸다(롬 1:19-20)

② 인간은 타고난 본성으로 율법이 명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롬 2:14)

③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갈구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행 17:27-28)

④ 자연 속에 나타난 계시를 통하여 성경의 진리성이 더욱 확고히 드러난다.

⑤ 불신자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고 또 성도와 불신자간의 공동영역으로서 전도를 위한 접촉점이 된다.

⑥ 인간의 양심에 작용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한다.

 

2) 특별계시

- 구원에 관한 지식을 결핍하고 있는 일반계시의 미흡함을 보완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계시한 것이다.

-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훼손되거나 오류 없이 문서화 한 것이 바로 성경이다(성경무오성). 즉, 

성경은 기록자체가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 즉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타났다.

① 신현(Theophany)

- 무생물을 통한 임재의 상징을 보임으로써 그룹들 사이에서(시80:1), 물, 연기, 구름 사이에서(창15:17, 출 3:2),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왕상 19;12), 폭풍 가운데서(욥38:1, 시18:10-15) 나타나셨다.

- 천사를 통해 계시하셨다.(단8:13, 9:11, 10:5, 슥1:7, 6:5, 행7:53)

- 성육신하셨다

-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고전3:16)의 존재가 특별계시의 증거다

② 신언(Divine word)

- 음성으로(창 2:16, 출 19:9, 삼상3:4)

- 꿈으로(민12:6, 삼상18:6, 요엘2:28)

- 환상으로(단1:17, 암 7:1-9)

-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고 참된 완전 유일한 로고스이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대언이었다.

③ 이적(Divine Work)

- 이적은 하나님의 임재와 섭리의 증거인 표적이 되기 위한 경우에 국한된다.

- 가장 결정적인 이적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3. 계시에 대한 다른 복음

 

1) 펠라기우스파와 자연신론주의자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부정하거나 왜곡한다. 이들은 일반계시만으로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중요시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특성을 애써 외면한다.

 

2)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무시하면 기독교 자체의 존립이 무의미하다. 나아가 특별계시가 없다면 인간의 영적 갈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의 영향력은 일반계시의 방편인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훼손시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자연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수용하지 못하며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2장. 人間의 正體性 論爭- 自由意志와 奴隸意志

 

1. 자유(Freedom)와 자유의지

 

1)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것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법률 밖의 방임과 구별된다.

 

2) 세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유는 중요한 주제이다. 기도교의 역사에서도 자유는 성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자유는 소극적으로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사가들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이 자유로 찬란한 문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3)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자유로운 선택 혹은 능력이라는 의미로 어떤 외부적인 작용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혹은 선택의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해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놓고 중요한 신학적 대립이 나타난 것이다.

 

2. 루터와 에라스무스

 

1) 마르틴 루터(M. Luther)는 그의 작품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재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노예의지론>을 통해 자유에 대한 이해 및 인간 본질에 관한 규명을 시도했다.

 

2)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에 반하는 <자유의지론>의 주창자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한 수도사였고 당대의 저명한 인문주의자로서 그의 저작 <우신예찬(1511)>은 당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인물이며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으로 특별히 종교개혁자인 루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는 이 헬라어판을 통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신학을 바르게 교정할 수 있었고, 정확한 기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1522년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3)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자신의 교회개혁

사상과 상통한다고 여기고 루터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한 신학적 입장 차이로 둘은 상반된 길을 걷는다.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안에서 교회의 개혁을 소망했지만 루터는 보다 광범위한 개혁을 원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본성적인 성품을 선하게 보는 등 자신의 신학과 다른 사상을 접하자 이후부터 에라스무스를 초대교회 대 어거스틴에 대항한 펠라기우스에 비유했다. 루터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라스무스는 훌륭한 학자인 것은 인정하지만 신학자는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1524년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편지를 보내 에라스무스가 성경연구의 공헌은 있지만 종교개혁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에라스무스는 속이 상했고 루터의 편지에 대한 반박으로 1524년 <자유의지론-자유 선택에 관한 강론>을 라틴어로 저술하게 되었다.

 

3. 자유의지론

 

1)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공격하면서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적 책임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2) 그는 먼저 루터가 주장하는 노예적 의지가 희랍 및 라틴교부들, 교회회의 그리고 교황들의 견해와 다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가늬 의지가 전혀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만약 루터의 주장처럼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인간은 윤리적으로 약해지고 게을러지며 더욱 악을 자행하게 될 것이며 그 누구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sola gratia, sola fide에 근거한 뤄의 노예의지론은 (카톨릭)교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해야 교회의 평화와 성도들의 도덕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3) 전체적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이 교육에 의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높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주신의 구원에 일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구원에서 이탈하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그는 루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구원을 위해 어떠한 능동적인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크게 논박했다. 인간은 그 스스로 구원에 대하여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4) 에라스무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으로 인해 약해진 것이지 결코 그 능력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꽁꽁 묶어놓고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인협동(Synergism)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편에 서서 적극적인 행동과 결단을 강조했다.

 

4. 노예의지론(1525년)

 

1)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에 대해 과연 인간이 올바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2) 루터는 먼저 인간의 의지는 죄로 인해 속박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논리의 전개를 위해 성경의 명확성, 인간의 본성, 십자가 뒤에 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신앙과 은혜의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등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함께 다루었다. 특히 자유의지에 관한 규명을 하면서 바로를 언급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충분히 설명했다.

 

3)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써 사람들을 구속하였다고 믿는다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전적인 부패로 인해 철저히 무능력함을 고백해야 한다(롬 9:10-11). 만약 우리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헛되거나 아니면 사람의 가장 가치 없는 부분의 구속자로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②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에 해당한다.

 

③ 인간의 자연적 능력( 지, 정, 의)은 복음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노예의지에 불과하다. 즉, 자연인의 선과 그가 행한 행동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이는 노예의지의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불신앙자들이 취한 행동일 뿐이다.

 

④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이나 천사나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살고 있고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자유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배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계시된 하나님과 숨어계신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한 우를 범했다.

 

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었으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이지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인간의 행동은 자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내적으로 감동받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악령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와 논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어떤 강압적인 것에 의해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사탄의 영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⑥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도 부분적인 자유는 있다. 자신이 선한 일을 할 것인지 악을 행할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자유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 가장 문제는 모든 행동의 동기인데 타락한 인간의 동기 자체가 타락적이다.

 

⑦ 인간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든지 아니면 악령에 의해 움직이든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은 없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순수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결론>

1.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영원한 삶을 획득할 자격을 얻으며,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인간의 성격이 초자연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뜻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 자유의 행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

 

2.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라는 자연스러운 사람을 살기 위해 부자연스러운 멍에로부터 먼저 해장되어야 한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이것이 믿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탄의 뜻을 따르게 도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3장. Calvinism & Arminianism

 

1.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1) 종교개혁은 유럽사회의 지축을 흔드는 대지진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전 유럽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진시켰다. 당시엔 교회와 정부 모두 교황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교황주의에 대한 부정은 즉시 세속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주들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2) 이러한 반역은 화란에서부터 점화되었다. 원래 화란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라인강 하류의 낮은 지대에 속하는 17개 주로 구성된 나라로서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란의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로서의 결집력을 자랑했다. 크게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황제 카알 5세(Karl ∨, 1550-1558)의 통치하에 있었고, 작게는 부르군드 공화국에 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카톨릭을 신봉했고 개신교는 매우 미미한 세력에 불과해 하나의 이단적 종파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더욱이 칼빈주의는 몇몇 지식인들 그룹에서만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파고가 드높아지자 당시 화란의 통치자인 황제 카알 5세는 즉시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필립 2세(Philipp ∥, 1555-1598)는 탄압을 더 가중시켰다. 그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충성과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한편 왕권신수설을 앞세우고 종교개혁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핍박이 가해질수록 개신교도들의 종교개혁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뜨거워져 갔다.

 

3) 그 기반에는 일찍부터 발달한 화란의 경제력이 깔려 있었다. 특히 화란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안트워프 등은 중세후반부터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북해 무역을 주도하였고, 신대륙 등의 발견이후 세계무역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화란 내의 도시 수만 200여개에 달했고, 이 도시들에 의해 거두어진 세금은 당시 강대국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국에서 거둬들인 세금보다 무려 7배(은을 기준)나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4) 여기에 카톨릭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만나게 되었고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어두운 커튼이 열리며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빛이 비추어지자 대세는 개신교로 기울어져 갔다. 드디어 화란은 통치자인 스페인과 결별하기 위해 이른바 독립전쟁을 치루고 1609년에 네덜란드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화란의 독립은 유럽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독일의 영주국인 팔쯔 선제후국은 1560년에 칼빈주의의 개혁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는 1576년에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다. 이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개신교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산의 원인으로는 개신교의 관용정책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개신교를 수용한 여러 국가나 교회들은 카톨릭과 달리 비록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해도 종교의 자유를 소지할 있도록 종교적 관용정책을 베풀었는데 이것이 많은 점에서 개신교가 급속도록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5) 이후 새로운 화란은 칼빈주의를 국가의 종교와 국민들의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였으며 도르트회의를 통해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수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칼빈주의 신학과 영성의 가장 중요한 무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화란은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콥, 헤르만 바빙크 등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하여 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6)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Selection)

③ 제한적 속죄(Limited Salvation)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reservation of Saints)

 

2. 알미니안주의

 

1) 16세기 이후 유럽사회는 칼빈이 대세였다. 루터교 등 다른 교파들도 공존했지만 칼빈주의의 득세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칼빈의 바다에 별안간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화란 태생의 칼빈주의자이자 베자를 스승으로 둔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라는 한 인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아르미니우스는 다른 모든 칼빈의 신학적 사상들을 수용했지만 칼빈의 예정설만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하나님의 절대예정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라이덴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같은 대학교수이자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처음에 이 문제는 상호 중재의 노력으로 수면 아래로 감추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칼빈주의에 반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하자 다시 분쟁의 문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들을 교회의 회의에 고소하게 되었고,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자기들의 5대 교리를 작성하여 항의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3)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르트에서 회의를 열었다. 1618년 11월부터 소집된 회의는 1619년 5월까지 무려 154회에 걸쳐 열렸다. 공식적인 구성원만도 네덜란드 정통 칼빈주의자가 128명, 외국의 칼빈주의자 28명,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자 13명 등 모두 17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압도적 다수를 점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었다. 그 내용으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함과 동시에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칼빈주의와 예정론은 법적으로 승리하였고 반대자들은 모두 사형과 종신형 등에 처하며 패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곤잘레스는 자기 스스로 칼빈주의자로 자처했고, 영원히 칼빈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아르미 

니우스는 본인의 사망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의 창시자가 되고 이단의 괴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4)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이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자유의지

조건적 선택

보편적 구속

거부할 수 있는 은총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4장. 啓蒙主義, Illuminism

 

1. 배경

 

1)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계몽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영국의 이신론(deism), 르네상스 휴머니즘(Renaissance Humanism),소시니아니즘(Socinianism)에서 영향을 받았다.

 

2) 대표적인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트뢸취 등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내로 침투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잉태했다. 특히 폴 틸리히는 칸트의 사상을 자율성, 발전, 자연, 조화로 분류하여 강화시켰다. 그렌츠 & 오슨은 Reason, Nature, Autonomy, Harmony, Growth로 정리했다.

 

3) 그러나 계몽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인간 자율성의 한계를 말하며, 신학을 자연과학과 철학에 종속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이는 스콜라신학과 정반대이다.

 

2. 계몽주의가 자유주의에 끼친 영향들

- 버나드 램(B. Ramm)의 견해

1) 역사주의 historicism

2) 과학만능 scientism

3) 비평주의 criticism

4) 합리주의 rationalism

5) 관용주의 tolerationism

6) 낙관주의 optimism

7) 칸트주의 kantianism

8) 인본주의 humanism

9) 분리주의 separatism 

 

 

5장. 敬虔主義, Pietism

 

1. 배경

 

1) 독일 루터교회의 일치신조(1577년)와 칼빈주의자의 축출, 그리고 스콜라적 정통주의(죽은 정통주의)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이에 스페너(P. J. Spenner, 1635-1705)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도와 경건생활을 강조했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케(1663-1727), 진젠도르프(1700-1760) 등이 경건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왕은 경건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 1694년에 할레(Halle)대학을 설립했다. 경건주의가 표방하는 종교적 감정과 경험, 교리보다 실제 삶을, 지식보다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은 자유주의의 주관주의적이며 경험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에 영향을 끼쳤다.

 

2. 경건주의 운동가들

 

1) 스페너(Spener, 1635-1705)의 6가지 개혁

- 말씀운동/ 루터의 만인제사장 사상정립=평신도운동 / 사랑의 실천 / 논쟁에서 탈피 / 신학교육의 개혁 / 경건을 위한 설교의 강화

 

2) 프랑케(A.H. Francke, 1663-1736)

- 라이프니쯔 대학에 성경연구회 조직

-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누더기학교 설립(1695)

 

3) 벵겔(J. Bengel, 1687-1752)

- 성경주석가

 

4) 고트프리 아놀드(G. Arnold, 1666-1714)

 

5) 진젠도르프(Nicolas. L, Zinzendorf, 1700-1760)

- 모라비아교의 창시자

 

3. 경건주의의 특성

 

1) 개인의 내적 변화를 강조

- 개인의 죄와 회개의 체험과 같은 개인적인 신앙의 내적 본질을 강조한다.

   

2) 교리보다는 삶

- 크리스천의 지식보다는 거룩한 사람을 실천하도록 강조

한다.

- 지나치게 성화론을 강조하여 윤리적 요구와 금욕을 강하게 주장 / 교회 안에 작은 교회

 

3) 개인의 성경연구 강화

- 루터의 영향

 

4) 기존 교회에 대한 저항정신

- 스페너가 그의 책 <경건의 열망>에서 정부 교회를 비판

 

4. 비판

 

1) 윤리실천운동으로 전락

 

2) 지나친 금욕주의로 기독교 신비주의의 탄생

 

3) 독선과 신앙우월주의

 

4) 이신칭의 등 정통 신학적 교리를 등한시하고 신자의 내적 신앙의 성장에만 초점.

 

5. 자유주의에 끼친 영향

 

1) 신학의 주관주의화에 영향

- 누구든지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자유롭게 신학을 다룰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2) 인간의 감정과 체험을 강조

-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주의의 개인적 체험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신학을 만들었다.

 

3) 정통주의의 탈피

- 경건주의는 딱딱한 신학이나 교리를 벗어버리고 신자의 윤리적인 면과 내적 성숙을 강조했는데, 이런 점들이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였다.

   

 

6장. 浪漫主義, Romanticism

 

1. 배경

 

1) 자유주의 신학의 또 다른 배경으로 낭만주의가 있다. 1790년대 독일의 루소와 레싱에 의해 시작된 이 사상은 19세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2) 낭만주의는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벌적인 것을, 차가운 합리성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졌다. 낭만주의는 이후 노발리스와 슐레겔, 피히테, 헤겔과 쉘링, 그리고 슐라이에르마허로 이어졌다.

 

3)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

- 산업혁명으로 인한 문명, 개화, 번영이 인간미를 상실

- 프랑스혁명으로 자유 진보 사상이 이성의 우위를 주장

 

4) 문예사조(18-19세기)의 등장

- 미의 추구

-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고 정서를 중시

- 자연으로 돌아가자

 

3) 루소, 슐레겔, 졸거, 괴테 등이 주도

 

2. 특징

 

1) 자아의식에 근거한 주관성을 강조

- (피히테) 자의식이란, 자의식 이외에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정될 수 없다는 것과 만사는 자아의 활동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2) 인간생활에 무엇보다 감정과 미적인 요소들이 중요

- 감정은 심지어 종교까지도 연구의 방법으로 사용

 

3)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경향

- 현실의 구현은 합리적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체험, 정신계몽을 통해 이루어짐

 

4) 내면주의

- 진리는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사색을 통한 내면의 기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획득함

 

5)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전제의 붕괴

- 무한이 유한 안에 실제로 존재하고, 유한은 무한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함

- 즉, 신은 인간 안에 있고 인간은 신 안에 존재론적으로 있다며 신과 인간의 경계를 붕괴

 

3. 비판

 

1) 지나친 주관주의(知情意 중 情緖만 강조)와 독선으로 개관적인 전체를 보지 못했다.

 

2) 현실을 도외시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무책임성

 

3) 하나님을 제외한 상태에서 근본적이며 영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4) 유한과 무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 철학적 모순을 가졌다.

 

4.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

 

1) 자유주의자들은 신학연구에 미적 직관과 감정을 사용했다.

 

2) 슐라이에르마허의 경우

-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낭만주의적 영향을 받아 종교론에서 우주의 미적 직관을 강조했다. 그는 美가 성경과 같은 계시로서 신을 만나는 수단이 된다고 했다. 그는 종교를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의 직관을 사용함으로 계시 의존적인 신학 방법을 버리고(성경에 나타난 계시와 초자연적 영역을 부정하고) 인류학적인 신학의 방법론을 시도했다.

 

 

7장. 自由主義, Liberalism

 

1.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1) 칸트와 헤겔

- 18세기는 칸트(I. Kant)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인 지식론을 바탕으로 플라톤이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체계)로 구분하고,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함으로서 초자연의 세계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종교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주제들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시킴으로서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Liberalism)란 18세기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 헤겔(Hegel)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을 강조했다면 헤겔은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과 이성을 동일시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학적으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이 원래는 기독교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의 철학은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절대적 진리의 주장들이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출현했다. 즉, '상대의 세계는 자기에 대한 존재하는 세계이며, 모순을 지닌 채 운동과 생성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성은 이 자기 모순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자기 안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한한 진행은 아니고 일체의 상대적 관계가 경과함에 따라 절대정신이 개현된다고 본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라고 하였다. 헤겔의 이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연구에 적용한 대표적인 신학자로 스트라우스와 바우어가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보고자 노력했다.

 

2) 자유주의 신학

- 칸트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발현했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세상의 풍조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었다. 당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일었는데, 이 때 슐라이에르마허가 나타나 종교적 멸시 풍조를 공격하고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은 종교라는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그는 종교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의 그릇된 사조에 반기를 든 것은 높이 평가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신학과 사상은 훗날 자유주의신학을 태동시킴으로서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우선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

로 설명하면서 새로운 자유주의신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을 버리고,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에 심히 고무되어 인간의 이성, 직관, 감정, 기타 체험을 이용하여 성경과 신학을 자유롭게,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을 출현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의 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슐라이에르마허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칼 바르트마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벗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 한편, 칸트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향을 가졌다. 슐라이에르마허기 감정을 신학의 주제로 삼고, 헤겔이 정신에 역점을 두었다면 리츨은 윤리에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예수와 함께 발전하고 성숙되어진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다. 그는 죄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죄는 무지의 결과로서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리츨과 그의 추종자들은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왕국의 영역으로 종교의 수준을 끌어들인 결과를 낳으며 자유주의 신학이 종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2. 특징

 

1) 기독교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이다.

-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개인적 사상과 진술에 따라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2) 신학의 기초와 방법을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 경험에 두고 있다.

- 경건주의가 강조한 개인주의적 성경연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신학 방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이성, 감정,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즉, 신학을 하나님 중심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신학의 방법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학의 주체이고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신학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어거스틴

의 하나님의 은총론에 맞서 인간의 선택의 힘(possibilitias utriusque patris)을 강조했던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비슷하다.

 

3) 내재적인 신학이다.

-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성을 파괴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하지 않고 내재적인 신학으로 빠져 들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느낌으로 이해했다. 그는 종교를 한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무한자(the infinite)와 교제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 않고 윤리만을 강조하는 칸트보다는 더 종교적이지만 그의 내재주의는 초월주의, 즉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키에르케고르도 헤겔의 관념주의를 비판할 때 이것을 강조했다)를 강조한 칼 바르트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을 받았다. 실상 자유주의신학은 칼 바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언급이 아니다.

 

4) 낙관주의 신학

-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능력을 믿고 다분히 인간이 모든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인간은 충분히 선을 가지고 있기에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복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한 생각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이후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대세로 자리 잡는다.

 

5) 윤리의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

- 자유주의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주제들을 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모든 영적인 주제들과 내세적인 소망들을 폐기시키고 오직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사회복음주의운동이 태동하였고, 최근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6)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신학

-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적 역사비평학적 입장(종교사학파의 입장)에서 예수를 연구하여 하나의 종교적 모델로서 제시하는 한편, 그런 차원에서 예수의 인간성

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등으로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예수는 그저 타종교의 지도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 예수가 타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참 진리를 가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대표적으로 존 힉(John Hick) 같은 자는 성육신 사건을 상대화시킴과 함께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각자의 진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종교 간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선 기독교가 주장하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절대적이며 독선적인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WCC, KNCC 등이 중심이 되어 시도하고 있는 운동이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그 본질은 종교다원주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 자유주의 신학의 세 가지 흐름

 

1)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하는 감정의 신학이다. 네안더, 니이체, 슈바이처, 트베스텐 등이 이에 속한다.

 

2)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을 주도한 헤겔철학에 기반을 두고 역사 비평적인 신학을 추구했다. 헤겔은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 바우르, 비더만(1819-1885)과 구약성서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동원한 벨하우젠(Wellhausen,1844-1918) 등이 이에 속한다.

 

3)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취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리츨(A. Ritschl, 1822-1889)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와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 경험에 호소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신학방법을 거부했다. 이후 헤르만, 하르낙(1852-1930), 카텐부쉬, 숄츠 등이 리츨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19세기 말엽 독일에서 발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보려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그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가 모두 고대 근동지방의 신비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고 모두 제거해 버렸다. 궁켈(H. Gunkel, 1862-1932), 부세트(W. Bousset), 바이스(Johanes Weiss, 1863-1918) 등이 이에 속하고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취(E. Troeltsch, 1865-1923)이다.

 

4. 기타 자유주의(Liberalism) 신학의 발전과 양태

 

1) 리츨학파 - 리츨, 하르낙, 헤르만, 카덴부쉬, 루푸스, 트륄치

 

2) 후 불트만 학파 - 불트만, 콘젤만, 반 두센, 하롤드 등

 

3) 급진파 - 본회퍼 등

 

4) 세속화 신학 - 반 부렌, 하비 콕스 등

 

5)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도드, 니버, 폴 틸리히

 

6) 독립파 - 몰트만

   

7) 구속사학파 - 오스카 쿨만, 슈바이처, 알란 리차드슨, 헌터 등

 

8) 신 자유주의 - 부로우스, 필슨, 조지 라이트, 브라텐, 앤드슨

 

9) 한국 -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 김경재, 길희성 등

 

5. 결론

 

1) 주관주의적 신학

-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중심의 신학방법을 따르지 않고 주관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 감정적, 경험적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정통적인 신학의 체계를 허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신학공동체의 약화

-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지켜지고 계보를 이어왔던 기독교 신학의 공동체가 약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악한 영향을 끼치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산 교훈이 된다. 한편 한 개인의 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성경과 기존의 건전한 신학적인 전통에 의해 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신학이 새로운 독창성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신학을 형성하였는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3)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 물론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들이 특수한 시대의 철학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신학의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그들의 실수를 통해 올바른 신학,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성경을 벗어난 신학은 위험한 것이다

-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가 신학을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방법으로 다루지 않을 때 얼마나 위험해 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준 단적인 실례라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로마 카톨릭교회가 만든 인위적이고 비성경적인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역사적 교회들의 전통과 신조들, 그리고 개혁적 신학사상을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방법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은 인문주의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방법들을 성경과 연결하여 차원 높은 신앙적 원리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성경의 권위를 버리고 인문주의적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은 철학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지나치게 현실과의 조화에 치중하다보니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부정하고 세상의 논리와 타협을 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8장. 新正統主義, Neo-Orthodoxism

 

1. 배경

 

1)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에 의해 창시된 신학이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그는 인간의 경험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2) 그의 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중심에 대한 강조가 바르트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3) 바르트와 자유주의 신학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왜냐하면 그이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과의 오랜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교육을 받고 신학자가 되었으나 훗날 자유주의와 결별하고 자유주의 분쇄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2. 바르트와 슐라이에르마허

 

1) 슐라이에르마허가 없었다면 바르트도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의 창시자인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둘의 만남은 베른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경험 신학에 흥미를 느꼈고 그에 관한 강의나 논문을 쓰기도 했다.

 

2) 바르트의 전환점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계기가 되었다. 하르낙, 헤르만을 비롯한 바르트의 스승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바르트는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3) 한편으로 그 선언서에 나타난 전체적 사상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판단하고 이때부터 그를 정통적인 신학적 계보에서 제외시켰다.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고 선언했다.

★ 칼 바르트(K. Barth)

- 1886. 5. 10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에 의해 베른대학에서 신학수업을 받았다.

- 1906년 베를린대학에서 카프탄, 궁켈, 하르낙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 1907년 튀빙겐대학에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 1909년 제네바에서 잠시 부목사로 목회하다가 1911년부터 10년 동안 스위스의 작은 공업도시인 자펜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독일 지성인 93명의 성명서를 기점으로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에 흥미를 잃고 이후 자유주의신학의 아성을 허무는데 일생을 바쳤다.

- 1919년에 ‘로마서주석’을 출간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의 분기점으로 평가되었다.

- 1921년에 괴팅겐교수가 되었고 이때부터 무명의 목회자에서 일약 저명한 신학자의 삶을 살았다.

- 1925년 뮌스터대학의 교의학 및 신약주석교수가 되었고, 1933년 히틀러정권을 반대하는 이유로 교수직과 모든 출판활동을 금지당했다.

- 1935년 독일에서 추방당한 그는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대학 교수로 봉직하다가 1968년 사망했다.

- 바르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의 결정적인 차이와 논쟁의 핵심은 신학의 개념과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라면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신자의 자기의식 안에 주어진 것을 단순히 개념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을 신앙의 본질로 정의하고 이러한 감정 혹은 종교의식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 대상으로 삼아지만 바르트는 신앙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을 전개했다. 다시 말해 슐라이에르마허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신학방법을 택했다며 바르트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신학의 방법론을 택한 것이다.

 

3. 바르트신학의 핵심

 

1) 하나님 말씀의 신학

- 바르트의 3가지 강조점

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한다

③ 하나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토대 위에 신학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말씀의 3중 형식

① 성육신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② 쓰여진 말씀: 성경

③ 선포된 말씀: 설교

 

2)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 기독교교의학(1927), 교회교의학(1932) 이후부터 그의 신학은 기독론적 접근법으로 모아졌다. 모든 신학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로 보았다. 그의 교의학의 네 가지 주제는 말씀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진정한 길은 없다고 보았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3중의 양식으로 알려진다고 했다. 이것을 삼위일체의 구조라고 했다.

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고

②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과 형상이고

③ 성령은 형상이며, 말씀을 전달하는 힘이다.  

 

4. 과오 및 비판

 

1)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be)’가 아니라 ‘말씀이 된다(become)' 라고 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pp. 528, 529).

 

2)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p.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54, 55).

 

3)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 무용담)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p. 42).

 

4)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성육신, 부활 등)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고르),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pp. 29, 30)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그것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 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5) 보편 구원론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I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6)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5).

 

 

9장. 根本主義, Fundamentalism

 

1. 배경

 

1) 9세기 말경 미국신학은 Charles Darwin의 진화론의 도입과 Unitarian주의의 삼위일체론의 거부, 지질학의 연대설의 출현, 독일에서 유입된 고등비평 등으로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한마디로 성경은 합리주의에 의해 도마 위에서 칼을 기다리는 생선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2) 20세기 들자 미국교회는 각성의 눈을 뜨고 드디어 이 악마적인 요소를 멸절시키고자 다양한 세력들이 청교도의 정신으로 봉기했다. Dwight Moody의 전도운동과 Niagara Conference 운동이 이러한 운동의 선두에 섰다. Moody의 전도운동이 외적으로 성경을 거리에 들고 나간 대중집회 운동이라면, Niagara운동은 내적 운동으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모아 사경회를 인도하는 운동이었다. 이 두 운동은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자유주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교회를 다시 건설하여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확고히 세우자는 초교파적인 보수주의 운동이었다.

 

3) 1895년 Niagara 사경회에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공격하는 성경의 근본적인 다섯 가지 교리를 선정,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⑴ 성경의 무오성, ⑵ 예수의 동정녀 탄생, ⑶ 예수의 대속적 죽음, ⑷ 예수의 육체적 부활, ⑸ 예수의 육체적 재림이었다. 그리하여 이상의 5대 근본교리를 중심으로 하여 모인 자들을 지칭하여 근본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다.

 

2. 발전

1)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본주의 운동은 활발한 문서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가운데서도 “The Fundamentals:A Testimony to the Truth"라는 12권의 신학 논문집은 당시 보수주의 신학을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집필자들은 당시의 권위 있는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그 논문집은 300만권 이상 보급되었는데 당시의 집필자들은 Benjamin B. Warfield, John C. Ryle, M.G. Kyle, Charles Edman 등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참여했다. 내용적으로는 전 천년설 등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의 글은 자제하는 한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선교와 전도에 대한 글도 포함되었다.

2) 이 논문지들의 여파는 예상외로 강력했다. 미국의 각 신학교는 자유 대 보수로 나누어졌다. 둘 간의 신학적 대결은 치열해졌다. 그 결과 각처에서 보수주의 계통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의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신학교로는 R.A. Torrey가 세운 Los Angels 신학대학, C.I. Scofield가 세운 필라델피아 신학대학, D.R. Moody가 시카고에 세운 무디신학대학, L.S. Chafes와 H.G. Thomas가 세운 Dallas 신학대학원 등이다. 이 신학교들은 보수적 신학연맹을 결성하였는데 당시 가입한 신학교 수는 무려 100개교가 넘을 정도였다. 이러한 신학교들은 대부분 독립 체제를 운영하였는데 졸업생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으로 돌아와 성경을 지키는 보수주의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 갈등과 분리

 

1) 1920년대까지 필라델피아의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는 당시 세계에서 자랑하는 보수신학의 보루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당시 Machen박사는 프린스톤에서 신약과 변증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는 프린스톤신학교가 자유주의화 하는 것을 막기 온몸을 던져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교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인 Stevenson과 Macartney가 주동이 되어 신학교 행정체제와 교단정치에 위반한다는 명분으로 Machen 박사의 교수직을 박탈하고 아울러 소속교단에서 제명까지 결행하고 말았다.

 

2) 이에 Machen 박사는 동조자들과 함께 1929년 독립적으로 Westminster신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라는 이름의 교단을 창설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롭고도 혁신적인 신학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3) 그런데 대부분 무천년주의자들로 구성된 Westminster신학교에 반동이 일어났다. Carl McIntire를 중심으로 한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성을 가지고 Westminster의 무 천년설을 비판하고 따로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교단과 Faith 신학교를 설립하고 분리해 나갔다. 그들의 이러한 근본주의 운동은 주관적이며 지협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아집주의적 경향으로 경도되었다.

 

4) 그 결과 전 천년주의자들은 분리주의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장로교회 경우보다 침례교회가 더 강한 분리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교리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경향성에다 교회의 정치적 독립주의가 침례교회의 분리를 재촉했다. 그 여파로 1930년 이후엔 The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교단과 The Conservative Baptist Association of America 등의 교단 등이 분리되어 나갔다. 나아가 그들 분리주의자들은 W.C. C 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기존의 보수진영과 협의도 없이 C. McIntire의 주도아래 1948년 독자적으로 I.C.C.C라는 단체를 조직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보수주의 진영은 힘을 양분하거나 분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4. 활동

 

1) 1960년대에 들자 근본주의는 정치 참여에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전략을 버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생각을 사회에 주입시키는 적극적인 선교의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미국 사회는 너무나 타락하여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그토록 자랑하던 청교도의 삶은 형체조차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다시 회복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근본주의자들이 지적한 대로 마약과 도색문화, 동성애, 낙태, 이혼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심각한 실정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퇴폐문화가 자유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죄를 조장하는 자유주의의 파도를 부셔버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자 현안이 된 것이다.

 

2) 이러한 운동은 드디어 정치적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미국 공화당을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TV방송을 주도했던 Jerry Fallwell, Pat Robertson 등이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으로 인해 미국사회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의 차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5. 긍정적 평가

 

1) 근본주의 운동은 처음엔 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운동이 힘을 얻게 된 것은 과거 자유주의자들이 인용한 진화론과 지질학의 연대기설 등이 컴퓨터 관련학문과 유전공학의 발달로 하나의 가설(Hypothesis)에 불과하다는 점이 점차 사실로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DNA의 연구는 생물 속에 진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종족 보존의 유전 인자를 더욱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지질학의 연대계산은 컴퓨터 지질학적으로 볼 때 기존의 일반 지질학의 연구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인류의 연대가 수만 년으로 알고 있던 것이 컴퓨터의 공학적 연구에 의해 1만년이 넘지 아니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동안 미심쩍어했던 성경의 연대를 강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나아가 자유주의와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형성된 과학과 과학절대주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2) 성경의 권위의 회복과 보수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각처에서 도덕 복고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Reagan 대통령부터 Bush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공화당이 집권을 계속했다. 덩달아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가 힘을 얻어가기 시작하였다. 이 영향으로 미국의 사회는 청소년을 강하게 다루는 법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고 사형제도가 각 주마다 부활하게 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은 이렇게 미국사회를 정화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다.

 

6. 문제, 그리고 한계

 

1) 먼저 근본주의 운동은 개혁파 교회가 강조하는 역사적 전통에 기인한 교리적, 윤리적, 제도적 개혁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른 보수주의 운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을 강조하는 세대주의가 자연스럽게 교리적 배경이 되고 말았다.  

 

2) 그리고 객관성을 결여한 강한 주관주의는 많은 폐단을 낳았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가 습관화 된 듯하였고, 같은 세대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주장과 약간 다른 교리를 주장하면 정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이 반동으로 1970년대 이후부터 근본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 의한 신복음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다음으로 개혁신학은 시대적으로 교리의 도전을 받을 때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는 신학운동의 문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교회의 역사적 의미를 뒤로 하는 시대적 제한성을 소유한 신학이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는 시대적 상황이 종료되자 그 힘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에 비해 개혁신학의 역사는 자유주의가 전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에도, 근본주의가 북미 대륙에서 유행병처럼 번질 때에도 시대의 조류에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가담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영향 받지 않고 변함없이 자신의 신학을 유지해 왔다. 이것이야 말로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신학임을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4) 근본주의는 자체적인 모순과 이원론적 대립으로 인해 자멸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아야 한다. 앞에서 기술한대로 근본주의가 처음에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큰 힘을 얻었지만 이원론(Dualism)적인 신학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세속에 대한 지나친 경계선과 세상의 배척, 과학에 대한 혐오, 일반 문화와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거절하는 지경으로 치달아 스스로 고립의 세계로 걸어가게 되었다.

 

5) 결국 근본주의는 신 복음주의를 낳았고 이러한 운동에 대한 근본주의의 자기 성찰은 문화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리는 듯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입장에서의 일반은총을 강조하기 보다는 비평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서 여전히 이원론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였고 그들의 신학적 주장 또한 세대주의적인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6) 결론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교리는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모두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와 개혁주의의 교리적 차이점은 성경에 대한 강조점을 부분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전체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10장. 宗敎多元主義

 

종교다원주의의 공통적인 주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두 사람의 견해를 알아본다.

 

1. 최덕성의 견해

 

첫째, 역사적인 종교들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구원의 길'이다. 각 종교인들은 각각 다른 길을 거쳐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중심의 존재에서 실재중심 또는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치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어 본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현하며 하나님의 나라, 불국(佛國), 대동세계 실현에 힘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전통을 가진 인류를 위한 유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근거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 속에 차별 없이 관대하게 역사하고 있으므로 특정 종교가 인류의 하나됨의 구심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셋째, 각 종교의 배후에는 궁극적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가 있다. 모든 종교는 같은 신적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 등은 인간이 각각의 문화 조건 하에서 신적 실재를 그린 서로 다른 그림이다. 진정한 진리는 각 종교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들 안에 자신을 계시한다.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전통을 따라 신과 관계하고 구원을 받는다. 딸서 선교는 다 구원의 길이다. 선교는 더 이상 비기독교 신자를 기독교로 회심시키려 하지 않아야 한다.(중략) 종교 간의 대화로 서로를 존중하고 세계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한다.

 

넷째, 각 종교는 자기의 고유한 것을 유지하면서 타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답게, 불교는 불교답게,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답게 각각 고유한 색깔과 독특한 향기를 발해야 한다. 각자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여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 다른 종교를 자기가 믿는 종교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정 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명의 경건한 신도를 가진 종교를 어찌 참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진리 담론은 역사, 문화,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으므로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인간이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해 완전한 인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실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제한된 이성으로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종교의 가치는 경험에 있고, 그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인간 역사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계시란 항상 현재적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계시는 진리를 보여주기에 불충분하다. 기독교의 계시는 다른 종교가 가진 계시와 동등한 차원에 있다.

 

2. 서철원의 견해

 

첫째,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신은 절대자이고 궁극적 실재이지만 이 존재를 체험한 것은 역사 내에서 이루어져 상대적이므로 어떤 한 종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구원종교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이다.

 

둘째, 예수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냥 보통 인간일 뿐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정하여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종교요 절대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신약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성육신의 사상은 후기 교회가 이방종교들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를 주라고 높여서 한 사랑의 고백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들은 다 비신화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는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로 말한 적이 없이 그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예수가 경험한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고 궁극적 실재인데 그 존재를 신으로 표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구주로서 모든 종교들에 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나타난 구원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제공을 위해 노력한 모든 종교의 설립자들도 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가 펼치는 구원은 다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넷째, 종교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이를 위해 자기의 종교만 주장하지 말고 대화를 하여 서로 유익을 보며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종교는 절대적인 것이 없고 다 궁극적인 실재를 역사의 한 구간에 경험한 것이므로 시대마다 이루어진 신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져 서로 성장하고 자기 종교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의 대 기독교 입장

 

1)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 특히 구원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대략 세 가지 부류들이 제시되고 있다. 즉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이다.

 

첫째,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구원진리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현대적 신약 성서학의 영향,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현대의 문화적 경험, 그리고 보다 넓어진 다른 종교들에 대한 지식 등에 근거하여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몇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존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고 보며, 레이몬드 파니카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며 '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 되었으나 그것은 모든 역사적 형태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역사적 상대성에 기초하여 '어떤 종교나 종교인물도 신의 전적인 신비 앞에서 자신을 궁극적인 말, 충만한 의미로 말할 수 없기에 하나의 종교는 자신의 추종자에게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어느 종교인에게도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해방신학 혹은 정치신학은 윤리적 실천을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판단기준으로 삼고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세계의 역사에서 비도덕적 태도, 우월성, 불관용, 몰지각한 판단을 유발시켰음으로 그것을 철저히 재평가하고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존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둘째, 포괄주의는 성서만을 유일한 규범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신앙전통을 용납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신학적 주장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실제 알갱이가 거의 같은 주장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Ⅱ보고서라든지 칼 라너 같은 사람들의 '익명의 그리스도' 주장을 보면 교회 밖의 타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이 미치는데 이 말은 타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개념인데 이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되어진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이 견해는 신학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배타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개념적 주장이고 실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론'에 따르면 타종교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모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종교다원주의와 실천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이들은 타종교 안에 있는 자연계시 

를 인정해주고 강조한다. 일괄하면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많은데 그 마지막 접근로에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올려놓은 모양이 된다. 가톨릭 안에서 한스 큉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아예 기독교밖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자고 하기도 한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 신학교 교수들이 이런 기독교 밖의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부 제3세계 신학자들도 이 포괄주의의 입장에서 타종교들 안에 존재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셋째, 배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건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수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계시의 절대성과 무오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1:12).

 

4.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들

 

1) 칼 라아너(Karl Rahner, 1886-1968)

-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자로서 종교다원주의를 신학적으로 확립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라는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익명의 그리스도론(Anonymous Christology)'을 주창한다. 사람이 진지하게 자기의 실존을 받으면 그는 유신론자이며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즉, 비록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2)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 스페인 출신 로마가톨릭교회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 신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이며, 현재 세계교회협의회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그는 두 종교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종교 간의 대화를 주창한다. 초기 작품인 『힌두교의 익명의 그리스도』(1964)에서는 계시의 완성이 역사적 예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17년 뒤에 같은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는 그리스도의 절대 우월성을 대폭 수정하여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천명한다. 그리스도가 기독교와 관계없이 힌두교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 그에 따르면 각 종교가 서로 다른 교리와 실천과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로고스’를 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이법’, ‘신적 빛,’ ‘이성의 빛’ 인 로고스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 이 로고스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인물에 제한되지 않으면, 구체적인 역사 사건과 인물 속에서 그 순수성과 투명성을 달리하면서 드러난다. 다양한 종교들은 로고스의 현존이다. 예수 ․ 석가 ․ 공자는 로고스의 구체적인 성육화(成育化)의 결과라고 본고 있다.

 

3) 존 힉(John Hick, 1922- )

- ‘신중심주의 신학’ 이라는 종교다원론을 주창한다. 그는 칼 라아너가 타 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교조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탄한다. 그에 따르면 ‘배타주의’를 벗어나기는 했으나 ‘포용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본다.

- 그는 또 기독교 신앙이 예수중심의 모델에서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위대한 세계종교들이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환경에서 형성되고 서로 다른 자각들이 구체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세계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게 응답한 결과이며 그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이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 힉의 관심은 모든 종교가 제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가, 아니면 같은 신을 섬기는가, 여호와, 알라, 라마 등은 별개의 신의 이름인가, 아니면 같은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인가에 있다. 그는 모든 종교가 같은 신을 섬긴다고 주장한다. 여호와, 알라, 하늘님 등은 같은 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적 우주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이 있으며, 예수는 신과의 만남을 위한 중재자이지만, 유일의 중재자는 아니라고 본다.

- 힉이 출간한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의 핵심은 한 마디로 이명동일신론(異名同一神論)이다. ‘우주적 실재’는 한 분이지만, 그 분은 문화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다른 언어 구조가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들어 냈는데, 헬라인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하고, 유태인은 ‘야훼’(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하며, 고대 인도인은 ‘아트만’ 또는 ‘달마’ 또는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르고, 중국인은 도(道), 천리(天理), 천명(天命), 아랍인은 ‘알라’, 한국인은 ‘하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반증이라는 것이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신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4) 폴 니터(Paul F Knitter)

- 기독교가 종교다원 사회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종교와 대화하자면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에서 신 중심 세계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왜 한국교회가 통일교하고 싸우느냐고 비난하고, 궁극의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를 강조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따위의 발상을 버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한다고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그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예수의 선교활동은 하나님 왕국의 실현에 목표가 있었다. ‘당신의 왕국이 이루어지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한 것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신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신 중심, 왕국중심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가 ‘그리스도 중심의 모델’로 바뀐 것은 그가 죽은 뒤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각(浮刻)시킨 것은 초대교회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말한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으로 풀이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인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진리가 확실하고 하나이며 불변하다고 믿는 고전주의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대교의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전승의 맥락이 지배하고 있었다. 또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강력한 배타적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이러한 바탕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기독교인들의 ‘고백’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민주주의적인 다원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성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다. 고백 언어는 다른 구원자의 실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수 외에도 하나님께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있다. 보편적인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구분된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예수를 거쳐서만 계시된 것은 아니다.

- 그러므로 니터는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의 관심을 예수의 삶을 본받는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옮겨야 하며, 참 인간이 되는 길과 참 평화를 실현하는 관점을 가지고 종교 간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종교해방신학’ 의 관점으로 인간의 복지와 평화 실천을 위한 종교 간의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대화는 자기 종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 모든 종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 곧 하나님의 뜻, 인간복지, 인류평화, 전쟁억제, 빈민구제 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활동의 모범을 보였다.

 

5)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문화와 종교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깊이 생각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이 여러 종교 안에 작용하므로 기독교인은 타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일본 종교계를 둘러보면서 어느 신도(神道) 사제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가 만약 일본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신도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서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당신은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도사제가 되었다’ 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나 신도교가 외형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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