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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8.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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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아리엘교회

- 이 글은 변종길의 <오순절운동과 성령세례, 말씀사, 2012>를 주된 텍스트로 하여 기타 관련 자료를 필자가 참고로 인용하거나 발췌하고 또 내용을 알맞게 첨삭하였습니다.

1장. 배경

1. 1970년대부터 수입된 오순절운동의 여파로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중 전통적 교회와 가장 큰 갈등은 바로 성령세례의 문제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를 별도의 체험 즉, ‘두 번째 체험’이라 말하며 새로운 성령운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이 또 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 있는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오순절 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기성 교회는 혼란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 ‘초자연적이고 특별하고 가시적인 성령의 역사가 사도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신자의 회심 후 체험 속에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오순절주의자들의 특징이다.

2.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난점이 존재한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이런 것은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한다(벧후 3:16). 그래서 ‘성령세례’라는 용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다. 특히 사도행전은 누가가 교리적으로 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기술했기에 명확한 교리를 구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성경의 단일성이라는 대원칙을 전제로 하고 통전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2장. 오순절운동의 역사

1. 몬타누스주의(2세기)

- 라인홀트 제베르크는 몬타누스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계시의 마지막 시대가 열렸으며 이 시대는 신령한 은사의 시대이다.

 신앙의 규칙을 인정함으로 정통성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 세상의 종말을 특히 강조했다.

 엄격한 도덕적 요구를 강요했다.

2. 메소디즘(Methodism)

1) 웨슬리 형제의 엄격하고 규칙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조소하는 투로 부르던 용어로 18세기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운동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2) 존 웨슬리를 오순절운동의 조상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전하고 가르친 ‘그리스도의 완전’(Chrisyian Perfection)이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두 번째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와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중점적으로 전하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성화’였다. 이것은 ‘은혜의 두 번째 역사’라고 불리는 것인데 ‘칭의’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 성화는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러한 체[험이 있기 전까지 점진적인 은혜의 사역이 선행되지만 성화의 역사 그 자체는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18세기의 메소디즘은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의 어머니이고, 이 성결운동은 20세기 오순절주의를 낳았다.”(브루너)

“죄와 죄의 세력에 대한 점진적인 확산 후에 순간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듯이 내주하는 죄에 대해 점점 증가하는 확신을 가진 후에 순간적으로 성화될 것이다”(1784년 6월 21일자 편지에서)

3) 이러한 칭의 후의 즉각적인 성화의 체험의 교리는 오순절주의의 ‘회심 후 성령의 세례’라는 교리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 찰스 피니(C. Finney)와 미국의 부흥운동

1) 웨슬리의 메소디즘을 가지고 19세기 침체한 미국의 부흥운동을 대표적으로 주도한 두 사람이 피니와 무디(D.L. Moody)이다. 이중 피니는 메소디즘과 오순절운동의 주요한 역사적 다리였다. 피니는 1821년 10월 10일 아침 일찍 숲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기도한 후 근무하던 법률사무소에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에 ‘막강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때 그의 몸과 혼을 꿰뚫는 것 같았고,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별다른 신학교육 없이 목회자가 되었다.

2) 그는 회심 이후에 임하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성령의 기름부음’ 또는 ‘성령의 세례’로 표현했다. 여기에 특별히 성화를 강조하여 법정적 칭의보다 실질적 성화가 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영적 위기’를 강조하며 사람들을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몰아갔다.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능력을 힘입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장시간 기도하는 일에 힘썼고 가는 곳마다 기도회를 조직했다.

3) 1857-58년 사이에 그가 일으킨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에 이르자 이 운동은 새로운 성결운동으로 이어졌다.

4. 성결운동(19세기 후반)

1) 성결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에는 남북전쟁이 자리잡고 있다. 전쟁 이후 미국은 도덕적 타락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 타락도 심각했다.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수입되어 기독교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2) 특히 감리교 내부에서 교회의 영적 침체에 대해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웨슬리안적 유산에 충실하자는 반성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회심 후 ‘두 번째 체험을 하자’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2차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모든 신자들은 ‘순수한 마음, 성화, 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화의 체험’ 즉 ‘성령의 두 번째 축복’을 대중화했다. 이 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보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첫 체험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첫 체험 후 수년 만에 일어나는) 두 번째 체험이 있다. 이것은 두 번째 회심이다.”(Higher Christian Life 중에서)

5.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론

1) 19세기 성결운동이 20세기의 오순절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있어서 교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무디의 동역자였던 토레이이다. 그의 저서 <성령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주의의 교리서이다.

2) 그는 여기서 성령의 세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성령세례는 자신이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고, 또는 알아야 하는 뚜렷한 하나의 체험이다.

- 성령 세례는 거듭남을 전제로 한 별개의 활동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는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요 13:10)

- 진정한 신자는 누구에게나 성령이 내주하시지만(롬 8:9) 모든 신자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성령세례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과 매우 다른 것인 동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체험으로서 내주하시는 존재 전체를 완전히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상태이다.

- 성령 세례는 근본적인 복음 증거와 사역을 위한 것으로서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5-8)

- 성령 세례의 구체적인 표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전 12:4-13)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은사를 받고 능력을 받는다. 이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 성령 세례의 또 다른 결과는 증언과 사역에 있어서 담대함이다.

- 성령 세례는 그것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영적인 일들에 몰두하게 만든다.

6. 오순절운동

1) 오순절운동은 성결운동으로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좀 더 무엇’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이 ‘무엇’이 바로 방언체험이었다.

2) 1901년 1월 1일 팔함성경대학에서 팔함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던 오즈먼이라는 여학생이 갑자기 중국어로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후 3일 동안 영어로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3) 1906년 LA 아주사 거리에 있는 감리교회 건물에서 윌리엄 세이무어라는 성결운동가가 설교를 했는데 이때 성령세례와 방언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큰 부흥이 발생했다. 이 장소에 마침 노르웨이의 감리교 목사인 바라트가 참여했는데 그도 성령세례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 이 운동을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유럽지역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성회’ 등 하나의 교단을 구축하고 지금은 별도의 독립된 교파로 존속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계열에 속한 신자 수는 약 9,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며 비 오순절교회에서 이 운동을 지지하는 수도 계속 증가되고 있다.

7. 신오순절운동

1) 1950년대에 들어 ‘성령세례’와 방언‘이라는 현상이 비 오순절교회에까지 침입했는데, 이처럼 오순절교회 밖에서 오순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오순절주의자들‘(Neo Pentecostals)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오늘날에 이르러 ’은사운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2) 무엇보다 이런 현상을 낳은 주된 원인은 기성교회의 영적인 무기력과 침체 때문이었다. 영적인 갈증을 느끼던 기성교인들에게 신오순절주의가 소개하는 새로운 능력과 기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3) 한편, 무엇보다 은사운동은 기성교회에게 경각심을 던지고 있다. 은사운동에 심취한 신자들은 이제 기성교회의 경건함을 케케묵은 전통만 고집하는 무료하고 따분하고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제아무리 교리가 옳다고 해도 교회생활이 기쁘고 즐겁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무기로 새로운 신앙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성교회는 점점 축소되고,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즐겁고 지루하지 않은 ‘열린 예배’로 인해 성경적인 예배가 파괴되고, ‘온전하고 경건을 추구하는 신자들’ 대신에 ‘절반의 교인들’이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3장. 오순절 교리

1. 두 가지 요점

- 오순절 교리는 크게 보아서 은혜의 두 번째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교리와 방언교리로 구성된다. 이 교리의 핵심은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한다. 그중에서 특히 성령세례가 오순절 교리의 핵심이다.

2. 성령세례

1)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 첫째, 두 번째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성령세례가 두 번째 체험임을 확증하기 위해 이들은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이미 중생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 둘째, 봉사를 위한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가 있다.

2) 토레이는 행 1:5에 대해 “제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했다고 선언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아직 그들에겐 몇 날 후의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8:12(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19:1-2(에베소 사람들의 세례)의 경우도 중생은 했으나 성령세례는 받지 못한 경우로 해석한다. 그는 분명히 ‘성령의 중생’과 ‘성령의 세례’를 구분하며 전자는 ‘생명의 구원’에 후자는 ‘능력과 봉사’에 관련시키고 있다.

3) 커밍도 동일하게 주장한다.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이미 중생했지만 오순절을 기점으로 제자들의 신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지혜, 용기 등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능력에 있어서의 변화라고 설명했다.

4) 조용기는 그의 <성령론>이라는 책에서 “성경에는 중생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한 예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전제하고(그 증거로 요 5:24상, 13:10, 눅 10:20, 행 1:4-5를 든다), “성경은 믿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5) 오순절주의자들이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인 무기력과 침체를 바로 바라보고 이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와 노력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리나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능력이라 보고 오직 이것에 치중한 것은 교회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미숙하고 영적 이기주의자인 신자들만 잔뜩 양산하여 기독교의 침몰을 야기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과오이다. 특히 이들의 요란하고 외향적인 영적 체험운동으로 인해 전통적인 경건한 예배가 붕괴되고 있는 것은 현대교회에 있어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4장. 올바른 견해

1.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이다.

1)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도행전의 주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 사업에 대한 성령의 증거이다.(중략)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영구한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 성취의 문을 여신 것이다”(‘사도행전 주석’에서. 영음사, 1981)

2)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속사적 중요성을 “매우 중요한,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영단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고”고 기술한다.

2.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사건이다.

1) 완성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와 온 땅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이 복음전파의 결과로 교회가 탄생하였다. 물론 교회는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오순절 전에도 교회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마 16:18, 18:17), 예수님의 완성된 구속 사업을 기초로 한 복음전파에 의한 신앙공동체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의해 초래된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이며 성령시대의 시작이다.

2) 한편으로 오순절사건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첫 번째 사건(오순절사건을 자꾸 두 번째 사건으로 보려는 오순절주의자들을 염두해 둔 표현이다)이며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이며 교회시대의 시작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경륜에서 보면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이어서 일어난 구속사업의 마지막 사건이다.(존 스토트)

3. 중생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다시 강림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1) 분명히 오순절 전에 제자들은 믿음의 선물을 받고 중생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오순절에 그들이 왜 성령을 다시 받아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이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은 분명히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동시에 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마지막 구속 사업이자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서 보면 제자들은 구약의 성도와 비슷한 지위에 속해 있었고 신약시대의 구원 이전에 속해 있었다. 한 마디로 구약과 신약의 전환기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2) 제임스 던은 <성령 안에서의 세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순절 전의 120명의 제자들은 요단강 이전의 예수님의 그것과 유사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옛 시대의 구원에 속해 있었다“

3) 엉거(Unger)도 <세례와 선물>에서 ”오순절 전의 제자들은 새 시대의 보편적 구원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4) 변종길은 이것을 ‘창당준비위원회’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즉 120명은 ‘예수당’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에 의해 임명된 발기인들로서 창당준비위원회(위원장: 베드로)를 꾸리고 있다가 오순절을 통해 창당이 선포되자 준비위원회는 자동적으로 해체되고 준비위원들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정리하면, 오순절날 제자들은 새 출발을 했다.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그런 것은 이제 지나간 일로 여기고 오순절 사건을 통해 새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한때 준비위원장이었던 베드로는 행 11:15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처음(아르케)으로 말하고 있다. 왜 베드로가 그날을 ‘처음’이라 말했는가?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의 시작이냐 하면 바로 복음전파의 시작이요 신약적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다고 했는데 왜 오순절 날에야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고백했는가, 그 전에는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믿었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새 출발’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전 에 믿었던 것은 없었던 것으로 치고 또는 준비하는 기간으로 보고 이제부터 성령의 강림과 함께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성령세례와 충만은 다른 것이다.

1) 사도행전 1:8에서 성령세례의 결과적 현상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권능을 받는 것과, 예수님의 증인 되는 일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결과물을 매우 중시한다. 즉, 성령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 두 가지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견해이다.

2) 특히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복음전파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체험한 것은 분명히 성령의 세례이지만 이 세례의 결과로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라는 행 2:4가 이를 증명한다. 원어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성령세례에 이어 또는 그 결과로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성령세례와 충만의 사이에 ‘카이’(그리고)라는 접속어가 연결고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에 이어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3) 단지 오늘날과 다른 점은 오순절 날 제자들의 경우엔 모두가 성령세례에 이어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특수한 상황이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날 성령세례를 받고 회심과 중생을 경험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충만함을 받지는 않는다. 물론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우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성령충만을 완성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4) 중요한 것은 성령의 세례는 단회적이고 영구적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받았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즉 성령세례는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세례라는 말이 신약에서 시작의 경우에 한정되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성령충만의 결과 제자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다.

1) 성령충만은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의 능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다. 그 결과 교회의 큰 부흥이 일어났다.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3천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2) 성령충만과 성령의 능력은 아주 밀접하다. 이것이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능력은 충만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증인이 되는 것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충만은 성도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헌신적인 증인으로 만들고, 특별한 사역이나 직무, 또는 시급한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절대적인 무기가 된다. 참고로 바울서신은 주로 성도의 생활과 관련한 성령충만에 대해 논한다면(엡 5:18, 골 3:16-17), 사도행전은 능력에 관계된 복음전파로 나타나는 성령충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행 4:8, 31, 13:9)

3) 예수님의 경우,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권능이 차례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눅 3:21-22),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눅 4:1-13),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다(눅 4:14). 그리고는 백성들을 가르치셨다(4:15). 이것을 정리하면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권능- 복음의 전파’의 순서이다. 즉, 성령세례는 능력을 받는 시초이지만 성령세례 그 자체는 능력 받음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단회적 사건인 성령의 세례를 근거로 해야 한다. 성령세례 없이 성령충만이 있을 수 없다.

5장. 결론

1. 물세례를 포함해서 세례의 개념은 시초적이고 진입적이며 단회적이며 영구적이다. 개인의 경우에 세례는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고 단체의 경우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자 출발이다. 오순절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명백히 구분 짓는 날이었다.

2.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을 새로운 성령의 세례, 즉 ‘두 번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제자들 개인의 입장에서만 바라본 편협하고 굴절된 해석이다.

3. 새로운 교회의 시대와 함께 모든 신자는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성령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말씀과 기도와 헌신을 통해 얻어지는 성령의 능력이다. 말씀충만이 곧 성령충만이다. 방언도 성령충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방언의 선물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받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일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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