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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사(CCK)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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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C.C.K(최더함)

 

<칼빈 이후>

1. 스위스  2. 프랑스  3. 네덜란드  4. 남아프리카  5. 스코틀랜드  6. 영국  7. 미국  8. 한국 

 

1. 스위스 개혁교회

 

1) 1564년 칼빈이 죽은 이후 제네바는 오스트리아령 사보이의 침략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이에 제네바는 1584년 베른과 취리히와 우호조약을 멪고 사보이의 위험을 물리쳤으며, 1603년부터 어느 정도 자주권을 행사하는 독립도시가 되었다.

 

2) 이런 상황에서 제네바 교회를 지켜온 사람이 바로 칼빈의 제자요 제네바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베자(Theodore Beza, 1519~ 1605)였다. 그는 1548년 심한 병고를 치른 후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칼빈의 개혁운동에 동참했다. 1559년부터 제네바 아카데미 학장과 헬라어 교수로 봉직했다. 1564년 칼빈의 생애를 저술했고, 1576년 칼빈의 교회헌법을 개정하고 권징을 보다 엄격히 시행하여 제네바를 강도 높게 개혁했다. 한편 베자는 칼빈의 평등사상을 사회구조 가운데 적용하였다. 그는 1573년 <행정관료의 규율>이라는 책에서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지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교회 안에서도 힘 있는 목사가 힘없는 목사를 지배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목사회의는 의장제도를 도입해 매년 의장을 교체토록 했다. 근 또 철두철미한 예정론자로 타락전 예정론을 주장했다. 베자는 인위적 예배행위를 거부했다. 특히 성찬 시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했다.

 

3) 칼빈과 베자의 영향으로 스위스교회는 독일어권을 제외하고 장로교 정치사상을 받아들였다. 바젤에서는 요한 야곱 그리나우스와 요하네스 볼레비우스가 개혁주의 신앙을 보급했고, 베른에서는 아브라함 무스쿠루스가, 취리히에선 루돌프 그발터가 활약했다.

 

4) 17세기 제네바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프랑수아 투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다. 그는 1648년 제네바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된 후 개혁주의 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신학논박개요, 1679>를 통해 소뮈르학파의 가설적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전통적인 개혁신학을 옹호했으며 그의 조직신학은 오랫동안 개혁신학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장 알퐁스 투레틴은 개혁주의 신학을 버리고 자연신론과 합리주의를 수용하여 제네바의 신학을 좌경화시켰다. 이때부터 제네바 신학은 진보적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 점점 세속화되었다.

 

   

2. 프랑스

 

1)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이미 칼빈 이전부터 있었다. 12세기 피터 왈도를 주도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고, 16세기엔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경을 원어로 연구하고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다.

 

2)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점화된 종교개혁은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1515-1547)는 이태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1516년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조약을 체결하고 점점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왕은 교회법에 따른 감독 선출제도를 폐지하고 10명의 대주교, 83명의 주교, 527명의 주임신부를 직접 임명하였으며 교회가 소유한 방대한 이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는 인문주의자들에게 관대했으며 성경연구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1526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통치권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와 왕권을 위협하자 왕은 1533년부터 정책을 달리하고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칼빈은 이처럼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1536년 기독교강요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3) 프랑수아를 이은 앙리 2세(1547-1559)의 박해는 더 극심했다. 앙리는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남편으로 어린 나이에 왕좌를 받았으므로 외삼촌인 로레인이 섭정을 했다. 그는 곳곳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칼빈의 제자들인 개혁운동가들을 화형에 처했다.

 

4) 이러한 박해에도 1546년 개신교도들은 모에서 최초로 개혁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칼빈의 제자인 쟌 마르숑을 목사로 선택했다. 1559년에는 100개로 늘어났고, 1562년엔 2,150개가 되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조국의 종교개혁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사역자들을 파송했다. 1555년부터 1572년까지 최소한 120명의 선교사가 프랑스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프랑스개혁교회를 결성했으며, 칼빈의 제자 앙뜨안느 샹듀가 초안한 ‘프랑스 신앙고백서’와 ‘권징규칙서’를 채택했다. (이 때부터 개혁교도들은 ‘맹세한 동무들’이란 뜻의 ‘위그노’라 불려졌다). 교회정치제도는 제네바의 규범을 따랐지만 더 발전된 형태였다. 당회, 노회,(10-15개 개교회) 지역대회와 전국적인 총회를 두었고, 각 지역에 속한 교회들이 목사와 장로 1명씩을 총대로 파송했다.

 

5) 위그노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퍼지자 로마천주교회와 프랑스 정부당국은 위협을 느꼈다. 결국 로마천주교회가 공격을 감행했다. 위그노들도 응전을 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소식을 듣고 1557년 9월 16일 위그노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무력시위의 중지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라고 요청했다.

 

6) 앙리 2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동생인 샤를 9세(1560-1574)가 왕위에 올랐으나 메디치가 섭정을 했다. 메디치는 1561년 1월 17이 생 제르맹 칙령을 선포하고 위그노드에게 관용을 허락했다. 이후 위그노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562년에는 전체 인구의 1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의 성도로 늘어났다. 이때 남부 지역의 왈도파들이 합세하여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1562년 3월 1일 예배드리던 위그노들에게 공격을 감행하여 60여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그노들은 너무 분개하여 칼빈의 충고를 듣지 않고 4월 12일 콩고드를 중심으로 모여 로마천주교회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교회 조직은 즉시 군대조직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30년 종교전쟁(1562-1598)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교회측과 왕실은 위그노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수많은 위그노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국외로 떠났다.

 

7) 앙리 3세(1574-1589)가 즉위하자 온건한 정책이 펼쳐졌다. 그래서 앙리 3세는 로마와 갈등을 빚었다. 이때 위그노의 지도자는 나바르의 앙리였다. 그는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앙리 4세(1589-1610)가 되었다. 그는 1598년 ‘낭트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로마천주교극 국교로 인정했지만 위그노들도 법으로 자유를 보장했다. 성경을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게 되었고, 대학과 일반학교에 진학하며, 공직이나 사업도 자유로웠다.

 

8) 그러나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루이13세(1610-1643)는 위그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자 했다. 이에 위그노들은 1612년 무력봉기를 시도했다. 이에 위그노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고 1629년엔 정치적 자유를 박탈했다.

 

9) 루이 14세(1643-1715)는 위그노 고사작전을 실행했다. 위그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경제적 자유를 제한했다. 예배 장소가 폐쇄되었고, 목사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위그노들은 천주교인으로 개종해야만 했다. 위그노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드디어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 목사들은 15일 안에 교회를 떠나도록 명령받았다. 교회당은 파괴되었고 학교는 폐교 당했다. 많은 위그노들이 이민의 길을 택했다. 잡히면 사형이었다. 필사의 탈출이 이어졌다. 이때 25만 명이 넘는 위그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남은 위그노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1686년부터 광야교회를 조직했다. 1715년엔 위그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시간이 지나자 광야교회는 칼빈주의를 버리고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를 도입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길을 걷게 되었다.

 

10)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했다. 왕정의 폐지와 함께 반종교적인 풍조가 전국을 휩쓸면서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위그노를 인정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목사와 전도사들이 프랑스에 와서 학교를 세우는 등 교회 발전을 도모했다. 로베르 알덴은 이때 칼빈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는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알덴의 개혁주의 운동에 반발했다. 그들은 16세기 위그노들이 채택한 ‘프랑스 신앙고백서’를 배척했다. 정통파는 1848년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장로교회를 회복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통 장로교회는 약 40만 명의 신자로 성장했다. 오늘날에도 위그노들의 후손들이 비록 소수의 그룹으로 존재하지만 그들이 사회적으로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다.

 

 

 3. 네덜란드

 

1)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소개되자 네덜란드 교회지도자들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519년 루방대학의 교수들은 그의 사상을 정죄하고 그의 글을 불태웠다. 1523년 보에스와 존 에쉬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전파하자 로마천주당국은 이들을 화형에 처하여 최초의 순교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번역되어지고 개신교 신자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갔다.

 

2) 루터파 이후 1534년에는 재세례파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상을 깨트리고 성화를 불사르고 천주교인들을 살해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카톨릭에 대항했다. 그들의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 혼란의 시기가 지나자 칼빈의 제자들이 네덜란드로 들어와 교회의 개혁운동이 점화되었다. 1542년에는 야곱 리스펠트가 신구약을 번역하고 1545년에는 칼빈이 직접 라틴어판 소요리문답을 소개하며 개혁운동을 독려했다. 칼빈이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네덜란드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네덜란드의 성도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칼빈에 의해 파송 받은 브레스 목사는 1559년 저지대를 기점으로 칼빈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4) 이에 네덜란드의 지배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로마천주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주교의 숫자를 4명에서 14명으로 늘리고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추기경 카라파에게 일임하고 수도사들에게 이단색출을 명하고 개혁자들의 글이나 책을 소지하거나 판매하는 행위를 일체 금했다. 특히 성자들의 형상을 훼손하고 성경을 읽거나 종교적인 토론을 벌인 자는 교수형에 처했다.

 

5) 한편, 카톨릭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개혁파들은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566년 500여 명의 개혁파들이 섭정 파르마의 부인을 방문하여 종교적인 자유를 청원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그들의 복장을 빗대어 ‘거지 떼들‘이라고 조롱함으로서 이후 네덜란드의 개혁자들의 별칭이 되었고 이들의 후예들은 이 별칭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루를 메고 다니는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6) 개혁파들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1567년 펠리페 2세가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진압작전을 펼치면서다. 이때 약 1,800명의 개혁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폭정으로부터 네덜란드를 구한 이가 바로 빌헬름 공(William of Orange)이다. 그는 사령관 알바의 잔악함을 목격하고 1568년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개혁파의 편에 가담했다. 그는 1572년 펠리페 2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1579년 7개 주의 대표들과 함께 동맹조약을 맺고 스페인과 대립했다. 드디어 1581년 빌헬름 공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국민들에 의해 통치자로 추대되었으며 1584년에는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그는 예배와 교회행정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교회개혁에 앞장섰으며, 1588년 스페인이 영국의 무적함대에 패전한 것을 계기로 1608년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

7) 1571년에 이르러 개혁파들은 교회를 대회로 조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엠덴에 모여 벨직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칼빈의 평등사상을 교회정치의 기본원리로 고백했다. 한편 교회는 권징과 생활개혁을 실시하기로 했다.

 

8) 그런데 정작 빌헬름은 교회가 이처럼 장로교회로 개혁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칼빈보다는 츠빙글리를 더 선호했고 권징을 교회의 권한이 아닌 국가의 속한 것으로 간주했다. 정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9) 정부의 교회간섭은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 논쟁 때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베자 밑에서 수학했다. 1587년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벨직신앙고백서 16조(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에게 자비하시고 죄와 유기 가운데 버려진 다른 이들에게는 공의롭게 행하신다)의 내용을 수용하지 않았고,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배척하였으며 만인구원론을 주장하고 인간의 구원은 불확실하다고 가르쳤다.

 

10)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반한 사람은 고마루스(Gomarus, 1563~1641)이다. 그는 아르미니우스가 1603년 라이덴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자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이단적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에 네덜란드교회는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동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파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칼빈주의파 간의 치열한 신학논쟁에 접어들었다. 교회는 1605년 총회를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는 교회가 정부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파의 편에 서서 교회의 이러한 노력을 방해했다.

 

11) 그러나 아르미니우스파들은 점점 세력이 위축되어 갔다. 이에 1610년 46명의 아르미니우스파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위치를 보호받고자 정부의 보호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에 그들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전면 부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르미니우스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했다.

 

12) 그리고 정부는 1618년 11월 13일 아르미니우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르트에 교회회의를 소집했다.(도르트대회) 이 대회에는 18명의 의회 의원, 58명의 목사와 장로, 영국과 베른, 취리히, 제네바, 브레멘, 바젤, 낫소, 헤세 등에서 파견된 3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회의는 1619년 5월 19일까지 154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마침내 도르트대회는 칼빈주의의 핵심교리인 5대 교리 즉, TULIP교리를 채택했다.

 

13) 도르트 이후 네널란드 교회는 신앙과 경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신앙을 생활에 적용하자는 운동을 펼침 사람은 빌헬름 틸링크(Teellinck, 1579~1629)이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1611년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민 왔으며 그의 <신학의 정수>는 17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그의 경건주의는 ‘판 로렌스타인’에게 계승되었는데 엄격한 생활과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체험을 역설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극단적인 율법주의로 치달았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합리적 사변주의로 변질되기도 했다.

 

14) 19세기에 들면서 프랑스가 정치적 개입을 시작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홀란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1813년 빌헬름 프리드리히가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왕위를 되찾은 뒤 개혁교회를 국교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주의자로서 1816년부터 장로정치를 억압하고 자신이 직접 교회대표들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완전히 정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이에 반 프린스터러(van Prinsterer, 1801~1876)의 주도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반혁명당을 조직하고 프리드리히의 교회탄압에 맞섰다.

 

15) 이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역사상 네덜란드교회를 가장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이다. 그는 처음에 언론인(일간 ‘Standaard')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프린스터러 이후 희미해졌던 반혁명당을 재결성하여 1874년에 자신이 하원의원에 피선되었다. 그는 교육사업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1880년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여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쳤으며, 1886년에는 돌레안티 교회를 세워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영역주권사상에 기초한다. 그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각각 고유한 책임영역이 있고, 각 영역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각 영역은 상호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모든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실천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수상이 되었으며 영역주권사상을 모든 분야에 적용하였고, 기독교학교를 공립으로 세웠고, 노동자보호법을 제정했다. 그로 인해 네덜란드는 가장 강력한 개혁주의 국가가 되었다.

 

16) 그의 후계자는 헤르만 바빙크(H. Barvink)가 이어갔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갔다. 이때 산아제한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터졌다. 인구팽창으로 산업구조가 무너지고 경제가 위축되자 이에 개혁교회는 산아제한을 지지했는데 카톨릭이 가족계획을 반대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개혁교회는 점점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오늘날 네덜란드는 다시 카톨릭 국가로 환원되었다.

 

 

 4. 남아프리카

 

1) 유럽인들의 남아프리카 이민은 1602년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회사(Dutch East Inia Company)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얀 판 리벡이 1652년 4월 케이프타운에 정착촌을 개척한 후 수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이주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등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이 때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가 폭넓게 형성되어 마침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가 탄생했고, 1618년에는 도르트회의의 결과로 아르미니우스파들이 정죄되고 칼빈주의 5대 교리가 확정되었다)

 

2) 1665년 네덜란드교회는 요한 판 아켈 목사를 파송했다. 그해 9월에 최초의 성찬식을 가졌으며 교회를 조직했다. 이어 스텔렌보쉬에 교회가 세워지고 케이프타운의 목사가 3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여 설교와 세례를 베풀었다.

 

3) 1688년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피에르 시몽 목사를 필두로 이주해 왔다. 그들은 동인도회사의 지원으로 드라켄슈타인, 파알, 벨링톤 등에 정착했다. 그리고 위그노들은 1689년에 자체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동화정책으로 위그노 2세들은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네덜란드교회로 흡수되어 갔다.

 

4) 1708년과 1751년 두 차례에 걸쳐 천연두 등 전염병의 발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722년 폭풍 때에는 배들이 파선하고 600여 명이 희생되었다.

 

5) 1745년 각 교회 대표들과 지사들을 소집하여 매년 1월에 연례 노회를 개최할 것을 합의함으로서 최초의 교회 연합체가 조직되었고, 네덜란드개혁교회가 남아프리카의 공인된 국교가 되었다.

 

6) 개혁교회는 원주님에 대한선교활동을 강화하였다. 1788년 복음협회가 조직되어 흑인 복음화에 주력했다.

 

7) 18세기 말에 이르러 동인도회사의 교회지배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케이프타운의 지배를 놓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갈등이 본격화 되었다. 1795년부터 1803년까지 지배했다가 1803년 다시 네덜란드가 장악했고, 1805년부터는 영국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여 1820년부터 수많은 영국인들이 알고아 만에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 틈을 타 1820년에는 사카족이 동부지역에 줄루왕국을 건설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8)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영국의 성공회가 남아프리카의 공인된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목회잗의 부족으로 성도들은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적인 예배에 의존했다. 이에 영국정부는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교회에 배치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남아프리카의 신학을 이룩한 앤드루 머레이(Andrew Murray, 1794-1866)이다. 그는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강의하며 교회연합운동을 벌였고 복음주의 연맹을 조직하여 교회의 일치를 추구했다.

 

9) 1836부터 네덜란드의 백인들(아프리칸스, Africans)은 영국의 지배를 피해 북부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그리고 1853년엔 호프 목사에 의해 아프리카 네덜란드 개혁교회(HK)가 조직되었고, 1859년에는 포츠마 목사가 ‘개혁교회’(GK)를 조직함으로서 남아프리카에는 네달란드 개혁교회(NG)와 함께 3개의 개혁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10) 장로교회는 180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하이랜드 93연대 소속의 군인 장로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1829년 케이프타운에 최초의 장로교회인 성 앤드류 교회가 세워졌고 이어 카프라리아 장로회, 나탈 장로회가 차례로 설립되었으며더반의 모임에서 남아프리카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영국장로회가작성한 24개 신조를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했는데 특히 인종간의 평등 문제를 다루어 일부 백인들의 항의가 있었다. 1936년 감리교회를 제외한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중심의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가 조직되었다. 1999년 9월에 남아프리카연합장로교회가 조직되었다.

 

11)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치열한 쟁탈전은 남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1875년 트랜스바알에서 세계 굴지의 금광이 발견되고 1892년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 관산이 발견되자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과 부어(Boers, 네덜란드 백인을 지칭하는 말, 농부라는 의미)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산업이 발전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인종간, 문화간, 경제적 갈등이 표출되었다.

 

12) 한편 1948년 국민당이 권력을 잡고 흑백분리정책의 일환으로 인종차별을 펴는 아파테이트(Apartheid)을 추진하면서 흑인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 이러한 백인우월정책에 반대하여 1961년 NG와 HK는 WCC에서 탈퇴했다. 이후교회들은 아파테이트 정책을 이단적 정책으로 정죄했다.

 

13) 1990년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27년간의 투옥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고 그는 백인정권을 물리치고 흑인정권 시대를 열었으며 드디어 1994년 아파테이트 정책을 없앴다.

 

 

 5. 스코틀랜드

 

1) 스코틀랜드 또한 수많은 이들이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위클리프에 감화를 받고 성경적인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다가 1407년에 순교한 제임스 레스비(J. Resby), 오직 성경을 외치다 1433년 처형당한 보헤미안 출신의 후스파 선교사 폴 크라파르(P. Crawar), 그리고 1528년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1528) 등이 있다.

 

2)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존 낙스(John Knox, 1523-1572)에 의해 시작되었다.

- 어린 시절의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지만 하딩톤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수학과 법을 연구하고 인문주의자인 존 메이저의 가르침을 받았다.

- 종교개혁 당시 그는 공증인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며 귀족의 자녀를 가르치기도 했다. 강건하고 우람한 신체의 소유자로 개혁가인 위사트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546년 위사트가 천주교 당국에 의해 화형을 당하자 피신했다가 시민들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성을 탈환했다.

- 이에 왕실과 천주교 당국은 프랑스에 원병을 요청했고, 낙스 일행은 메리 왕비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1547년 함락되어 낙스 일행은 체포되었다. 이후 낙스는 포로가 되어 19개월 동안 갤리선에 노를 젓는 노예생활을 하다가 영국의 에드워드 6세의 교섭으로 석방되었다.

- 이후 영국 왕의 배려로 베릭과 뉴케슬의 교구목사로 임명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1551년에는 궁정 설교자로 초청받아 왕 앞에서 설교를 하여 점점 명망을 얻었다. 왕은 이제 낙스를 영국 4대 교구 중의 하나인 로체스터 주교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낙스는 감독정치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낙스는 베릭에서 장로정치를 실시하며 개혁주의적인 예배를 드렸다. 그는 성찬 시 무릎을 꿇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고 정죄하고 참여자들을 성찬식탁에 둘러앉게 했다.

- 1553년 에드워드에 이어 메리여왕(the Bloody Mary)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때 300여명의 개혁자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낙스는 몸을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장로정치교회를 시자하려 했지만 감독주의자인 리처드 콕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콕스는 칼빈주의자였지만 교회정치만은 성직자가 일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뒤에 엘리자베스 여왕 때 콕스 지지자들은 성공회정책을 폈지만 낙스 지지자들은 장로정치를 하는 청교도운동을 전개했다.

- 이에 낙스는 제네바의 칼빈을 찾아갔다. 낙스는 완전한 개혁도시가 된 제네바를 보고 ‘사도 이래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칭송하고 칼빈의 교회 개혁운동에 동참했다.

- 1555년 8월 조국으로 귀국하여 마저리와 결혼했으며, 6개월간 전역을 순회하며 개혁신앙을 전파했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는 교회와 정부를 세울 것을 주창했다.

- 그러나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고 낙스는 다시 제네바로 갔다. 에든버러 법원은 낙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시켰다. 그러나 낙스 지지자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을 하기로 다짐하고 이를 서약했다. 이를 제1 계약( The First Bond)이라 한다. 이로서 장로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 제네바에서 낙스는 피난민교회를 이끌었다. 1556년 ‘기도의 형식과 성례등의 집행’을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 직분으로 목사와 장로, 집사만 인정하고 매년 선거에 의해 선출하도록 했다. 이어 1558년에는 ‘괴물 같은 여성 통치자들(영국: 메리 여왕, 스코틀랜드: 기즈 가문의 메리, 프랑스: 왕비 캐더린 메디치)이 가하는 종교적 박해를 혐오하면서’를 발표하면서 여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 1558년 11월, 피의 여왕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자 종교 관용정책이 펼쳐졌고, 이에 낙스는 1559년 5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기도: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7월에 낙스는 에든버러의 목사로 선임되었고,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명성을 얻어갔다.

- 그러나 이번엔 프랑스에 의한 군사적 압박이 가해왔다. 1560년 1월에 프랑스는 15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 종교개혁자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에 영국이 낙스 일행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함으로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7월에 에든버러 조약으로 전쟁은 종료되었다.

- 전쟁 후 낙스는 교회 전체의 개혁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의회는 난상토론 끝에 낙스를 비롯한 5명의 개혁가들에게 신앙고백서 작성을 의뢰했다. 이것이 바로 1560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the Scot Confession>이다. 이어 5월에 ‘제1 치리서’를 정치원리로 채택하고, 드디어 12월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으며 1564년에는 ‘공동예배서’를 만들었다.

-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종교개혁에 힘입어 기독교 국가로 변모하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낙스는 성경을 풀어 해석함으로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정치 지도자들이 개혁의 대열에 합세하고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 그러나 1561년 메리 여왕이 18세의 나이로 여왕이 되자 종교개혁은 위기를 맞았다. 메리는 어린 시절 프랑스에서 로마천주교회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귀국과 함께 절대 왕정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로마천주교회를 회복하고자 했다. 제일 먼저 국법이 금하고 있던 미사를 부활시켰다. 이에 낙스는 메리를 비난했다. 여왕은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낙스를 소환하고 경고했다. 낙스는 여왕에게 자신의 주장이 카톨릭보다 더 성경적이며, 만약 여왕이 참된 종교를 박해하면 국민들이 무력항쟁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칼빈은 ‘행정관료는 폭군을 제어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낙스의 저항정신은 칼빈의 영향으로 본다). - 이후 낙스와 메리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메리는 1563년 불신자인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와 결혼계획을 발표했다. 낙스는 결사반대했다. 메리는 결국 1565년 단리 경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메리가 교황청에서 파견한 리치오와 영문설이 떠돌자 단리가 리치오를 살해하고 메리는 그런 남편에 실망하여 보스웰을 정부로 삼았는데, 그가 단리를 살해했다. 그러나 메리는 보스웰의 범죄를 눈감아주려 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1567년 부도덕한 왕으로 정죄되어 폐위되었다. 후임으로 이제 1세인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올랐다.

- 1562년 12월 에든버러 총회에서 낙스는 3가지를 제안했다. 빈민구제와 목사의 생활대책, 그리고 제네바예식서(성례, 결혼, 장례)의 수용이 그것이다. 이에 총회는 낙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566년 12월 총회는 목회자의 평등을 주장한 <제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 이 총회에서는 또 크리스마스와 성자기념일 등 각종 성일을 부인하고, 오직 주일과 성경적 절기만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선언했다. 1567년 정부는 종교개혁 정책들을 재확인하고 주교 대신 목사를 세웠다. 그러나 1572년 낙스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사정이 달라졌다. 제임스 6세 대신 섭정을 하던 모톤 백작이 장로정치를 버리고 감독정치를 택한 다음 존 더글러스를 주교로 임명했다.

 

3) 이러한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구한 사람이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 1545-1622)이다.

- 그는 파리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569년 제네바의 베자에게서 수학하고 제네바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를 하다가 낙스가 사망하고 조국의 교회가 혼란해지자 1574년 귀국했다.

- 스코틀랜드는 멜빌의 지도아래 더욱 철저한 종교개혁을 이루었다. 1574년 글라스고 대학교 총장에 이어 1580년에 세인트루이스 대학총장에 취임하여 제네바아카데미의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제2치리서’를 작성했다. 그는 감독정치가 불법적이고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화 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

- 그러나 1584년 제임스 6세는 다시 감독주의를 교회정치원리로 채택하고 자신이 교회와 국가의 머리가 됨을 선포했다. 그리고 1587년에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왕에게 귀속시켰다. 멜빌은 왕과 대립했다. 제임스는 1597년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감독정치제를 고집했다.

- 1603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왕이 죽자 영국은 제임스를 영국의 왕으로 임명하여 두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영국에서 제임스 1세(1603-1625)가 되었다. 제임스는 이제 영국의 청교도들까지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멜빌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는 1607년 런던 타워에 투옥되어 4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석방 후 멜빌은 1611년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장로교육에 남은 생을 바쳤다.

 

4) 박해

- 찰스 1세(1625-1647)는 청교도박해를 강화했고, 철회령을 발표하여 교회조직을 계급화했고, 1637년에는 카톨릭의 ‘공동기도서’가 발표되어 스코틀랜드의 예배형식이 되었다.

- 163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장로정치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찰스에 항거하는 ‘스코틀랜드국민계약’을 맺었다. 이는 찰스에 대한 개혁파들의 선전포고였다. 이에 찰스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는데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이 찰스의 정책에 반대하자 의회파와 왕당파 간에 분쟁이 일어나 내란으로 발전했다.

- 개혁파들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엄숙 동맹과 계약’을 맺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다양한 교리적 운동을 펼쳐나갔다. 1644년에 사무엘 러더포드(Samusil Rutherford, 1600-1661)가 <법이 왕이다>를 출판하여 정부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 논하였고, 로버트 베일리(R. Baillie, 1599-1662)는 감독주의자인 존 맥스웰에 맞서 감독주의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낱낱이 공개했다.

- 의회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전되었다. 마침내 1649년 찰스는 의회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권력은 호민관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장로정치를 반대하고 성공회를 지지했다. 그는 1653년의 에딘버르 장로교 총회를 해산하고 어떤 목사들의 모임도 불허했다.

- 크롬웰이 죽자 찰스 2세(1660-1685)가 왕이 되었다. 그는 두 나라의 개혁파들과 동맹을 약속했지만 막상 권력을 잡자 두 나라의 장로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1661년 장로정치를 선언했던 1633년의 의회 결정을 모두 취소하고 다시 감독제를 부활시켰다.

-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더 철저한 로마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5명 이상 모이는 가정예배를 금했고 이를 어길 시 반역으로 간주하여 처형시켰다. 1685년부터 약 3년 동안 참혹한 박해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는 1688년 명예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다.

 

5) 장로교의 회복

- 제임스 2세를 이어 메리가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과 결혼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지만 성공회와 타협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녀는 ‘종교관용령’을 발표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했다.

- 이때 장로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윌리엄 카스테어스(W. Carstares, 1649-1715) 목사였다. 그는 메리의 남편인 오렌지공과 친구사이로 그의 힘을 빌어 스코틀랜드에 장로정치를 안착시키고자 노력했다. 의회는 드디어 1689년 7월 카스테어스의 청원에 의거하여 감독제를 폐지하고 장로체제를 인정했다. 이후 모든 것은 장로제도로 귀환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고 당회와 노회 지역대회와 총회의 구조가 승인되었다.

- 1707년 5월 1일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왕실과 하나의 의회로 연합했다. 그리고 영국은 성공회를 채택하고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채택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평신도의 목사임명권문제로 내홍을 겪었다. 복음적인 장로교도들은 이에 저항하며 장로교 회복운동을 벌였다.

 

6) 혼돈과 대항

-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는 데이비드 흄(D. Hume)의 합리주의 영향으로 중도주의(Moderates)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일으킨 샤프츠베리는 인간이 개인적 권리와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이기적 목표와 이타적인 목표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중용을 통해 덕이 실현된다고 했다. 이에 영향 받은 중도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주장함으로서 전적 타락 교리를 부정하고 심판과 이신칭의 교리도 멀리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한낱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이다.

-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장로정치를 구한 사람은 신학의 대부로 알려진 토머스 찰머스(Thomas Chalmas, 1780-1847)이다. 그는 중도주의자들이 겉으로는 화려하나 내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장로주의를 확립했다. 그는 교회의 대형화(한 교회의 적당한 교인수를 2,000명으로 보았다)를 막기 위해 적당한 규모의 교회를 여럿 세우도록 권유하며 교회분립개척을 주도했다. 그리고 정부의 교회간섭과 주권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항했다. 그는 기존 교회 내에서는 개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43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따로 조직했다. 그러나 대학을 소유하지 못하여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 19세기 말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으로 어려움이 닥쳤다. 윌리엄 스미스(1846-1894)는 독일의 리츨(Ritschl, 1822-1889), 과 벨하우젠(Wellhausen)과 교제하며 스코틀랜드에 자유주의신학을 소개했다. 그는 총회에 의해 1881년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 19세기 후반에는 3개의 주요한 장로교회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자유교회, 연합장로교회가 그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스코틀랜드교회는 교회의 세속화와 교인수의 감소로 점차 약화되고 있다.

 

   

6. 영국

 

1) 영국의 개혁자들

-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교회정치제도에 대한 논쟁과 함께 가열되었다. 특히 교회의 직분에 대해 감독주의자들은 ‘3직분론’을 주장하며 계급구조에 의한 교회 운영을 고집하였고, 장로교도들은 ‘2직분론’에 근거하여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강조하였으며 회중교도나 독립파는 개별적 교회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 2직분 사상은 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 불리는 위클리프가 주장했던 이론으로 그는 이것을 영국교회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즉, 사도시대에는 감독을 의미하는 성직자와 집사 두 직분만 있었으며 감독과 장로는 별개가 아닌 동일한 직분에 대한 다른 호칭이라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위클리프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부제, 교직자, 사제장과 같은 직분을 폐기하고 집사와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초대교회의 정치행정체제를 회복할 것을 역설했다.

- 2직분 사상은 영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특히 성공회 대주교이자 개혁가인 토머스 크랜머(T. Cranmer, 1489~1556)도 2직분을 찬성했으며 이어 낙스에 의해 공고해졌다. 여기에 칼빈도 영국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인 서모셋 경에 편지하면서 2직분론을 독려했다.

- 영국의 종교개혁은 1561년 토머스 노턴이 기독교강요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칼빈의 사상이 전파되었고 더욱 대중화되었다.

 

2) 청교도

- 칼빈의 사상은 청교도들이 계승했다. 157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였던 토머스 카트라이트(T. Cartwright, 1535~1603)는 성공회의 감독정치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영국교회의 철저한 개혁에 앞장섰다. 존 레이놀즈와 트레버스, 존 필드, 토마스 윌콕 등도 감독정치를 비판했다.

- 카트라이트의 개혁에 대해 감독주의자인 리처드 뱅크로프트(R. Bancroft)는 감독주의의 신적 기원을 내세우며 장로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영국을 스코틀랜드의 속국으로 만들 것이라며 카트라이트를 매국적인 의도를 가진 자라고 비난했다. 감독주의자들은 장로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한 나머지 카트라이트를 박해하고 1572년 그를 교단에서 추방했다.

-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은 윌리엄 에임스(W. Ames, 1576~1633)이다. 그의 <신학의 정수, The Mrrow Sacred Thrology>는 청교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의 지배를 받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단언했다. 또 교회정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임금이자 머리인 단일군주제하의 귀족적이며 민주적이라고 했다.

-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장로교를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1603~1625)가 ‘감독 없이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는 선언과 함께 감독주의를 지지하고 장로주의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청교도들은 통치자를 통한 종교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설교운동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하기시작했다. 아울러 신학교육을 강화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설교자 양성기관으로 만들고자 힘을 쏟았다.

- 이것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져왔다. 장로교회의 확산과 함께 교회의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국왕 찰스 1세(1625~1649)는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하고 청교도들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는 등 박해하기 시작했다. 소환된 청교도들은 대부분 귀를 잘리거나 화인을 맞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청교도운동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청교도 내부에서는 감독주의를 대체할 정치체제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졌다. 감독정치와 장로정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회중정치를 선호했다. 그리고 성공회 안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칼빈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내분이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다.

- 찰스의 종교정책은 영국과 스코틀랜드로부터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638년 스코틀랜드인들은 감독정치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성공회의 정책은 진리의 가면을 쓴 마귀의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찰스에 대해 전쟁도 불사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찰스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의원들은 찰스의 정책을 비판하고 성공회의 주교제도를 폐지하려고 했다. 그러자 찰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루었다. 그러나 더 많은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했다. 그러자 또 의회를 해산하는 등 이런 일이 4회나 반복되었다.

- 의회는 찰스에 맞서기 위해 드디어 자위대를 구성했다. 이로 인해 왕당파와 의회파가 생겼다. 그 둘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가 계속되자 의회지도자들은 영국 전역의 목사들을 초청하여 총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3) 웨스트민스터 총회

- 총회의 구성은 의회가 파송한 상원과 하원 의원 각 15명과 전국에서 선발된 121명의 목사로 했고, 총회는 1643년 7월 1일 개회하여 1649년 2월 2일에 종료했다. 이 기간 동안 총 1,163번의 회의가 열렸고, 회의에는 매번 60명이 참석했다.

- 총회는 1643년부터 44년까지는 예배와 정부의 형태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예배에 대해선 일치를 보았지만 정부의 형태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오랜 논의 끝에 표준문서를 만들어내었다. 그것이 바로 장로교도들의 정수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와 <대요리문답서, The Larger Catechism> <소요리문답, The Shorter Catechism>, <공예배지침서>, <장로교정부형태론> 등이다.

 

4) 크롬웰과 왕정복고

-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의회군 지도자인 크롬웰이 호민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파 출신으로 백성의 개혁에 대한 열망에 부합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종교적 규제를 적용함으로서 백성의 원망을 샀다.

- 이에 대한 반발로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독립파를 물리치고 잠시 장로파들을 중용했다. 그러나 그도 안정이 이루어지자 성공회 지지로 돌아서 교회를 주교들의 손에 맡기었다. 그는 곧 ‘통일령’을 내려 모든 목사들에게 3개월 이내에 국교회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사직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 이에 청교도들을 비롯한 장로교도들이 반발했다. 2,000여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반대하면서 찰스 2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1661년 찰스는 ‘자치제령’을 발표 비국교도들이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을 막았으며, 1661년에는 일반인들의 청교도 예배 참석을 금지하는 ‘제1 집회령’과 추방된 청교도 목사가 전임지의 5마일 이내에 접근을 금지하는 ‘5마일령’을 선포했다. 수많은 비국교도들이 박해를 당했다.

- 1688년에는 제임스 2세가 한 발 더 나아가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교회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명예혁명을 일으켜 왕을 추방했다. 이제 국왕은 의회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며 함부로 종교 문제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1689년에는 ‘종교관용령’이 선포되어 모든 제한이 풀어졌다.

 

5) 장로교회

- 하지만 장로교회는 박해의 여파로 겨우 500교회만이 생존했다. 더욱이 교회가 분열되면서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목사들이 목회사역을 함으로서 회중들이 목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도 아리우스주의와 단일신론 등에 물들어 좌경화되어 갔다.

- 19세기 들어서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는 북부지역의 교회들만 겨우 생존했다. 19세기 말엽에 스코틀랜드교회의 도움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교를 설립하고 20세기 들어 총회를 구성하고 약 7만 명의 교인을 둔 교단으로 성장했다. 20세기 중반에 개혁교회와 연합하여 현재 약 20만 명을 거느리는 ‘연합개혁교회’가 되었다.

 

6) 아일랜드

- 한편 아일랜드는 성 패트릭에 의해 복음화 되어 켈틱교회를 형성했으나 1170년 로마천주교회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영국교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세까지 카톨릭에 충실했으며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자 종교개혁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 17세기 초반 북아일랜드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제임스 1세가 반란을 진압한 뒤 아일랜드에 장로교도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로버트 블레어, 조시아스 웰스(낙스의 손자), 존 리빙스턴 등의 칼빈주의자들이 이주했다.

- 1641년 카톨릭주의자인 울스터가 원주민들을 동원하여 장로교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이주민들이 살해되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 1642년 장로교 총회가 결성되었고, 1660년에는 80만 명의 교인수로 발전했다. 그러나 크롬웰에 이어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의 핍박으로 아일랜드의 개혁교인들은 거의 아일랜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7. 미국

 

1) 이민자들

-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로마카톨릭의 영향력은 유럽에서 점점 축소되어갔다. 이때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은 서구인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천주교도들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동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세력을 구축했다.

-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은 17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신대륙에 이민하여 교회를 세우며 영역확장을 꾀했다. 주로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바다거지들,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주축이 되었다.

- 위그노들은 종교적 탄압을 피해 브라질에 이민을 시작했다. 위그노 지도자인 가스빠르 콜리니가 1556년에 브라질 리우데 자네이로에 위그노들을 이주시켰다.

-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1600년 초에 대서양 연안에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들은 칼빈의 제네바를 모델삼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1606년에 버지니아식민회사를 설립하고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1607년 5월 24일 신대륙에서 첫 성찬 예배를 드린 후 버지니아 헌장을 채택했다. 그리고 1611년에는 식민지 관리를 위해 ‘법과 조례’를 제정했다. 버지니아의 사도라 불리워지는 칼빈주의자인 알렉산더 휘테커(A.Whitaker, 1585-1617)가 미국에 도착한 시기가 이때이다. 그리고 1620년 102명의 분리주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에 이주했다. 이어 1630년 이후부터 비분리주의의 청교도들도 회이트 목사에 의해 이주를 시작했다.

- 대체적으로 카톨릭신앙을 가진 스페인계는 16세기부터 서인도제도와 남미 및 중미, 그리고 미국의 남부를 차지했다. 이들은 주로 파렴치하고 제국주의적인 무력을 동원해 점령지를 카톨릭화하였다. 다만 남미의 브라질은 포르투칼이 개척했는데 스페인처럼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 북미와 미시시피 지역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인디언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교화에 힘썼다. 그들은 캐나다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1718년에 뉴올리언즈를 창설하고 1753년에는 피츠버그를 개척했다. 그러나 인디언들과의 전쟁으로 세력확산이 중단되었다.

- 기타 델라웨어는 스페인계의 루터교인들이, 뉴암스테르담(뉴욕)에는 네덜란드의 개혁파들이, 펜실베니아에는 윌리엄 펜과 그 추종자들인 퀘이커교도들과 루터란, 모라비언, 독일 개혁파와 좌경화된 개혁파, 잉글랜드의 카톨릭 등이 섞여 정착했다.

 

2) 미국의 독립

- 1664년에는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뉴암스테르담은 영국의 지배로 들어가 이름을 ‘뉴욕’으로 개칭했다. 네덜란드 개혁교인들은 1709년 뉴저지에 개혁교회를 설립하고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조선에 파송된 언더우드가 이곳 출신이다.

- 1689-1697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후 미국은 거의 영국의 주도하에 편입되었다.

- 1765년 영국의회는 인지세법을 제정하여 미국 식민지에서 신문이나 기타 모든 공적인 서류를 작성하고 등록하는데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1767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에 대해 간세를 부과했다. 반대가 극심하자 1770년에는 차(tea)만 제외하고 모든 관세를 철회했다. 이에 분노한 미국인들이 보스톤에서 차를 실은 배를 공격하는 등 무력으로 대항하자 영국은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독립전쟁을 치루게 되었으며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고 그해 7월 4일에 13개주 대표들이 모여 국회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3) 혼합과 자유주의신학

- 17세기 말에 이르자 영국의 자연신론을 비롯한 유럽의 계몽주의합리주의적 사상들이 미국 식민지 교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18세기에는 홍수가 범람하듯이 확산되었다.

이외 네덜란드의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유니테리언주의(Uniterianism)가 나타났다. 이들은 훗날 자신들을 ‘자유주의자’(Liberals)로 불렀다. 1815년 윌리엄 채닝(W. Channing)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했고,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1838년 하버드 신학교에서 행항 연설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사신신학(the Death of God)의 길을 열었다. 이 신학을 다른 말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이라 하는데 이것은 칸트와 그 이전의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린 말이다.

- 이후 하버드는 유니테리언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에 칼빈주의자들이 반발하여 1808년 앤도버 신학교를 세웠다. 함께 예일은 하버드와 달리 1802년 드와이트 총장에 의해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이의 영향으로 많은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 이에 18세기 들어 인본주의에 대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1738년 경건주의자인 진젠도르프가 모라비아형제단을 창설했으며, 영국에서는 웨슬리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4) 각성운동

 

<1차 각성운동>

-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1734년에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다.(영국에서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근거한 반면에 에드워드 조나단은 칼빈주의에 근거했다) 이 운동은 1740년 조지 휫필드가 미국을 방문하여 순회 설교를 하면서부터 더 널리 파급되었고 1763년에 절정에 이르러 이것을 ‘대각성’(The Great Awareness)이라고 한다.

 

<2차 각성운동>

- 뉴잉글랜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손자인 디모데 드와이트(예일대 총장, 1752-1817)와 테일러(1786-1858)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1796년부터 장로교의 제임스 맥그레디(McGready) 목사가 캔터키를 중심으로 부흥을 시작했다.

- 가장 유명한 부흥사는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였다. 그는 1812년 회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도시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최초의 사람으로 많은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회개를 강력하게 주문하면서 사람을 공중 앞에 세워놓고 죄를 고백하게 하는 ‘새로운 회개의 법’을 도입하여 부정적인 비판을 받았다.

- 부흥운동의 결과, 감리교 순회설교자인 카트라이트 등에 의해 장로교보다 감리교와 침례교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 버몬트의 경건한 침례교인이었던 윌리암 밀러(W. Miller, 1782-1849)가 재림안식교를 창시했다. 그는 다니엘서 9:24-27과 8:14에 근거하여 주님의 재림시기를 1843년 3월로 계산했다. 두 차례에 걸쳐 기간을 연장했다가 많은 추종자들이 실망하고 떠났는데 오히려 ‘대실망의 날’이 계기가 되어 안식교가 시작되었다.

 

<3차 각성운동>

- 19세기 후반 무디(Dwight Moody, 1837-1899)에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1856년 회심한 이후 시카고의 플리머스 회중교회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무려 1,500명으로 부흥시켜 이약 유명세를 탔다. 1861년부터 생업을 버리고 전도자로 나섰으며 1870년 생키와 함께 찬양 전도팀을 결성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대 전도집회를 열었다. 그의 설교는 미국의 낙관주의와 복음주의적이며 알미니안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이었다. 성경을 높이 쳐들고 회개를 강조하면서 청중들에게 영생을 믿는 자는 앞으로 나와서 취하라라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그를 계승했다.

 

<20세기 부흥운동>

- 1911년에는 650명의 부흥사가 활약했고, 1912-1918년까지 35,000회의 부흥집회가 열렸다. 이러한 부흥회의 영향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큰 도전을 받았다.

 

5) 남북전쟁과 흑인교회

- 남북전쟁(1861-1865)을 계기로 교회도 남북으로 갈렸다. 양측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 편이라 확신하면서 전쟁에 적극 참여했다. 많은 목사들이 군목이 되었고 전쟁 중에도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병사들의 회심이 있었다. 결국 노예제도를 지지하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인들은 분립을 단행했다.

- 북부인들은 흑인들의 인권회복과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연방정부는 13-15차 수정헌법을 통해 노예제도를 일소하고 흑인들에게 시민권과 선거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남주에는 KKK같은 비밀단체가 맹약하면서 흑인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여전히 흑인들을 차별했다. 이에 흑인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15만 명의 흑인들이 따로 그들만의 교회를 세웠다. 감리교 흑인들은 1870년에 무려 20만 명이 남감리교를 떠나 따로 흑인감리교에 가입했다.

- 우여곡절 끝에 1968년 마틴 루터 킹(M. Luther King Jr., 1919-1968)목사의 희생이 계기가 되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게 되었다.

 

6)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교회발전과 사상 - 보수와 진보, 남과 북으로의 분열

 

- 독립전쟁은 미국에게 새로운 기회와 자유를 허락했지만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사람들은 신앙심을 잃고 영적인 방황을 했다. 교회당이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되면서 교회에 대한 경시풍조가 생겼다. 독립전쟁의 지도자들이 영국에서 해방되기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은 것을 계기로 프랑스의 볼테르와 루소 등의 계몽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 이러한 혼란은 서부개척과 부흥운동을 통해 다소 진정되었다. 장로교회의 부흥은 서부개척지에서 제임스 맥그리디의 열정적인 설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7년 켄터키지역의 로건 카운티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은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로 확산되었다. 이때 야영집회가 유행했다. 그러나 야영집회의 설교자들은 구원사역보다는 신앙적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은사중심과 종교적 흥분이 고조되었다. 경련, 기절, 비명, 갑가스러운 웃음, 춤추기, 황홀경 등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학이 나타났다.

- 야영집회가 서부 개척민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면 동부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났다. 1790년 조나단 에드워드의 외손자이자 예일대 총장이었던 디모데 드와이트가 코네티컷에서 부흥집회를 시작한 이후 1802년에는 예일대생 1/3이 회심체험을 하면서 2차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의 영향으로 1782년부터 1850년 사이에 서부에 28개 대학이 설립되었다.

- 신대륙의 개척지가 늘어나면서 목사들의 수요가 부족해졌다. 특히 장로교회는 목사 한 사람을 배출하는 데 수많은 시간과 재정이 투자되어 필요한 만큼의 목사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미국 장로교총회는 무자격한 목사의 양산보다 영력과 지력을 갖춘 실력있는 목회자를 배출할 때 교회의 장래가 밝다고 믿었다. 1812년 신학교 설립계획서에 의하면, 신학생은 성경 원어를 통달하고 유대역사와 기독교 고전을 이해하고,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을 배워서 목회자로서 충분한 지식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1811년 뉴저지 프린스턴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1812년에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1818년 어번신학교, 1827년 피츠버그에 웨스턴 신학교,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콜롬비아 신학교, 1829년에 레인 신학교, 1830년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 1836년에 뉴욕에 유니언신학교사 설립되었다.

- 반면에 감리교나 침례교는 까다로운 절차를 배제하고 목사의 수준을 낮추어 안수함으로서 자유롭게 목사들을 배출해 장로교보다 빠른 부흥을 보였다. 심지어 침례교는 학력을 고려하지 않고 소명이 있다고 판단하는 자는 모두 목사로 안수하여 개척지로 파송했다. 그 결과 미국은 가는 곳마다 침례교회가 생겨났다. 1850년 통계상으로 감리교 34.2%, 침례교 20>5%, 천주교 13.9%, 장로교 11.6%의 순이었다. 1870년 이후에는 천주교가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했다.

- 활발한 선교활동과 함께 선교지에서의 교파간 충돌이 일어나자 장로교는 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상호 협력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회중교회와의 연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이로 인해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졌다. 진보파는 18세기 신파의 후예들로서 신학적 관용주의를 표방하던 뉴잉글랜드의 신학에 포용적이었고, 엄격한 신조주의를 거부하고 폭넓은 교리와 자유로운 성경 해석을 주장하며 노예제도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에 보수파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계통의 후예들로서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회중교회측의 부흥운동을 거부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충실할 것과 노예문제에 있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회중파 목사인 나다니엘 테일러가 펠라기우스중의를 받아들이자 진보파들이 칼빈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신학을 취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829년 진보파의 앨버트 반즈가 설교를 통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찬양하고 보수파를 공격하자 보수파들은 단독으로 선교부를 조직하는 등 진보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1년 진보파에서 서부해외선교부를 조직하였고, 이에 1834년 보수파는 장로교해외선교부를 따로 조직했다. 결국 1838년 진보파는 새로운 총회를 구성했다. 이후 미국 남부와 북동부는 보수파가, 북부는 진보파가 득세했다.

-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1830년 이루 노예문제로 절정에 달했다. 전체적인 장로교회의 입장은 노예폐지론에 가까웠다. 그러나 1830년대 까지 거의 침묵했다. 그러나 1833년 루이스 태핀과 아더 태핀 형제가 이 문제를 공식화했다. 그들은 급진적인 노예폐지론자인 로이드 게리슨과 함께 미국 노예폐지협의회를 조직했으며, 레인신학교생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노예폐지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후 오벌린대학이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찰스 피니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 노예문제로 인해 장로교 뿐 아니라 1844년에는 침례교가, 1845년에는 감리교가 남북으로 갈라졌다. 1860년 11월 6일 노예폐지론자인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1861년 남부연합군이 북부군을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남부장로교도들은 노예폐지가 결정되자 1861년 총회로부터 이탈하고 미연방장로교회를 조직함으로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로써 1838년 진보와 보수로 분열하고 1861년에는 지역적으로 분열했다.

- 이제 장로교는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로 나뉘어졌다. 남장로교를 대표하던 신학자는 손웰이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면서 사회적인 입장에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노예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성경이 노예제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므로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선 교회도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부교회의 신학은 찰스 핫지에 의해 발전했다. 하지는 알렉산더의 제자로 프린스턴에서 56년간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진보파가 웨스트민스터신조를 부정하자 진보파를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자들로 교회질서에서 기준을 떠났다고 질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교회정치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손웰은 치리장로와 강도장로를 동일하게 보았지만 핫지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인 단순한 평신도로 보았다.

- 1864년 교회합동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1869년 진보와 보수파들은 다시 연합하여 PCUSA를 결성했다. 이때 무디(D. L. Moody)가 나타나 부흥운동을 벌였다. 이의 영향으로 미국교회는 금주금연 등 절제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을 정치가들이 정강정책으로 채택했다.

- 설교의 패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850년대부터 원고 설교가 등장하면서 설교가 40-45분으로 단축되고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예배가 사라졌다. 찬송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점점 설교중심에서 의식 중심의 예배로 변질되었다.

 

7) 미국교회의 교파

- 유럽에서 온 이주자들에 의해 세워진 미국교회는 처음부터 다양한 교파 교회로 출발했다. 이들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내세우며 미국사회를 기독교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 그러나 교파교회들은 쉽게 분열하고 또 쉽게 통폐합하면서 발전해 갔다. 한편 미국에서는 평신도운동이 활발했다. 19세기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현저히 늘었다.

 

<감리교회>

- 독립전쟁 이후 감리교회의 교세가 확산되었다. 웨슬리안들은 독립 이전에는 웨슬리의 주장대로 영국교회의 안에 미국의 감리교회를 두려고 했다. 사실 웨슬리는 미국이 독립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평신도 순회 설교자들의 활약에 더불어 감리교인들의 수가 배가되었다. 1784년엔 감리교 감독교회가 생겼으며 영국의회는 이 교회를 앵글리칸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로 인정했다.

- 1784년 볼티모어에서 ‘감리교회’를 조직했다. 1813년에는 흑인들이 따로 교회를 분리하여 ‘아프리카 감리교회’를 세웠다.

- 1844년에는 노예문제가 남북의 대립을 초래한 정치적인 문제가 되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현재 제일 큰 교세를 가진 곳은 ‘연합감리교회’이다. 이외 약 20여 개의 교파가 있다.

 

<침례교회>

-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한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은 재세례파의 메노나이트의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지도자인 존 스미스가 침례로 재세례를 받고 1609년에 영국인 침례교회를 세웠다. 스미스 사후 만인구원론을 믿는 추종자들이 영국으로 귀국하고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 미국의 침례교회는 1631년에 미국으로 온 로저 윌리엄이 1639년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세운 교회를 시초로 본다. 현재 약 10만 교회, 3천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중 남침례회가 가장 교세가 크다.

 

<장로교회>

- 버지니아, 메사추세츠, 코네티컷, 롱아일랜드, 뉴욕 등에 산재했던 장로교회는 1710년 이후부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부터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 1709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많은 이주자들이 들어오면서 장로교회는 프랜시스 매케미(F. Makemie, 1658-1708)의 주도로 미국 최초의 노회인 필라델피아 노회를 설립했다. 노회에서는 목회자의 수급을 위해 목사교육에 힘을 쏟았다. 처음부터 목사의 학문적인 수준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설교자의 숫자가 다소 부족할 때도 장로교회의 이상을 따라 학식을 겸비한 자만을 목회자로 세웠다. 반드시 히브리어와 헬라어, 신학을 공부해야 했고, 목사고시를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자격이 없다고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교육한 후 교회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감리교와 침례교는 목사가 되는데 반드시 고등교육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았는데 이것이 장로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부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부흥운동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일어나 갈라졌다가 1758년에 다시 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회중교회와의 연합을 지지하는 신파와 엄격한 칼빈주의를 고수하며 회중교회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구파는 결국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837년에 돌로 나누어졌다. 그러다 1902년에 초교파적인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구파의 엄격한 입장이 다소 완화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등 연합했다.

- 1983년에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미국연합장로교회(PCUSA)가 되었고, 1973년 남장로교회에서 나온 PCA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감독교회>

-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란시스 드레이크에게 신대륙을 개척하는 임무를 주었다. 1578년 드레이크는 프란시 프레처 사목(chaplain)을 대동하고 버지니아에 도착하여 앵글리칸교회를 개척했다. 북쪽에는 1689년 보스턴에 킹스채플이 설립되었다.

- 그러나 독립전쟁 이후 영국과 분립되면서 미국의 앵글리칸 교회로 재출발했다. 1967년부터 감독교회로 부르고 있다. 1970년에 여자를 집사로 안수했지만 사제로는 임명을 하지 않고 있다1976년에 가결을 했다. 이에 반대하는 파가 북미앵글리칸교회를 세웠다.

 

<루터교회>

- 1623년 네덜란드에서 온 루터교 이민자들은 맨해튼에 도착했고 1638년에는 스웨덴 루터란들이 델라웨어 해안가에 식민지를 개척했고, 독일 루터란들은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정착했다. 1748년 펜실베니아 노회를 결성하고 1820년에 총회가 조직되었다. 현재 12개 교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혁파교회>

- 식민지 당시에 40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었으나 몇 개의 그룹으로 통합되었다. 네덜란드계로는 RCA와 CRC가 있고, 독일계로는 RCUS가, 헝가리계로는 HRCA가 있다. 모두 보수적인 칼빈주의교회이며 하이델베르크와 벨기에, 도르트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다.

 

 

8. 한국(장로교회를 중심으로)

 

1) 외국인들

- 1653년 네덜란드 개혁교인인 하멜(Hamal)이 제주도에 표류, 13년간 생활한 후 귀국하여 ‘하멜표류기’를 통해 서양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했다.(전래설화를 소개하면서 바벨탑설화와 비슷한 설화라고 함)

- 1816년에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이 백령도에 상륙하여 중국어로 된 성경을 전했다.

- 1832년에 독일인 칼 귀츨라프(Carl Gutzlaff)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군산 하류와 충남 고대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 1866년에 스코틀랜드인 토머스(Thomas)가 미국 상선 제너럴 서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문 성경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2) 성경번역과 전래

- 1872년 만주의 존 로스(J. Ross)심양에서 한국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에게 복음을 전하고 1876년 이응찬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그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1880년에 이응찬, 백홍준 ,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누가와 요한복음을 번역했다. 1887년에는 존 매킨타이어(J. McIntyre)와 함께 신약을 완역했다.

- 1884년에 일본에 있던 이수정이 미국성경공회 루미스 선교사의 권유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 서상륜은 만주로부터 성경을 비밀리에 가지고 황해도 소래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1883년 한국 최초로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배편을 이용, 인천 항구를 통해 6,000부의 성경을 들여와 서울을 왕래하며 전도활동을 벌였다.

 

3) 선교사들의 입국

- 1866년에 프랑스가 조선에 거주하던 신부들을 처형한 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강화도를 침입했다.

- 1871년에 미국 제너럴 셔먼호의 침몰사건을 이유로 통상조약체결을 요구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 1873년에 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왕후가 집권하면서 문호개방이 시작되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고, 1882년에 한영수호조약, 한독수호조약,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 1883년에 미국 푸트 장군이 초대 공사로 부임했다. 이어 미 북장로교회는 상해에 있던 의사 선교사인 알렌을 조선에 입국시켰다. 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시의가 되었고 정치적 자문역할까지 맡았다. 고종은 그에게 광혜원(나중에 제중원이라 했고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설립을 허가했다. 나아가 고종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어 친구인 모오스에게 팔아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 1883년에 미국의 볼티모어에서 목회하던 감리교 목사인 가우쳐(Goucher)가 한국선교를 주장하여 미국에서 많은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 1885년 부활절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이 입국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마가복음을 얻었고, 그것을 가지고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먼저 고아들을 돌보며 학교를 세웠다. 1890년에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 1889년에 호주인 헨리 데이비스 남매가 부산에 도착했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레이놀드(이눌서), 전킨(전위렴)이 전라도 지방을, 1893년에 캐나다 장로교의 존 매킨지가 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일대를, 그를 뒤이어 1898년에 그리어슨(구례선)이 계승했다.

- 1910년경에 800여 개의 미션스쿨이 설립되었고, 학생수는 41,000명으로 정부가 운영하는 학생 수보다 2배 많은 수였다.

- 1893년에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었고, 1890년에 중국 선교사인 존 네비우스(J. Nevius)를 초청하여 선교정책세미나를 개최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네비우스의 충고를 따라 3자운동(자립보급, 자립선교, 자립정치)의 원칙을 정하고 전도에 전념했다.

 

4) 신학교의 설립과 부흥

- 1901년에 조직된 대한예수교공의회는 신학교 설립을 의결하고 평양의 마포삼열(Samuel Moffet)선교사 자택에 신학교를 개교했다. 학 생은 김종섭, 방기창 2인이었고 교수는 마포삼열과 이길함(Graham Lee)이었다. 그후 한석진, 서상륜, 길선주, 이기풍 등이 입학했다. 선교사공의회는 1905년 평양신학교를 승인하고 평양연합신학교라 칭했다. 1908년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가 환화 1만 1천원을 기증하여 평양 하수구리에 5천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본관건물을 지었고, 1913년에는 6동의 기숙사를 준공했다. 1922년에 맥코믹 여사가 다시 7만원을 기증하여 서양식 교사를 신축했다.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교회와 지도자들은 영적 대각성운동을 벌였다. 1907년 1월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가 성경사경회를 열어 회개와 기도운동을 펼쳤다. 이때 매주일 14,000여 명이 모여 기도하고 부르짖는 역사가 일어나 회심과 함께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 1907년 9월 17일에 4개의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독노회를 구성했다. 독노회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등 7인의 한국인에게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기풍은 제주도로 파송되었다. 1909년에는 최관홀을 연해주에, 한석진을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5) 일제 치하

- 1912년 7개의 노회를 기반으로 총회를 조직했다.

- 일제는 1910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교계 지도자와 애국지사들을 박해했다.

- 제1차 세계대전 후 윌슨의 자주독립원칙이 선언되자 1919년에 재일 유학생 중심으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이의 여파로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독립지사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인쇄하고 33인인 선언문에 서명했다.(16인이 기독교인) 이 사건으로 1509명이 살해되었고, 15961명이 부상하고 47,000명이 체포되어 이중 19525명이 투옥되었다.(투옥자중 3,426명이 기독교인/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전 인구의 1.5%에 불과)

- 한국교회는 힘을 모아 사회개혁에 앞장섰다. 반상제도의 타파, 남녀평등의 실현, 교육운동의 전개, 금주금연운동, 낭비와 사치문화 추방운동을 벌여 큰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 일제는 신사참배의 강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등으로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폈다. 1925년 남산에 신사를 세워 일본의 민속종교인 신도를 보급하기 위해 전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이에 한국교회는 황국신민화에 반기를 들었다. 1931년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를 죄악으로 규정했고, 반대운동을 공식화했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 박해가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 1936년 평양숭실전문학교와 숭의여학교 교장이 파면되었고, 1938년 9월 27차 장로교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이자 총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총회는 굴복하고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당연한 의무라고 결의했다. 이에 수믾은 성도들이 반대하여 투옥되었고, 주기철,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박의흠, 서정명 전도사 등 50여 명이 순교했다.

- 한편으로 교회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여 발전을 가로막았다. 공산주의는 1920년대부터 민중해방을 선동하며 표면화되었고, 신유집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비주의 운동은 1919년 김익두 목사를 통해 시작되었다. 심지어 감리교 목사 이용도는 “사도신경과 삼위일체교리와 예수에 의한 사죄의 교리를 폐기하고 신비적이고 신지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계자 황국주는 “예수의 목이 자신에게 접붙임했다”고 하면서 “성적인 접촉을 통해 피갈음을 해야 한다”고 했고, 이것은 후에 박태선의 피갈음의 기초가 되었고, 이를 김백문이 체계화하여 <기독교근본교리>로 만들어 문선명집단의 통일교 기초교리가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 신학은 1934년 유학파인 김재준 목사가 모세 5경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고 성경무오교리를 부정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1939년 3월 자유주의파들은 따로 총회를 분리하여 일본제국에 충성스러운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조선신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당시 교수진은 채필근, 김영주, 함태영, 김재준, 윤인구, 이정로 등 자유주의 신학자와 친일파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 이후 일제의 만행은 친일파를 앞세워 교회를 부패시키는 등 계속되었다. 채필근은 주기철 목사가 투옥 중에 사택을 빼앗기 위해 당국에 고소를 했고, 일본 귀신인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미소기바라이’를 자행했다. 또 일제는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42년에 조선혁신교단을 만들어 구약을 없애고 계시록과 찬송가를 개편하고 1945년 7월에는 모든 교파를 합하여 일본기독교단을 조직했다.

 

6) 분열과 에큐메니칼 운동

-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20여 명의 옥중 성도들이 8월 17일 평야형무소에서 출옥하여 9월 20일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회개와 자숙, 신학교육기관의 재건 등을 골자로 하는 5개항의 교회 재건원칙을 발표했다(재건파). 그러나 자유주의자인 홍택기, 김관식, 송창근, 김영주 등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밖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신사참배를 합리화하며 완강히 저항했다.

- 이에 재건파는 기성교회를 마귀당으로 정죄하고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경남노회의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근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46년 교려신학교를 설립하고 청교도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선언했다. 그러나 1951년 36차 총회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는 인정했으나 교려신학교는 인준하지 않았다. 1952년 교려신학교는 총회로부터 이탈하여 분립해 나갔다.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순교적 신앙을 고수하였던 교회들이 총회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 1953년에는 김재준 목사와 그 일행들이 기장으로 분리해 나갔고 1959년 44차 총회에서는 WCC가입문제로 인해 박형룡을 중심으로한 승동측과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연동측이 분열했다. 승동측은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WCC에 가입하는 것은 배교행위와 같다고 주장했고, 연동측은 시대적 조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동파는 1960년 새문안교회당에서 기장측 일부를 받아들이고 통합총회를 열었다. 승동측은 12월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합동총회를 열고 새찬송가 출판을 결의했다. 1961년에는 김치선을 중심으로 한 대신측이 분립했고, 잠시 승동측과 고려측의 합동이 성사되었으나 학교 인준문제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1962년에 한상동 목사 등 고려신학교가 다시 분리해 나가 오늘의 고신총회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에는 총회신학교가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분쟁한 결과 박형룡 박사의 아들인 박아론을 필두로 방배동 총회신학교가 탄생했고, 또 박윤선을 중심으로 합동신학원이 분립해 나갔다.

 

7) 대중집회와 성장

-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여기엔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와 김준곤 목사와 대학생 선교회 주최로 열린 1974년의 엑스플로, 그리고 1977년의 민족복음화 성회 등이 연달아 개최되면서 초유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의 여파로 80년에는 21,243개 교회와 7,180,627명의 신자를 확보했다.

- 수적인 확장과 더불어 오순절계통의 조용기 목사와 감리교회의 김선도 목사를 중심으로 대교회운동이 일어났고 교회성장주의가 생겼다. 교단은 구령보다는 교세확장에 치중하게 되었다. 주일예배를 2부, 3부 심지어 8부까지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여기에 더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육관 건축, 기도원 건립, 교회 묘지의 마련 등이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8) 사회참여의 문제

-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참여를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고, 진보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으로 본다. 보수주의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의 준수만이 신앙적이라고 주장하며 주일 성수 문제와 화폐에 불상을 넣으려는 등 신앙을 위협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나서지만 진보주의는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5-10계명)의 준수를 중요시하면서 노동문제와 인권 등 민주화 투쟁에 적극 가담하고 주도했다.

- 정치,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보수주의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많은 성도들이 민주화에 앞장섰던 진보주의 교회로 가거나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100개가 넘는 장로교단은 분리주의적이라는 인상을 남겼고 300여 개의 무인가 신학교에서 수많은 무자격 목회자들이 배출되면서 장로교 목사들은 무지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침체현상으로 이어졌다.

 

9) 개교회주의와 연합운동

-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침체기를 맞았다. 여기에 미국의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 같은 회중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성경의 원리보다 실용주의적인 방법을 택하는 등 회중적 성격을 가진 개교회주의가 나타났다.

- 한편으로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이 확산되었다. 한기총, 한국복음주의 연합회 등의 대형 기구와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이제 R회 안에서 장로교적인 것과 비장로교적인 것들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1998년에는 한기총에서 목사제복 착용을 권장하여 사제인지 신부인지 구분도 모호해졌다.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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