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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 하는가? 2 (존 오웬)

존 오웬

by 김경호 진실 2013. 1. 7. 09:11

본문

 

1. 복음을 배반하는 이유 및 그 성격 (2)

(히 6: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우리는 이 모든 영적 특권들로부터 이 서신의 저자가 심중에 두고 쓴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 그들은 진지한 참 신자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문에는 신앙이라든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 이야기도 없다. 저자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 칭하지도 않고 있다. 또 그들이 중생했다는 기록도 없으며 칭의 되었다든가, 성화되었다든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든가 혹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한편 본 서신의 저자는 그들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흡수하지만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에 비유되고 있는데(히 6:7), 이것은 참 신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정원 안에서 특별히 자란 약초이기 때문이다. 본 서신의 저자는 참 신자들을 묘사하면서 이 배도자들과 구분하고 있다. 신자들 안에서는 그보다 더 나은 것, 구원에 가까운 것을 발견한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9절). 신자들이 그들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은 오직 참 믿음뿐이기 때문이다(10절). 그러나 그 배도자들에 대해서는 이 중 어느 것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본 서신의 저자는 신자들에 대해 다음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보존된다는 사실 말이다(10,17,18절). 이 모든 것 그리고 다른 많은 점에서 신자들은 배도자들과 구분된다.

(2)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특별한 영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방언이나 이적을 행하는 은사 등과 같은 성령의 특별 은사들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의 왕국(그들이 “내세”라 부르는)이 자기들에게 임했음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들을 자신들 및 다른 사람들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 몇 가지를 직접 체험하고 만족 해 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마음에 비췸을 받고 가슴이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아마도 신자들 간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 및 거룩함에 대항하는 악의에 찬 적대감과 죄와 세상에 대한 광포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들로 하여금 신앙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이 받은 그 모든 빛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말살시키려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거창한 은사나 특권을 받아 누리는 것보다 최소한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천국 가는 데는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만약 타락하면”(If they fall away, 한글 개역에는 “타락한 자들은”으로 번역됨 - 역자 주, 히 6:6). 본 서신의 저자는 이 배도자들이 타락할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나중에 회개하여 다시 새롭게 된 베드로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는 사람이 유혹을 받아 타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이지, 회개가 불가능한 어떤 특정한 죄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타락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뜻함에 틀림없다. 사람은 죄를 짓다가도 그 마음에 여전히 복음의 빛이 주는 원리와 확신을 지니고 있어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회개의 가망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 진리의 전체 취지에 어긋난다(겔 18:21; 사 55:7 참조). 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 삶이 변화되는 체험을 몇 번 했다가도 또다시 타락하여 오랫동안 악한 길로 행할 수도 있다. 이에 해당되는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악한 왕 므낫세이다. 그는 결국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용납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안에 어떤 빛의 씨앗이라든가 소생할 가망이 있는 진리에의 확신이 있는 한, 그래서 그것이 그 영혼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능력 있게 역사할 가망성이 있는 한 이런 사람들을 회개가 전혀 불가능한 배도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들이 지금 현재 아주 위험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바울은 “실족”과 “타락”(넘어짐)을 구분하고 있다(롬 11:11 참조). 바울은 유대인들이 넘어지기까지 그래서 회복의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실족”에 해당되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다만 그 실족의 도가 심하다는 표현을 주기 위해 전치사 “away"가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방식으로 실족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든가 실족해서 결국은 넘어지게까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본문에 나오는 “타락하다”(넘어지다)라는 말이 뜻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그 죄의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 이 죄 또는 저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2) 그것은 어떤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유혹에 빠졌다가 다시 회개에 이른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유혹에 빠지는 일은 사전에 계획된 것도 아니요 의도적으로 택해서 빠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3) 그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적 원리 몇 가지를 부인하는 그런 타락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죄에 빠졌었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게 되는 칭의를 부인하는 죄에 빠졌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타락은 기독교의 주요 원리 및 교리를 모두 전적으로 부인하는 타락임에 틀림없다. 복음을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의 죄가 바로 이런 타락인데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타락도 바로 이런 것에 해당된다. 이 타락이 정말 구원의 소망도 없는 마지막 타락이었다면 이러한 부인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 당사자가 유대교든 아니면 다른 종교 혹은 이교(異敎)로 돌아서기 위해 기독교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이미 복음을 완전히 저버리고서도 어떤 세상적 이목이나 두려움 때문에 여전히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배도를 눈가림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조롱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러한 철저한 거짓말은 오히려 그들의 죄만 가중시켜 나중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타락”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복음의 규례 및 그에 대한 순종을 자진해서 저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최대의 비난과 모욕을 안겨 주는 일이다.

이러한 배도자들에 대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

그들은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새롭게 되어 회개할 수 있는 길이 그들에게는 막혔다. 사실 그들이 새롭게 되어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전적 불가능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단지 도덕적 불가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불가능”이 어떤 불가능을 의미하는지 그 참 뜻을 결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리들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1) 미래의 모든 사건들은 홀로 반드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것은 존재하지 말라 혹은 저 사건은 일어나지 말라고 제정하신 미래의 일들을 사실 불가능한 것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울과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존속되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반(反)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금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삼상 15:28,29 참조).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이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정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다면 구원 얻는 사람들이나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은 상태 혹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롬 9:11,12 참조).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은 하나님 혼자만 속으로 알고 계시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 정하신 일이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사 40:13,14; 롬 11:34 참조).

(2)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공의와 율법을 만족시키지 않은 채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법도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 배도자들의 회개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몰론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배도자들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데에는 그의 본성에 반(反)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새롭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 주권자 되신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마귀나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보다 이 배도자들에게 더 많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본 구절의 의미가 그런 뜻이라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3) 어떤 일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일의 질서와 규칙에 준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의 길로 인도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들을 회개로 이끌 수단을 제공하신 것도 아니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의 길로 이끌 경우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하신 거서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케 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거서도 아니요, 수단을 제공하신 것도 아니요, 도움의 약속도 하시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려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시키려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도움의 약속도 전혀 받지 않고 우리 고집대로 그 일을 자행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성사시키지도 못할 것이요 그 일을 시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제시하신 뜻과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면 그 일은 죄이기 때문이다(롬 14:23 참조).
따라서 우리가 배도자들을 회개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 알듯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의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일들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일은 그런 일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행하실 것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 혹은 원하시지 않는다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이 배도자들이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사용된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음의 은혜로운 변화”라는 뜻이다. 그 변화는 복음의 원리 및 약속이 그 영혼 전체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면서 일어나게 된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헬라어로는 “새롭게 하여 다시 회개케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배도자들이 자신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 배도자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케 하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뜻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불가능은 다른 사람들의 의무와 노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런 말이다. 누구든지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려고 해보았자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요 시간 낭비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한다.”는 단어는 우리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다시 헌신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따라서 이 새롭게 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과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뜻이 다 담겨 있다.
이 새롭게 됨은 내적으로 참되게 새롭게 되는 것이거나 아니면 외적 표시나 입술로만 하는 신앙의 외적 고백에 지나지 않는 것, 둘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새로워진다(딛 3:5; 살전 5:23 참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배도자들은 한 번도 새롭게 되고 성화된 적이 없었으므로 다시 새로워진다는 말은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외적 표시나 입술로만 하는 신앙의 외적 고백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뜻에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한 사람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배도자들은 비록 회개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한 번도 새롭게 되거나 성화된 적이 없다. 이처럼 외적 변화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하여 기독교 신앙과 자신들이 받은 세례마저 그렇게 철저히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 어디에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가 다시 거절되었다는 말은 전혀 있지 않다. 또 본문은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다가 아주 큰 죄를 짓고 다시 죄 된 길로 돌아서서 그런 삶을 오랫동안 영위하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자 할 때, 그가 성도의 교제를 다시 나눌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본문은 오히려 이런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로, 그들은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은 또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혹은 기독교 신앙을 영접하기 전에 자신들이 살던 옛 생활방식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파할 때 배도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중한 다스림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선하심뿐 아니라 그의 엄하심 또한 보여 주어야 한다. (롬 11:22 참조)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무한히 순전하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운 분이므로 만약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를 기쁘시게 섬기기 위해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예상치 않았던 때에 아주 엄하게 우리를 다루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과 지혜에 따라 반항하는 배도자들을 이처럼 엄히 다스리신다. 그런데 이런 엄한 처사는 만약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거스를 경우 우리도 그와 같이 엄히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로 주어진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그 공의나 위엄 혹은 지혜에 비추어 반드시 처벌하는 죄나 죄의 정도가 있는데 그것은 그와 똑같은 길을 가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엄하심을 나타내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하심은 무모하고 아주 극악무도한 죄인들, 특히 교회와 영광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에서 볼 수 있다. (나 1:2 참조)
이 세상으로 하여금 정신 차리고 앉아서 하나님의 엄하심을 보게 하려면 그분의 심판은 아주 이색적이어야만 한다.(민 16:29,30 참조) 그리고 모두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신다. (신 7:10 참조) 하나님께서 당장에 보응하신다는 것은 그 보응을 공개적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른다.(살전 5:3) 이러한 멸망이 큰 성 바벨론과 바벨론을 지지한 모든 자들에게 언젠가 임할 것이다.(계 18:7-10 참조)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심판은 그런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의 엄하심은 영적 심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심판에 의하여 배도자들을 다시는 새롭게 되어 회개에 이를 수 없는 형벌 아래 두신 것이다. 이 심판에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이 있다.(딤전 5:24 참조) 다시 말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절대 피할 수 없도록 이 세상에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관심도 갖지 아니하시며 그들로부터 어떤 영적 열매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개종과 회개의 수단을 자비롭게 제공해 주실 때는, 그분이 회개의 열매를 찾고 계시다는 뜻이다. 마치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포도 열매를 기대하듯 말이다.(사 5:2,4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회개할 수단을 더 이상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으로부터 회개의 열매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무도 사막을 돌보지 않듯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다. 그분의 백성은 돌보시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절대 회개하거나 믿지 못하게 하시려고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 (요 12:39,40 참조)
하나님은 자신의 엄하신 심판에 따라 저희들이 악한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도 있다.(롬 1:26,28,29 참조) 저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이듯 이 정욕에 사로잡혀 있어 도저히 일어나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시려고 유혹을 저희 가운에 역사하게 하시어 저희로 거짓말을 믿게 하신다.(살후 2:10-12 참조) 복음의 진리가 저들에게 전파되었고 저들은 한동안 그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그 진리를 영접했다. 그러나 그것에 순종할 만큼 그 진리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와 정욕 및 불의를 즐거워하여 회개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복음이 이런 죄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자 그들은 진리 자체를 싫어하고 은밀히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계속 믿는 척해야 하니까 이런 죄들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사단의 세력에 넘겨주신다. 그러자 사단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그들이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짓말을 가지고 그들 눈을 멀게 하고 유혹하며 속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겉으로 그리스도인 신분은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죄나 정욕은 버리려 하지 않는 그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신자들이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케 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려는” 성향이 있다.(롬 2:4,5) 그래서 그 영적 완고함과 뉘우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자신들에게 쌓고 있다.
따라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뿐 아니라 엄하심도 설교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도할 위험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도 회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이런 배도의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만약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의 영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심판받게 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유혹을 역사하게 하신다”는 사실도 경고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시겠다는 약속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가혹한 협박만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그들은 마치 “두 번 죽는 나무요 뿌리채 뽑힌 나무”와 같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을 사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래서 이런 홀연한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본문이 최초로 사도 시대에 성령의 특별하거나 기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분석해 볼 때 이 경고는 그러한 기적적인 은사가 그친 오늘날의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성령께서 주시는 평범한 은사나 특권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복음에 신실한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경고는 처음 쓰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이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하라.” 벼랑 끝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배도자들이 새롭게 되어 회개에 이를 수 없는 이유

어떤 헬라어 필사본들을 보면 “그들 자신에게”라는 헬라어가 빠져 있다. 따라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아니지만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누구든지 이 배도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배도자들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모든 혜택들도 다 공공연히 부인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그리스도가 또다시 제물로 드려질 수는 없다. 따라서 그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의 죄는 속죄될 수가 없다. 당시에는 미사에서 매일 드려지는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의 제물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 아래서의 속죄 제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제물은 그들이 과거에 범한 죄만 법적으로 속죄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또 짓는 죄에 대해서는 다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죄를 위해 새로운 속죄 제물이 드려져야 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해 단번에 드려진 예물이므로 그 예물을 거부하고 그이 피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또 드릴 수 있는 다른 예물이 없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가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 그리고 율법 아래서 속죄될 수 없었던 모든 죄까지 다 속죄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행 13:39) 율법 아래서는 어떤 희생 제물로도 속죄될 수 없는 죄들이 있었다.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은 가차 없이 죽어야만 했다. 살인과 간음이 바로 이런 죄에 해당한다. 그래서 두 가지 죄를 다 범한 다윗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런 죄들도 속죄했다.
그러나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배도를 속죄할 희생 제물은 없었다. 구약시대 때는 율법의 근본 원리들에서 완전히 떠났거나 혹은 “도에 지나친”죄를 범했을 경우 이를 속죄할 다른 제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는” 행위였다.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한 사람은 “긍휼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히 10:28) 그리고 이것은 복음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의적으로 배도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게 되어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위해 지정된 다른 희생 제물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멸망당할 일만 남아 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긍휼, 은혜, 구원은 오직 한 가지 예물,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만 국한된 것이다.(히 9:25-28, 10:12,14 참조) 그의 무한하신 지혜와 주권적 기쁨 아래 하나님은 그 모든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그리스도 한 분 안에만 두셨다.(요 1:14,16,17; 행 4:12; 골 1:19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이 “단 한 번의 예물”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하며 아주 강한 효력을 발한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예물 되신 그리스도께 오는 죄인 중, 죄를 위한 제사를 단 한 번만 드리고 더 이상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만약 누군가 이 한 번의 제사를 거부하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잘못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다른 제사(가령 미사와 같은)를 드리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 단 한 번의 제사가 가져다주는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보면 이것은 곧 배도자들 자신의 행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못 박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지만, 그분을 도덕적으로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들은 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 박는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악인으로 취급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행위를 옳다고 인정하고 정당화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셈이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거짓말쟁이요 하나님을 모독한 자요 악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든지, 악인으로 몰려 거부당하든지 양단간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배도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악인으로 선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를 저버리고 유대교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들은 또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및 그의 도를 믿어 보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진리나 선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배도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모토는 “당신의 복음을 읽고 알아 본 결과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어 본 결과 그 안에는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것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 불명예를 안겨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이 죄만도 엄청난 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다시 못 박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굴욕의 자리에 계실 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즉, 그가 “자신을 비우고 어떤 선한 증거도 얻지 못하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그분의 외적 조건이나 약함을 통해 “그의 영광,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하신 영광”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배도자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영에 의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이 배도의 죄가 막중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분을 직접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에 그 죄가 더욱 가중하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한 것이다. 여기서 “현저히 욕보였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는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즉, 가해자로 생각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벌하여 만인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으로, 그를 본 사람이 모두 그를 혐오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았을 때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마 1:19 참조). 그는 “마리아를 공공연한 본보기로 삼고 싶지 않았다.” 즉, 그는 혹시 간음을 범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서 그녀가 부끄러운 형벌받기를 원치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고 말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참혹한 고통을 겪으시며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셨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특히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배도자들이 그와 똑같은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그를 욕보였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현저히 욕보인 자들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이 배도자들은 그 용서와 긍휼을 받을 수 없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즉, 복음의 진리를 맛본 후 그리스도와 복음을 저버린 자들의 죄는 그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죄보다 훨씬 더 중하다는 것이다.
그 죄가 더 중한 이유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었다(행 3:17; 고전 2:8; 딤전 1:13 참조).
이 배도자들은 복음의 진리 및 그 선하심과 영광을 체험했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 중 어느 것도 체험하지 못했고 체험할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성령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와 사역마저 거부한 이 배도자들에게는 더 이상 긍휼과 은혜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 배도자들이 범한 죄 속에는 성령을 훼방한 죄도 들어 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그의 능력도 체험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의 이 사역을 마귀의 일로 돌리지 않고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3).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는 저주받을 자요 몹쓸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배도자들이 행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배도자들이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진리 및 선하심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의 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공개적으로 욕보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로부터 배운 것과는 위배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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