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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칼빈주의 확산에 비추어 본 한국 개혁주의의 발전과제/최더함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3. 1. 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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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칼빈주의의 확산에 비추어 본 한국 개혁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제 및 대안에 대한 고찰

 

- 최더함(Th.D. 아리엘교회 담임목사)

 

 

 

 

 

 

1. 들어가는 말

 

중국의 모 신학교에 강의 차 다녀왔다.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느끼고 배우고 각성한 것이 많았다. 중국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도 한 복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여대생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도심과 농촌의 중간지대에서 도자기 디자인을 하는 젊은 자매는 매일 아침과 저녁 시간을 정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산다고 고백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자매의 아버지는 중국 공산당의 고위 관료였으며 그 자신도 현재 기독교로 개종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신학교는 지금 전국 각지에서 밀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북적였다. 그들은 중국당국의 이유 있는 정책과 배려(?)를 빌미로 한 곳에 기숙하며 기독교신학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당국은 이런 불법의 단체를 단속하고 해치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가 신고라도 할까봐 크게 찬송을 부르지 못한다. 공안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리면 모두 쥐 죽은 듯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은 마치 16세기에 있어서 유럽의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다. 중국의 현 상황은 칼빈주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복음이 전 유럽으로 확산될 무렵의 시대적 상황과 닮은 꼴이다. 짧은 기간 안에 억압받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진 것도 닮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해진 천인공노할 교황청의 탄압이 있었던 것처럼 중국 정부도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당시 유럽에 잘못 이해된 칼빈주의가 공존했듯이 중국에 전파된 복음에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혼재되어 있는 실정이다. 서로 다른 복음들이 진짜 복음과 뒤섞여 현지인들은 무엇이 진짜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복음의 어지러움 속에서 잘못된 신학과 사상을 동시에 흡수하고 있는 중이다. 문득 토저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상과 연합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가련한 잡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주께 가증한 것이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다.”

 

더욱 큰 문제는 칼빈주의는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혹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선교단체나 신학교들이 있지만 그들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필자는 16세기의 칼빈주의를 재조명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수호하고 계승코자 하는 칼빈주의의 정확한 실태에 대해 고민하고 현재의 과제와 향후 대응책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 중국의 바른 복음의 전파와 칼빈주의 신학의 전수를 위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16세기 유럽의 칼빈주의의 확산 배경

 

1) 카톨릭의 타락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 유럽사회는 큰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종교개혁의 사상들은 기존 카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근간에서부터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각인했고, 예수를 죄인들의 무게를 재는 두려운 메시아로 가르쳤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의 심판을 두려워했다. 이미 예수 보혈의 권능으로 죄를 사함 받았음에도 그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심판과 무서운 징계로 인해 쩔쩔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거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중보자가 필요했다. 처음엔 성직자들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 중세 말이 되자 성자들과 마리아를 추앙하는 신앙이 더해져 기독교신앙은 점점 미신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모범적인 목자로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할 교황들의 타락이었다. 한꺼번에 세 명의 교황들이 난립했던 1400년대를 기점으로 그들의 타락은 정점을 향했다. 연이어 흉악한 인물들이 교황좌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워나갔다. 그들은 한 마디로 부랑배에 가까웠다. 루터가 탄생할 당시의 교황은 이노센트 8세였는데 그는 결혼금지의 규약을 어기고 여러 명의 애첩들을 교황청에 상주시키고 그 사이에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기도 했다. 그의 후임인 알렉산더 6세(1492-1503)는 가장 악랄한 교황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혹평을 받는다. 그의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기아인데 스페인 출신인 그는 단 한 번도 사제로 일한 적이 없었음에도 삼촌 칼릭투스 교황(1455)의 힘으로 추기경에 임명되고 드디어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서 한 일은 재산 축재와 환락적인 파티와 창녀들과의 음행과 살인과 부끄러운 악행들이 거의 전부였다. 심지어 자신의 딸과 근친관계를 했다는 소문이 로마시내에 파다하게 퍼진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그는 1503년에 정적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이외에도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부패하고 타락한 교황들의 열전은 계속된다.

 

이 뿐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간직해 온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이 교황의 입맛에 따라 수정되고 변이되기 시작했다. 마리아와 교황은 점점 하나님의 호칭을 듣게 되었다. 한편으로 공룡이 된 교황청의 살림을 꾸리기 위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성상과 마리아상 조각품, 그리고 면죄부 판매, 그리고 각종 헌금요목을 나열하고 반강제적으로 헌금을 모금하여 보충해 나갔다.

 

카톨릭의 가르침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항구를 출항한 그들은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폭풍을 맞아야만 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심판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개혁적 바람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왜냐면 카톨릭의 칼바람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개혁의 싹을 자르고 짓밟기 위해 철저히 대응했다. 먼저 교황청은 개혁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도망친 노예들을 붙잡기 위해 동원된 추노들처럼 체포전담반을 만들어 전 지역을 이 잡듯이 뒤적였다. 체포된 자들은 일단 종교재판을 열어 정죄한 다음 가차 없이 화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자 이번에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만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예배를 드리던 개신교도들의 교회 안에까지 군사들이 침입해 불을 지르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교황청은 예수회(Jesuite)를 조직하고 신학적인 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수회원들은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이 이단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단정죄작업을 하는 산하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험악한 상황에서 종교개혁가들은 목숨을 걸고 개혁의 길을 걸었다. 루터를 필두로 많은 개혁가들이 각국에서 일어나 무지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하며 카톨릭의 횡포에 맞섰다. 점점 유럽사회는 카톨릭의 어둡고 무거운 옷을 벗고 개혁의 새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 유행은 삽시간에 전유럽을 강타했다.

 

2) 인쇄술의 발전과 기독교강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유행은 칼빈주의였다. 칼빈주의만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사람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 것은 없었다. 먼저 유럽의 지식인 사회가 칼빈에게 반응을 보였다. 이런 반응이 가능했던 것은 단연코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한 책의 보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은 쉽게 나를 수 있었고 자유로이 국경을 통과하여 개인 서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쇄물은 종교개혁사상을 전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잉글랜드를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책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서점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자들을 매료시킨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을 하나로 통합하고 개신교 개혁파의 신학을 정립하여 여러 혼란을 잠재운 것은 바로 이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개혁파들에게 하나의 심장이자 이정표가 되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라틴어와 불어로 출간된 이 책은 여러 차례 판을 거듭하면서 증보되었다.

 

기독교강요는 단순히 종교개혁을 위한 신학 책만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칼빈은 자신의 사상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의 중심된 교리들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든 하나의 교육자료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그래서 신학을 모르는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의 내용을 쉽게 읽고 이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어 불어판(1541년)의 경우, 칼빈은 일반 독자들을 배려하여 일부러 희랍어 단어들과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들을 과감히 폐하고 건전한 프랑스 속담들과 관용어들로 대신했다.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된 요인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만이 기독교강요의 위대성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중구난방이던 당시의 성경해석에 대한 불변의 지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칼빈은 책 서문에다 자신이 이 책을 쓴 목적을 분명히 기록해 두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자 거룩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이들이 하나님 말씀에 쉽게 다가가고 어려움 없이 그 말씀 안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강요를 읽은 사람들은 이 책이 성경에 견고한 토대를 두고 기독교의 중심 가르침들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면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참교회의 본질과 정치적 제도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이고 명료한 지침들과 세부규칙에 관한 다양하고 올바른 정보들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큰 힘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특히 개혁파 목회자들은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칼빈 이외의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3) 동역자들의 협력과 순교

 

사실 칼빈은 작은 도시 제네바의 일개 목회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칼빈의 영향력의 확대는 마치 홍수가 순식간에 땅을 뒤덮는 것처럼 유럽사회를 덮쳤다. 그런데 이러한 칼빈주의의 확산에는 칼빈 이외 여러 개혁가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루터의 제자인 필립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 칼빈에게 영향을 끼쳤고, 칼빈을 개혁의 길로 이끈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물론이고, 취리히에는 쯔빙글리(Zwingli, 1484-1531)와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 1504-1575)가, 바젤에는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ampadius, 1482-1531)가, 스트라스부르그엔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가 있었으며, 칼빈의 후계자이자 칼빈주의의 시조로 인정되는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장로교회의 기틀을 세운 존 낙스(J. Knox, 1514-1572) 등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들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자신의 목숨과 일생을 쏟아 부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의 보급과 확산을 위해 헌신하고 순교한 무명의 수많은 동역자들의 공로 또한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의 개혁을 위해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고 프랑스에 파송되었다가 무고히 목숨을 희생당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칼빈주의의 생명력 또한 크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에 의한 종교개혁사상과 운동의 확산은 14세기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사상이나 17세기 후반의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4) 지정학적인 위치와 사전효과

 

칼빈이 종교개혁을 제네바에서 시작한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 보인다. 칼빈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네바는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사상 전파에 매우 유리한 지점이었다. 우선 지리적으로 제네바는 남으로 이탈리아, 동으로는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국들, 서로는 강대국 스페인, 북으로는 프랑스와 화란, 그리고 잉글랜드를 두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인 유리함을 이용하여 칼빈은 줄기차게 각국의 지인들과 목회자들, 설교자들, 선교사들, 영향력 있는 권세자들과 귀부인들에게까지 서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칼빈의 서신은 종교개혁의 엔진이 꺼지지 않도록 만든 불쏘시개였다. 칼빈은 그의 서신을 통해 각국의 신학적 난제들에 대해 해명하고, 도 어려운 정치적 숙제들에 대해 답을 주었으며, 이단의 공격에는 적극적인 변증을 하면서 복음을 수호했다.

 

한편으로 제네바는 프랑스의 직접적인 통치와 경제적 영향을 받긴 했지만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교황청 간의 미묘한 정치적 구도에 의해 다른 지역보다 매우 자유로운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이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일찍이 시작할 수 있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제네바는 칼빈이 오기 전에 이미 종교개혁을 시작한 곳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그의 신학사상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마음껏 개혁신학을 교육할 수 있었다. 하나님에 의해 제네바는 사전에 칼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제네바의 자유로운 환경은 칼빈주의를 낳게 한 주요한 요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도 지리적으로 선교의 중심지가 될 만한 매우 유리한 지정학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상의 요인들 외에도 칼빈주의가 유럽사회를 강타하고 빠른 시간 안에 확산된 원인과 배경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황청의 탄압이 극심해질수록 반발심과 함께 확산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든지, 북부 화란을 비롯한 상업과 무역대국들이 이룩한 경제력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한 문맹에의 탈출 등의 요인들도 칼빈주의를 발전시킨 요인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결과적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역사에 의해 중세 1천년 동안 교회에 드리우진 커튼을 치우는 유효한 도구가 된 것이다.

 

3. 현대 칼빈주의의 과제

 

1) 중국의 경우

 

불행히도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먼저 수입하지 못하고(한국은 다행스럽게 칼빈주의의 대가인 고 박윤선, 박형룡, 김치선 박사 등에 의해 정통 신학을 수입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보아야 한다.) 각종 이단적 사상과 신학을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신학을 전파하는 일은 마치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16세기 당시를 연상케 한다.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복음의 자유로운 전파를 허가하지 않고 있다. 15억 인구를 가진 거대한 나라 중국은 아직까지 복음적 입장에서는 어둠의 땅이다. 그나마 복음을 접한 일부 중국인들(조선족까지 포함한)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정부에서 감시하고 관리하는 삼자교회의 교인들까지 합하면 공식적으로 대략 3천만 명 전후로 파악한다. 그러나 워낙 지하교회가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정확한 숫자의 파악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중국정부의 대기독교정책에 있어서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제 외교적인 입장에서 중국정부는 현재 삼자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의 운영을 중국기독교연합회에 일임하고 있다. 목회자 안수 및 청빙이라든지, 회합, 집회 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 주일마다 행해지는 설교에서 중국정부의 정책과 지도부를 비롯한 권력자들과 공산당을 비방하는 설교는 엄격히 금지된다. 삼자교회의 담당자는 매월 교회의 재정상태에 대해 종교국에 보고해야 한다. 여전히 지하교회를 감시하고 그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여 처리하고 있고, 한국 및 외국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밀착하여 감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행하는 신학교 운영에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1차 적발 시에 구두로 경고하지만 그 이상일 경우, 벌금을 물리거나 인신구속을 하거나 영구추방령을 내린다. 이 상황은 16세기 로마 카톨릭의 감시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말로 심각한 것은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가 정통 보수 개혁주의적 기독교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장로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겐 매우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의 성향으로 보건대 대개 신령주의와 기복주의, 은사주의 등 온갖 다른 복음과 다른 사상이 혼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칼빈주의는 상륙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현지 목회자들은 한족이건 조선족이건 간에 개혁주의라는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부분 그들은 중국에 불어 닥친 복음에 대한 열정 하나로 무장하고 부지런히 복음의 비밀조직원들을 구성하고 있었다. 베이징 외곽에서 제법 규모를 가지고 운영되는 S신학교의 강좌는 온갖 신학류가 혼재한 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숙사 형태로 운영되는 이 신학교에서 학생들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고함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방언기도가 횡행되었다. 일부는 교회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목사라는 자격을 따기 위해 입학한 학생도 섞여 있었다. 그들에게 칼빈은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었다.

 

과연 이러한 땅에 개혁주의 신학은 발을 딛고 정착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중국을 비롯한 제 3의 국가들에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하고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 위해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어떤 역량을 모으고 발휘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을 앞에 두고 현재 한국의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당면의 과제들을 살펴보고 개선책을 수립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심도 있게 모색해보아야 할 때라고 본다.

 

2) 한국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당면한 과제들

 

공식적으로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원사우)가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부터 셈하면 한국 개혁주의의 역사는 2012년 현재 127주년에 달한다. 그러나 건전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한국 개혁주의는 해방 이후 박윤선, 박형룡 등의 신학자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고신과 총신의 대학들로부터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개혁주의는 철저히 종교개혁의 정신,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개혁’을 지향한다. 특히 한국의 개혁주의는 칼빈주의로서 일반적으로 루터교 신학이나 알미니안주의 신학과 구별되는 신학사상을 일컫는다. 물론 종교개혁 당시부터 대략 1560년대까지는 개혁(reformed)이라는 말은 프로테스탄트 내지는 복음주의를 의미했고, 루터교를 포함했었다. 그러다가 1590년대 이후에 비로소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이 명료해졌다. 특히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혁주의는 루터교회와 구분되는, 다시 말해 칼빈에 의해 주창된 교리체계와 교회체제, 또는 정책을 수용하고 따르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의 표준으로 삼는 전통을 세웠다.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성을 고수하며 말씀 사경회와 기도회 등을 통해 신자들을 정통신학의 범위 안에서 교육하는 한편 적극적인 신학교 설립에 투자하여 많은 개혁주의 학자 및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한국교회의 발전을 주도하다시피 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장로교회 안에 미국발 오순절주의 신학과 은사주의적 운동들이 대거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용하고 신중하며 매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던 전통적인 장로교인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만들었고 그들은 조금씩 이상한 기독교의 전통에 물들어갔다. 박수조차 교회 안에서 치기를 거부했던 그들이 손뼉을 치며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팔을 흔들고 온갖 방언을 하고 눈물과 통회와 부르짖음과 철야 기도와 합심기도와 입신과 각종 은사들의 향연과 축귀를 위해 고함치고 뒤집어지는 일을 예사로이 행했다. 더 이상 개혁주의에 입각한 장로교라고 말할 수 없는 장로교회가 즐비하게 되었다. 많은 장로교의 지도자 및 교인들이 기존의 교단을 버리고 자신들만의 교단을 설립하고 분리해 나갔다. 특히 여자 목사 안수문제를 둘러싸고 장로교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 개혁주의의 변질과 변이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개혁주의 진영에 침투한 자유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오순절주의 등 비개혁주의 신학과 신앙행위들로 인해 한국 개혁주의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개혁주의가 왜 이런 처지가 된 것인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수많은 정치적 대립과 갈등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한국 장로교회는 친일적 유산을 청산하려는 영적 쇄신운동과 교회재건운동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불행하게도 장로교회의 대립과 긴장의 요인이 되었다.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신사참배자에 대한 치리문제로 인해 교회 분열을 체험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고신교단의 분열이다. 재건파와 한상동 목사파의 대립은 결국 분열을 낳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게 박해를 받던 성도들이 출옥하여 세운 재건파는 기성 교회를 마귀당으로 정죄하고 기성교인과 교제하는 것을 신사참배 동참죄에 빠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등 극단적인 분리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자들에게 회개와 근신을 요구하자 친일파였던 김길창과 김관식은 회개 대신 신사참배 합리화에 급급했다. 이들 세력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등을 졌다. 이후 합동 측의 주류와 비주류간의 싸움도 정치적인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것이었다. 과거의 정치적인 사례가 모든 갈등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개혁교회 안에는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의 요인들이 남아서 지금까지 각자 다른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고 교단을 형성함으로서 많은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만약 한국의 개혁교회가 정치적으로 분열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역량을 모아 중국을 비롯한 제 3세계에 대한 개혁주의의 수출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둘째, 잘못된 부흥의 여파로 인한 현실안주와 외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1970년대 들어 크게 부흥했다. 특히 1973년의 빌리 그래이엄 목사의 전도집회와 1977년의 민족복음화 성회, 1974년 엑스플로 74 등을 통해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한기총 자료에 따르면 1970년에 13,007개이던 교회와 3,235,475명이던 교인수가 1976년에는 16,351개의 교회와 4,319,315명의 신자로 늘어났고,1980년대에는 21,243개의 교회와 7,180,627명의 교인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수백만이 모이는 대중 집회가 성공을 거두자 교회는 수적인 확장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교회성장주의가 득세를 하고 수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개교회주의가 득세를 하자 기존의 교단 중심의 질서가 와해되고 오히려 총회가 대형교회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각 교단들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교세확장에 앞장섰다. 이러한 교단의 확장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교권주의자들을 만들었다. 교권주의자들은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나아가 세를 불리기 위해 교권주의자들은 1990년대 들어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불순한 교단의 정치활동과 패권주의는 한국의 개혁주의를 오염시켰다. 특히 장로교회는 부흥의 와중에서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제 온전한 개혁주의 전통으로 무장한 장로교회를 찾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후 몇몇 뜻있는 신학자들과 열렬한 추종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전락했다. 일반 성도들은 어느새 신학과 관계없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숫자적 부흥이 개혁주의를 발전하도록 하기는커녕 오히려 개혁주의의 퇴보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잘못된 부흥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 도취되어 현실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벗어야 한다. 시대를 바라보고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오히려 철저한 개혁주의의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 알다시피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신념의 선상에 놓여 있다. 이 말은 시대적 상황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교회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교회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

 

셋째, 반지성적인 신앙행위를 묵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비개혁주의적인 요소들, 즉 감정적이고 직통계시적인 신령주의와, 기복적이고 극단적인 신앙의 침투에 적극적으로 대비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 결과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지성적인 요소들이 함몰되고 반지성주의적 신앙과 신학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여 기존의 정통적인 교회상을 무시하고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행위들이 장로교 안에 속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몇몇을 제외하고선 잡종이 되었다. 장로교회의 목사가 집회 중에 방언기도를 드리고,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음악을 통한 감성적 자극에 앞장서는 형국이 되어 있다. 개혁주의는 위대한 지성적 활동을 요구한다. 개혁주의 기독교는 지성적인 사고의 연합에 의한 매우 고결한 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순간의 감정이나 황홀경으로 신자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개혁주의의 가장 큰 위험이다. 불행히도 반지성적인 기독교의 모양들이 1980년대부터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자유주의와 은사주의의 영향을 받은 터이다. 이에 대해 많은 선견자들이 경고한 바 있다. 그중 1980년 가을 무렵에 미국 휘튼대학(Wheaton College)에서 찰스 말리크(Charles Malik)는 이렇게 경고했다.

“기독교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위기는 반지성주의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영역에서 가장 깊숙한 곳까지 계발되고 향상되어야 할 지성이 기독교에서는 거의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개혁주의가 침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합리적이고 일체감 있는 신학적인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혁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신학적 사상이나 특성, 또는 배경에 따라 개혁파 신학, 칼빈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 등으로 불리어진다. 보수적 신학계통의 장로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적 성격을 주장함에 있어 정통적인 칼빈주의적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란 역사적 기독교회가 믿고 추구해야 할 성경적 개념과 사상을 말한다. 서요한 교수는 개혁신학의 특징으로 정통성과 부단한 자기혁신, 그리고 적용되는 신학과 공동체사역의 지속적인 추구를 꼽았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인 정의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는 모든 신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게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그리하여 한국의 개혁주의는 모든 학자들마다 다르고 모든 목사들마다 다르고 모든 학교에서 다르고 모든 교회에서 다르다는 말을 듣는다. 무엇인가 일치된 카테고리가 필요함에도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모든 입으로 개혁주의를 말하면서 하나의 개혁주의를 말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우수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의 능력으로 단순히 재단하고 평가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밝히려는 개혁주의를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는 비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혁주의를 전파하고 가르치기 위해 하나의 일치된 규범을 준비해야 한다. 이 규범으로 개혁주의의 확산을 꾀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개혁주의는 여전히 분산되어 있다.

 

 

4. 한국 개혁주의의 확산을 위한 몇 가지 방안들

 

첫째, 정치적인 교단의 틀을 허물고 속히 신학적인 일치를 가진 교회들의 교단으로 거듭나야 한다. 특히 정치적인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효율적이며 교권주의적 행태를 탈피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신학적 일치를 이룬 교단의 창설을 서둘러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장로교회의 대다수가 이미 비개혁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하나의 교단 내에 여러 신학이 혼재하여 외부적인 공격이나 새로운 이단사상의 출현에 합의되고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신학이 다르다는 것은 신앙이 다르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교단은 같은 신앙고백을 기초로 모인 교회연합체이자 총회이다. 이제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신학을 겸비한 교회들의 새로운 연합과 총회가 구성되어 할 때이다. 한 마디로 개혁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총회를 기반으로 더욱 강건한 힘과 능력으로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지러운 한국의 개혁주의를 수습하고 정비하여 집결된 힘으로 하루 속히 중국 땅에 개혁주의를 수출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둘째, 다양한 개혁주의의 사상과 견해들이 산재하지만 일정한 개혁주의의 틀을 짜야 한다. 놀라운 것은 신학교에서 개혁주의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한국 개혁주의를 무지개에 비유하면서 적어도 일곱 색깔의 다양성을 내포한 무지개의 아름다운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내는 이른바 무지개신학을 선언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적어도 이 정도의 범위와 범주, 내용들을 망라한 한국 개혁주의의 정수를 수립하는 것이 21세기 개혁주의 확산에 기여하는 해법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셋째, 21세기 개혁주의 확산을 위해 모든 사역자들이 합심하고 협력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는 무엇보다 공동체 사역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한국 개혁주의 선교 및 교육정책을 재고하고 선교사 파견기구를 일원화하는 한편, 선교사양성기관을 두어 자격을 갖추고 질 좋은 선교사들을 배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국내의 개혁주의에 대한 교육을 위해 통일된 커리큘럼과 정통 개혁주의 노선수립 등에 힘써야 하며, 무자격 무인가 총회신학교의 운영을 중단하고 전국 단위의 개혁주의 신학교의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개 교회 중심으로 진행되는 모든 활동을 자제하고 총회 중심의 사역에 집중하도록 개 교회를 설득하고 동참을 유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원확보에 힘써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개혁교회는 재원을 튼실하게 마련하는 일에 실패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중,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법률적, 경제적인 지식을 보유한 전문가를 중심으로 재단설립을 추진하며 일단의 수익사업을 병행하는 기구를 속히 전담 배치해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해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돈 문제에 대해 사실상 기피하고 외면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마치 돈 문제에 얽히는 것이 은혜로운 일이 아니라는 강박관념 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을 앞두고선 누군가가 재정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요행에 빠지기도 한다. 기도하면 된다는 논리는 기도와 함께 지각을 사용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못 오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이 돈을 잘 관리할 뿐 아니라 열심히 돈을 벌기도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청지기가 될 것을 주문한다. ‘나는 신학자이므로 열심히 학문만 하면 돈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오히려 기복주의일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재원이 없어서 선교를 못하고, 재원이 모자라서 교육을 중단하고, 재원이 고갈되어서 다른 이에게 좋은 기업과 약속의 땅과 주님의 백성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재원확보를 위한 특별대책을 강구할 때라고 본다.

 

5. 나가는 말

 

16세기 유럽사회를 강타했던 칼빈주의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한국 개혁주의의 확산을 꿈꾼다. 16세기의 선조들이 칼빈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필요할 때 연합하고 상부상조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이 동역자의 심정으로 헌신과 연합으로 섬기는 사역에 앞장서야 한다. 나아가 일치된 신학적 입장으로 한국을 넘어 중국과 동남아와 중동과 아프리카 등의 선교에 주역이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전세계에 개혁주의를 전파하고 확산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왜 우리는 개혁주의를 전파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개혁주의만이 복음을 바로 전하고 바로 증거하고 모든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고 인도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반틸은 누구보다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오직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 제시하는 바 성경 그대로의 그리스도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죄를 버릴 수 있도록 강하게 도전하고 또한 그들을 진리와 생명 속에 확고히 세워 줄 수가 있다.~ 복음은 마음대로 가감되거나 절충적으로 타협됨이 없이 그대로 전파되어야 한다. 보라! 온 세상이 깊은 어둠속에 빠져 있지 않은가. 현대 철학자들은 스스로 건설해 놓은 영역의 공허 속을 서로가 서로의 뒤를 다르면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율에 대한 공통적 가정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올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이며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하고자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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