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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의 경제원리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9. 01:36

본문

칼빈주의의 경제원리

서론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사회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곡해되어 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돈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는 돈에 대해서 극단적 회피주의의 모습을 나타냈으나 오늘날은 기복주의 신앙의 영향으로 인해서 돈에 대한 소유여부가 기독교적 신앙의 절대기준이 되어 버린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런 왜곡된 돈에 대한 이해 때문에 돈을 통해서 발생되는 다양한 경제적 활동과 모습도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변질된 모습으로 기형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 글을 통해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칼빈주의 입장에서 회복해야 할 성경적인 올바른 경제원리가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칼빈주의와 돈

1) 비성경적인 돈에 대한 입장

성경적 경제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활동의 핵심이 되는 돈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먼저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비성경적인 두 입장을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중세시대의 돈에 대한 입장으로서 중세시대는 극단적인 이원론의 사고로 인해서 돈을 부정하는 부정적 자세를 드러내었다. 둘째로 오늘날은 기복주의 신앙으로 인해서 돈이 신앙의 결과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세시대의 문제점은 정당한 돈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으며 오늘날의 돈에 대한 잘못된 내용은 돈을 하나님처럼 받드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두 입장 모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낳아서 올바른 성경적 경제원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중세시대의 경제관은 염세주의적 경제관을 갖게 되어 돈을 죄악시 하였고, 그 결과 돈과 관련된 노동이나, 경제활동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고로 인해서 사회경제는 발전하지 못하고 더딘 걸음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경제관은 너무 돈에 치우친 나머지 교회나 사회모두 돈을 소유하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 결과 돈의 소유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을 판단하게 되었으며, 이런 신앙관은 사회경제원리에도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기 위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으며, 이런 모습으로 인해서 각종 부정부패가 더욱 깊어 가는 경제활동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2) 성경적인 돈의 정의

성경에서 가르치는 돈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입장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적으로 올바른 성경적 관점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시대는 극단적 이원론의 사고 때문에 돈과 관련된 모든 경제적 활동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성경에서는 인간의 삶의 문제가 신앙만큼 중요한 요소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창조해 주셨다. 몸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몸이 생명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라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필요한 내용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선물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라는 말씀을 통해서 문화명령을 주셨기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들은 중세시대의 판단처럼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아가도록 마련해 주신 방편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하는 중요한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타락 이후에 죄로 인해서 악해진 부분이 있을지라도 칼빈주의에서는 일반은총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인간의 삶의 수단들이 건전하게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도구들임을 지적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성경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돈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라고까지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잠10:15)”,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잠11:16)”,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잠18:11)”. 또한 조석만 교수는 구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소개하면서 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선물로서 주어진 성격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욥기에 기록된 욥의 고백에서 보면 재물의 출처가 어디인 것을 말하고 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의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인데 하루 동안에 수많은 재물의 손실을 보았으며 그의 육신에 불치의 병까지 들고 말았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향하여 부르짖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하였다. 시편 127:2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아니하시면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 26:12에서는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질 것이라”고 하셨다. 전도서 5:19에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돈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지만 기복주의적 사고로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복주의적 신앙관은 돈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본질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의 삶을 극단적인 물질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물질주의에 대한 정신에 대해서 성경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탐욕은 우상숭배와 같다고 그 위험성을 엄격하게 지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경고들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6-17)”,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잠21:27)”,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23:4)”,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위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돈에 대한 의미를 오해하거나 변질시키게 되면 그것은 곧 죄악을 짓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 숭배의 길로 빠져드는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주의는 돈에 대한 이중적 의미를 균형 있게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돈은 일반은총 안에서 생각할 때 문화명령을 성취하기 위한 선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이런 바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물질주의로 빠지게 되면 그것은 가장 큰 악을 범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주의해야 함을 함께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항상 도전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소개될 칼빈주의적 경제원리에 있어서도 이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돈에 대한 바른 정립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돈에 대한 의미를 바르게 정립하게 되면 성도들을 아버지와 같이 돌보시는 은혜에 깊은 감사의 정신을 갖게 되며,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주는 생명과 관계된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신앙을 간직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칼빈주의와 노동

칼빈주의는 돈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도 아니요, 또한 돈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입장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돈은 문화명령을 성취하기 위한 합당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귀하게 쓰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칼빈주의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노동에 대한 문제를 제시해 주었다. 왜냐하면 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은 문화명령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창조 시에 우리에게 세워주신 노동임을 성경에서는 증거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좀더 졸자,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6-11)”,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3:10)”,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전3:13). 이런 말씀들은 노동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고, 그 노동의 결과를 통해서 돈이라고 하는 재화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돈은 이처럼 노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적인 돈이 칼빈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로서 정당하게 평가되는 것처럼 역시 돈을 산출하는 노동도 칼빈주의에 있어서는 거룩하고 소중한 것으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원리에 대한 이해는 십계명의 정신에 기초되어 있기도 하다. 십계명 중에서 팔계명은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출20:15)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노동명령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141 제 팔 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제 팔 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들과 거래에 있어서 진실하고, 신실하며,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각자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며, 정당한 소유주로부터 불법하게 점유한 물건을 배상할 것이며, 우리들의 재능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주기도 하고, 빌려주는 것이며, 이 세상 제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의지와 애정을 절제하는 것이며, 우리의 성질의 유지에 필요하고 편리하며, 형편에 맞는 것들을 얻고 보존하며 사용하고 처리하려는 주의 깊은 용의(用意)와 연구를 하는 것이며, 정당한 직업과 그것에 근면하는 것이며, 검약함과 불필요한 소송과 보증서는 일이나 기타 그와 같은 약속들을 피하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부와 부동산을 구하여 보존하고 증진하기 위하여 모든 공정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대요리문답의 설명처럼 칼빈주의는 노동이 문화명령을 성취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했으며, 이런 이해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합법적이고 건전한 노동이 “하나님의 소명”으로서 이해되어졌으며, 여기서 “직업소명론”이라고 하는 유명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은 중세시대처럼 회피하고 외면해야 하는 더럽고 악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교회와 사회는 노동에 대한 중요한 변화를 갖게 된다. 즉 중세시대에는 노동활동 등이 아주 더럽고 추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회피되고 무시되어서 각종 직업과 경제활동들이 퇴보하도록 하였으나 칼빈주의의 제시를 통해서 각 지역에 활발한 노동이 펼쳐지고 그 노동을 통해서 많은 재화를 축적하게 됨으로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극복해 갈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돈에 대한 부분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노동의 양면성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돈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갖고 있기 때문에 깊은 주의와 절제가 필요한 것처럼 노동도 역시 직업소명론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이것도 인간의 죄악 때문에 노동의 성격은 한계가 있고 또한 악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고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깊이 지적되고 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다(전 3:10)”.

결국 칼빈주의는 노동의 원리를 중세의 극단적 이원론으로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해 주었다. “직업소명”이라는 의미로 노동은 하나님의 뜻인 문화명령을 성취해 가는 중요한 수단이요, 선물로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환으로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지역에서는 노동활동과 경제활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높여주었다 해서 마치 노동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오직 노동자체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며 결과인 것처럼 이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노동은 물질만능주의로 갈 수 있는 위험을 항상 갖고 있음을 함께 지적해 주었던 것이다. 노동에는 분명히 한계와 취약한 함이 있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노동을 통해서 인간의 경제활동을 최고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면서도 자칫 그 노동의 결과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각각의 노동 분야에 절제하고 적정성을 지킬 수 있는 균형있는 자세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3. 칼빈주의와 경제활동

돈과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져는 과정과 결과는 반드시 일반사회의 경제활동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은 사회의 경제적 활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며, 돈은 그 노동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물로서 경제적 활동을 유지시키고 발전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돈과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총제적인 경제활동에 대한 칼빈주의 원리를 다시 한번 정립해 보고자 한다. 경제활동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부분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경제활동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문제들, 특히 노동과 돈과 연결된 경제활동에 대해서만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 부분 중에서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이해가 필요한 기업과 노조문화에 대해서 제시해 보고자한다. 왜냐하면 경제활동의 가장 중심이며, 출발이 되는 것이 바로 기업가와 노동자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1. 기업가와 노동자에 대한 성경적 이해

현대사회가 자본주의화 되면서 두 가지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주로 기업의 책임자들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해 있다. 또다른 하나는 분배를 중심으로 경제를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이 분포해 있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항상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다. 경제성장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으며, 경제분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업가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갈등이 깊어 갈 때는 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갈등 속에서 과연 성도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경제라고 하는 것은 노동을 중심으로 그 결과물인 돈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적 경제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과정인 경제활동 중에서 기업과 노동활동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기업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다. 기업은 노동활동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기업의 자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았지만 현대사회는 다양한 기업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사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노동이 기업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활동에 있어서 중심적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큰 비중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로 현대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폐단은 수많은 개인들이 노동의 주체가 되고, 그 노동의 실제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반대로 노동자들은 기업을 세우기 위한 단순한 희생자들로 전락했다. 특히 노예제도와 같은 구조는 기업중심의 경제형태가 보여주는 가장 큰 폐단의 모습이기도 했다.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기업가들의 악한 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경제적 우월권을 가지고 있는자는 경제적으로 아래에 있는 자를 소중히 여기고 잘 돌봐줘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제적 우월권이 인간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칼빈주의에서는 청지기적 경제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각 사람의 자리를 세워 주셨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 대해서 철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칼빈주의는 특히 5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확립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사회질서를 세워 주셨는데 특히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는 “124 제 오 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합니까? 답: 제 오 계명에 있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연령과 은사에 있어서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의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정신에서 경제적 우선권을 가진 기업가들도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막중한 권위이기 때문에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고 엄중하게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대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해 주고 있다.

130 윗사람들이 짓는 죄들이 무엇입니까? 답: 윗사람들이 짓는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 외에 자기 자신들의 영광, 안일, 혹은 쾌락을 과도히 추구함과 불법한 일이나 아랫사람들의 힘에 지나친 일을 하라고 명령함이며, 악한 일을 권하고 격려하거나 찬성함이며, 선한 일을 못하게 말리며, 낙심시키거나 반대함이며, 그들을 부당하게 징계함이며, 잘못된 일과 시험과 위험에 그들을 부주의하게 폭로하거나 내버려둠이며, 그들을 노하도록 격동하게 함이며, 혹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불공평, 무분별, 가혹, 혹은 태만한 행동으로 그들의 권위를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경제적 우선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세부적으로 그 의무를 지적해 주기도 한다. 제 사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8-11)라고 지적하면서 경제적으로 아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휴식까지 염려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과도한 노동을 통해서 아랫사람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임금과 관련해서도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결국 성경의 표현들을 통해서 경제적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살펴보면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경제적 우선권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권위이기에 거룩한 청지기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와 같은 높고 거룩한 책임감이기에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도록 맡겨주신 아랫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돌보듯 자비롭게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양육하시기도 하지만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가정에서는 부모를 통해서 양육하시기도 하며, 사회를 통해서는 기업가나 통치자를 통해서 우리를 양육하시며, 영혼에 대해서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를 양육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청지기적 책임감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는 주로 기업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성경적 자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인류역사가 발전해 오면서 노동자들은 항상 권력과 힘과 부 앞에서 희생자로 살아온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죄악된 모습 때문에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사회속에서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사건이나 19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자유주의 신학 운동들을 통해서 급진적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이나 활동 방식이 매우 과격하고 혁명적이며, 폭력적이어서 사회를 더 큰 혼란을 몰아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들에 대한 강한 배타적 의식으로 인해서 경제적 불균형의 질서를 완전히 부정하게 되었고, 분배를 중심으로 초점을 삼아 각종 부당한 행위들을 일삼기도 했다.

노조활동도 위와 같은 정신의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은 매우 배타적이고, 경제활동에 대해서 아주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서 각종 폭력과 무질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으로 기업과 사회는 더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다. 비록 노조활동이 성경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정신과 행동에 있어서는 매우 비성경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노동자의 입장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위에서도 보았지만 5계명을 중심으로 한 창조적 질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인해서 각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세워 주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직업소명론이라는 원리를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주권 사상에서 도출했던 것이다. 특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라는 말씀은 이런 정신을 제시하는 중요한 구절로 제시되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각 사회질서 속에 세워진 권위를 존중하고 섬길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죄악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생명조차 유지 될 수 없는 무질서와 혼탁함으로 빠질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 보호책을 세워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창조적 질서가 흐트러져서는 안된다고 엄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29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이게 주신 권위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가서 대요리문답에서는 경제적으로 아래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범할 수 있는 죄의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127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마땅히 드릴 존경은 무엇입니까?

답: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마땅히 드릴 존경은 마음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모든 순종함과 합당한 경의와 그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와 그들의 덕행과 은혜를 본받음과 그들의 합법적인 명령과 권고에 즐거이 그들의 징계에 마땅히 복종함과 그들의 여러 계급과 그들의 지위의 성질에 따라 윗사람들의 인격과 권위에 충성하고 변호하며 지지함과 아울러 그들의 약점을 짊어지고 이를 사랑으로 덮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과 그들의 다스림에 영예가 되게 합니다.

128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대하여 범하는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짓는 죄들은, 그들에게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함과 합법적인 권고와 명령과 징계를 함에 그들의 인격과 지위에 대하여 시기하고, 경멸하고, 반역하는 것이며, 그들과 그들의 다스림에 치욕과 불명예를 주는 그런 모든 난처하고도 불미스러운 태도를 취하여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들입니다.

위의 고백 중에서 아랫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무서운 죄는 윗사람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를 매우 심각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랫사람이 가져야 하는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이런 고백들은 노동자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깊은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아랫사람은 먼저 경제적 질서를 단순한 자본주의적 원리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 질서 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노동자도 자신의 성실함과 근면함을 통해서 때로 경제적 우위의 권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그런 위치를 얻지 못했을 때는 노동자로서의 소명을 잘 지켜가야 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노동적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서 창조적 질서까지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만 합법적인 방법 안에서 정당하고 바르게 활동할 수는 있지만 그 선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질서를 무너뜨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벧전2:13)”라고 지적하면서 창조적 질서와 제도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태도를 통해서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세워질 때 상호존중하고 섬기는 원리가 경제활동 속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소명의 정신이 세워져야만 경제성장과 분배에 대한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경제적 결과를 누릴 수 있는 균형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칼빈주의에 있어서 경제원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주권 사상에 기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 속에서 이 경제원리를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을 때 문화명령을 주셨기에 노동의 존재로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동은 반드시 경제활동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비록 죄악이 파고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창조명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정신에서 칼빈주의 돈도 일반은총 안에서 선하게 사용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도 직업소명론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 속에서만이 바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경제적 활동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바른 방향을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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