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라진 복음(월터 챈트리)
(막 10: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젊은 부자 관원의 특징
예수께 나아온 젊은이를 보면 그가 존경스럽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품위 있고 건실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을 깍듯한 예의로 맞이했습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그의 커다란 관심은 여러분의 존경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영적인 도움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로 그리스도께 달려왔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면담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영생을 보장받기에 갈급해 있었습니다. 달려오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안녕을 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계명들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삶은 두드러지게 청결했습니다. 예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지금까지 정결을 지켜왔다고 진실되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도덕질하지 말라”고 하는 우리 주님의 명령에 대해 그는 자신의 사업에 관한 한 정직하다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는 사기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부모를 존경해왔습니다. 그는 결코 중상 모략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성품은 우연하게 얻어진 것도, 새롭게 획득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도덕성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습관으로 정착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22절은 그가 재물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 :18에서는 그를 ‘관원’ -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귀족-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 : 20은 그가 ‘청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그의 성취가 훨씬 놀라운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를 ‘올해의 시민상 후보로 적합한 자’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분명히 여러분은 그를 그리스도를 위한 트로피로 내세우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예수를 고백하고 당신의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적인 이유가 세상에서 그처럼 성공적인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시키지 않겠느냐는 육적인 생각에 기인한 것이라면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어떠하겠습니까? 여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유망한 친구가 있다고 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전도자의 바람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성경을 펴서 그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나를 따라 이렇게 기도드립시다….’ 그는 약간의 지침에 따른 각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에게 일상적인 성경구절들을 보여주기만 하십시오. 이 부자는 우리의 복음전도를 위해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전도를 위한 우리의 물음들은 순식간에 그의 ‘결단’을 이끌어낼 것이며 그밖에 그에게 영생의 확신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그는 통계 자료에 첨부되어지고 그의 개종은 전세계에 보고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명성을 알 만한 복음주의 잡지에다 개인의 신상소개를 하는 데 많은 유익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이 귀한 영혼을 너무 함부로 다루시는 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처럼 형편없는 전도전략을 사용해서 죄인을 다루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책망으로 시작해서(모든 일에 대한) 십계명에 대해 얘기했고 영생을 얻는 조건으로 커다란 희생을 요구했으며 그 물고기가 떠나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방법을 몰랐단 말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점에 대해서 놀란다면 진정 당신은 복음전도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의 책망
예수께서는 자신의 첫 반응을 그 관원의 질문에 보이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심코 행한 인사말에 보이셨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경의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를 위대한 선생으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있는 말씀을 행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심지어 네가 언급한 나까지도)에게는 선하다고 불리워질만한 혹은 알려질 만한 자격이 없다. 원래 그리고 본질적으로 선한 이는 하나님한 분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영광스런 형용어들을 인간에게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참된 일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형용어들을 사용할 경우 우리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말들을 사용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말을 그처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겠습니까? 우리는 “선한”이란 용어를 호의적이고도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모든 칭찬들을 시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모든 대화에 말참견을 하라고 요구하십니까? 이 사소한 문제를 강조하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위대한 전도자가 되신 예수님은 결코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선한”이란 용어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 캠페인을 벌일 것을 가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선생되신 그분 자신이 의인들을 선인이라고 칭하셨습니다(마 5:45).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라 매우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별다른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아첨하기를 즐겨하는 것에 대해 그 사람을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 대화의 초반부터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거룩한 속성에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문의자의 인사말을 교훈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한하신 거룩이나 선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전도 메시지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기
우리 주님께서는 대화를 하는 가운데 열정적인 청년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동기 부여를 받으셨습니다. 21절은 예수께서 그와 대화를 하시는 동안 그에 대해 갚은 사랑을 가지게 되셨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재물을 동시에 구할 수 없었기에 그 청년이 예수를 떠났을 때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는 동정 어린 슬픔의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긍휼의 제안을 거절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가 돌이켜 떠났을 때 이 특이한 죄인에게도 동일한 감정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군 보고서를 장식할 소망적인 통계도 성공의 트로피도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그러한 사랑은 모든 복음 전도자의 필수적인 자질입니다. 하지만 그 관원의 영혼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자극했던 최고의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서 자극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으로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서 동기 유발되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에 따른 우리 주님의 주된 목표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 공생애 기간 동안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요 8:29).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이처럼 요약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이처럼 불타는 열정이 평생동안 그를 불태웠습니다.
현대의 복음 전도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정확한 교리에 대해 열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잃어버린 죄인들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주지 못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선교적 노력의 부재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죄인들에 대한 열정에 의해서 자극되어진 것이 필수적인 것이라면 충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동기 유발되어지는 것은 훨씬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이러한 동기와 결단은 복음 전도자의 메시지 자체에 나타날 것입니다. 분문의 질문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한 질문) 자신의 필요에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대화의 일차적인 중점을 하나님과 그ㅡ이 영광으로 돌리셨습니다. 그의 전 메시지는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짜여졌습니다. 그 사람은 단지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의 해결책을 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동정심을 가지고 점차적으로 이러한 관심에 대해 언급하셨으나 우선 기초가 바로 놓여져야만 했으며 보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어져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이 여호와를 고양시키고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며 그분만이 선하심을 알리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항상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설교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요 4장) 그는 그녀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이 아덴의 언덕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행 17장) 그는 자신의 복음 메시지에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속성에 보다 헌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창조자요 모든 생명의 보존자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전능하신 자로 언급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높이 세우는 이 요소는 우리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현대 설교의 대다수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생명의 피가 그 메시지 속에 결여되었으므로 무기력합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그들의 메시지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춥니다. 인간은 죄를 범했으므로 큰 축복을 상실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커다란 손실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저런 방법을 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매우 상이합니다. 그의 복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으로 시작합니다. 그 복음은 인간에게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 복음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유일한 소망은 이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을 보내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두 메시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전자는 영광의 주님을 무시한 채 인간을 위해 천국에 이르는 길을 밝히고자 하며, 후자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은혜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전자는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리이까?’ 라는 질문에 적절한 기초도 없이 기술적인 답변만을 저시하나 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동행해야만 하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홀로 선하시며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을만한 거룩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초위에 당신의 질문에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시선을 자신에게서 떼고 성경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참된 모습-한없이 순전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피조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자신과 영생에 대해서 얘기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설교가 죄인의 구원을 구하는 것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속성에 대한 설교는 죄인의 회개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죄인은 그가 대적했고 그를 멸망으로 위협하거나 혹은 그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개인의 구세주”는 공허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부자 관원의 자아중심적인 시선을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화로다 나야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치게 했던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리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부차적인 요소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의, 제1요소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누구를 대적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것에 대한 가책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얘기할 준비는 되어 있었으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으나 다윗처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이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41:4)라고 고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빛을 보았을 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즉시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내가 누구를 핍박했습니까? 어떻게 핍박했습니까? 예수께 달려온 자도 동일한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결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말할 수 없는 신성을 알지 못한 그는 엄청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비록 전심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그것을 죄에 대한 무관심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의 도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질문자가 유대인이요 아마도 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 전도자들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보다도 훨씬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슬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알기를 원하시는 다섯 가지 사실들”로 곧장 들어갑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원한 행운에 관심을 기울일 뿐 “하나님은 구구신가?”라고 하는 질문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와같이 전도를 받은 죄인들은 결코 그들의 위기의 심각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척한 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며 이것이 비극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에게 닥친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심판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순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함에 대한 언급은 특별히 이 청년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 심판자의 거룩함, “결단코 죄를 사하지 않는” 거룩함(출 34:7)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는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을 위해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속성으로 죄인들 앞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성경은 대체로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거룩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속성들은 쉽게 기억하지만 자신들을 위협받거나 경고하는 속성들은 모두 잊어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많은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단 한가지의 속성-사랑-만을 가지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진리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진리를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남게 됩니다. “예, 그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게 결코 해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용서와 풍성한 자비로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내 영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하는 개념이 없으며 단지 하나님은 지극히 감상적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하는 왜곡되어진 개념만이 존재합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침묵과 모호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을 조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반역자에게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을 위해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 순간 그는 죄인들에 대해서 분노하시며, 그의 진노의 칼은 이미 죄인의 목에 놓여졌으며 그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그를 영원히 괴롭게 할 것입니다. 이 계획은 결코 멋진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죄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전도방법은 부자 관원을 다루신 예수님의 방법에 대치됩니다. 그는 그의 무지에 대해서 비위를 맞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현대인들은 그 부자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인격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창조주”를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종종 우리가 보는 세상과 별 관계가 없는 이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는 “창조와 섭리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구속을 주관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대개 자신을 희생해서 인간의 주권적인 의지를 높이 세우는 데 헌신한 자를 언급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결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이요 단호한 거룩성을 지니신 분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은 자주 “하나님”을 유순한 존재로 생각하므로 그 결과 하나님은 결코 멋진 인간을 징계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도할 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라고 선포하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메시지는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완전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에 이르는 4가지 손쉬운 방법(사영리)으로 접근해간다면 여러분은 그와 당신 자신을 기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에게 당신을 따라 기도하도록 요구할 것이며 당신은 영화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는 또 다른 신 혹은 기껏해야 “자신도 모르는 신”에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고 하는 말씀은 현대의 전도자들에게 적절한 물음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 의하여 의존해야만 하는 그분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욘 2:9). 하나님의 권세와 은총만이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전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강조점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메시지에서 심장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청년은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질문을 여호와께 적용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분의 궁전에 달려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는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여러분의 눈에 비취게 될 때 여러분은 부정하다고 하는 두려운 생각 때문에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불사르는 불꽃이시므로 여러분은 그분의 자비를 간구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하나님께 은총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의 아들을 믿도록 명령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커다란 은총을 보이셨습니다.
천국에 이르는 몇 가지 간단한 단계를 전파하는 것은 복음전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을 전파하는 것이 참된 복음전도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하는 명백한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참된 복음전도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창조주라고 말하는 것은 지적인 진화론자들을 접한 당신에게 당혹스러움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복음에 이ㅆ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불필요한 장식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 의사를 표시할 것입니다.
“나의 선교 단체는 그러한 교리들이 분파를 조장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교리들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만 거하는 것은 죄인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또한 결론을 맺어야 한다는 압력은 복음을 전할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나 실무자들이 감히 하나님의 속성을 비본질적인 범주의 것으로 조좌천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유주의자들이 동정녀 탄생은 불필요한 진리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와 학교에서 대거 떠나버렸습니다. 만일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거룩성과 주권성은 너무 첨예하여 설교하기 어려운 주제라고 말한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심지어 갈등을 빚고 친숙한 교제로부터의 추방을 당한다 할지라도 담대하게 다른 사람들을 교훈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착한 목회자가 아닌 순회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 20:26)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주장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각 사람에게 4가지 영적인 법칙들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복음 전도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입증해 줍니다. “이는 내가 거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순회 사역을 통해서 바울은 영생에 이르는 4가지 단계가 아닌 온전한 신학을 전파했습니다.
현대의 선교 단체들은 그들의 선교사들에게 무리한 일을 행하지 앟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성경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복음주의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써 불화를 야기시키지 마십시오. 당신의 옆에서 동료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에게 복음의 명백한 명령을 요구함으로써 문제를 야기시키지 마십시오. 주된 문제에만 집착하십시오.
만일 누군가 복음을 값싼 것으로 만들어 5분 동안의 판매 선전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인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설교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교조주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 안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복음주의 세계의 신전통주의를 깰 때입니다. 가엾게 죽어가는 많은 죄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합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속성을 높이 선포하는 것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젊은 부자 관원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만 합니다.
http://thevine21.hompee.com/v2.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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