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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안식일 2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3. 2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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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요구와 소극적 요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데 일정한 분량의 시간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잡한 것도 아니고 수많은 규칙들과 조항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면 혼란이나 부담스러운 것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 제4계명에는 단지 4개의 아주 간단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2가지는 적극적인 것이고, 2가지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마음속에 중요한 의무와 계명으로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생일에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보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날을 잊어버린다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업상의 약속을 그날로 잡게 됩니다. 친구들과 만나 오락을 즐기기로 스케줄을 짭니다. 금방 그 생일의 많은 시간들이 다른 일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시간의 어느 한 부분을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기를 원한다면 다른 약속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이에게 바쳐진 날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을 끝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주님의 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 바쳐진 시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정된 시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행해질 것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일과 여가활동의 계획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시간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애를 쓰는 한 계획되고 지켜질 것입니다. 그날은 기억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계획은 그날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적극적인 원리는 그날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덕법에 너무나 둔감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4계명이 하루 온종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교회에 참석하는 몇 시간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매번 반복되는 1주일 중에서 온전한 하루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6일 동안은 우리 자신의 일을 위해 보낼 수 있지만, 제7일은 주 우리 하나님의 안식일입니다.

온전한 하루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날이 주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하여 따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몫의 시간은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신성한 일에 사용되어야 할 시간입니다. 구약 시대에 식탁이나 그릇이나 포크 등이 ‘거룩’ 하다고 불리울 때, 그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신성한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관련된 활동들을 위하여 따로 구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계명 역시 하루의 시간이 완전히 영적으로 사용되도록 바쳐지는 것을 요구합니다. “제 칠일은 (우리 자신의 일을 위해 사용되는 6일과는 반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그날은 그분의 날입니다. 그분은 그날이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날은 그분께 속한 날인 것입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나 제한된 의미에서의 요구 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분과 함께할 날을 바라보며 즐겁게 고동칠 것입니다. 자녀들은 하루 온종일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물론 세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대체 시간을 바친다는 것을 몹시 싫어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도취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을 몹시 유감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러한 요구가 답답하고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유와 기쁨의 넓은 길입니다. 1주일 중에서 하루를 온전히 나의 일상적인 오락과 일과로부터 해방되어 나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함께 보내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내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또한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의 공적인 예배에 충실하다면, 또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의 교훈들을 준비하여 가르치며,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방문하고, 친구에게 증거하며, 성도들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그날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너무나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와 찬양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날은 6일과는 다른 거룩한 날입니다. 그날은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데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2가지 적극적인 원리들과 함께 2가지의 소극적인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사실 그 2가지 소극적인 원리들은 그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2가지의 금지된 일을 행하는 것과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 금지된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소극적인 원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입니다.

일상적인 노동에 안식일의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 시간은 주님께 바쳐져야 할 시간입니다. 만약 개인적인 일이나 가족의 일, 또는 학교 공부나 회사의 일이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제4계명은 단지 주일학교나 교회에 가는 시간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주일 오후마다 야구경기를 구경하러 가거나 직장으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날은 ‘인식일’이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만 자거나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로부터 휴식한다는 것의 요지는 힘 있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하여 다른 것에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조장된 바로 이 오해에 대해 우리 구세주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만 그날에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르는 짐승들도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짐승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것들도 역시 여호와 앞에서 겸손히 금식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금식에 참여할 수 없는 소나 양들에게까지 먹을 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도 어떻게든 금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살지 않게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심리학적이고 물질적인 유익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즉 활동 유형의 변화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의 목적은 쉬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쉬는 것은 그날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은 우리가 직장에서 해야 할 일만큼이나 필수적입니다.

두 번째의 소극적인 원리는 우리가 우리의 아들이나 딸이나 종이나 짐승이나 외국인이나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데 1주일 중의 하루를 온전히 바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면, 인류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이날에는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서 딴 데로 관심을 돌리도록 하거나 거룩한 그날을 속되게 보내도록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문외한’ 이나 하나님의 집에 있어서의 ‘외국인’은 어떻게든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방 문화 속에 사는 사람은 그런 시험에 빠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지으신 분에게 하루를 바치는 것을 양심의 문제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가게는 문을 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 나를 위한 일을 시킴으로써 주님의 날이 나에게 더 즐거울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덕법들은 보편적으로 적용됩니다. 결코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의 모든 규범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게 되면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윤리적 규범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 원칙이 적용되기 어려운 극도의 곤란한 상황을 제시하거나, 혹은 이 원칙과 저 원칙이 상충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제시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술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그 기준이 터무니없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제4계명 역시 그런 일에 있어서 예외가 아닙니다. 당신을 혼란하게 하는 어려운 경우에 봉착했을 때 이 법의 간결성과 실용성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1주일 중 하루는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신성한 일에 바쳐지는 시간으로 따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이날에는 일상적인 업무나 오락을 행해서는 안 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 요구사항은 어린아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의 육신과 싸워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이 규범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4계명이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을 설명한 다음, 그것에 복종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강화하기 위한 3가지 이유 혹은 동기가 그 계명 안에서 제시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십계명은 매우 오래된 법입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처음으로 모세에 의해 기록된 형태로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창조되던 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 롬 2:15. 중생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은 그것을 인간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기셨습니다 - 히 10:15,16.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길로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제4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도록 분발시키기 위하여 역사상 최초로 안식일에 지켜졌던 일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는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은 세상의 창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이 모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창조되는데 1주일의 시간이 걸렸는데, 삼위 하나님께서 직접 6일 동안에 그의 모든 창조의 활동을 하셨고 제 7일에 쉬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쉼으로써 그의 창조주를 모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논증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이 법이 특별히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전능하신 분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동 유형과 그분의 창조사역 후의 안식으로 인해 우리도 그와 비슷한 노동과 휴식의 주기를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문외한들과 하나님의 백성의 집에 있어서의 외국인들도 이 도덕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창조의 노동에 의해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제4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를 면제시켜 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이 법이 유대교에 독특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것을 정교하게 논증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다시 들려줄 때(신 5장), 그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래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출 20장), 제4계명은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강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다른 모든 계명과 마찬가지로 제4계명에도 역시 자신들을 예속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독특한 의식적이고 법률적인 규범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계명을 삼켜 버렸으며, 마찬가지로 구약시대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 역시 심연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구약성경의 대부분의 구절들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도덕법을 의식적이고 법률적인 추가사항 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사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가 제4계명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의식법과 시민법에 따라 적용했던 것처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십계명은 모세 언약의 모든 의식적이고 법률적인 특징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출애굽기 20:11은 모세와 아브라함 이전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구절의 후반부에 등장한 얘기들은 바로 창세기 2:1-3의 내용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2가지의 부가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안식일을 ‘복 주셨다는 것’과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날을 신성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날을 따로 구별하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애굽을 탈출한 후의 일이 아닙니다. 그날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그분의 선언은 그분 자신이 최초의 안식을 지키셨던 창조의 1주일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창조시에 그 전능하신 분은 1주일 중에서 하루는 자신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것과 함께 그날에 대한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해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3은 그 두 형제가 ‘때가 경과함에 따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공동번역에는 ‘때가 되어’로 되어 있음 - 역자 주) 하나님께 그들의 제물을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문자적으로 ‘날들의 마지막에’ 즉 제7일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아들들은 매주 예배를 드리는 하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시간이 7일을 주기로 되어 있다는 데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일 출애굽기 16장에는 유대인들에게 만나가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제7일은 ‘안식의 날,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23절). 그들이 이 옛날의 창조의 법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어떤 사람들은 제4계명이 완전히 예표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계명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이나 혹은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위에 의한 구원으로부터의 안식을 예표하는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정교한 신학적 논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은 희생제사나 성전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합니다. 실체(그리스도)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안식일이나 그림자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명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거나 또는 장래에 성취될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에 의한 과거의 창조와 안식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창조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시간 사용에 있어서 우리의 삶은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는 두 번째의 강력한 권유는 그 명령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가 창조의 1주일 동안 그분이 행하신 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영광의 왕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제7일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최초의 1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그분은 신성한 예배의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안식을을 지키는 일에 관련된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유익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축복을 서약하셨기 때문입니다.

1주일 중 하루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데 사용되지 않게 될 때, 교회 안과 밖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가 빠르게 증가됩니다. 가족들이 함께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할 때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교훈하기에 적합한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그 가정은 붕괴되고 맙니다. 개인들은 그들의 영혼이 방치되고 또한 영적 소생을 위한 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쌓여 갑니다. 교회는 약해지고 게을러집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데 시간을 바칠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데 온전한 하루를 바치는 데서 발견되는 축복들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그분 자신이 그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의 교제입니다. 가정에서는 1년에 52일, 그러니까 매주에 하루를 온전히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자녀들을 교훈하고,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자녀들과 함께 우리 시대의 도덕적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교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고 도로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됩니다. 국가의 사상과 도덕은 하늘의 기준을 향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가 왕성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영적인 소생과 기쁨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 마음의 강건함 등등이 이루어집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비실제적이며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진부합니까? 그것을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영적이지 못한 발언입니까? 안식일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가져다주는 영원한 축복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하고 증거하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부족한 것을 슬퍼합니다. 지혜와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1주일 중의 하루를 따로 구별하여 주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러한 경건한 사람들의 소원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마지막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그분은 자신의 주권으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1주일 중의 하루를 예배하고 섬기는 데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충고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그분이 우리의 시간을 나누셨으며, 우리가 그분에게 1주일 중의 하루를 드려야 한다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분은 법을 세우시는 분이시며 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도덕법을 제정하시는 것은 그분의 대권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전능하신 분이 1주일 중의 하루를 그분 자신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이 선고되는 것을 듣기 위해 언젠가는 그분 앞에 서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기준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몰랐다는 것이나,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했다는 것이나, 성경을 읽거나 성도들과 친하게 지내거나 가족을 예배에 참석시킬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들이 이 계명 앞에서는 할 말을 잊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위엄 있게 말씀하셨는데, 누가 안식일 지키는 일에서 면제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을 거룩하다고 선언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누가 그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안식일 지키는 일을 인간의 의를 위한 10가지 계명 중의 하나로 정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누가 그분과 논쟁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이라는 것을 보이시면서 최초로 안식일을 지키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누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도록 인도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분의 의를 모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분의 법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분은 그 계명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의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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