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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Henri Nouwen, 그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헨리 나우웬

by 김경호 진실 2013. 4. 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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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나우엔, 그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외국인이 쓴 책이 거의 모두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이런 저런 영향을 폭 넓게 미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은 아주 굉장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40여권의 그의 책들은 2백만 권 이상 전세계적으로 팔리고 있고, 지금까지 22개국 언어로 그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가 광장하다는 우리의 확신을 상당히 굳게 할 것이다. 헨리 나우엔이 그런 놀라운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천주교회의 사제(priest)였고, 천주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한 ‘소위 영성 이론과 실천’을 제시했는데도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개신교도들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소위 은혜’도 받고, 삶이 변했다고 하며, 그가 제안한 영성을 실천해 보려고 하고 있다. 사실 그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들은 천주교인들 보다는 개신교인들이 더 많다. 따라서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독자들조차도 천주교인들보다는 개신교인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나우엔이 천주교회와 개신 교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 어떤 사상과 어떤 ‘소위 영성’을 지녀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진실로 그러한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성 작가”라고 언급되는1 나우웬에게 접근해 보기로 하자.


     나우엔, 그는 누구인가?

헨리 나우엔(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천주교 신부요 영적 생황에 대한 40여권의 책을 쓴 영적 생활의 저술가요, 그런 생활을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정정을 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언어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것은 사실 그의 이름은 나우윈(now-win)으로 발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헨리 나우윈 홈페이지의 그를 소개하는 http://www.henrinouwen.org/henri/about/에 실린 그에 대한 소개를 보라.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우웬’이라는 음역 대신 그의 친구들이 부르는 대로 ‘나우윈’이라고 쓸 것이다.). 아마도 그가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된 것은 그가 유명한 대학교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정신 지체자들을 돌보는 일에로 나아가 죽기까지 그렇게 낮아 진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보려고 실천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실천을 잘 보지 못한 우리들이 그런 진정한 내려놓음의 실천에서 진정한 사랑의 구현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일단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그는 1932년 1월 24일에 네덜란드의 네이께르크(Nijkerk)에서 세무법학자였던 Laurent Jean Marie Nouwen과 Maria Huberta Helena Ramselaar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화란 사람이라는 것과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배워 온 그는 6살 되었을 때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헤이그(Hague)의 제수이트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그의 삼촌(Monsignor AC (Toon) Ramselaar)이 교장으로 있던 아펠도른(Apeldoorn)에 있는 작은 천주교 신학교 1년 공부하였고, Driebergen 근처의 Rijsenburg 신학교에서 6년 공부한 후, 1957년에 우트레흐트 교구에서 신부로 서품 받았다. 우트레흐트 감독은 그를 로마에 있는 그레고니안(Gregorian) 대학교에 보내서 대학원 과정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나우윈은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교회의 허락을 받아서 네이메겐(Nijmegen) 천주교 대학교 대학원에서 1963년까지 6년 동안 심리학을 더 공부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고든 알포트(Gordon Allport)의 격려와 추천으로 1964년에 그는 미국 케사스(Kensas)주 토페카(Topeka)에 있는 메닝거 클리닉(Menninger Clinic), 종교와 심리 치료(Religion and Psychiatry) 프로그램에서 더 연구하고자 연구원(a fellow)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여기서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시워드 힐트너(Sewart Hiltner)도 있었다. 나우윈은 자신의 책 창조적 목회에서 힐트너를 자신에게 “목회 신학 분야를 도입 시켜 준 선생님이요 친구”라고 언급하고 있다(Creative Ministry, 1972, 서문). 그는 이 때 민권 운동과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을 보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과 자각을 각제 되었다고들 생각한다.

     여기서의 2년 동안의 임상 심리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비슷한 작업을 화란에서 하려던 그는 메닝거 연구소에서 알게 된 죤 산토스(John Santos) 박사에 의해서 미국의 전통적 천주교 대학인 노트르담 대학교에 새로 시작된 심리학과에서 같이 가르쳐 달라는 청빙을 받고 2년 동안 노트르담에서 가르쳤다(a visiting lecturer, 1966-68). 이곳에서의 연구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이끌었고, 그 결과 그는 여기서 그의 처음 저서인 ꡔ친밀함: 목회 심리학 논문들ꡕ(Intimacy: Essays in Pastoral Psychology, 1969)을 내게 된다.

    그 후 화란에 돌아 온 그는 암스테르담 목회 연구소(Amsterdam Joint Pastoral Institute)에서와 그 후에는 우트레흐트 천주교 신학부(the Catholic Theological Institute of Utrecht)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나우윈은 기도에 대한 책인 ꡔ손을 펼치고 (또는 빈손으로)ꡕ(With Open Hands)2 그가 한번 만났던 영성 운동가인 토마스 머톤에 대한 입문서(Thomas Merton: Contemplative Critic)를 내었다.3 계속해서 가르치면서 박 사 학위가 필요했던 그는 네이메겐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과정의 종합 시험을 다 치루었으나 (1971) 박사 학위 논문은 쓰지 않았다.4

     그러다 나우윈의 ꡔ친밀함: 목회 심리학 논문들ꡕ을 살펴 본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의 학감(dean)이었던 콜린 윌리암스(Colin Williams)의 초청을 받았을 때 나우윈은 박사 학위논문을  쓸 것을 요구하지 말 것, 3년 후에는 종신 교수(tenure)가 되는 것을 허락할 것, 그리고 5년 후에는 정교수가 되도록 해 달라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책을 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조건을 요구하고 허락받은 후에 그 곳에서 10년 동안 목회 심리학과 목회학을 가르친다(1971-81). 이 가장 왕성한 활동 기간 동안 그는 ꡔ창조적 목회ꡕ(Creative Ministry),5 그 자신의 별명이 되다시피한 ꡔ상처 입은 치유자ꡕ(The Wounded Healer),6 영적 변혁(spiritual transformation)의 과정을 평이한 용어로 써낸 ꡔ~에로 나아가 미침ꡕ(Reaching Out),7 그리고 ꡔ마음의 길ꡕ(The Way of the Heart), ꡔ모든 것을 새롭게 함ꡕ(Making All Things New)8 등의 책을 쓰게 된다.

     이 과정 중에 그는 뉴욕 주 Genesee에 있는  수도원에서 두 번에 걸쳐서(1974년 6월-12월, 1979년) 7 달 동안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아주 직접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의 삶과 직면하고, 이 경험을 담은 The Genessee Diary,9 그리고 두 번째 기간 동안 이곳에서의 매일 삶을 정리하면서 했던 기도를 모아 낸 ꡔ자비를 구하는 부르짖음ꡕ(Cry for Mercy)을 내기도 했다.10

     또한 1978년 그의 부모가 화란으로부터 미국으로 그를 방문하고 회란으로 돌아 간 3주 만에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궁극적인 것과의 대면이라는 큰 어려움을 겪고서 ꡔ어머니를 추모하며ꡕ(In Memoriam)11와 ꡔ위로의 편지ꡕ(A Letter of Consolation)를 낸다.12 그의 어머니는 그와 아주 가까운 편이었고, 특히 영성 문제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초기 저작들은 출간 전에 모두 그녀가 먼저 읽었을 정도라고 한다.13 그런 어머니의 죽음이 큰 어려움의 근원이었으리라는 것은 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한 어머니는 죽어 가고, 한 아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모든 것은 선하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14 1978년에는 로마에서 5개월 동안 로마의 북미 대학교의 주재 신학자(Scholar-in-Residence at the North American College in Rome)로 있으면서 강의한 내용을 Clowning in Rome으로 펴냈다.15 또한 70년 대 후반 중남미의 정치적 신학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1981년 7월에 예일을 떠나서 볼리비아에 가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 후에 페루의 리마에서 가난 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가나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같이 가진 해방 신학자 구스타보 쿠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그의 소명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그는 1982년 미국으로 돌아와서 해방신학을 가르치도록 그를 초청한 하바드 대학교 신학부에 1년에 한 학기만 가르쳐도 된다는 파트타임 교수직(a part-time professorship: Professor of Divinity and Horace De Y. Lentz Lecturer)을 제안하여,  한편으로는 하바드에서 가르치는 일과 한편으로는 남미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1983-1985). 그러나 이 때가 그에게는 매우 어려운 때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사제로서의 25년을 산후에 나는 가장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면서 논쟁이 되는 문제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일어났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매우 어두운 곳에 살고 있음과 심리학에서 편리하게 “극도로 지침‘(burn out)이라고 부르는 영적인 죽음 상태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16


    그래서 그는 1985년에 하바드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전에도 두 번(1983년과  1984년에)가 보았던 프랑스 트로슬리(Trosly)에 있는 (Jean Vanier와 Pere Thomas가 창설한)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의 공동체에 참여하여 생활하게 되었고(1985년 8월부터 1986년 8월까지), 1986년에 카나다 토론토 근처의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L’Arche Daybreak)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신부로 부름 받고17 깊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고 감독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 부름에 응하여 6명의 정신 지체 장애자들과 그들을 돕는 분들과 함께 그들의 목회자로 살기 시작하였고 이곳을 자신의 최종적 사역지로 여겼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ꡔ데이브레이크에 이르는 길ꡕ(The Road to Daybreak)이라는 책에서18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열매 있을 수 있고(fruitful)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배웠다. 많은 산물을 내는 삶(being productive)과 열매 있는 삶(being fruitful)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을 일년 가진 후에 그는 지쳐서 다시 회복하며 다시 자신을 찾아야 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 때 그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비유를 그린 그림에서 상당한 영감을 얻게 되었음을 자신의 책 ꡔ탕자의 돌아옴ꡕ(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서19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본성을 새롭게 깨닫게 된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 받는 자이며20 자신의 집은 그리스도 안이며, 자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신부(a "father") 역할을 해야 한다는 천주교 사제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정신 지체 장애가 아주 심한 아담 아네트(Adam Arnett)를  날마다 돌보면서 나우윈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21 아담의 영약성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함을 통해서 나우윈은 자신이 가길 원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수동성(passivity)과 하나님께 의뢰함(reliance on God)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탕자의 비유에 대한 렘브란트의 다규멘타리를 촬영하러 러시아로 가는 길에 1996년 9월 21일 화란에서 갑자기 일어나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카나다 온타리오(Ontario) 주의 킹 시티(King City)의 한 묘지(Sacred Heart Cemetery)에 묻혀졌다.


    나우윈의 강조점

나우윈은 평생 외로움에 대한 감정을 깊이 느끼면서 이 외로움의 감정과 싸웠다고 한다. 그는 항상 관심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전 세계의 여러 친구들에게 한 밤중에 전회를 걸어 그가 얼마나 외로운 지를 말하곤 했다고 한다.22 이와 같이 그는 진정한 홀로 있음(solitude)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천주교도가 아닌 사람들까지를 향해서도 넓게 나아가려는 정향 사이에서 큰 어려움을 느겼다. 그러니 그가 외로움에 대한 깊은 감정을 느겼으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인들의 의미에 대한 추구, 어디엔가에 소속 되고 싶어함(belonging), 친밀함(intimacy)에의 갈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우윈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면서 이를 섬김과 사회 정의에 대한 논의와 잘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베트남 전쟁과 핵전쟁 모두에 대해 강한 반대를 표현 했다. 그는 고독(solitude)과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김(service, ministry)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활동하시고 말씀하실) 여지를 마련하는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틈을 마련하는 일을 준비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기 원한다.

     그런데 그의 논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그 이전에 사역했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과 함께 천주교회 신학의 철저하게 근거하여 영성 훈련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천주교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은혜 받을 만한 언어로 말하고 있는 그의 말들 배후에는 인간에게 은혜를 주입하셔서(infusion of grace)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을 만들어 내시고, 결국은 자신과 합일 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 하나님께서 역사할 여지를 우리가 내어 드리도록 하려는 그의 생각 배후에 강한 천주교 신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에게 앙리 나우윈은 무엇인가?

나우윈은 우리에게 이 시대의 천주교회의 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천주교적 성례인 영성체가 있었다. 그는 늘 성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다시 제시하는 피 없는 제사로 드리기를 원하며, 그러나 우리의 심령과 존재의 모든 면에서 준비를 잘 갖추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하여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m)가 이 시대 가운데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가 옳다면 종교 개혁은 어떤 면에서는 잘못된 것이 된다. 나우윈은 이것을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가 제시하는 것 배후에 있는 철저한 천주교 사상은 종교 개혁자들의 말씀만(Sola scriptura)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은혜만으로(sola gratia)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된다. 나우윈에게도 은혜는 항상 준비된 자들에게 그들의 준비의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 받은 이들이 행하는 것은 진정한 공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천주교도였으니 그는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그의 보편구원론적인 정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23 힌두 영적 교사인 엘라뜨 에아스바란(Elnath Easwaran)이 만트라 명상을 가르치는 책을 추천하는 데서 이 책은 “나에게 상당한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하는 데서 그의 보편주의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선택을 말하면서 그는 우리가 선택 받았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다른 이들도 똑같이 귀함을(in their preciousness)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므로,24 결국 그가 수사적으로 사용하는 ‘선택’이라는 말이 그저 고귀함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그는 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 찟겨지신 것(broken)을 말하면서 직접적으로 우리가 broken people이라고 하면서 우리 존재의 깨어짐과 감정의 깨어짐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도 불안이 있다. 또한 오병어어 사건을25 우리가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배가 시키신다(multifly)는 교훈을 주기 위해 언급할 때, 이 사건을 그렇게 해석하던 자유주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불안은 더 심해진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동성애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소년일 때부터 의심이 있었으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그에게 심한 어려움을 주었던 이 문제 때문에 나우윈은 많이 어려워했다고 한다.26 그러나 그는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는 사제로서의 서약을 깬 일은 없다고 한다.27 그는 죽기 전에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독특한 소명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물론 넓은 의미의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가 가르치는 영성, 그의 영적 인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심각하게 의문시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28

     나우윈은 친구들에게 후하게 베푸는 면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또 친구들에게 많이 요구하는 성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에게 감정적으로 미친 영향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잘 짐작할 수 있다. 데이브레이크의 장(Director)이었던 나단 볼(Nathan Ball)이 그에게서 좀 멀리 서려고 했을 때의 그의 반응, 감정적 파괴(emotional breakdown)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을 정도였던 그의 강한 반응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29

     그의 철저한 천주교적 사상과 그의 윤리적 문제(그는 이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등은 우리로 하여금 영성에 대한 강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고, 소위 영성 추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며, 이 시대에 좀더 성경에 충실하고, 성경적 사상에 충실한 선생님들을 더 갈망하게 만든다.


출처 : 이승구 교수의 개혁신학과 우리사회이야기
글쓴이 : 이승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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