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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헨리 나우윈에 대한 개혁신학적 한 성찰>

헨리 나우웬

by 김경호 진실 2021. 7. 1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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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역사적 기독교에서 상당히 이탈한 이웃 신학(사실은 이단 사상에 가까운 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를 담은 <우리 이웃의 신학들>에 수록되어 있는 논문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인 헨리 나우웬의 신학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다. 헨리 나우웬의 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영성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주교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개신교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 영양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저자의 평가를 읽고 나면 더욱 그럴 것이다.

본 논문의 저자는 우선 헨리 나우웬의 인생을 추적한다. 그는 1932년 1월 24일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는데, 6세 때부터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학교에서 수년간 공부한 끝에 1957년에 신부가 되었는데,(26세) "심리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대주교의 허락 하에 1963년까지 6년 동안 심리학을 더 공부했다.(32세) 그 후 종교와 심리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미국 메닝거 클리닉에서 연구원으로 활동을 시작했고(1964년, 33세), 이무렵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을 보면서 사회 참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미국 천주교 전통의 대학인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로 강의를 했으며,(1966~1968년, 35~37세)1968년에 네덜란드로 다시 돌아온 후로는 천주교 영성의 대가인 토머스 머튼을 연구하면서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1년부터 다시 미국으로 가서 예일대학교 목회심리학 교수가 되었고,(40세) <창조적 목회>, <상처입은 치유자>, <고독 속에서>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두 번의 수도원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1974년과 1979년, 43세와 48세), 1981년에 돌연히 교수직을 그만두고 남미에서 해방신학자들과 정치투쟁을 함께하기 시작했다.(50세) 1982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해방신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51세) 1985년에 다시 교수직을 사임하고 프랑스에서 발달장애인을 돕는 공동체에 참여했다.(54세) 그리고 1996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어서 저자는 헨리 나우웬 신학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반펠라기우스적 "행위 구원론"이다.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 "화체설"을 믿으며, "관상 기도"를 강조하는데, 이는 만트라와 같이 어떤 단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초청"하는 형태의 기도방식이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방식의 기도이므로 반펠라기우스적 행위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더 나아가 헨리 나우웬은 "정통파 천주교 사제"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천주교 사제"로서 "만인구원론"을 믿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을 베풀 수 있다고 믿으며, "예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를 "제멋대로" 재정의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인격적/윤리적 문제인데, 나우웬 주변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항상 사람들의 관심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동성애적 성향"인데, 물론 그렇다고 그가 사제로서의 순결 서약을 깨뜨렸던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향 때문인지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독특한 소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윤리적으로 혼란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그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상당히 멀리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출처] 이승구, <헨리 나우윈에 대한 개혁신학적 한 성찰>|작성자 Jung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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