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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WCC

by 김경호 진실 2013. 10. 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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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마지막회)

< 문병호 목사,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

<이 원고는 2013년 합신총동문회수련회 특강 원고이며 우리는 왜 WCC를 반대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합니다. 1. 한국교회와 WCC. 2. 아홉 차례 총회를 중심으로 본 WCC의 정체성. 3. WCC 에큐메니칼 신학. 4. WCC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5. 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 편집자 주>

 

 

 

1. “협의회적 교제를 통한 협의회적 공동체추구

WCCWCC 자체를 중심으로 교회의 기구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협의회성(conciliarity)”이라는 말을 고안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논의는 웁살라 총회에서 WCC진정한 우주적 협의회라고 명명한 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협의회성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불가결한 속성이다. 거의 모든 고대 교회의 협의회들은 교회의 일치가 이단에 의해서 위협당하고 분파주의에 의해서 금이 갔을 때 소집되었다. 협의회들은 단지 일치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았으며 금이 간 교제를 회복하고 존재하는 분파주의를 고치고자 하는 노력을 자주 기울였다. 협의회성은 신앙과 성례적 삶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를 회복시키는 길을 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WCC의 주요 관심사는 교회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교회의 협의회적 성격에 있다. 교회는 말씀의 터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다. 그러나 협의회는 이러한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진리 자체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의견들의 타협에서 가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협의회에 모인 사람들의 완전한 동의가 최고의 기준이 된다. 곧 협의회적 합의가 진리가 된다. 그들은 신앙과 직제위원회협의회성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Conciliarity and the Future of the Ecumenical Movement)라는 보고서에서 이를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우리가 위에서 고찰했듯이, WCC는 성경 자체를 계시로 여기지 않고 그것이 역사상 정황적 의미를 갖게 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된다고 본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전통화라고 부른다. WCCWCC 자체를 이러한 전통화의 주축(主軸)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로 로마 가톨릭에 기원을 둔 협의회적 교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협의회적 교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협의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다. 그들이 공언하듯이 협의회적 공동체(konziliare Gemeinschaft, conciliar community)”가 하나의 교회도, 유일한 교회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교회를 대체하는 기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세워지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WCC신앙과 직제위원회교회의 일치-다음 단계들(The Unity of the Church-Next Steps)라는 보고서에서 하나의 교회는 그들 자체가 참으로 연합되어 있는 지역 교회들의 협의회적 교제로서 그려질 수 있다고 한 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WCC는 자신을 협의회적 교제를 이루는 진정한 우주적 협의회로 여기고 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잘 드러낸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완전하고 실체적인 일체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루고자 하며 그것이 이미 지상에서 실제적이며 우주적으로 주어졌다고 본다.

 

 

 

2. 종교다원주의의 길에 선 WCC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는 WCC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서 보편화시키는 데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또 다른 그리스도를 낳는 선례를 보였다는 점에서 찾고자 한다. 간혹 그들이 그리스도가 없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많은 교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교사 정도로 여긴다.

1990년에 작성된 바르 선언문(Barr Statement)WCC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선언문은 하나님은 나의 이웃인 힌두교도의 기도를 들으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추구되었으며, 다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부분은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총의 보편성을 구원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하나님을 다른 신앙을 가진 우리 이웃의 인생 가운데서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개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구원의 경험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편성을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부분은 기독론과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제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그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만 올바르게 이해되는데, 그것은 종교를 넘어서는 사랑의 차원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류보편의 우주적 차원에서 그 신비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부분은 성령과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타종교와 관련해서 이러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바르 선언문은 삼위일체의 구속 사역을 창조의 일반은총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주님의 구속이 타 종교에서도 발견되며 그것은 성부의 창조적 사랑의 실현이며 성령의 보편적 역사에 들어맞는다고 보았다. 바르 선언문은 WCC가 자주 사용하는 대화혹은 교제라는 말이 종교다원주의를 근본에 둔 개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3. 선교를 퇴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WCC의 종교다원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다. 화란의 선교학자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에 의해 주장된 이 개념은 교회 중심의 선교를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중심적 선교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선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지로 전개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총체적인 관계의 변혁을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 안팎의 화평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개념이 그저 보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어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활동을 통하여서 선교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선교의 인간화(humanization)”를 추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국내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WCC 선교관을 확정한 중요한 문서로서 1982년에 발표된 선교와 복음전도: 에큐메니칼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여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본 문서는 기존의 선교가 지역적 고유성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선교지의 노예상태 혹은 식민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이제 복음을 위한 복음 전파는 현 단계에서 유예(猶豫, 모라토리움, moratorium)되어야 한다며 선교지로부터의 철수를 내세웠다.

WCC는 자신들의 선교론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총회가 시작될 즈음인 1950년대에는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선교사 숫자가 거의 비슷했으나, 30여년이 지난 1985년 통계에 이르러서는 진보주의 진영의 선교사(4,439)가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사(35,386)보다 크게 못 미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2011628일에 WCC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 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공동 선교 문서로 발표한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증인(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하나님의 선교개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는 교회 존재의 중심에 있다. 선교를 위한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여야 한다. 즉 종교들 서로간의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우주적인 교제를 이끌어내는 교회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서로 격려는 하되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익을 위하여 범종교적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여러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연합하는 일에 협력하여야 한다.

 

본 문건의 논조는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라는 공통의 목적이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 가운데 한 길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종교혼합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영생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의 현세적 공영과 공존일 뿐이다. 그들은 땅 끝까지 나아가라는 명령에는 깨어있는지 모르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는 귀를 닿고 있는 것이다(1:8).

 

 

4. WCC의 그릇된 이상: 교회의 연합이 아니라 인류의 연합을 추구

 

WCC가 교회의 연합을 인류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웁살라 총회에서부터였다. 본 총회는 이를 일종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규범과 같이 여겼다.

 

인간의 상호의존이 그토록 불가피한 것이라면 기독교인들을 우주적인 교제로 연합시키는 유대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규범적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인류의 우주적 일치를 동일하게 다룬다. 그들은 교회의 기본적 단위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그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교회를 정의한다.

 

세상 가운데서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세상의 일부분이 되고 그리하여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알려지고 실현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고 완성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종이고 미래의 소망을 지닌 교회의 증인이다. 교회는 세상이 미래에 될 것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곳으로서 공동체라고 불린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WCC가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과 속성을 조목별로 제시하고 비판한다.

첫째,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죄의 멍에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이 아니라, 이념적, 사회적, 정치적 해방을 뜻한다.

둘째, “사람들 가운데서 공동체를 위한 증인으로서의 교회.” 그들의 관심사는 복음을 증언하는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데 있다.

셋째, “잠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은 외면하고 인류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과정 중에 존재하는 모임으로만 묘사한다.

넷째, “진정한 공동체의 표징으로서의 교회.” 그들은 교회를 성례의 표징과 같이 여겨서 이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참여하는 모임이 표상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주의는 지극히 비성경적이다.

다섯째, “열린 미래.” 그들은 교회가 인류 전체의 모임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미래로의 개방성을 말한다.

그들은 교회의 종말론적인 완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무지하다.

교회의 연합을 인류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WCC의 접근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수정(修正)된 기독론에 기초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서 인류보편의 가치를 찾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록 타종교인일지라도 교회의 구성원으로 여겨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들은 이들을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들(anonymous Christians)”이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심지어 그들은 지금 우리는 종교적 회심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거듭나는 은혜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말고 보편적인 인류의 공동선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5. 결론적 고찰: WCC비성경적,’ ‘반교리적에큐메니즘

 

지금까지 우리는 WCC가 성경의 진리 가운데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묻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온전히 한 몸이 될 때 진리의 연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2:3).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이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진리를 교회가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고백한 것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교리가 바로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교리가 바로서지 못하면 교회는 넘어진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리의 하나임에 기초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추구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교회가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그러했다.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를 제일로 삼은 것은 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교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회복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주님을 나눌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눌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교리 안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WCC는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은 문제 삼지 않고 서로 공감하는 것들만 붙들고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은 이를 부정적 일치,” “능동적 일치라고 부른다. 과연 서로 다른 것을 그대로 둔 채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태도가 그릇됨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WCC교회들의협의회로서 자신들을 규정하지만 정작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에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우기보다 교회의 전통을 말씀으로 여긴다. 교회를 창세전에 정해진 백성의 모임으로 보지 않고 인류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산물과 같이 여긴다.

WCC는 교리에 관한 고백은 하지만 교리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은 성경 비평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젖어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반()교리적이다. 그들은 성경 자체를 계시로 여기지 않는다. 성경은 실존적으로 체험될 때 즉 각자에게 고유한 전통이 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된다고 본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오해 때문에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에 관한 정통 교리가 모두 가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WCC는 연합이 아니라 타협을, 일치가 아니라 공존을 추구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없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협의회적 교제를 통하여 협의회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상의 모든 교회를 WCC의 조직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WCC는 교회의 일치를 넘어서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확장이라기보다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화를 의미한다. 언약의 자녀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는 무의미해지고 인류보편의 가치를 실현한 전형적 모범으로서 한 사람 예수가 소개될 뿐이다. 성도의 구원은 전적은혜의 영역이 아니라 자질의 강화를 통한 신화(神化)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아들의 성육신을 통한 대속의 필연성이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존재와 경륜에 대한 필연성도 없고, 성령이 굳이 그리스도의 영이어야 할 필연성도 없다. 자연스럽게 필리오케 교리가 거부된다.

WCC가 추구하는 잘못된 에큐메니즘은 이렇듯 잘못된 교리 가운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고안하여 하나님이 하시면 굳이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이론적 수단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교회적 선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세상적 선교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연결하는 중심이 하나님-교회-세계에서 하나님-세계-교회로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폭력, 동성연애, 공산주의가 인류의 일치를 위하여 허용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되다(1:6-9). 오직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 배운 것만을 자랑한다(고전 4:7; 딤후 3:14).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17:11). “여호와의 열심”(9:7)이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떠낸 반석과 우묵한 구덩이로 되돌아가야 한다(51:1-2).

교회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하게 붙들고자 했을 때 오히려 편협하지 않았으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다. 그들은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진리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자신의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참 교회는 성경적 현실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진리를 상황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참 교회와 참 성도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에 대한 복종에 있다. 진리의 성령에 다스림을 받지 않는 곳에는 참 교회가 없다. 교회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홀로라도 남아서 진리를 외치는 것은 교회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지키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임을 외치는 사람을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세태야 말로 가장 교묘하게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는 그것이 진리 가운데 이루질 때만 평강이 된다. 그 진리는 참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 자신이다(14:6). 교회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4:15). 교회의 본질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두고 그 가운데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에큐메니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모이기에만 힘쓰는 WCC그럼에도 불구하고신학은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지침을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 그것은 WCC 자신들이다. 이 사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하물며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고 이를 수호해야 할 교사로서의 직무를 가진 신학자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여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43:10-11).

 

Soli Deo Gloria in Aeternum!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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