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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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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진실 2013. 9. 2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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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하여

 

< 문병호 목사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

 

 

 

<이 원고는 2013년 합신총동문회수련회 특강 원고이며 우리는 왜 WCC를 반대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한다. 1. 한국교회와 WCC. 2. 아홉 차례 총회를 중심으로 본 WCC의 정체성3. WCC 에큐메니칼 신학4. WCC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5. WCC의 가시적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 편집자 주>

 

1. 단지 명목상 고백에 그침

 

 

 

WCC의 총무를 역임한 콘라드 라이저(Konrad Raiser)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신학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관점에서 고찰한 바 있다.

 

 

 

첫째모든 신학은 성경적 증거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성경이 정황에 따라서 새롭게 읽혀져야 하며, “교리적 포로상태(dogmatic captivity)”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둘째모든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의해서 형성되어지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신학은 공동체의 신앙에 따른 영적인 수용성에 따라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셋째모든 신학은 토착화된 신학이어야 한다보편적인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신학은 본질적으로 지역적 성격이 있다신학은 상황적이므로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가 항상 요구된다.

넷째신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신학은 인간의 품위와 관계된다신학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모든 사람들의 대화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공동체의 가치에 따라서 상대화 시키는, WCC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ecumenical theology)의 오류를 간파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서 엄격하게 신학을 추구하는 것을 교리적 포로상태로 규정한다그러나 오히려 그들이 정작 상황과 정황의 포로가 되어있다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WCC는 제8차 하레레 총회에서 복음주의오순절교회그리고 로마 가톨릭을 포함한 세계기독교 광장’(Global Christian Forum) 운동을 제안했다여기에서 그들은 회원이 되고자 하는 교회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삶과 증언 속에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하고예컨대 이런 신앙고백은 니케아 신조(Nicene-Constantinople Creed)에 명시되어 있다.

2) 해당 교회의 신조(교리)에 따른 입장을 취하되 복음의 선포와 성례전 집행의 사역이 준수되어야 한다.

3) ‘성부성자성령이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며스스로와 다른 회원교회들의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4) 자기 교회의 권역 밖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음을 인정하고다른 교회들도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하나님의 지혜의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5) 설령 다른 회원교회들을 참되고 온전한 의미의 교회’(토론토 선언/1950)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라도다른 회원교회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참된 교회의 요소들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1)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따른 삼위일체 고백을 조건으로 삼고 있지만 2)-5)는 사실상 그것을 백지화시키는 완화 규정을 두고 있다여기에서는 회원의 자격으로서 교회의 신앙이나 고백이 올바른지를 따지기보다는 각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개방적인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콘라드 라이저의 말과 2)-5)의 규정을 종합해 보면, WCC는 사실상 교회폐기론(敎會廢棄論)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참 교회의 근본이 되는 신앙고백의 조항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그리고 이것들에 버금가는 교리들에 있다.

 

 

 

WCC가 적지 않은 문서들을 통하여 칼빈이 여기에서 제시한 조목들을 고백해 온 것은 사실이다예컨대WCC 헌장 제1조는 “WCC는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고백하며성부성자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고백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신학이 옳은지 그른지를 궁극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신앙고백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는가에 머물지 말고 무엇을 무엇으로’ 어떻게’ 믿는가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부른다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고백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를 누구라고 부르는지를 살펴야 한다(마 16:13-16). 주님을 부르되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서 복음이 되기도, “다른 복음이 되기도 한다성경은 다른 복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갈 1:7).

WCC는 어떻게 믿느냐는 묻지 않고 무엇을 믿느냐만 문제를 삼는다그들은 교회 본래의 진리수호와 변증의 사명을 포기해 버렸다겉으로 무엇을 믿고 있다고 고백만 하면 어떻게 그것을 믿고 있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한다오히려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에큐메니칼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비난한다. ‘무엇을 믿느냐와 어떻게 믿느냐의 큰 차이여기에 WCC에 대한 면밀한 교리적 고찰과 비판의 이유가 있다.

 

2. 비성경적인 성경론

 

 

 

WCC는 성경을 전통 혹은 전통화의 산물로 본다성경은 교회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서 상대적인 권위만 가질 뿐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그들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리고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보는 데에도 부정적이다.

WCC의 성경관은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1998년에 출판한 보고서 질그릇에 담긴 보배해석학에 관한 에큐메니칼 고찰을 위한 도구에 잘 나타난다여기에서 그들은 에큐메니칼 성경해석학을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해석학으로 정의하고그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성경은 일련의 문학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여타 문학적 자료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들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따라서 문학비평이 필수적이다.

2)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 기록과 재기록과 해석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므로역사비평이 필수적이다.

3) 성경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서로 다른 내용들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지만때로는 서로 상충될 수 있다이 때 무조건적인 조화를 피하고서로 모순되는 상태로 놓아두어야 한다.

 

 

 

여기에 나타나듯이 WCC는 성경을 단지 인간의 저술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그러므로 성경의 의미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문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비평이 필수적이다그리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다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WCC는 성경기록을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으로그리고 성경을 그 해석학적 작업의 산물로 여긴다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는 해석자의 수준과 체험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의 상황적 의미를 그들은 전통이라고 부른다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직 전통의 형태로만 작용한다그들이 말하듯이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후에 비로소 계시적 성격을 드러낸다.”

WCC에 있어서성경은 다양한 전통들을 형성하는 원형적 전통에 불과하다그들은 성경을 대문자로 표현하여(Tradition) 일반전통(tradition)과 구별할 뿐이다.

 

 

 

전통(Tradition)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 복음 자체교회의 삶에 현존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전통(tradition)은 전승과정을 의미한다전통들(traditions)이라는 용어는······표현되는 다양한 양식들과 고백적 전통들을······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성경은 계시적 성격을 드러낼 뿐 그 자체로 계시가 될 수 없다계속되는 다음 말에 주목하자.

 

 

 

성경 자체는 영원한 진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로서가 아니라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는 도구들에 대한 기록된 증언으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WCC에 있어서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성미해결의 책이다그들에게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도그것으로부터 나온 보편적 교리도 없다다만 그들이 말하는 교리적인 수렴’(收斂, doctrinal convergences) 만이 있을 뿐이다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호간의 신뢰 가운데 함께 자라가는 과정에서 교회들은 그들이 사도들과 우주적 교회의 가르침들과 일치하는 공동체의 삶을 함께 살고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 마지막 까지 이러한 교리적인 수렴을 단계별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렇듯 WCC는 성경을 전통 혹은 전통화로 여겨서 그 절대적객관적 권위를 부정한다그들은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또한 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전한 구원교리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딤후 3:16; 계 22:18-19).

이러한 WCC의 성경관은 성경의 절대적인 진리에 따라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려는 진정한 에큐메니즘에 본질적으로 역행한다.

 

3. 그리스도 없는 교회론: ‘비가시적 교회를 부인

 

 

 

성경은 비가시적 교회’(무형교회)와 가시적 교회’(유형교회)를 함께 가르친다. ‘비가시적 교회는 과거현재미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한다(엡 1:13; 딤후 2:19). 그리고 가시적 교회는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와 성례를 드리며 경건한 성도의 삶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모임을 말한다(엡 2:19; 4:11-13).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형태의 교회는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에만 제한된다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교회오직 영적인 교회비록 신앙상의 문제에서는 분열될지라도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서 하나가 될 교회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교회즉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가시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그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 대하여 고백은 하지만 이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기초시키지 않고 가시적 교회의 속성을 표현한 말로만 여긴다심지어 그들은 종말에 이루어질 천상교회도 가시적인 지상교회의 교제의 연장선으로 파악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의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주와 구속주로 인정하는 모든 교회들이 세상의 끝날 까지 믿게 될 그리스도의 몸에 서로가 온전히 속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 친교의 본성이다.

그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흩어진 백성들을 자신과의 영원한 연합 안에서 살아가도록 모으실 것이다그 연합의 기쁨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된 그 일치 안에서 느낄 수 있다.

 

 

 

WCC는 교회의 일치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아니라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에 있다고 봄으로써 비가시적 교회의 비밀을 제거해 버렸다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소망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그들은 교회를 주의 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몸이라고 정의하는데 더 익숙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근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이다이 보이는 몸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서 발견되었고 이제는 화해의 사역을 부탁받은 새 이스라엘에서 발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합된 성도들의 모임이다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언약의 공동체이다교회를 이라고 부르는 한 그 머리는 그리스도시다교회를 이라 부를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비가시적 교회를 가리킨다그러므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인식 없이 교회를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회를 사람들의 몸,” “보이는 몸이라고 했는데 교회의 연속성을 말하려면 이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쳐서 말해야 할 것이다(엡 1:20-23).

교회의 본성과 사역’(The Nature and Mission of the Church)은 WCC의 교회론을 다룬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가장 최근 문서로서가시적 교회의 일치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총정리 되어 있다여기에는 교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만이 다루어진다.

그들이 교회를 말씀과 성령의 산물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실존적인 부딪힘을 통하여 말씀을 접한 사람들의 교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는 말씀과 만남으로써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며 자신들의 성실한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교제이다그것은 성도들의 교제이다.

 

 

 

WCC는 성도 상호 간의 교제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보다 앞선다고 여긴다그들에게는 가시적 교회가 비가시적 교회보다 앞선다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가시적 연합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이끄는 우주적 일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4. WCC의 그릇된 성례주의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로 제시한다성례는 말씀의 제정표징성령의 세 요소로 작용한다성례에는 고유한 은혜가 있다그리하여 말씀과 함께 은혜의 방편이라고 불린다그럼에도 불구하고,성례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세례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며성찬을 통하여서 비로소 성화의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다.

세례(Baptism)와 성찬(Eucharist) 그리고 사역(Ministry)에 관한 리마 보고서를 칭하는 “BEM 문서가 공식 발표된 이후 WCC는 전(우주적 성례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WCC가 성례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시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WCC 신학의 모호성은 성례에서 극에 달한다그들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표징물 혹은 씻음이 제시하는 의미를()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의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의 해방에서 찾는다.

세례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중생의 표가 아니라 단지 변화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드러내는 이미지에 불과하다그들이 세례를 문화화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그들은 세례가 새 생활의 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명의 표라는(롬 6:3-5)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거행되는 세례는 우리가 함께 제자가 되었다는 표징이자 인()이다세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서로 간에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있는 교회와 연합하게 된다.

 

 

 

여기에서 WCC는 세례를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 거듭나는데서 찾고 있다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세례로 말미암아 인간성이 거듭나고 자유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WCC는 성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져있다이러한 오류 역시 성찬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제를 강조하기 위한 그들의 동기로부터 기인한다.

WCC는 성찬의 본질을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가 누리는 계속적인 은혜가 아니라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아들의 일에 동참하는 성도의 공로에서 찾는다그들은 이를 성찬적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성찬의 의미를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있다고 여긴다그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누리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실존적 사건이다그들에게는말씀이 독자의 실존적 결단을 통하여 비로소 계시가 되듯이성찬의 은혜도 그러하다.

WCC가 말하는 성찬적 사건은 에큐메니칼 사건을 뜻한다그들에 따르면성찬의 핵심적 가치는 십자가의 교훈을 되새기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교제에 있다그곳에는 그리스도의 영적 ‧ 실제적 임재는 없고 사람들 상호간의 도덕적상징적 임재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한 사랑을 상징할 수만 있다면 굳이 그 표징이 떡과 잔일 필요가 없으며굳이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필요가 없다우리는 이러한 WCC의 입장을 성례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WCC는 성찬을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 여긴다종교를 불문하고 대화를 이루는 장으로서 성찬이 기능한다성찬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간 대화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BEM 문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천명한다.

 

 

 

성찬을 축하하는 자체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the Church’s participation in God’s mission) 증거가 된다.

 

오늘날 WCC는 심지어 교회 자체를 하나의 성례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그들은 교회의 가시성에 주목해서 교회의 비밀을 성례의 비밀과 같이 여긴다그리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표징이자 도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회는 성례의 표징이 될 수 없다교회는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된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엡 5:32). 이렇듯 WCC가 극단적인 성례주의에 빠지게 된 것은 가시적기구적 교회일치만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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