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26)"
여기서는 앞의 네가지 축복을 네가지 저주와 대비시켜 각 구절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대비는 불경건한 이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뿐 아니라 신자들이 잠들지 않도록 깨웁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물질적인 안락에 쉽게 취하거나 달콤한 말에 잘 넘어가는지요? 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불신자들이 형통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을 부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세속적인 소유에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혀 내세를 망각하는 이들- 에 대해 저주를 선포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종종 한 삶을 파멸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부자는 자신에게 올무가 되거나 이 땅에 소망을 두어 스스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을 차단하지 않으면 하늘나에서 쫒겨나지는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물 자체로는 하나님 자녀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음을 부여 주려고 독자들에게 가난한 나사로가 부자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점을 훌륭하게 예증합니다.
그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에수님은 배부른 자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의 삶의 축복에 대한 확신으로 교만해져서 신령한 본질에 속하는 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웃음에 대해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관점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웃는 자란 육신적인 쾌락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는데 필요하게 될 온갖 종류의 고난을 일축하는 자를 뜻합니다.
마지막 화는 야심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구하거나 최소한 그런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보다 더 흔히 벌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잘못된 길에서 지키시기 위해 그들에게 사람들의 지지는 결국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