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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봉헌)이란 무엇인가?

임경근목사(용인)

by 김경호 진실 2015. 4. 1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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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들어가며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 헌금을 한다. 미리 준비한 까칠까칠한 돈을 가지런하게 챙겨 봉투에 넣어 헌금 주머니나 헌금함에 넣는다. 액수가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다. 예배 중간에 헌금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당 입구에 헌금함을 놓고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넣도록 하기도 한다. 헌금종류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추수감사헌금, 맥추헌금, 건축헌금 등. 어떤 사람이 여러 교회에서 찾아본 헌금 종류는 무려 71개나 된다고 한다. 많은 헌금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십일조 헌금을 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산물이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대체 헌금이란 무엇인가? ‘헌금’은 무엇이고 ‘연보’는 무엇인가? 헌금은 목사 생활비와 교회 경영(?)을 위해 주는 ‘기부금’인가? 헌금의 원리는 무엇이며, 헌금의 목적, 헌금의 방법, 한금의 자세, 헌금의 양, 헌금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다. 이런저런 실제적인 질문은 ‘헌금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헌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성경은 헌금에 대한 정의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금에 관한 수많은 책이 있지만, 속 시원하게 ‘헌금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헌금은 이런저런 종류가 있고, 구약과 신약에 이렇게 사용되었는데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식의 실용적인 책들이 대부분이다. 헌금이 주로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배학 책을 뒤져보지만 이상하게도 헌금에 관해 언급하는 책은 거의 없다. 가장 가까이 접하고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헌금! ‘헌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헌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볼 것이다.

1. 용어의 문제

헌금?

성경에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에 몇 군데 나타난다(민 31:50; 대하 34:9, 14; 눅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눅 21:1)에서 ‘헌금’은 ‘선물’ 혹은 ‘바치는 것’(gifts & offerings)을 의미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헌금이라는 단어도 같다. ‘헌금’은 돈일 수도 있고(대하 34:9) 물건(패물,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고리, 목걸이)일 수도 있다(민 31:50). 자세히 보면 ‘헌금’이라는 단어는 주로 신약교회가 아니라,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나 ‘물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실제로 ‘헌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서에만 언급될 뿐 신약의 역사서와 서신서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헌금’(獻金)이라는 말의 뜻은 ‘바치는 돈’이다. ‘헌금’은 구약과 복음서에 나오는 ‘선물’이나 ‘바치는 물건’이라는 의미보다 좁다. ‘헌금’은 돈으로 축소되고 ‘헌물’(레 23:38; 5:15 등)의 의미는 빠져 있다. 한국 교회와 한국어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물건이 아니라 대부분 ‘돈을 바치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선물’과 ‘바치는 것’의 현대적 적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헌금’이라는 용어는 성경적 본래 의미를 부족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적 적용의 용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헌금’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분명히 빈약한 번역이니, 다른 좋은 번역을 찾아본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헌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다.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헌금’(민 7:10), ‘헌물’(민 7:10), ‘제물’(겔 20:28)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헌’(레 1:3)라고 번역되었다. 민수기 7장 10절에는 ‘고르반’이라는 단어에서 ‘헌물’과 ‘봉헌’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한 단어에 대한 서 너 가지 번역 가운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번역을 찾으라고 한다면 ‘봉헌’을 선택하고 싶다. ‘봉헌’(奉獻)은 ‘(사물을 어떤 분에게)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봉헌’이라는 단어는 ‘제물’, ‘(헌)금(돈)’, ‘(헌)물건’을 모두 포함한다.

연보?

신약성경에는 ‘봉헌’이나 ‘헌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연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연보’라는 단어도 번역의 문제가 없지 않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주로 등장하는 ‘연보’라는 단어는 한 단어의 번역이 아니라, 다양한 헬라어 단어의 번역이다(롬 15:26; 고전 16:1-2; 고후 8:2, 20; 9:5, 11, 13). 우선 ‘연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교제’(koinonia, 롬 15:26; 고후 9:13), ‘관대함’(generosity, 고후 8:2), ‘복’(eulogia, 고후 9:5), ‘기부’(collection, 고전 16:1) 등이다. 간접적으로 ‘연보’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섬김’(diakonia, 행 11:29 “부조”로 번역; 고후 8:4; 9:1, 12, 13. “성도 섬기는 일”)이라는 단어도 있다. ‘부조’(扶助, help)는 ‘기부’(寄附, contribution)와 동의어로 쓰인다.

‘연보’(捐補)는 ‘자기 재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연보’의 의미는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가 돈을 모아 도운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연보’는 성도와 교회 상호간에 ‘교제’하고 ‘관대함’으로 대하며 ‘기부’하고 ‘섬기는 행위’였다. 이렇게 ‘연보’하는 것은 결국 연보하는 자에게나 연보를 받는 자에게 ‘복’이다.

특별히 ‘연보’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6장 1절에 나오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의 ‘연보’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더 분명해진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에 사용된 ‘연보’라는 단어가 ‘로게이아’(logeia)인데 ‘돈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단어의 라틴어 번역이 ‘콜렉타’(collecta, <colligere> ‘모으다’)인데 여기에서 ‘헌금’ 혹은 ‘연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컬렉션’(collection)이 유래했다. 이 ‘컬렉션’의 한국어 번역이 ‘헌금 혹은 ‘연보’이다. ‘연보’(捐補)의 뜻은 ‘자기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다’이니 본문의 정황을 고려한 좋은 번역인 셈이다.

종합해 보면 신약교회에서 ‘연보’는 ‘가난한 교회나 성도를 돕기 위해 모으는 돈 혹은 물건’(collection)이라고 보면 된다.

봉헌!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헌금’, ‘연보’와 ‘봉헌’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적절한 용어는 ‘봉헌’이라고 하겠다. ‘연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간을 돕는 수평적인 것을 잘 표현한다고 하겠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수직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수직적 드림과 수평적 나눔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용어로는 무엇이 적당할까? 당연히 ‘봉헌’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인가 들고 나아가 바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봉헌’(offering)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헌상’(獻上)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기도 한다. ‘헌상’은 ‘임금에게 물건을 받들어 올리다’는 뜻이다. 왕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니 좋은 용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치다’(offering)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는 ‘봉헌’(offering)이 있으니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봉헌’은 구약의 제사에서 나타난 의미와 신약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2. 봉헌(헌금)의 원리

은혜의 원리

‘봉헌’(offering)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물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셨다(창 4, 10, 12, 18, 21, 25). 미소 짓는 하나님! 활짝 웃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작품을 완성하시고는 특별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이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영광이고 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극한 기쁨 자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인간은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이 인간에게도 좋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봉헌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이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관계가 끊어지자 인간은 죽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모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봉헌’은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 없는 멋진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쓴다. 인간이 관리하고 있는 모든 돈과 재물과 건강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신이나 우상에게 ‘봉헌’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봉헌’, ‘고르반’, ‘가까이 다가가다’, ‘to offer’) 수 없다. 은혜의 법이 아니고는 ‘봉헌’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이교에도 ‘봉헌’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봉헌’의 의미가 이교들의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교에서는 신에게 뭔가를 얻기 위해 뭔가를 바친다. ‘봉헌’을 통해 신과 하나가되거나 신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스스로 나아가 뭔가 드리고 복을 얻을 수 없다. 구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간이 드리는 ‘봉헌’은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없이는 인간이 ‘봉헌’할 수 없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려 하지만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 ‘봉헌’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피의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사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속죄제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봉헌’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여 응답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속죄제사에서 우리가 뭔가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봉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주신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물이 바로 ‘봉헌’(gift & offering)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하나님으로 온 것이고, 우리는 그 ‘봉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지 우리 쪽에서 뭔가를 준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속제제사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자. ‘봉헌자’가 자신의 두 손을 짐승의 머리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함으로 ‘봉헌자’와 짐승이 하나가 되어 ‘봉헌자’ 자신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짐승은 봉헌자의 ‘대리자’가 된다. 피를 흘린 제물을 제단 위에 완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길을 열어 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하기 원할 때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봉헌’에 순종하면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절대로 제단에 불을 끄지 않도록 관리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렇게 ‘피의 속죄제사’조차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봉헌은 은혜의 법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길(방법)에 순종함으로 따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었다. 제사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헛될 뿐이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은 구약의 ‘제사’와 ‘봉헌’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신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다. 인간이 바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을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물로서 아버지의 택한 백성을 위해 대신 피 흘려 죽으셨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은혜로운 ‘봉헌’의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 곧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봉헌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혀 주셨다(엡 2:4-6). 우리는 이제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봉헌) 수 있다. 죄인의 신분에 있을 때에는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기에 드릴 것(봉헌)이 있다. 이 은혜의 원리에 봉헌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돈으로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부르지만, ‘봉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은혜의 법에 따른 ‘봉헌’의 원리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서 순서를 정해 ‘헌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 혹은 ‘봉헌한다’는 뜻이다.

청지기의 원리

‘봉헌’의 의미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것을 맡기셨다는 청지기의 원리에서 ‘봉헌’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과 권세와 명예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9-12).

인간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관리할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이 청지기의 감사에 봉헌의 원리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소유를 인간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신다.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를 맡아 관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파괴하고 생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학대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방식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죄와 비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경영(엡 1:9, 3:1; 딤전 1:4)은 계속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경륜’(經綸)은 계획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경륜’은 ‘경영’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바로 이 ‘경영’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영어 ‘이코노미’(economy)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영’(management)은 창세부터 말세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경영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인간은 ‘청지기’라고 불린다. ‘청직(淸職)이’, 곧 ‘청지기’란 ‘오이코노모스’(oikonomos)인데 한 집안을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다스리는 ‘집사’(steward)와 같은 자이다. ‘청지기’(oikonomos)는 주인의 ‘경영’(oikonomia) 철학에 따라 모든 재산을 맡아 관리해야 한다. 청지기의 관리(to administer)와 경영(to manage)의 기준은 철저하게 주인의 뜻이어야 한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재산의 관리자(administrator) 혹은 경영자(manager)일 뿐이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의 모든 것을 잘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만한 그 어떤 소유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재물, 명예,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단지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임을 지속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성경 역사 가운데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봉헌’(offering)이라는 부른다. 인간이 맡아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봉헌’이다. 만약 ‘봉헌’이라는 모습이 없다면 인간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봉헌’이라는 방법,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부, 지극히 작은 것을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모여 예배한다. 그 때 자신이 가진 일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주일 예배의 ‘봉헌’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이다.

3. 봉헌의 목적

구약교회에 보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봉헌했다(레위기의 제사제도). 하나님의 백성은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께 드렸다(출 29:36-42; 30:36; 레 24:9).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봉헌했다(민 21-24; 신 18:1-5). 셋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봉헌했다(신 14:28-29; 15:11; 16:11; 24:19).

신약교회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예배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금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예배하는데 필요한 장소와 시설 유지를 위한 경비를 봉헌했다. 둘째,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역자의 생활비를 위해 봉헌했다. 교역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넉넉한 생활비가 필요하다. 방문자들을 접대하는 일과 자녀의 교육비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는 구제를 위해 봉헌했다(행 6장; 고후 8-9장; 약 2:15; 히 13:16; 갈 6:10). 이것은 교회 내에서 상호 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상호간의 구제도 포함한다. 고린도후서 8-9장에 보면 ‘연보’라는 말로 풍성한 구제가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 넷째는 복음전파를 위해 봉헌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했고 복음의 전파의 시초부터 사도가 하는 일에 참여했다(빌 1:5; 4:15).

4. 봉헌의 양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봉헌의 양은 구약시대의 규례를 보면 다양했다. 첫째, 땅의 소산(곡식과 열매)과 짐승의 1/10을 바쳐야 했다(레 27:30-32; 민 18:21-32).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첫 번째 십일조는 먼저 하나님의 성소를 위해 일하도록 구별된 레위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 원리는 신약교회의 교역자를 위한 생활비를 지급하는 원리적 근거가 된다(마 10:9-10; 눅 10:7; 고전 9:13; 딤전 5:18). 두 번째 십일조는 매년 성소를 방문하는 비용을 위해 사용했다(신 12:4-19). 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고아와 객과 과부와 노비, 그리고 레위인도 포함된다(레 16:11; 14:22-29). 세 번째 십일조는 매 삼년 마지막에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되었다(신 14:28-29; 26:12-15). 이 모든 십일조를 다 합치면 십일조가 소득의 23.3%나 된다. 그 외에도 첫 새끼와 처음 익은 열매와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출 22:30).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대신 레위인을 구별하여 드렸다. 첫 소산은 아론과 제사장에게 돌렸다(민 18:12).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원예물(레 7:16), 감사희생(레 7:13, 15), 칠칠절에 드리는 자원하는 예물(신 16:10) 등이 있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옛 언약의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와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십일조 규례나 첫 소산을 바칠 필요는 없다. 대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봉헌한다. 이 점에서는 구약의 봉헌과 신약의 봉헌은 차이가 없다.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신약에 나오는 봉헌의 액수는 일관된 규칙이 없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행 11:29) 봉헌자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드렸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봉헌자의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가 봉헌 액수를 결정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봉헌자는 자신의 힘을 다해 봉헌할 것이지만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봉헌한다. 바리새인은 수입의 십일조(눅 18:12)를 했고, 삭개오는 모든 소유의 절반을 봉헌했고(눅 19:8), 가난한 과부와 바나바는 그들의 소유 전부를 바쳤다(눅 21:4; 행 4:37). 이 모든 예들을 살펴볼 때 봉헌의 양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지만, 봉헌의 특징은 구약이나 신약교회가 다르지 않다.

물론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양과 액수가 정해져 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개념은 구약의 십일조의 개념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1/10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만약 구약의 십일조와 같은 원리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자기 수입의 23.3%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헌의 양으로서의 십일조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바쳐야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신학적 의미의 십일조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성도는 적어도 십일조 이상의 봉헌을 하는 것이 옳다.

봉헌의 액수는 은혜를 받은 대로 신앙 양심에 따를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봉헌을 많이 할 수 없다. 또 많이 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는 많은 봉헌을 하게 될 것이다. 영적 부요함의 정도에 따라 물질적 봉헌의 액수도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다. 신약교회에서는 헌금 액수를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봉헌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5. 봉헌의 자세

봉헌의 자세는 ‘인색함’으로나 ‘억지’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새 언약의 시대의 봉헌은 성령의 법 아래 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지만 성령님을 속일 수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팔아 봉헌했다고 속였다. 봉헌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지 못한 자세로 봉헌하다가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다. 성령님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봉헌을 하나님과 흥정하듯 해서도 안 된다. 무엇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봉헌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대학 입학을 위한 헌금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에 유행하는 수많은 제목의 헌금목록에는 이런 것들이 즐비하다. 봉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리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더 이하도 더 이상도 아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라고 했다. 봉헌을 하는 구체적인 행위에는 우리의 마음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평가하신 것을 볼 때 잘 드러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가지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2-4). 봉헌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마음이 중요하니 굳이 돈을 봉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가난하지만 그 은혜에 대한 마음을 표시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바치기도 했다. 헌금의 기준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봉헌자의 마음과 자세가 결정한다. 그러나 대체로 재산이 많은 자가 교회에서 많은 금액을 봉헌하는 것이 옳다. 많은 받았으니 많이 바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지를 위해,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많이 봉헌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아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했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것이 복이다.

6. 봉헌의 장소와 때

개신교회는 봉헌을 예배 가운데 포함시켰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의 신앙을 따르는 교회들도 예배 전 혹은 후에 헌금함에 봉헌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다. 예배가 언약의 갱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배 전후 드나들면서 예배당 입구에 놓인 헌금함에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 가운데 넣는 것은 예배의 의미와도 맞다. 예배는 언약의 갱신 예식으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헌금 시간이 예배 시간 안에 배치되는 것은 옳다.

예배 가운데 봉헌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를 할 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고 했다. ‘매주 첫날’(안식 후 첫 날)은 주일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0장 7절이나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매주 첫 날에 모였는데 예배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는 모임을 바로 예배이다. 이 예배에서 구제를 위한 연보를 한 것은 봉헌이 예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봉헌하며, 또 우리에게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사역을 생각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표로서의 봉헌은 주일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7. 봉헌의 삶

예배 가운데 드리는 ‘봉헌’은 끝이 아니다. ‘봉헌’은 모든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봉헌’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청지기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단순히 돈 몇 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예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배’는 ‘섬김’(service)의 다른 번역이다. 곧 ‘연보’ 혹은 ‘봉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 그리고 명예와 지위를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 예배 가운데 진심으로 봉헌하는 그리스도인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데 불신자와 다르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경영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것 같다.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단절로 인해 삶으로 봉헌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다. 가정과 회사와 기관의 관리와 경영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부의 관리자가 되면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애써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의 ‘봉헌’은 삶에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봉헌’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다.

8. 봉헌의 관리와 집행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에서 ‘봉헌’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교회 재정의 관리와 집행이 투명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많은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봉헌’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봉헌’된 돈과 재물을 잘 관리하고 집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원칙과 원리를 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적 교회 재정과 집행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상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회단체나 회사에서 하는 형식을 원용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원시적인 경우는 목사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재정의 관리와 관련해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집사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장로교회는 집사회가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재정위원회가 교회 일반 재정을 관리하고 구제는 집사회에서 책임진다.

특별히 성경은 집사가 구제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도행전 일곱 집사는 구제를 위해 구별된 자들이 분명하지만, 단순히 구제만을 하지는 않았다.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복음 전파하는 일에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회가 세워져 가면서 집사의 역할이 재정의 관리와 집행과 밀접한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종교 개혁가들이 오늘의 집사제도를 성경에 기초해 정착시켰다.

각 교회는 교회재정 원칙을 성경적 기초 위에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앞으로 성경적 재정 관리와 집행에 대한 신학적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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