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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혁주의 교회의 미래과제/허순길 교수

허순길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3. 11. 25. 16:54

본문

 

韓國 改革敎會의 未來 課題

                                                                許 淳 吉


내용;

   서론

     1. 개혁주의 신학의 창의적 개발

     2. “신앙고백교회”로서의 정체성 확립

     3. 신학과 설교의 괴리성(乖離性) 극복

     4. 개혁주의 생활의 확립

     5. 직분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

     6. 분열된 장로교회 일치의 추구

   결론



序論;


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세아에서 가장 복음화 된 나라가 되었다. 개신교역사가  120년도 채 되지 않은 한국이  총 인구의 약 20 퍼센트가 되는  신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는 개신교 여러 교파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큰 교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 한국개신교 세계에서 장로교의 교세가 전 교세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나아가, 놀라운 것은 장로교회 전 교세 중 70퍼센트 이상이 정통 보수라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기독교계에서 장로교회, 특별히 정통 보수 장로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비중이 큰 한국 정통 보수 장로교회가 한국 기독교계에서 그 비중에 걸 맞는 역할을 해 왔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을 하기 어려운 역사를 남겨 왔을 뿐 아니라, 현실은  더욱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장로교회가 신학, 신앙, 생활면에서  참된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오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그 동안 한국 장로교회는  다양한 교파 교회들 가운데서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탁월성을 그 생활에서 보여 주지 못하였다. 특별히 지난 반세기동안 끊임없이 일어난 교회분열과 교회생활에 자리 잡은 교권주의, 물량주의, 외형주의, 지방주의, 기복주의 등은 속화된 교회 현실을 그대로 들어내 주어 왔다.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는 특단의 치유를 받지 않는 한 소망이 없는  병자에 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긴급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형편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 교회가 가진 약점과 심각한 병증(病症)에도 불구하고  한국 보수 장로교회는 21세기에 한국과 세계의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교회로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개혁주의 세계에서 한국 보수장로교회의 교세가 다른 어느 나라의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비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보수 장로교회의 교세는1) 미국에 있는 개혁주의 보수 교회들의 협의체인 “북미장로개혁교회협의회”(The Norrth American Pre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NAPARC으로 약칭)의 전 교세보다 크며2), 세계의 보수 개혁주의 교회(장로교회, 개혁교회)의 모임인 “국제개혁교회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Reformed Churches, ICRC로 약칭)의 전체 교세에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3)

한국 장로교회가 거듭나 명실공히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교회 지도자. 신학자들이 지구촌 시대의 세계언어(영어)의 장벽을 뛰어 넘을 때 한국의 장로교회는 세계의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큰 봉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한국 장로교회가 먼저 해야할 일은, 막연한  정통보수 교회가 아니라, 신학, 신앙, 교리, 정치, 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좀 더 개혁주의적인, 좀 더 칼빈주의적인 교회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에서 좀 더 칼빈주의적인, 개혁주의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미래의 과제를 찾아 보고자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를 주의 깊게 읽고, 교회의 현실을 바로 관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한국 장로 교회역사를 비판적 입장에서 개관하고, 오늘의 교회의 현실을 살핌으로 미래의 과제를 몇 가지 찾아보려고 한다.


1.  改革主義 神學의 創意的 開發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맥을 역사적으로 간단히 살핌으로 미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과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로교회는 원래 역사적인 칼빈주의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이런 신학과 신앙 고백을 소개받고 성장했는지는 역사를 뒤돌아봄으로 알게 된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 남북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카나다 장로교회의 네 교회에 속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네 선교회 가운데 미 북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선교의 터를 잡고 그 수도 가장 많았기 때문에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 신앙, 생활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한국 교회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에 있어서도 신학교 설립당시부터(1901) 주도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매우 컸던 것이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기까지 교수들의 3분의 2 이상이 언제나 북 장로교회에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결과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 생활의 터를 놓은 분들은 주로 북 장로교회 선교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초대 선교사들이 어떤 신학을 한국에 도입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 현재의 신학적인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초대 한국의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와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출신들이었다. 선교 4반세기(25주년)를 기념하던 1909년에 7개 신학교에서 수학한 40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봉사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16명이 프린스톤 출신이었고, 11명이 맥코빅 출신으로 이 두 신하교의 출신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4)  당시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J. Brown)은 “첫 25년간의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탄형의 선교사들이었다...신학과 성경비평에 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하였다”고 했다.5) 박형룡은 “그 선교사들이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고 그들의 신학으로 교역자들을 양성해 냄으로 전교회 신학사상과 교회생활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풍토로 인도했던 것이다”라고 했다.6) 요약하면 초대 미 선교사들은 퓨리탄적 개혁주의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관에 있어서는 축자 영감을 믿은 철두철미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품고 가르친 분들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 첫 근거는 이 초대선교사들이 1905년에 알미니안 신학노선을 걷고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재한개신교복음주의선교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세우기로 합의를 본데서 찾게 된다.  이런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려고 결의했을 때 거기 참석한 선교사들 중에 어느 한 분도 반대하는 분이 없었다고 한다.7)  저들은 당시 본국교회에 신학파(The New School)의 강세로 알미니안적 신학을 차츰 수용하는 북장로교회의 교리적 포괄주의 경향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평양신학교 주경학 교수였던 스왈론(W.L. Swallon, 蘇安論)은 “한국에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 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8) 그는 한때 “교회일치위원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었다.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한 것은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 칼빈주의 신학을 수용하려 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장로교 선교사들 편에서 칼빈주의 신학 입장을 완화하고 알미니안 신학의 입장을 너그러이 수용하려 함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는 “선교총공의회”가 모였을 때,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자는 제의가 있자 바로 동의를 했던9)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놀드(W.D. Reynolds, 李訥瑞)의 신학적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칼빈주의 5 대교리라고 불리는 “돌트신경”(the Canons of Dort)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칼빈신학의 유명한 소위 ”오대 요점“이라는 무조건적 택정, 유한한 속죄, 전적부패,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등은 당시 알메니안 파에 속한 46인의 목사가 화란 정부에 제출한 오개조의 항의문에 대한 칼빈의 답변으로 쓰여진 것이다. 피차 상반되는 교리를 호상 고집하였던 것이니 즉 칼빈주의자들은 신의 통치권을 고조하고, 알메니안 파에서는 인간의지의 자유를 고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쌍방에서 공이 전체적으로 보아 조화를 얻게 하려는 노력은 심히 결핍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도  설교할 때에 보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였고, 알메니안 파에서도 기도할 때에는 신의 통치하는 은총에 귀이함을 말하였던 것이다. 생각건대 칼빈파에서 만일 하나님의 마음속에 작정된 교결이라는 제목에 대한 변증을 개시하지 않았던들 개혁파 중에 이렇게 심각한 교리적 분파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하고, 나아가 그는 ”이 해명하기 어렵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칼빈주의자들의 변론을 피하고, 또 소위 “오대요점"이라는 데 대한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 파들과의 그리 향기롭지 못한 변박을 그만 두고 이제 우리는 칼빈교리의 특수한 원리를 잠고하고...”라고 말한다.10) 이를 볼 때 레이놀드가 알미니안주의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전적부패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중심이된 “돌트 신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알미니안적 신인협력 사상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를 볼 때, 그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자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1924년부터 1937년 은퇴할 때가지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양신학교의 신학이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가 신학교에서 가르친 조직신학도 중국인 가옥명(賈玉銘)이 프린스톤의 핫지 부자(Hodge)와  미 침례교 신학자로 로체스터 신학교(Rechester  Seminary)의 교수였던 스트롱(Strong)의 책을 발췌해서 만든 조직신학을 따라 가르쳤었다.11)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그에게 시사하고 1934년 졸업한(제29회) 박윤선은 그의 자서전에서 평양신학교 학생시절의 그 학교의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을 밝힌 후에 이어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 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했다. 나는 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로부터 ”성경신학“이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그 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 못하였다”고 했다.12) 박윤선의 위의 말은 이해할만하다.  당시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의 대변지라 할 수 있는 “신학지남”이 출간되지(1918년) 15년 동안 그 내용에서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에 관한 제목의 글을 거이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주목을 끄는 것이다. 1934년 칼빈의 425주년 탄일(7월10일)을 마지하고서야 기념으로 칼빈에 관한 특집을 내게 되어 비로소 “개혁주의” “칼빈주의” “개혁교회”란 말이 크게 부각이 됨을 보게 된다.13)


이상의 역사적인 흔적을 살펴볼 때,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형의 개혁주의 신앙인들로서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고, 성경교육에 중점을 두었지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하여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저들은 19세기 미 개신교 보수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피니(Finney)를 위시한 무디(Moody)의 부흥운동에 간접적 영향을 받아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적 경향을 크게 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첫 번째 복음 선교사로 평생 서울에 머물면서 큰 영향을 끼친 언더우드(H.G. Underwood, 元杜于)가 선교사로 임용되었을 때, 당시 선교부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낸다면, 나는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포하기 원한다면 가겠습니다”라고 말 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14), 그가 뒤에 게일(J. Gale, 奇一)과 함께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먼 세대주의 매개체인 스코필드 관주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 1910)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자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위에 든 레이놀드도 1922년 2월호 “신학지남”에 시대주의 전천년기 재림론의 대변기관인 “나이야가라 사경회”의 유익을 예찬하여 시대주의 전천년 지지자임을 잘 보여 줌으로 조직신학 교수로서 철저한 칼빈주의자가 아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칼빈주의, 개혁주의에 대한 큰 관심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교수로 등장할 무렵부터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1930년대 초반에 유학에서 돌아온 분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젖어 들어온 분들(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등) 도 있었지만, 칼빈주의를 알고 그 신학체계의 탁월함을 익히고 돌아온 분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들이 신학교에 교수로 임용됨으로 분위기가 차츰 바뀌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남궁혁이 1927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30년에 박형룡이 교수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1930년 이전 “신학지남”에서 나타나지 않던 칼빈주의에 대한 논문이 이 분들이 교수가 된 후에 두드러지기 나타나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1934년의 칼빈 특집(제14월 4집)이 나타난 후 계속 칼빈주의에 대한 논문이 실리게 된 것을 보게 된다.15) 


이 후 차츰 한국인 신학자들이 신학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의 개혁신학은 이제 한국인들이 세운 신학교에서 한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터가 잡히고 발전해 가게 되었다. 먼저 1946년 설립된 부산의 “고려신학교”에서 지난날 평양신학교의 강사였던 박윤선이 주도하는 개혁신학이 교수되었다. 그리고 1948년에 설립된 서울의 “장로회 신학교”에는 일찍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박형룡의 주도로 개혁신학이 교수되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해방 후 70년대까지 한국인 신학자로 개혁주의 신학을 주도한 두 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분은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각기 신학적인 면에서 고유한 특성과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박혁룡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그 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개편되기 전의 전통적인 미 장로교의 칼빈주의 신학을 받았으며, 박윤선은 프린스톤 신학교가 좌경됨으로 생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미국적 칼빈주의 신학자 메췐(G. Machen)과 화란 개혁신학을 배경한 반틸(C. Vantil)에게 시사를 함으로 구미 양 개혁주의 신학을 받았었다고 본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구라파 개혁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볼 수 있는 화란계 개혁주의 신학을 접하고 이를 근간으로  신학작업을 하려 노력한 것이다. 이는 박형룡이 교의학 신학자로서 지난날 평양신학교에서 레이놀드가 가르친 조직신학의 방향과는 달리 미 화란계 개혁교회에 속한 칼빈신학교의 버콥(H. Berkhof)의 조직신학을 모델로 작업을 하여 가르친 사실과, 박윤선이 주경학자로서 화란의 흐로샤이데(F.W. Grosheide), 흐레이다너스(S.Grijdanus), 스킬더(K. Schilder)등의 책을 중용한데서 찾아보게 된다. 이 두 분은 해방 후 거이 80년대 중반까지 지난날 선교사들이 하지 못한 구미의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보급하고 정착시키는 데 놀라운 봉사를 하였다. 오늘 한국의 정통적 장로교회의 신학은 주로 이 두 분이 다진 신학의 터 위에 서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미래 과제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지난 80년대까지 주로 박형룡, 박윤선의 전통적인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따라 오던 오던 개혁주의 신학이 근년에 이르러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약간 느끼게 된다. 과거에 확고했던  “보수신학”의  노선과 차츰 거리를 두고, 신학적 포용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시대정신에 융합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지난날에 개혁주의 신학을 주도하고 그 보루 역을 하며 세계개혁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여러 구미 신학교의 신학이 시대정신에 융합해 옴으로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에서  떠나게 되어, 교회의 속화를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오늘 한국 개혁주의 보수신학계의 경향을 주목하게 된다.

현재 창립되어 출발하는 “개혁신학협의회”(The Association of Reformed theology)는 주로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들의 모임인 것으로 이해를 한다. 오늘 세계 개혁주의 신학계의 흐름을 주시할 때, 이 협의회의 사명이 중대하다고 보게 된다. 이미 언급한대로 한국 보수장로교회의 교세는 세계의 어느 보수 개혁교회의 그것보다 엄청나게 큰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개혁신학의 계발과 발전을 위한 인적 자원도 세계 어느 교회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이 나라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미래의 과제는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고 교부들과 개혁자들의 신학의 터전 위에  구미의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 통합하여 창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주조해 내는 일이다. 이럴 때 이 나라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과 세계의 개혁주의 교회건설에 크게 봉사하게 될 줄 믿는다.

  



2. "信仰告白敎會“로서의 敎會 正體性 確立.


교회가 가진 “신앙고백”(혹은 신조)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들어내는 기치(旗幟)이다. 신조를 가리키는  란전어(Symbolum)에는 이런 기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종교개혁 후 세워진 여러 교회공동체는 모두 신조를 기치로 내세우고 각기 교회의 정체성을 들어내었다. 루터교는 “컨코드 교리문서”(The Book of Concord, 1580), 스위스 개혁교회는 “제2 스위스 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1566), 화란 개핵교회는 벡직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1561),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을 통해 그 정체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면 한국 장로교회가 역사의 시발부터 “장로교 신앙고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

봄으로 오늘의 장로교회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선교지 교회는 최초의 개척 선교사들이 어떤 기반 위에 교회를 세웠는지에 따라 그 교회의 전통과 미래의 실체가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한번 자리잡은 전통은 쉽게 바뀌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앞서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품은 분들이라 하기보다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가진 분들로서 알미니안 신학에 대하여 매우 화해적이고 수용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런 입장은 곧 신앙고백에 대한 그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처음부터 칼빈주의 신학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장로교회의 교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채용하는데 주저하였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어린 교회에 이 “신앙고백”이 부담이 된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배후에 가려진 이유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이미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에, 이 일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함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인 터를 놓는 때에, 1905년 인도 자유 장로교회가 채용한 소위 “12신조”를 교회의 신조로 받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단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으로만 언급을 하게 되었다. 장로교의 원천적인 신조대신 저 간단한 “12신조”를 채용한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경보다 간단하여도 그 요긴한 것은 다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참된 이유는  1905년에 감리교선교사들과 함께 조직한 “재한복음주의선교총공의회”에서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교회”를 세우기로 이미 합의를 했으니, 알미니안 파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조건 선택과 유기 등의 교리가 분명하게 기술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그 합의를 이행하는 데 지장을 초래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1912년에 총회로 개편하게 되었을 때에도 신앙고백 채용 문제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의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은 신학과 신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일이 별로 없고, 거기 대한 지식도  없으니,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단지 장차 목사가 될 신학생들에게 알려진 문서가 될 뿐이었다.  1920년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장로교회의 역사적 표준 즉 신경, 요리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모범... 이것들을 교육의 표준으로 삼는다”고할 뿐이었다.16)


결과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장로교의 최대 기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교리의 터로 갖지 못함으로 정체성 있는 “신앙고백교회”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1918년 창간이래 장로교 신학 대변지 역할을 한 “신학지남”(神學指南)에서도 교사들은 교회의 신조(신앙고백)문제에 대하여 단지 몇 편의 평범한 글을 실렸을 뿐이다.17) 그런데 평양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교수하던 곽안련은 1919년에 그의 “조선야소교장노회신경논”에서 한국장로교회가 채용한 “12신조”의 탁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우리 신경은 만국 장로회신경 중에 최호한 거시니 웨슷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칠신경보다 나흐니 우리 신경은 간단하고 명백하여 알기가 용이한 거이라....조선 신경이 간단하나 유치한 거시 아니오, 완전한 신경이며 이보다 우승한 신경이 세상에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리 신경보다 나은 것이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리신경보다 부족한 거시 만흐며 웨슷민스터 신경이라도 이 신경보다 우승하기 어려우니라...”18) “12신조”에 대하여 “이보다 우승한 신경이 세상에 없고..”라고 까지 한 과찬(過讚)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왜 저토록 “12신조”를 높이 평가하였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는 계속해서 “또 장로 감리 양 교회 연합 문제를 인하여 회집하였을 시에 연로한 감리교파 선교사의 말이 두 교회가 연합하게 되면 우리 감리파가 웨슷미스터 신경은 채용하가기 극난하나, 이 인도국에서 출래한 신경을 채용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다 하였으니 감리파의 타 교역자는 여하게 생각할넌지 아지 못하거니와 가히 알만한 일이라” 하였다.19)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지 않고, 12신조를 채용한 중요한 동기가,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교회”를 세우기 위해 알미니안 파를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있었음을 거이 확실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장로교회의  원래의 신경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적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장로교회는 이제 감리교회와 거리감 없이 교류를 하게 되었다. 1905년에 장, 감 양 선교부에 속한 교회들이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고, 선교사들이 강단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 총공의회”는 선교지역을 상호 조정하여 1909년에 거이 그 마무리를 지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칼빈주의 교리의 교육과 수호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남녀 학교도 연합하고, 주일학교 공과도 함께 발행해서 사용했다. 선교지역 조정으로 어떤 지역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이 되고, 감리교인이 장로교인이 되기도 했다. 선교지역 조정으로 장로교회 교인들이 감리교회에 속하도록 강요를 받았을 때에 강력한 저항을 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20) 이런 상황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라는 이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신조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보이지 않은 장로교회에는 상대주의적 교회관이 처음부터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다만 이 때에 나타난 양 교회의 정체성이란 교회정치분야 뿐이었다. 장로교회는 장로회가, 감리교회는 감독이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뿐이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자의식은 신학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신학자들이 등장하여 신학교육과 교회봉사에 참여함으로 차츰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장로교회가 1934, 5년에 대두된 자유주의 신학문제로 말미암은 어려움을 겪은 후인 1938년에 박형룡이 “신학지남”에 5번에 걸쳐 “신경소론”이란 제목으로 신경에 대한 글을 써 주의를 끌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장로교의 기본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출발한 한국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기치(旗幟)인 신조에 무관심한 교회로 지나오게 되었다.  장로교회의 기본신조가 교회와 무관한 것이 되고, 심지어 목사와 장로도 신조를 참고서 정도로 치부하고 지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해방이 되고, 한국인 목사 장로들이 신학교와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까지 자라게 되고,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해도 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장로교 각 교회 공동체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을 공식적인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게 되었다.21) 그러나 신조를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용했다해서 신조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크게 달라질 수 없었다. 장로교회 신조는 아직도 여전히 필요할 때 살펴보게 되는 참조문서 정도로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장로교가 명실공히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장로회정치” 외에,  장로교의 기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이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형식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요리문답”을 채용한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들은  물론 모든 교인들이 이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알고, 믿어, 장로교인 된 것을 감사하면서 긍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럴 때 장로교회는 참된 개혁주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신앙고백”과 교회의 관계를 보는 점에 있어서 구라파의 장로교회와 신대륙 미주에 이식(移植)된 교회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왔다.  장로교회 사상 전세계 장로교회의 모 교회(母敎會)라 할 수 있는 스콧틀란드 장로교회(자유교회)는 처음부터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라 신앙고백을 함으로 입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입교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교리교육이 선행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생활은 구라파 대륙에 있는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전통과 같았다. 현재도 구미의 “개혁교회”는 이 전통을 따가 입교시 서약 중에 첫째로 묻는 것이 “신앙고백들 속에 요약되어 있고, 이 곳 그리스도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진심으로 믿습니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리와 행위에 과실이 생긴다면 교회의 훈계와 권징에 쾌히 순복하기로 약속합니까?”라고 묻게 된다.22)

 그런데 17세기에 신대륙 미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미주 장로교회는 이 전통을 버리게 되었다. 일반 신자의 입교는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몇 가지 신앙교리를 고백함으로 허락하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물려받은 값있는 영적, 교리적 유산이나, 다른 교회와의 차별성에 대한 지식 없이 장로교회 교인이 된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이런 미주 장로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 오게 되었다. 그래서 입교할 사람들에게 대한 철저한 장로교 신조교육이 없고, 그러니 입교서약에서 장로교 신조(신앙고백)의 수용여부를 묻지 않게 된다.  이런 교회에서 입교한 자는 장로교가 믿는 신조를 믿고 기쁘게 수용함으로 장로교회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신조만을 받아들임으로 실제로는 초 교파적 교인이 되고, 잠정적으로 그 장로 교회의 행정권(行政圈)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교회생활은 아무 신앙양심의 저촉을 받지 않고 이 교파에서  저 교파로 수평적 유동을 쉽게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만들고, 교회관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상대주의적 초 교파적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오늘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교회생활을 현실적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교파의 이름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기호(嗜好)를 따라 수평적으로 유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조”를 고백함으로 입교한 분들은 철두철미 개혁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교파를 초월한 수평적 유동은 거이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한국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신앙고백교회로서의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다. 지난 백년동안 실질적으로 “장로교회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로 자라온 한국장로교회는 신앙고백교회로서의 자리 매김을 새롭게 하고 개혁주의 장로교회로서의 정체를 확립해야 한다. 오늘날 ‘절대적인  진리’ 와 ‘확실한 표준’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정신은 역사적인 전통을 수호하며 정체성을 찾으려는 운동에 부정적이다. 이런 때에 고백교회를 세우려는 기도와 노력은 큰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는 고백교회가 됨으로 역사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3. 神學과 說敎의 乖離性 克服


신학교육과 목회현장과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한국장로교 세계에는 이들 간에 괴리현상이 너무 심각하다. 한국에는 일찍부터 신학 따로 목회 따로 라는 이상한 풍토가 이뤄져 왔다.  그래서 신학은 목사의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고, 목회현장에서는 신학과는 관계없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해 온 것이 상례였다. 결과 신학을 하는 신학교는 자격증을 공급하는 한 기관에 불과하게 되어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한 목사는 개혁주의 원리에 입각한 예배, 개혁주의 적 설교, 개혁주의 원리에 따른 직분적 봉사를 해야한다.  그러나 상당수 목사들은 기존의 원리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즉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새로운 것(fast food)을 찾아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새로운 소리를 듣고 새로운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인기 있는 강사가 인도하는 세미나 장소를 부지런히 찾아다니게 된다.  어떤 목회자는 이런 세미나에 몇 시간 참석하고 돌아와서 신학교 3년 동안 배운 이상의 유익을 얻었다고 하는 분들까지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목회 현장에서는 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장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본론에서는 신학과 설교와의 괴리문제만을 들어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신학은 지식을 얻기 위한 학문이기 전에 바른 설교를 하기 위한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한 사람은 목회현장에서 개혁주의 설교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탁월성이 설교에서 들어 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한국장로교회 역사는 그 초기부터 이런 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평 신학교가 장로회 신학교이면서 개혁신학과 조화를 이루는 설교를 강조함으로 개혁주의 설교의 정체성을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 한국 초대교회가 취한 알미니안 주의에 대한 신학적 포용주의 입장과 장로교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입장이 장로교 설교의 특성을 강조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결국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설교의 괴리현상의 첫걸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로회 신학교가 감리교 신학교와 다른 “청교도적 개혁신학”을 가르쳤다 하더라도 교회생활에서 알미니안 감리교와 강단교류를 함으로 자기 신학의 특성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장, 감 양교회 선교사들이 1905년에 조선에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기로 한 후, 양측 선교사들이 강단교류를 하게 되었다.  특별히 1907년의 대 부흥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심령부흥 위주의 교회로 성장을 해 오게 되어, 원래부터 심령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주관적 체험을 중시해온 감리교회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양측 선교사들은 기도회뿐 아니라  부흥회도 같이 모였다. 어린 한국 교회는 초대 선교사들이 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양측 교회의 부흥사들이 장,감 어느교회 구별 없이  초청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당시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평양의 “산정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가 감리교 목사요 신비주의자인 부흥사 이용도(李龍道)를 청하여 부흥회를 가졌었다.23)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설교의 질(質)에 대한 구별이 있을 수 없었다. 이 후 한국 장로교회의 설교는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이 배경 된 것이 아니었고, 칼빈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알미안적 성격을 띈 설교가 지배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장로교회 신학교가 가르친 개혁신학과 교회강단의 설교와의 괴리현상이 자리를 잡았다고 보게 된다.

1930년대 중반에 있었던 감리교 안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경계,  해방 후 감리교의 진보, 급진신학의 선도적 입장 때문에 양 교회의 관계는 전과 같지는 않게 되고, 강단 교류도 어느 정도 단절이 되었었다. 그러나 한번 장로교 안에 정착된  알미니안 주의적 설교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한국 장로교회의 강단에서의 심령부흥위주의 설교, 옅은 전도적 복음 설교는 지배적으로 신인협동이 강조되는 알미니안적 설교들이다.


해방 후 한국의 장로교회는 한국인 신학자들이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갖게 됨으로 선교사들이 신학을 주도하던 시대보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었다. 특별히 보수계 장로교회 신학자들은 알미니안 주의적 신학의 누룩을 제거하고 개혁주의 신학확립에 노력함으로 큰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한번 교회생활에 정착된 신학과 설교의 괴리 현상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을 하지만 설교는 여전히 알미니안적 성격을 띈 설교라는 것이다. 


개혁주의 설교는 신학교에서 익힌 모든 신학분야의 지식을 동원한 한 통합된 작품이어야 한다.  설교의 작성은 먼저 개혁주의 성경해석원리에 따른 바른 본문 주해와 교의학을 배경으로 한 교의학적 지식등 모든 신학영역이 연관되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이 장로교 신조를 통해 여과(濾過)되어야 한다. 이렇게 작성된 설교라야 개혁주의 설교가 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설교에 대한 매우 높은 견해(a high view)를 가지고 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선포된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와 그 신학과 생활의 뿌리를 같이하는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세가지 표지(標識)가운데 “순수한 복음의 설교”를 제일 먼저 두고 있다.24) 이 때문에 개혁교회에서는 신학을 한 목사만이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설교는 그 내용전체가 성경적이어야 하고, 사용되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책임 있는 개혁주의 설교를 만들고, 하기 위해 신학교에 여러 과목의 신학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구미의 개혁교회는 일반적으로  신학교와 목회현장, 신학과 설교, 설교와 생활간에 별 괴리가 없는 교회라 할 수 있다. 특별히 개혁주위 신학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Covenant)을 중심한  저들의 설교와 생활에서의 강조는 그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신자인 부모로서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책임감은 그들이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는 곳마다 기독교학교도 세우게 했다. 그래서 개혁교회가 있는 곳에는 어는 곳이든 적어도  기독교 중 고등학교가 서게 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신학과 설교의 괴리를 없애는 일이다. 이는 설교가 개혁주의적 설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  설교가 철저히 개혁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한 개혁주의 설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전에는 개혁주의 교회가 될 수 없다. 한국장로교회는 이제 개혁주의 설교를 통해  그 정체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 설교가 개혁주의 신학이 결한 너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왔다.  옅은 전도적인 심령부흥 중심의 설교(Evangelistic preaching),  알미니안적 성격의 설교가 지배를 해 왔다. 거이 모든 부흥사들의 설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을 배경한 교육적인 건설적인 설교로 교회의 질(質)을 높여야 한다. 이에 대한 모범을 신학교가 보여주어야 한다. 신학교의 경건회 강단의 설교가  목사 후보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 이들이 목회현장에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이 설교전체에 배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로서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괴리가 살아지고, 신학교와 교회가 함께 호흡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4. 改革主義 生活의 確立


한국의 기독교계는 오랫동안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는 타계적(他界的이)고, 사회개혁에 무관하며, 진보적인 교회는 현실적이고 사회개혁에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남겨왔다. 그리고 보수측 교회는 어떤 종류의 정부에도 협조적이고, 진보측은 언제나 비판적이라는 인상도 남겼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한국 개신교 세계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세계에서  뚜렷이 나타났었다.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에 바른 개혁주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비정상적인 현상이라 이해하게 된다.

참된 개혁주의 신앙은 현실과 세계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루터주의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추구하고, 경건주의의 관심이 개인 영혼의 평안을 찾는데 있고, 웨슬리안(감리교)들의 목적이 개인의 성화에 있다면, 개혁주의 신앙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같이 국가와 문화의 영역에서, 자연과 우주에서도 이루어지는데 관심을 갖게 된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장을 정부(Civil Government)에 대한 글로서 마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하다.25) 그는 경제적, 사회적, 시민적, 국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졌었다.   칼빈은 특별히 교회와 정부 상호간의 독립성과 협력을 강조함으로 후일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개발한 영역주권의 원리를 제공했다. 세상의 모든 영역이 그의 관심의 영역이었고, 삶의 어떤 영역도 무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광범한 칼빈의 신학은 영국 북미 청교도들에게 “신정이념”(神政理念, a holy commonwealth)을 심어주었고, 뉴 잉글란드에 이주 정착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경건한 정부에 의해 통치되는 경건한 백성의 땅 “새로운 가나안”의 비전을 갖게 했었다.26) 그 후 19세기말에 화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 영역에 드러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개혁운동에 임했다.27) 이 운동의 주체인물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9)는 1898년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강의(Stone Lectures)에서 전통적인 칼빈주의 교리를 다루지 않고,  칼빈주의와 정치, 과학, 예술, 미래 등의 영역을 취급함으로 전통적 칼빈주의 원리를 창의적으로 계발해내었다. 그가 가진 핵심 논제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삶의 분야에만 한정된 부분적(partial)인 것인지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우주적(universal)인 것인지에 있었다.28) 결과 그는 “영역주권”(sphere-sovereignty)개념을 발전시켜 개혁주의 교회생활건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영역주권의 개념은 구미의 개혁교회에에 일반적으로 수용되어져 건전한  가정, 교회, 학교, 사회, 국가 생활관이 수립되었다. 이 영역주권의 개념은 모든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께서 가정, 교회, 학교, 국가 등 각 영역에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주권을 부여하셨음으로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중에 협력함으로 혼돈을 가져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역주권” 사상은 미 장로교의 “프린스톤 신학교”에서도  화란 개혁교회계의 신학자로 40년간 교수했던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에 의해 가르쳐졌다. 그는 카이퍼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여러 인간생활의 형태는 각기 그들이 활동하고 자신을 들어내는 그들 자신의 영역을 가진다. 과학의 영역, 예술의 영역, 가족의 영역, 국가의 영역이 있으며 상업과 산업의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 영역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의 원리의 지백적인 영향아래 오게 되고,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거기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29) 이로서 영역주권 사상은 미 장로교회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영역주권의 사상은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 그리스도의 주되심,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이 구체적으로 행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광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힘의 공급소(power-house)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교회의 강단에서는 전도적 영적 멧세지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봉사하는 데 필요한 성경적인 방향도 분명하게 전해져야 한다. 물론 교회의 강단이 사회개혁이나 혁명을 위한 플랫폼이 되어, 국가정치의 영역과 혼돈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질적으로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 동류로 취급을 받게 된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듣고 나아가 자기가 봉사하는 세상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구현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낼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봉사하는 각종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봉사하기 위해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체를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예를 들면 개혁주의 의사협회, 개혁주의 과학협회, 개혁주의 예술협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큰 덩이에 퍼지는 누룩이 되어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고, 정치와 사회, 과학과 예술, 상업과 산업을 하나님께 복종케 하는 하나님의 선택된 봉사자들이 되어야 한다.30)


 오늘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를 말해 왔지만 세상에서의 생활이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 이원적(二元的)인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만 그리스도인들이고, 평일 그들의 생화영역에 돌아가서는 세상사람들과 다름없이 생활함을 보게 된다. 이는 교회의 멧세지가 전도중심, 심령부흥중심으로 일방적이고, 광범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중심이 되려면, 먼저 교회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세상의 공동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과, 교회에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일들이 결코 일어나지도 않고 용납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그렇지 못함을  자주 드러내어 왔다.  교회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꼭 같은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상에 부끄러움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교회가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엄하게 징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보여주는 일도 거이 없었음을 보아 왔다. 그러니 교회도 세상의 다른 이익집단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만 신자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에서 신자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신자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어느 곳 보다 정치, 산업 등의 영역에서 자주 드러났었다. 국가적으로  불의한 사건이 크게 터지고 관련된 인물들의 실상이 밝혀질 때마다 신자가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 끊임없이 나타났었다.


오늘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그 동안의 타계적, 심령적, 체험적, 기복적, 물량적인 낮은 신앙생활의 차원을 벗어나,  모든 신자들을 어느 영역에서든지 하나님 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생활하는 높은 차원으로 인도함으로 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자로 봉사하게 하는 일이다.




  5.  職分에 對한 改革主義的 理解 確立.


개혁주의 교회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경계해 온 것 중의 하나가 교권이었다. 개혁교회는 사도직의 계승을 주장하는 감독교권체제를 성경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폐기했다.  칼빈이 사역한 제네바 교회는 1941년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직분만을 성경적인 항존직분으로 보고 도입했다. 지난날에  감독이 하던 역할은 “당회”(堂會)에 돌려졌다. 지난날 감독 한 사람에게 집중된 교권이 직분자(목사, 장로)들의 치리회(治理會)에 돌아간 것이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스콧틀란든 장로교회에서는 자난 날의 감독의 역할을 “장노회”(=老會, Presbytery)에 돌렸다. 이로서 칼빈의 교회정치 이념을 따른 개혁주의 교회는 교회 안에 감독의 교주권(敎主權)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결과 개혁주의 교회 세계에는 직분에 대한 높고 낮은 개념이 살아지고, 모든 직분자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함께 봉사하는 “섬기는 자”(diakonos)라는 직분관이 정립된 것이다.


개혁주의 장로교회 정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장로직(Presbyterate)이다.  그래서 장로직의 존재여부가 개혁교회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되어 있다. 장로직을 부정하는 교회는 장로교회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장로들이 설교, 성례, 권징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는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와 다스리는 일과 함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Teaching elder)로 구분을 하게 된다.(딤정 5:17)31) 가르치는 장로는 목사로서 설교, 성례집행, 교리교육 외에 행정 권징에 봉사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행정, 권징에 목사와 동등권을 가지고 봉사하게 된다. 목사와 장로는 기본적으로 장로이다. 단지 목사와 장로의 구별은 그 직책의 다름에 있을 뿐이고 교회를 다스리고 감독해 가는 데는 동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목사 장로는 부름 받은 개 교회건설을 위해서는 동역자의 입장에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에는 일찍부터 목사와 장로의 직분을 계급적인 교권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직분관이 자리를 잡게 되어졌다. 이것도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강한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게 된다. 19세기에 미, 남북 장로교회는 목사 와 장로의 직분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논란을 했고, 이 서로 다른 견해가 양 교회에 정착되었었다.  특별히 북장로교회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핫지(C. Hodge)교수의 영향을 받았었다.  핫지는 목사를 장로와는 차원이 다른 교회에서 “가장 높은 항존직”(the highest permanent officer)으로 보았으며, 장로교를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교구 감독정치제도”(parochial episcopacy)로 생각했던 것이다.32) 남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를 기본적으로 장로(presbyter"로 보고 계급적 차원에서의 이해를 거절하는 쏘넬(James H. Thornwell)의 견해를 받아들였었다.33)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에는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강한 영향으로 목사를 장로보다 높은 “감독직”으로 보는 직분관이  관료주의적 사고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한국 문화와 조화되어 그 대로 수용되고 정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속에서 교회정치를 마련한 유럽의 개혁교회는 일찍부터 이런 계급적 교권적 직분관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경계하여 왔다. 1619년에 화란 개혁교회가 받은 “교회정치”(Church Order of Dort)는 목사와 장로 어느 한편이 다른 편을 절대로 지배할 수 없게 규정되어 있다. 개혁교회의 “교회정치”는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되고, 어떤 직분자도 다른 직분자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34)  결과 개혁주의 정치원리에 의하면 목사가 장로를 지배할 수 없고, 장로가 목사를 절대 지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개혁교회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배한다거나 한 직분자가 다른 직분자를 지배한다는 것은  교권적 스캔들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에는 교권문제가 심각한 형편이다. 교회 안에 목사의 교권, 장로의 교권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근본 원인은 교회 직분관에 있어서 일찍이 고하(高下)의 개념을 수용하게 되어, 직분에 대한 계급적인 이해를 하게 함으로 교회직분에 대한 속화를 초래한데 있다고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계급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승진을 추구하며, 지시하고 순종하는 상하 관계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목사, 장로의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가지 문제를 짚어 본다.

첫째, 지역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목사와 장로의 심각한 대입현상이다. 목사들 편에서는 목사직을 교구감독직(parochial bishopric)처럼 이해하고 장로들을 단순한 협조자로만 간주하여 장로들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고, 장로들 편에서는  장로직을 “교인들의 대표자직”35)으로 이해하여 목사의 교권에 도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목사와 장로들의 교권장악에 대한 관심은 개 교회를 넘어 노회와 총회등 개교회 밖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목사 장로들이 노회와 총회의 회장(부회장)이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고, 교회내의 연합기관 혹은 교파 연합기구의 “장” 혹은 임원이 되기 위해서도 치열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운동은 세상에 선거가 있을 때에 나타나는 부패와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다.


  교회에서 교권장악을 추구하는 이런 일들은  교회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교회에서 실질적으로 교권을 가진 분은  사람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와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성령으로  교회(신자들)에 내주(內住) 하시고, 교회를 통해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불러 세워 그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을 바로 이해하는 곳에 교권이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성경적인 개혁주의 직분관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교회는 직분을 계급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입신양명으로 생각하는 세속적인 문화의 오염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니고, 회중의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그의 피를 값으로 주고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다.36) 그런고로 교회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권위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의 법이요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섬기는 자로 평생 사셨다. 그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시고,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이 있노라”(눅22:27)하셨다. 그리스도의 종은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는 “사람이 나를 섬리려면 나를 따르라”(요12:26“고 하셨다. 이 기독론을 바로 이해하는 곳에 교권의식이 자리잡을 수 없다. 교회의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의 ”교회의 일꾼“일 따름이다.(골1:25)  교회 직분의 권위는 교회의 주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고 섬길 때에 드러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기본적으로 같은 장로요, 교회건설을 위해 직임(function)만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양자는 가르치고, 다스림으로 교회를 건설해가는데 동역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육체적으로는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을 통해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의 “직분자”로 계시면서,  목사를 통해 그의 교회에 그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장로를 통해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며, 집사를 통해 그의 교회를 돌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로서 그리스도의 큰 선지자 직분을 봉사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의 직분을 봉사하며, 집사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직을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37)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에 상하(上下)의 개념이 있을 수 없듯이, 교회 직분 상호간에 상하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원천적으로 개 교회의 봉사와 건설을 위해 부름 받은 직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시대 이후에는 여러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주신 일이 없다.  그러니 목사 장로는 부름 받은 개교회의 건설을 위해 철두철미 봉사해야 한다. 개교회를 위해 부름 받은 목사 장로가 그 개교회 밖의 노회,  총회등의 장을 사모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양명(揚名), 교권의 추구이외에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다. 물론 저런 교회의 치리회가 필요하고, 이 회를 봉사할 “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위한 봉사는 자연스럽게 추대되고 선택을 받았을 때에 할 일이다. 목사 장로의 봉사영역은 철두철미 부름 받은 개 교회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참된 개혁주의 교회가 되기 위한  미래의 과제는  기독론에 입각한 봉사로서의 직분관을 바로 정립하는 일이다.

 

6. 分裂된 長老敎會 一致의 追求

 

한국 장로교회는 해방 후 1950년대 초부터 분열이 시작된 후 계속 분열되어 현재 수 없는 장로교회 공동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분열의 주요 원인이 처음에는  교회의 권징, 신학, WCC 가입문제(교회일치문제) 등이었지만, 1970년대 말부터는 그 원인이 주로 정치적인 것들이었다고 보게 된다.

장로교회의 첫 분열은 1951년 제36총회가 경남노회를 총회 밖으로 축출함으로 일어났다. 축출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경남노회가 해방 후 출옥한 주남선, 한상동 목사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부산 고려신학교를 인정하고 지원하며, 일제시 신사참배한 죄에 대한 공적 참회와 권징을 주장해 온데 데 있었다.  당시 총회의 교권은 1940년에 설립되어 일제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쳐 온 “조선신학교”를 지원하는 분들과, 신학의 보수를 말하면서도 신사참배한 죄에 대한 공적 참회와 권징을 거절하는 중도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 두 세력은 신학에 대하여는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출옥한 충복들을 중심하여 경남노회가 주장해 오는 참회와 공적 권징을 반대하는데는 쉽게 서로 공감대를 이루게 되어 경남노회를 축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고신측 장로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결국 당시 총회가 경남노회를 축출하게 된 제일 큰 원인은 교회의 “권징”에 대한 혐오였다.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은 1953년 자유주의 신학을 쫓는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소위 “장신총회”를 떠나 “한국기독교 장로회”를 세움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장신총회 안에  자유주의 “조선신학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1948년 “고려신학교”를 사면하고 상경한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세워 총회인준을 받게 되었다. 결과 이 “장로회신학교”측과 일찍이 총회직영인정(1946)을 받은 “조선신학교”측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 양편은 실질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이미 언급한대로 고려신학교측 경남노회를 축출하는데는 협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신측 경남노회를 축출한 후에 양측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약세를 의식한 조선신학측이 분열로 행동을 옮긴 것이다. 이 분열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지라도 주요 원인은 신학문제라고 할 수 있다.38)

장로교회의 제3차 분열은 “장신총회”속에 있던 보수측과 중도 보수측이 내적인 알력을 가져오던 중 1950년 중반부터 "세계기독교회협의회"(WCC)가입문제로 서로 대립을 해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8년 소위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 일어남으로 문제가 더욱 정치화되어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소위 NAE(복음주의자협의회)측인 박형룡 측과 WCC측인 한경직측이 분열되었다. 당시 이 양편은 분열 후 모인 장소를 따라 승동측, 연동측이라 불려졌다가, 후에는 “합동측” “통합측”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1959년의 분열의 주원인은 WCC 가입문제, 혹은 교회일치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약 20년간 한국 장로교회는 고신, 합동, 통합, 한신(옛 조신) 네 교회공동체로 나뉘어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합동측에서 주류, 비주류라는 균열현상이 일어나 결국 분열을 초래하게되고, 이후 핵분열이 일어나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연쇄적인 분열로 한국에는 거이 백개에 이르는 장로교회 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핵분열을 가져온 교회가 신학적인 면에서 보수측이라는 사실은,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한국 장로교회의 질적 문제에 대해 바로 심각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 초기의 분열이 앞서 언급한대로 주로 권징, 신학, 교회관 문제였던 것이다. 이 외에 정치적, 교권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던 것은 틀림없었으나, 주요한 원인에 관하여는 어느 정도 객관적 납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후의 핵분열은 개혁주의교회 세계의 상식으로는 전연 납득하기 어려운 분열이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분열에 큰 아픔을 느끼지 않고 지속해 온데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게 된다.

첫째 원인은, 한국장로교회에 개혁주의 교회관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교회는 건전한 신학과 신조가 기반이 될 때 교회의 일치성을 유지해 갈 수 있다. 이것은 교회를 서로 얽어주는 힘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그 역사의 초기부터 그렇지 못함으로 내적으로 분열의 불씨를 안고 자라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일찍부터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신조보다  교회일치를 앞세우게 되었다.  초대 선교사들은 이미 언급한 대로 1905년에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아닌,  하나의 “조선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했던 사실에서 잘 볼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처음부터 감리교의 알미니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은 것이 결국 뒤에는 자유주의 신학도 포용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됨으로 교회 안에 분열의 불씨를 가득 안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장로교회 총회가 한국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정죄한 일이 있으나 이들에게 압력을 가했을 뿐이고 정리하지는 못했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는 선교사들은 그대로 방임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카나다 연합교회 선교사 서고도(W. Scott)가 1926년에 이미 성경에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가르침으로 그의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했으나 한국 장로교회는 해방 후까지도 그를 방임했었다. 결국 한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세력을 방임하여 교회 안에 자리를 잡게 함으로  1951년에 정통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고려신학교”측을 축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1953년의 “조신”측의 분열을 초래하게 했으며, 그 잔재인 유사보수세력으로 말미암아 1959년의 승동, 연동분열이 일어나게 한 것이었다. 개혁교회 안의 이질적인 신학의 포용은 결국 교회의 변질과 분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분열의 둘째 원인으로, 개혁주의의 강점인 교회 회중의 참여권이 무시되고  몇 몇 교회 정치지도자들이  교권을 전횡한데 있었다 보게 된다.  여기엔 교권주의, 영웅주의, 독선주의, 지방주의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해 왔다.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마디마다 언제나 몇 몇 교회정치지도자들이 주도하였음을 쉽게 보게 된다. 1953년의 “조신계”의 분열, 장신계의 1959년의 승동과 연동의 분열, 1979년의 합동측의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등 모든 분열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총회가 분열이 됨으로 전국 각 개 교회는 아무 내용도 모르고 지도자를 따라 갈라서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가 만인 제사장직, 만인 선지자직, 만인 왕직을 가지고(벧전2:9) 교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자들은 그 지체들이다.(고전12:27) 그런고로 교회에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교인들은 마땅히 그 내용을 알고 판단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건전한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의 리더쉽이란 교권을 의미하지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충성스런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상당수 정치 지도자들은 부당한 교권의 행사로 교회분열을 주도함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찢은 큰 죄 책을 지고 왔다.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개혁주의 교회관을 바로 정립하고 개혁주의 교회다운 생활을 확립하며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을 하는 일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그 신조들 속에 교회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가지고 있다.39)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 하나됨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위해 기도하셨다.(요17:21) 그런데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참된 교회 아닌 가식적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경적인 표준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말해주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標識)를 들 수 있다.40) 그것은 순수한 복음의 전파, 그리스도가 설립한 대로의 순수한 성례의 집행, 죄를 교정하고 벌하기 위한 교회 권징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는 바른 신학과 신조를 따라 생활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학과 신조가 다른 교회와의 일치는 이미 역사가 보여준 대로 분열의 불씨를 다시 안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참 교회의 표지를 가진 교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기원을 따라 사는 길이다.

그런데 교회의 일치는 교회지도자들 몇 사람의 주도와  교권의 발동으로 강행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교회는 일반신자에 대한 성령의 내주와  직분을 믿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원리에 의하면 개 지역교회가 완전한 교회(completa ecclesia)이며 보편교회의 거울이다. 그러니 교회 교권의 기본적인 좌소(座所)는 개 지역교회이다. 그러기에 교회일치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몇몇 지도자의 뜻의 강행이나, 개교회의 뜻을 무시한 노회 총회의 강행은 개혁주의적이 아니다. 상명하달(上命下達)의 방식은 개혁주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일치문제는 상당기간의 연구와 대화, 교회의 이해와 동의를 얻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럴 때 교회상호간에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참된 유기적인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여러 교회 공동체로 분열된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들끼리 먼저 합하고, 차츰 교회일치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개신교 세계에는 이 참된 교회 일치운동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교회일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신학과 신조를 전적으로 초월한 포괄적 교회일치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장로교계 내 보수, 진보측 뿐 아니라 감리교를 위시한 모든 교회를 포괄하는 일치운동이 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에 있는 다양한 교파란 선교사들이 자기들 문화권에서 이루어진 것을 문화권이 전혀 다른 한국에 이식함으로 나타난 것이니, 한국인 신자들은 교파의 모든 울을 다 걷어 버리고 하나의 민족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섭리, 신앙의 유산등이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있음을 본다. 이 운동에 한국장로교계의 보수파 교회들의  중견 목사들이 주도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보수파 진용에서 핵분열이 계속되어 온 역사를 보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동안 개신교계 진보측을 대변해 오던 “한국기독교회연합회”(NCC)와 보수측을 대변해 오던 “한국기독교회총연합회”도 이런 교회일치운동의 영향아래에서 통합을 그리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난 몇 년동안 NCC 총무가 석가탄일을 맞아 불교계에 축하의 멧세지를 보냄으로 종교 다원권에의 진입을 알렸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개신교세계에는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이상 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개신교계,  특별히 장로교계가 이렇게 터를 잃게 되고, 미래의 진로가 암담하게 느껴지는 데도 교회지도자 누구로부터도 큰 우려의 소리를 듣기 어렵다.  특별히 지나날 보수를 주장하며 WCC적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여 교회 분열도 불사했던 교회들의 지도자들 중 어떤 분으로부터도 저런 운동에 대한 우려나 경고의 소리가 별로 들려지지 않고 있다.   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보루와 파수대로 세워진 보수계의 장로교 신학교들로부터도 이에  대한 어떤 비판의 소리를 들기 어렵고, 교회일치에 대한 개혁주의적  방향의 제시를 별로 보지 못한다.  한국교회는 현재 포괄주의적 교회일치운동이라는 신드름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이 교회일치에 대한 신드롬에 대해 바로 진단하고, 개혁주의 교회관에 입각한 건전하고 안전한 교회 교회일치운동에 나서는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중대한 문제를  교회정치 현장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몇 분들에게 맡기고 침묵할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교회관을 기반으로 교회 일치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結論.


이제까지 언급한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미래의 과제는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개혁의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개혁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 장로회사에서 확인을 했다. 과거는 오늘과 내일을 위한 한 거울이 될 뿐이다.(고전10;6)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전진(progression)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살피고 미래에 개혁해야 할 과제를 찾았다.  

교회의 개혁이란 영속적인 요구이다.41) 신자의 성화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결코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교회의 개혁도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순간도 멈춰서는 안 된다.  개혁이 멈추면 침체와 변질(deformation)이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개혁해 가지 않는 교회는 이상 더 “개혁교회”라 부를 수 없다. 참된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이다.(ecclesia reformanda est esmper reformands)

과거 역사에 대한 바른 비판과 자성 없이 양적인 성장만 해 온 한국 장로교회는 현재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교회가  이 문제들을 바로 보고 치유하며 개혁해 가지 않을 때, 현재를 사는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중대한 역사의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담대해야 한다. 동역자와 형제들의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려 할 때, 사람들의 미움을 살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개혁적인 사람은 언제나 논쟁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개혁은 굳은 신앙과 강철같은 의지로 인내하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혁자는 “내가 믿는 고로 말한다”는 신앙고백적인 담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개혁은 어려운 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하신 바로 그 길로 교회를 인도하는 길인 것이다.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밝은 미래는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의 과제를 찾아,  용기 있게 임하는 오늘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에게 달려 있다.


 


 

 

1) 1999년도 통계에 의하면 장로교 합동측이 약 6500교회 교인 2백 30만명, 개혁측이 약 5000교회, 1백만명, 고신측이 약 1400교회, 44만여명, 대신측이 약 1300교회,  22만 여명이었다. 이 외의 여러 대소 장로교 교회 공동체들을 합산하면 장로교 정통 보수측 교세가 적어도 2만 교회, 5백만여 교인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2) NAPARC은 1975년에 북미에 산재한 보수 장로교회, 개혁교회 교파 교회들의 협의체로 창립되어 현재 미 정통장로교회(The Orthdox Presbyterian Church)를 위시한 7 교파 교회가 회원교회이다.  회원교회의 전 교회수는 1500교회를 넘지 못한다. 기독교 개혁교회(The Christian Reformed Church)가 선도하여 시작된 협의회이지만, 이 교회가 여 목사와 장로제도를 도입하여 개혁주의 보수노선에서 떠나게 됨으로,  협의회는 2002년 모임에서 이 교회의 회원권을 박탈하게 되어 교세의 면에서는 더 약하게 되었다. 

3) ICRC는 1982년에 세계에 산재한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쫓는 장로교회, 개혁교회가 화란에서 모여 창립한 국제적 협의체이다. 현재 22개 개혁주의 교회 교파들이 회원교회가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고신 장로교회가 창립회원으로 처음부터 가담해 오고 있다. 1997년 대회가 한국에서 모였고, 지난번의 2001년 대회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Westminster 신학교에서 모였다. 회원 교회 22개 교파 교회중 10만명 이상의 교인을 가진 교파 교회는 소수이다.

4) The Quarter Centennial Papers read before the Korea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p. 136-138 참조

5) A.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Scribners, 1919, p. 540

6) 朴亨龍, 韓國長老敎會의 神學과 傳統, <神學指南> 第13卷 3輯, 1976, 가을호, p. 16

7) S.E. Moore, An Epoch-Making Conference in Korea, The Movement for a United Christian Church,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905, December Issue, pp.690,691.

8) The Annual Minutes,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1907, p. 25

9) Allen D. C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1971, p. 167

10) 이눌서, 칼빈의 신학과 그 감화, <神學指南> 第16卷 4輯(1935) 通卷76號, pp.45,50


11) Hodge 부자(Charles Hodge 와 Archibald A. Hodge)는 Princeton 신학교에서 구학파에 속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이었지만은, Strong은 침례교회에 속한 Rochester Seminary의 교수로 학생들에게 그 자신의 보수적 입장을 뛰어 넘도록 격려했던 분이었다. 침례교 신학의 일반적인 경향이 개혁주의 신학의 “언약”사상을 받아드리지 않은 결과 유아세례를 부정함으로 개혁주의 신학과는 큰 거리를 가지고 있다. The Westminster Dictionay of Church History,Westminster Press, 1971, Strong, Augustus Hopkins 항목 참조.

12) 정암 박윤선 박사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 영음사, 1992, pp.55,,56

13) 신학지남, 제16권 제4집(1934), 통권 76호, 칼빈 특집에 남궁혁의 “칼빈신학과 현대생활” 송창근의 “요한 칼빈의 일생”, 박형룡의 “칼빈의 예정론”, 이눌서의 “칼빈의 신학과 그 감화” 라부열의 “성경주석가로 본 칼빈” 등 여러 논문이 실려졌다.

14) L.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n" pp. 20 참조

15) 이후 1937년에 함일톤(B.F. Hamilton)의 “갈빈주의”가 씨리즈로 세 번(통권94-96호)에 걸쳐 실리고, 1939년(제21권 1집)에 남궁혁의 “칼빈의 사상”이, 1940년(통권110호)에 박형룡의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가 실리고 있다.

16) 김인수,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2, 169

17) <神學指南> 제2권 제2집(1919)에 곽안련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론”, 제4권 제2집(1922)에 이눌서의 “장로교인이 믿는 것, 제5권 제2집(1923)에 ”신학변증론;상제의 예정하심과 택전하신자가 구원을 득함“, 제16권 제6집(1934)에 이눌서의 ”신경의 조직화“등이 실려 있다.

18) 곽안련, 조선야소교장로회신경론, <神學指南> 제2권 제1집, pp.80,81

19) 상계서, pp.81,82

20) 예수교 장로회 제2회 총회록(1913), p.33; 총회에 제출된 이런 보고를 접하게 된다; “총회의 명령을 의지하여 황해도 해주 경내에 전에 장로교에 속했던 교인들이 감리교회의 치리권을 받지 않고, 따로 모이는 일을 권면하여 합하려고 가서 그 사람들을 청하여 권면하기도 하고,.. 합의하도록 하여도 불복하는 고로 합하지 못하였사옵는데...그 형제들에게 감리회에게 순복하라고 편지하옵시기를 바라나인다.”

 

21) 장로교 고신이 1966년에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1969년에 받았고, 함동측이 1966년에 통합측이 1967년에 받게 되었다.

22) Reformed Church의 Liturgical Forms중 “FORM FOR THE  PUBLIC PROFESSION OF FAITH"에서.

23) 李永獻, 韓國基督敎會史, 서울 컨콜디아사, 1978, pp. 181, 185. 李龍道는 “주님과의 血管的 連結”을 주장하고,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공격한 감성적 신비주의자였다.  장로교회는 1933년 9월 제22총회에서야 그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24) The Belgic Confession, Article 29; "The true Church is to be recognized by the following marks: It practices the pure preaching of the gospel. It maintains the pur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as Christ instituted them. It exercises Church discipline for correcting and punishing sins."

25)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hapter XX,  Civil Government.

26) Joseph Haroutunian, Piety Versus Moralism: The Passing of New England Theology, (New York: Torchbook, 1970: first edition 1932P, p. 88

27) A. Kuyper, H. Bavinck 와 이들을 계승하여 칼빈주의 인생관 세계관을 발전시킨 분들을 일반적으로 신 칼빈주의자들이라 불렀다. 1940년도 출간된 “神學指南”(제19권5집)에 박형룡이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일이 있다.

28) A.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Michigan, Eerdmans, 1931/1953, p. 49

29) Geerhardus Vos,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Reprinted, 1972, Presbyterian Reformed Pub. Co., N.J. pp. 87,88  

30) Louis Berkhof, The Church and Social Problem, Grand Rapids, Edermans, 1913, p.20

 

31) 원래의 한국장로교 헌법(정치)에는 장로에는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와 "다스리는 일과 설교를 하는 장로" 두 반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목사 장로의 교회정치에 있어서의 동권을 강하게 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 개정된 고신교회의 교회정치 제28조에는 “목사(말씀과 치리에 봉사하는 장로), 교인의 대표인 장로”라고 함으로 동등권이 매우 약화된 듯한 이상을 남긴다. 그런데 1991년에 개정된 미 정통장로교회의 교회정치는 제6장에서 “목사 혹은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s)" 제10장에서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s)라고 분명하게 밝혀 양 직분간의 동등권을 부각시키고 있다.(The Standards of Government, Discipline and Worship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Revised 1988,1992)

32) Charles Hodge, The Church and its Polity,  London, 1879, pp. 94, 273 참조.

33) James H. Thornwell, The Collected Writings IV, edited by John Adger, and John L. Bibareau, Richmond 1873, pp. 115-131 참조

34) Church Ordedr of the Canadian Reformed Church, Art. 74.  이 항목은 1618,19년에 개혁교회가 수용한 Dordt 의 교회정치 항목으로 화란계 모든 개혁교회 정치에  포함되어 있다; “No Church shall in any way lord it over other Churches, no office-bearer over other office-bearers."

35) 한국장로교회 정치에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자인 장로”라고 정의하고 있다.(고신교회 정치 제28조). 한국장로교세계의 모든 교회의 정치는 장로를 이렇게 정하가호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원래의 Westminster 교회정치 원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36) 마16:18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엡1:22,23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37) H. Bavinck, Gereformeede Dagmatiek, IV,  Kampen, J.H. KOK, 1030 p.371; "Door het leeraarambt onderwijst Hij, door het ouderlingambt leidt Hij, door het diakenambt verzorgt Hij Zijne kudde; end door alle drie bewijst Hij te zijn  onze hoogste profeet, onze eewige koning en onze barmhartige hoogepriester."

38) 일제시부터 조선신학교의 김재준과 함께 협력해 오던 韓景職이나, 일제시 積極信仰團, 革新敎團등에 등에 주동인물로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극단의 길을 걸었던 全弼淳 등이 조선신학교 측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신학문제보다 정치적문제가 주 원인이었다고 본다.

39) 개혁주의 교회에 대한 교리는 장로교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31장과 “개혁교회 신앙고백”(벨직신앙고백) 제27장-35장에 잘 나타나 있다.

40) Belgic Confession Art. 29; "The true Church is to be recognized by the following marks; It practices the pure preaching of the gospel. It maintains the pur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as Christ instituted them. It exercises Church discipline for correcting and punishing sins."

 

41) D.J.van der Walt, Anatomy of Reformation, Potchefstroom University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1981, pp. 522-524 참조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3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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