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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위기와 극복 방향_허순길 박사

허순길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3. 12. 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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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위기와 극복 방향

 

|허순길 박사|

 

<허순길 박사는 고려신학교 졸업(1960년), 고려신학교 재학 시절에 고 박윤선 박사의 사서로 있었으며 화란으로 유학을 하였다. 캄펜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1972년),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였다(1972-1977년). 이후 호주 자유개혁교회의 목사로 봉사하였으며(1978-1987년)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다시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및 원장으로 재직하였고 은퇴 이후에는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편집자 주>

 

 

“성도의 교제를 기뻐하는 모임이 참된 교회의 실제”

 

 

한국개신교 역사는 금년으로 135년이 넘었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의 1/4이 되었다. 이렇게 급성장한 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다.

 

1.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1884년에 한국에 들어온 복음은 어느 나라에서보다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었다. 이웃 나라 일본은 벌써 1549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 일본 기독교인의 수가 이미 80만면 이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기독교인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는 교회가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가 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급성장하게 되었는가? 학자들은 여러 역사적 사회적인 요인을 말한다. 또는 말씀을 받은 밭이라는 의미와 관련해 우리 민족성에서 그 요인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요인들은 다 개연성의 문제일 뿐이다. 한국 민족 역시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은 민족이었다.

 

과연 한국교회의 성장의 진정한 요인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받을 만한 역사와 사회를 준비하고 사람도 준비하신다. 하나님께서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씨가 잘 자라 열매 맺을만한 밭은 친히 준비하여 주신다.

 

2. 외형적 성장에 치중한 한국교회

 

지난 1세기 동안 급성장 해오던 한국 교회에 위기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위기를 인정하고 대처해 방안을 가져야 할 단계가 되었다. 병을 일찍 발견하고 대처한다면 치유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너무 늦어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 교회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치유할 길을 찾아보아야 하겠다.

 

한국교회는 경쟁적으로 성장에 치중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장은 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데 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위하여 예배와 복음과 건전한 성도의 교제, 교회 간의 교통의 관계와 같은 교회의 본질적인 주제들이 희생되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내적인 성장을 희생시켜왔다는 말이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사도가 설립한 고린도 교회라도 내적 분열, 시기, 근친상간과 같은 도덕적인 죄를 비롯해 부활을 부인하는 등의 심각한 교회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계시록의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다섯 교회가 내적으로 큰 문제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깨어라”고 권고하셨고 심지어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여버리겠다,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교회들 위에 지금 주님께서 이런 경고를 발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 교회들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3. 교회는 복음과 말씀과 참된 예배의 실재

 

앞에서 외적성장 위주로 교회가 나아가는 것이 문제라 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는 물량주의이다. 경제적으로 한국은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9년 연소득이 19000달러이고, 2010년에는 20000달러가 될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급성장을 사회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들도 이에 뒤지지 않게 달려간다는 것이다. 물량주의의 영향은 교회당 건축에 그대로 나타난다. 교회는 온 재력을 쏟아서 심지어는 빚을 내어서라도 큰 교회당을 짓는다. 그렇게 하여 한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것이 교회 성장이라 생각한다. 건물이 더 커지고 신자의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이 교회의 성장이교 목회의 성공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성도의 모임이 교회다. 초대 교회에는 건물이 따로 없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 교회당이었다. 바울은 셋집에서 복음을 전했고(행28:23,30)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이 예배당이 되기도 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한다”(고전 16:18)고 바울은 편지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을 나누는 교제였다. 교회됨은 건물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건물로 교회를 제한하고 평가하려는 사고는 반교회적이다.

 

교회가 건물이라는 잘못된 관념은 로마교회의 외형주의 의식주의의 영향이다. 마치 대성당이 예배를 더 의미 있게 한다 생각하고 예술적인 대성당을 짓는데 로마교는 몰두했다.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다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제라는 바른 교리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개혁교회들도 대 교회당을 추구하고 의식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대성당, 대교회당이 비어있다. 건물을 관리하는 것도 부담이 되어 교회당이 관광지와 예술품전시장으로 쓰여지고 있는 형편이다.

 

모여있는 성도들, 복음 전파, 믿음을 나누는 성도의 교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연합이 교회다. 곧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다. 모인 신자들의 예배와 교제의 기쁨이 교회이다.

 

마치는 말

 

사람들이 건물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있고 말씀이 있고 참된 예배를 갈망하고 성도의 교제를 기뻐하여 모이게 된다면 그 모임의 교회가 참된 개혁주의 교회이다. 교회당은 그 본질적인 것을 위한 장소여야 하지 그 반대여서는 안 된다. “크게 좋게 지었으니 좋은 교회이다, 이 좋은 교회당에 이제 사람들을 채워야 한다,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는 논리는 교회당을 유지하기 위하여 영적인 실재가 되는 교회는 파괴하자는 논리이다.

 

교회당은 필요하다.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의 외적 성장 추구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의 씨가 잘 자라 열매 맺도록 준비하신 하나님의 밭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http://blog.daum.net/7gnak/15717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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