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현필 목사, 부천 성만교회 청년부 지도 >
시작하는 말
요즘 여기저기서 가정의 파괴 소식이 들려온다. 도대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정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왜 이처럼 사람들이 가정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인류 최초의 부부와 관련해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정의 기원은 신성한 배경을 가진다. 곧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성케 하기 위한 최초의 복된 제도였던 셈이다.
이러한 시대에 신자들의 가정관을 바로 세우기 위해 복된 제도인 가정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돕는 배필’로서 아내의 위치를 점검하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신 ‘돕는 배필’
누군가 성경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처음 만나
던 창세기 2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와를 처음 본 순간 아담은 첫 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배필로 주어진 하와에게 감동적인 시 한수를 바쳤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새번역 성경은 히브리어 원문의 운율감을 살려서 좀 더 시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사람! 뼈도 내 뼈요, 살도 나의 살!” ESV 성경도 원문에 나타난 하파얌(�ph)의 뉘앙스를 살려서 ‘마침내’(at last)라는 부사구를 첨가하여 그 상황의 절묘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담이 하와를 아내로 맞이한 순간은 아담 개인에게도 극적이었지만, 그 본문이 놓인 창세기 1-2장의 문맥 속에서도 극적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지식 나무’(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을 주신 이후 그 다음 구절에서(창 2:18) 갑자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음으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문맥의 흐름은 여자에게 주어진 ‘돕는 배필’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즉, 그것은 단순히 아담의 생물학적인 욕구 충족이나 정서적 외로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그를 자극하고 격려하여 마침내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 즉 ‘경작하고 지키라’는 부르심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돕는 배필인 여자는 아담을 도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함께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인 것이다.
2. ‘돕는 배필’의 의미
아담을 돕는 여자의 사명은 결코 아담의 그것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아니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제르 커네게드’(Corresponding Helper, 상응하는 혹은 알맞은 조력자)인데, 성경에는 이 ‘에제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17번이나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가 그 한 예이다.
하나님께 주로 사용되는 ‘에제르’라는 단어가 여자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여성에게 주어진 사명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녀가 동산에서 첫 결혼식을 올리던 날 하나님은 친히 그녀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다. 마치 신부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신랑에게 인도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은 흙으로 빚은 첫 사람 아담을 ‘취하여’(라카흐) 사역의 자리인 에덴으로 이끄셨고, 아담에게서 취한(라카흐)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로 이끄셨다. 부르심의 영역이 다를 뿐, 아담과 여자는 서로 대등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돕는 배필의 영적인 사명은 선악과를 범한 이후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샤마 콜)을 듣고 내게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창 3:17). 이 책망의 말씀은 아담이 아내의 소리를 들은 것 자체에 문제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아담에 대한 여자의 영향력이 그만큼 큰 것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 여성의 사명이 구속사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라의 분별을 듣고서 남편 아브라함은 근심했다(히) 악하게 여기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창 21:12, 샤마 콜)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샤마 콜’이라는 어구는 창세기 3장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하며, 구속사적으로 의미 있게 공명하고 있다. 즉,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른 분별을 갖고 사역할 수 있도록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사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남편과 대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의 권위와 자존감은 자녀나 남편을 통한 대리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가정 안에 담긴 교회의 원리
아담과 여자의 만남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가 일곱째 날의 안식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그 절정에 이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두 번째 창조기사는 최초의 가정, 즉 남녀가 연합(결혼)하는 순간을 창조의 절정(하이라이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배치는 매우 뜻깊은 것이다.
남녀의 연합이 갖는 상징성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다루어진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언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아담과 여자의 연합은 신, 구약 계시의 빛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때문에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나타내는 메타포로 자주 등장한다. 또,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Simply Jesus>(2011)라는 최근의 저서에서 이 아담과 여자의 연합이 첫 창조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에게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지(sign)였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담과 여자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뿐만 아니라, 세상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늘과 땅의 우주적 연합까지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엡 1: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절정의 순간을 남녀의 기쁨이 넘치는 혼인 잔치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신,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재창조의 때가 도래하였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바로 그 때에 온 피조세계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이 예표했던(창 2:2)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온 피조세계는 영원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시 16:11).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의 두 창조 기사는 의미심장한 상응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4. 영원한 회복 예표하는 가정 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은 교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최소 단위이다. 그러나 그 구속사적 의미와 상징성은 결코 작지 않다. 만약, 비신자들이 신자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개개인 신자의 어떠함 이전에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화목하고 변화된 삶의 모습 때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확인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회복 원리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가정이었던 에덴동산은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이기도 했다. 에스겔 47장은 이 성소에서 스미어 나오는 생명강수가 흐르는 곳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죽은 사해 바다까지도 되살아 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겔 47:8).
결국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교회의 거창한 사역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전에서 스미어 나오는 작은 물처럼 우리가 쉽사리 하찮게 여길 만한 일상의 자리, 즉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이혼 증가율은 OECD 국가 중에서 1위라고 한다. 또,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2002년 현재 크리스천들의 이혼 빈도수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월등히 더 높다는 통계 결과도 있었다. 지난 10년 어간에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급격히 추락한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그 상황이 더 심각하리라고 짐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바로 건강한 크리스천 가정의 회복이다.
가정의 머리인 남자(아버지)는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자신을 순복할 줄 아는 섬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또한 여성(어머니) 역시 남자와의 경쟁관계가 아닌 ‘에제르’(ezer)로서의 본래적 자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회복된 가정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신다. 회복된 가정은 세상을 향해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영원한 세계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영감의 수원지가 될 것이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여정으로 초대받은 하나님의 ‘에제르’들, 그대들은 결코 작지 않다. 여권신장보다 먼저 ‘에제르’로서 사명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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