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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인 교회의 성장관

허순길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3. 12. 1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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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인 교회의 성장관

< 허순길 박사 >

<허순길 박사는 고려신학교 졸업(1960년), 고려신학교 재학 시절에 고 박윤선 박사의 사서로 있었으며 화란으로 유학을 하였다. 캄펜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1972년),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였다(1972-1977년). 이후 호주 자유개혁교회의 목사로 봉사하였으며(1978-1987년)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다시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및 원장으로 재직하였고 은퇴 이후에는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편집자 주>

한국의 기독 신자의 숫자적 증가는 괄목할 만하다.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대 교회주의와 연결될 때에는 문제가 있다. 큰 교회당을 짓고 많은 신자들인 한 교회에 모인다. 수천 수만 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생기게 되고 이런 목회를 성공적인 목회라고 보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선망한다.

1.교제가 살아있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이다(고전 12:27). 한 몸의 의의는 지체들이 서로 알고 서로 돕는데 있다. 몸은 지체들 상호간의 관계(교제)라고 할 수 있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잘 알고 그 지체의 필요를 돕는다. 이렇게 지체들은 서로를 세우며 온 몸을 세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비유이다.

교회는 서로를 가까이서 잘 알고 돕는 교제권을 형성하는 것으로 세워져 나가야 한다. 서로 얼굴을 알고 사정을 알고 사랑할 의식을 가지고 돕는 공동체여야 한다. 초대 교회가 그랬다. 물론 초대 교회의 회집 형식을 따라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은 동일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에서 신자간의 교제 생활을 이렇게 말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히 10:24), “서로 너희 죄를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신자의 관계에서 서로 돌아보고 서로 죄를 고하는 관계는 숫자에 제한을 받는다. 수가 많을 때에는 불가능하다. 숫자가 많으면 교인들이 서로 모른다. 목사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른다. 대교회주의는 교회 교제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보면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2. 대교회주의의 문제점

목자와 양의 비유로 말하면 그리스도는 목자이고 신자들은 양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안다. 주 예수님은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요 10:14,5)고 하셨다.

목회라는 말은 주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일이다. 목사는 그 일에 전담하는 주님의 종이다. 그런데 대교회에서는 이것이 어렵다. 대교회는 전도라는 면에서 보면 목회의 성공이다. 그러나 목자가 양의 사정을 알고 돌보아야 한다는 목사의 목회라는 본질에서 보면 실패다. 대교회주의는 참된 목회의 실패를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대교회에서는 성도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된다. 서로에 대하여 알 수 없다. 교회전체로서의 교제가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끼리끼리 만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한 교회의 하나된 교통이 어려워진다. 목자도 양을 모르고 양도 양을 모른다. 서로를 알지 못할 수밖에 없는 ‘대교회’라는 조건을 고집하는 성장은 교회에서의 성령의 자유로운 교통을 방해한다.

교회는 서로를 알고 교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사이의 관계가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들이 성령의 교통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반대의 방식으로 성장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교회는 목사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이름까지도 다 알 수 있고 교인들이 서로를 알 수 있는 크기가 이상적이다. 곧 성령께서 인격 관계 속에서 교통하게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규모의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대교회주의는 교회간의 연대관계에서도 해가 될 수 있다. 대교회주의는 자연히 개교회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첫째, 대교회주의의 본성상 다른 교회들과의 경쟁 관계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태생적인 성격이 개교회주의를 만든다. 둘째, 이미 대교회가 되었을 때에는 다른 교회의 협력이 없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개교회주의의 입장에 서게 된다.

또한 대교회의 능력은 작은 교회와 상하의 관계를 형성하기 쉽다. 대교회는 풍부한 재정으로 작은 교회를 도울 수 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작은 교회 목회자는 자연히 대교회를 선망하게 될 수 있고, 그런 선망을 작은 교회의 교인들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사를 가게 되거나 어떤 변동이 생기면 선망하던 대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대교회는 성장하고 소교회는 점점 작아지는 현상이 생긴다.

3. 성경적인 교회 성장관

우리의 교회관이 바로서야 한다. 잘못된 교회관 때문에 일어나는 횡적인 이동을 막아야 한다. 대교회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대교회주의의 약점을 보완해가야 할 것이다. 성도의 교제가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감으로써 성령의 교통을 방해할 수 있는 대교회의 단점을 최대한 줄여가야 할 것이다.

한편 작은 교회는 이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신자들 사이에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 죄를 고백하는 성령 안에서의 풍성한 교통을 추구해야 한다. 복음의 말씀으로 교회가 하나가 되고 교회 전체가 연합할 때에 주님께서 신자들을 보내주실 것이다.

복음 전파와 건전한 교회의 성장은 우리의 사명이다. 하지만 교회가 숫적으로 성장한다고 해도 대교회를 목표로 하거나 선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교회들은 성도의 교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될 만큼 교인의 수가 많아질 때에는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을 유지하기 위하여, 곧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성령께서 교통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심각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치는 말

수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은 교인 수가 성도의 교제를 방해할 만큼 많아질 때 교제가 가능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교인 수를 나누어 다른 한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장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이 살아있고 점점 풍성해지는 교회이다. 성령께서 성도 사이에 활발하게 교통하시도록 길이 열려 있는 교회, 복음의 말씀과 성도의 교제의 관계가 힘차게 살아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에 주님은 자기 백성을 보내 주실 것이다. 그것이 대교회가 되게 하기 위함인가? 아니다. 성경으로 계시하신 그 교회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살아있는 참 교회, 성도의 교통으로서의 교회를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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