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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정' 논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 - 김광열(총신대)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4. 3. 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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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원의 서정에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준다. 구원의 서정의 교리에 치우치다 보면, 인간의 논리와 노력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선택-부르심-믿음/회개-칭의/죄사함-성화의 구원의 경륜 전과정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심층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도록 하기 때문에 늘, 긴장과 새로움이 공존하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구원의 전과정에서 종말론적인 배경하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구원의 서정은 질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므로 의의가 있다.



'구원의 서정' 논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

- '구원의 서정' 논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의 신학적 의의


김광열(총신대)


I. 서론


기독교의 구원과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구원과의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자가 초월자의 전적이고 주권적인 역사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과 공덕이 그 구원의 근거로서 간주된다는 점이다. 기독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지만, 칼빈주의의 입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역사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란 아무런 근거나 원리 없이 아무렇게나(arbitrarily) 신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구속사역에 기초하여,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늘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적용시키실 수 있게 하는 근거와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풍성한 축복들이 아무리 다양하게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개개인들에게 경험되고 있을지라도, 그 축복들의 원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져야하는 것이다. 존 칼빈 선생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됨을 알 수 있다(행4:12).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부분들을 다른 데서 찾아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을 알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 분의 것'(고전 1:30)이므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찾는다면, 그것들은 그분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힘을 바란다면, 그것은 그 분의 통치 안에 놓여 있다. 순결함은 그분의 잉태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온유함은 그분의 탄생에서 나타난다...우리가 구속을 찾는다면, 이는 그분의 고난당하심에 놓여 있고, 석방은 그분의 정죄 당하심에서, 저주의 면제는 그분의 십자가에 놓여 있다(갈 3:13). 만족이라면, 그분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결하게 하심은 그분의 보혈에서, 화해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지심에서,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분의 무덤에서, 생명의 새로워짐은 그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안에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넘친다. 그러므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샘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양을 채우자.


오늘날 현대 교회의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신자의 주관적인 체험의 차원에서만 머물게 되기 쉽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열매이며, 따라서 그 분 안에서 찾아지고 누려져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 차원의 종교적 체험들 중의 하나로 전락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신자들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먼저 있었다(엡 1:3; 고전 1:30). 따라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간을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총들을 설명하는 '구원의 서정' 논의에 있어서, 그러한 관점이 간과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먼저 '구원의 서정'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들을 정리한 후에, 전통적으로 논의되어온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가 지니는 문제점들을 지적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문제제기 내용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구원의 서정 논의에 있어서 지니고 있는 신학적 의의들을 몇 가지 제시해 보려고 한다. 결국, 본고에서 필자는, 신자의 구원의 원천이 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자의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는 모든 국면들 속에서 핵심적인 주제와 초점이 되어야한다는 -앞에서 지적된-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II. "구원의 서정" 논의


가) 정의/ 논의의 역사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속에서 찾아지는 객관적인 구속 사역의 역사적 성취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객관적으로 성취되어진 구속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찾아진다. "구원의 서정(혹은 순서, ordo salutis)"이란 바로 그 후자의 역사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관한 논의를 말한다. 즉, "구원의 서정"이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을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적용하실 때에, 주어지는 그 여러 가지가 영적 축복들 사이의 내적 일관성과 질서에 대해 논하며, 체계적인 서술을 시도하여 정리하기 위한 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의 출발은 사실 성경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질문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 것"을 중생으로 인한 회심의 역사라고 볼 때, 그러한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는가? 라는 물음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관에 관한 중요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서정과 관련된 질문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가장 공식적으로 이 문제가 제기되었던 시기는 중세 로마 가톨릭신학에서였다. 중세 신학은 구원을 성례와 연관하여 설명하였으므로, 성령님께서 구원을 신자에게 적용시키시는 사역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7성례"에 제한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례주의적인 구조 속에서, 칭의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개념이 아니라, "과정적 칭의"의 개념으로 설명되었다. 즉, 세례를 통해서, 원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세례받은 신자는 고해 성사를 통해서 세례 이후의 불완전한 애통(contrition)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해 가야하며, 따라서, 칭의란 미완성적인 성격을 띄게되고 성화와 한데 뒤섞이게 되고 만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관한 중세 가톨릭의 그러한 혼란을 정리하여, 칭의란 법적 관계상의 변화로서, 내적 성품의 변화를 가리키는 성화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의 개념이 처음으로 발전되었던 때는 18세기의 개신교 스콜라 신학에서였다. Dr. Ferguson에 의하면,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 용어는 공식적으로 1724년에 F. Buddeus에 의해서 자신의 책인 <Institutiones Theologiae Dogmaticae>에서, 그리고 1739년에는 Jacob Karpov가 자신의 책인 <Theologia Revelata Dogmatica>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설명된다.


나) 논의의 필요성

그러면, 과연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는 필요한 것인가? 먼저 우리는 이 주제를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에 관한 논의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이 논의의 내용 속에는, 영적 축복들 사이의 내적(논리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연관성과 질서에 관한 설명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이 논의가 지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요성들을 지적해볼 수 있다.


사실, 가장 쉽게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 중에서, 우리는 '구원의 서정에 관한 사변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그 보다 더 중요한 복음 전도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간과하는, 스콜라주의적인 오류'라는 지적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음 전도와 구원의 서정의 이해의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의 서정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무의식적으로라도- 표출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했던 갈 3:2의 경우라면, 율법의 행위를 중생과 회심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이의 전도 방식과 그렇지 않은 자의 전도 방식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령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신자로 하여금 좀 더 균형 있는 신앙생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세 가톨릭의 칭의관은 결국 중생한 이후에도 신자들로 하여금 불완전한 칭의를 소유할 수밖에 없게 하므로, 확신 있는 신앙생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과 함께, 칭의의 과정도 계속되는 것이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자는 예수 안에 있는 참 평안에 이르지는 못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로 하여금 성령님의 일관된 사역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전도를 포함한 신앙생활의 여러 영역들 속에서 성경적인 질서를 회복하며, 효과적인 영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게 해준다.


III.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해 제기된 지적들

  

먼저 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구원의 서정 논의를 제출하고 있는 세 명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살펴본 후, 그 지적들에 대하여 요약하고 간단히 평가해 보려 한다.


가) 개혁 신학자들의 지적들

먼저, 우리는 A. A. Hoekema가 지적한 내용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하나의 극단적인 입장을 미국의 개혁 신학자인 J. Murray의 가르침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Murray의 설명은 그의 책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Murray는 "구원 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에 대한.....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Hoekema는 Murray가 그러한 성경의 이유들을 제시한 후, 그러한 "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의 순서로 정리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나서, Hoekema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현재 조직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이,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서는 항상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생을 가리키는 "팔링게네시아"라는 단어의 용례들을 언급하는데, 신약에서 사용된 두 번의 경우들 중에서, 디도서 3:5절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으나, 또 다른 구절인 마태복음 19:28의 경우에서는 '만물의 새로워짐'을 말하는, "우주적 중생"(cosmic regeneration)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Hoekema는 구원의 순서를 말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토대로서 사용되는 로마서 8:30절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 구절의 목적들 중에서, 구원의 순서를 말하기 위한 것은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요,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축복의 풍성함을 묘사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러한 지적은 G. C. Berkouwer에게서도 발견된다. Berkouwer는 롬 8:30의 구절에는 "성화"의 항목이 빠져 있음을 언급하면서, 그 구절에서 우리는 "은혜의 방식의 순서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하지 말고, 그 은혜의 역사의 부요함이 찾아져야 된다"는 R. Seeberg의 말을 상기시켜 준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Berkouwer의 글 속에서도 몇 가지의 근본적인 지적들이 발견되는데, 그는 구원의 서정논의에 대한 과거의 비판들을 소개하면서, 그 논의가 하나님의 은총의 부요함을 드러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먼저 그 논의가 교의적 쇠퇴기 혹은 스콜라주의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에 전개되었던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신학이 사변적이며 합리적인 경향 속에서 점차적인 조직화의 과정 속에서 전개되었던 시기에 제시된 것임을 상기시켰다. 특히, 구원의 서정이 구원의 적용을 가리킨다고 볼 때, 그것은 구원을 주관적인 면과 객관적인 면(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로)으로 나누어서 서로 대칭적으로 이해하려는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되는 점에서 비판받아 왔다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의 부요함에 대해 관심하지 못하고, 그 보다는 중생한 인간의 삶의 여러 국면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그러한 문제를 지니지 않았었는데, 즉 그들은 구원의 적용의 문제를 '은혜와 믿음'의 단순한 범주 안에서 이해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성경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서정"이라는 내용 속에, 오직 은혜와 믿음만을 고려하였다고 Berkouwer는 주장한다. 루터의 경우도 같은 마음이었으나, 그의 소요리 문답서에서 "성령님은 복음을 통하여 부르시고, 조명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함으로서, 후대의 발전을 자극하였고, 결국 구원받는 과정 속에서의 인간 영혼에 대한 좀더 조직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Berkouwer는 루터를 다소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요약하면, 잘못된 "구원의 서정"논의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의 부요함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러한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의 과정 속에 서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구원의 "순서"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심하게 됨으로서, 결국 구원은 인간의 사역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에만 전적으로 의존되는 구원을 가르치는 종교 개혁의 정신은 폐기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서정이란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의 모든 과정들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길들은 매우 부요하고 다양하므로, 그것들 모두를 고정된 척도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Berkouwer는 말한다. Bavinck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는 구원의 서정이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은 없으며,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을 드러내줄 때에만 의미 있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Berkouwer는 "구원의 서정"을 "그리스도의 은혜가 얻어지는 방식이며,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과 그 뒤를 따르는 사역들"이라고 설명한 칼빈의 글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결코 그의 시선을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믿는 인간' 쪽으로 옮기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Berkouwer의 핵심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는 "성경의 단어들과 순서들로부터 하나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로마서 8:30, 고린도전서 1:30; 6:11, 디도서 3:5 등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바울 서신들 속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다양성은 하나의 직선적 서정으로서 고정시키려는 시도를 무색케 한다는 것이다. 만일 '구원의 서정'이 인과적 연관성 안에 있는 일련의 요소들의 직선적 배열을 의도하려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에게 던져진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개혁신학은 언제나 믿음을 단지 구원의 길의 한 단계로만 간주하고, 그것의 중심적이고 포괄적인 특성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들에 대해서 항거해 왔음을 Berkouwer는 강조하였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R. Gaffin. Jr. 박사에 의해서도 제기된다. 그는 바울 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여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그 연구 속에서 Gaffin 박사는 바울의 구원론적 구조를 분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 자신의 칭의, 양자, 성화, 그리고 영화의 사건으로서 바울에 의해 해석되고 있으므로, 그 사건은 곧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사건이 된다고 밝혔고, 더 나아가 은혜 언약의 대표자 되신 그 분과 연합한 신자들의 구원의 기초가 됨을 말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구원론적 의의를 밝히는 가운데, 그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 분과 함께 한 부활"의 역사에 동참케 되므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으로 바울의 구원론은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에 이르러서, 그러한 바울의 부활적 구원론(resurrection-soteriology)의 구조는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정리하면서, 전통적인 ordo salutis 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첫째로, 바울의 구원론 논의에서 충만하게 드러나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전통적인 ordo salutis 논의에서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곧 종말론적이 사건이며, 구원적 체험이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그의 부활로 주어진 새 창조 시대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연구 앞부분에서 제시한 바대로- 실현된 부활과 앞으로 실현될 부활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존재 이해가 전통적인 논의에서는 결여되고 있다고 했다.


둘째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의 하나는 칭의, 양자, 성화와 같은 영적 축복들을 각각 구분되는 행위들로서 간주한다는 사실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개핀은 자신의 논문의 앞부분에서의 논의들을 기초로 하여, 바울은 그것들을 구별된 행위들로서 간주하지 않고, 단일한 행위의 구별된 국면들로서 해석하였다고 주장한다. 결국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의 구조는 그 모든 영적 축복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연결되어진다는 설명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셋째로는, 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에서 말하는 "중생"의 개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디도서 3:5에서 사용된 "중생"이란 용어는 어의적이며 구문론상의 난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중생에 대한 교의학적 기초를 제공하기에는 미흡한 근거성구라고 지적한 후, 그 용어가 신약에서 유일하게 다시 사용된 경우인 마 19:28의 경우에 그것은 분명하게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갱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엡 2:1절 이하의 구절에 대한 자신의 책 앞부분에서의 논의에 근거하여, 딛 3:5에서 사용된 '중생'은 바울의 부활적 구원론의 한 예속적 요소에 불과함을 지적했다. 즉,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종말론적 구원역사 체험의 한 국면으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 평가와 요약

우리는 이제까지 성령님의 구속 적용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순서적 배열"을 시도하여왔던 전통적인 ordo salutis 논의에 대해 제기된 지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지적들 모두를,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를 제시하는 각각의 신학자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Berkouwer가 구원의 서정 논의는 교의적 쇠퇴기랄 수 있는 18세기 스콜라주의의 산물로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비판가들인 Hoekema나 Gaffin이 또 다른 각도에서 지적하고 있는 Murray나 Kuyper, Hodge, Shedd 등의 신학자들에게도 Berkouwer가 비판한 내용들을 모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를 전개했던 이들이 "어떤 논리적인 순서만"을 추출하려하였다고 간주하면서, 성경의 단어들과 순서들로부터 하나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한 (영어권 전통에서의) 고전적인 사례로 볼 수 있는 William Perkins의 <황금 사슬(A Golden Chaine)>의 내용 속에서도, 우리는 단순히 논리적인 순서로만 논의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 제1단계인 유효적 소명의 범주 안에서, Perkins는 오늘날 이해되는 중생의 개념에 해당하는 사건을 비롯하여,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같은 개념들을 한데 어우러지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단계인 성화를 논하는 부분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나 '기도', '순교', '구제' 등과 같은 매우 실천적인 주제들을 포함하여 논의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하여 앞에서 지적했던 사항들이,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각각의 신학자들에게 획일적으로 다 적용되는 것으로는 말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에 있어서는, 그 지적된 문제들이 그 지적된 이들의 논의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Gaffin 교수가 지적한 내용 중,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서 영적 축복들이 각각 구분되는 행위들로서 간주되고 있다는 지적은 구원의 서정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를 체계적으로 잘 제시해준 신학자들 중의 하나인 J. Murray의 글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내용이다. 앞에서 Hoekema의 지적들을 정리했던 부분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Murray는 성경의 교훈의 근거 위에서 추구되는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구속 적용의 역사 속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화 등과 같은 영적 축복들은 "모두 구별되는 것이며,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다른 용어로 정의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설명은 물론 "하나님께서는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라"는 명제 아래서, 그러한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구속적용의 역사는 그 분의 언약과 지혜 안에서 어떤 일정한 질서 아래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제출된 것이었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만이 제시되고,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흐름들, 예를 들면 신약 시대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의 관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주지 못함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놓치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Gaffin교수의 지적과 같이, 신약 시대에서의 구원이란 곧 종말론적인 사건이며, 생동감 넘치는 "already/not yet"이라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 방식은 그러한 측면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Ferguson의 지적과 같이, Perkins의 '황금 사슬'의 접근 방식을 일방적으로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공정하지 못하게 취급하는 것은 문제이겠으나, 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이 올바르게 제시되거나 해석되지 못할 때 그의 논의를 통하여 "불건전한 주관주의(unhealty subjectivism)"로 떨어지거나 혹은 신약적 종말론적 특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에서는, 하나의 영적 축복은 또 다른 축복과는 구별되며, 논리적으로 전자의 축복 다음에서야 후자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은 '직선적인 구조'라는 평가를 받게될 수 있으며, 그러한 접근 방식은 원인과 결과라는 사슬 형태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가운데, 구원의 풍성한 축복들로부터 그리스도를 분리시키게 될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앞에서 Hoekema나 Berkouwer가 공통으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전통적인 논의에서 증거구절로 제시되어온 롬 8:28-30의 본문은 구원의 인과적 순서만을 말하려는 본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로 제시되는 직선적 구조의 방식, 즉 선택은 중생의 원인이고, 중생은 믿음의 원인이며, 믿음은 필연적으로 성화를 가져온다는 방식의 관점만으로 신자의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에서 중생, 성화, 영화, 칭의, 양자 등과 같은 구원의 모든 축복들은 각각 종말론적인(already/not yet) 구조 속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IV. '구원의 서정' 논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의 중요성


앞에서 제시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한 지적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물론 전통적 논의 방식의 정당성도 부분적으로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가 결코 "시간적인 차원에서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논리적 일관성"의 관점에서 전개된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부분에서 확인한 Murray의 지적과 같이,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정한 질서 아래서" 진행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신학(조직 신학)의 임무들 중의 하나는 바로 "신학의 내용들을 질서 정연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돕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므로, 우리는 중생, 회심, 칭의, 양자, 성화 등과 같은 구원의 서정에서 제시되는 영적 축복들이 아무렇게나(arbitrarily) 주어지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서적 논의"의 방식만이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영적 축복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전부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결국 성경적 관점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미흡한 설명에 머물게 되고 만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령님의 구속 적용의 역사를 제시함에 있어서, "(논리적) 순서적 논의" 이외의 또 다른 중요한 관점들 아래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기되었던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에 대한 지적들도 바로 이러한 방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분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서 제시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구원의 영적 축복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축복들을 구조화함에 있어서 성경의 관점들을 균형 있게 제시해줄 수 있는 어떤 성경적 "틀"(framework)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다양한 영적 축복들 사이의 논리적 구별과 순서를 제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와 아울러 그 모든 영적 축복들이 신자들의 실제적 삶 속에서 한데 어우러져서 경험되고 적용되는 사건임을 인식케 해주는 "구조틀"이 바르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

구원의 서정 논의에 있어서, 그러한 "어떤 성경적 구조틀"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본다. Ferguson교수는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그 분 안에 살아가도록 유지시키는 사역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한 점에서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적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영적 열매들(축복들)을 구조화하는 성경적인 구조틀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또한 칼빈 선생에 의해서도 채택되고 있는 접근 방식이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의 출발 기조를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도 같은 방향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구원의 전과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은 처음부터 그 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 속에서 구원의 축복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연합의 개념은 풍성하게 제시되고 있다. 구약에서 신자와의 연합을 뒷받침 해주는 개념들로는 백성들의 대표자로서 대속죄일에 사역했던 대제사장이나 이사야 53장에서 나타나는 '고난당하는 종'(suffering servant), 그리고 창 2:24에서 나타나는 한 몸을 이루는 부부 관계의 모습 등을 들 수 있으며,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개념인 것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세상의 어떤 조직체들의 결속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들을 지니는데, 현재의 논점과 연관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성격들만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이 연합은 전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통과하셨던 모든 과정들이 의미하는 바들을 이 연합을 통하여 함께 소유하고, 그 축복들에 참여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이 그와 연합한 모든 신자들의 죽음의 사건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2:6이나 고린도전서 15:22 등의 말씀 속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이 그와 함께 이미 살리심을 받았으며 또 앞으로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그와 연합한 신자들의 부활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영화의 축복도(골 3:4, 살전 4:16-17), 칭의나 성화의 축복도(고전 1:30)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임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걸어가셨던 모든 과정들이 함축하고 있는 영적 의미들은 그 분과 연합한 모든 신자들에게 공유케 되고 나누어지는 영적 축복들이 된다는 의미에서 "전포괄적인" 성격의 연합인 것이다.


또한 이 연합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진 종말론적 새시대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우주적인 새로운 창조의 역사 속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종말론적 새로운 창조의 나라에로의 진입은, 바울 신학이 제시하는 신약시대의 종말론적 특성 아래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바울 신학의 특성 속에서 이해되야 한다. 신약의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아직 성취해 가야할 부분이 남아있는 것과 같이, 신자들은 중생시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소유케 되었으나, 또한 재림시에 그 연합의 온전한 성취가 주어질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니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성격들을 염두에 두고서, 그 교리가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는지 살펴 보려한다.


나) 연합 교리의 중요성

먼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분에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의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1) 불건전한 주관주의의 위험성 극복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앞에서 "나)평가와 요약" 부분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불건전한 주관주의"의 위험성을 배제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이 처음부터 그 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이후의 모든 과정들도 그 분과의 연합과 교제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게 될 때, 그것은 신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의 축복들을 분리시키거나 혹은 그 결과로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구원의 서정 속에서 나타나는 영적 축복들의 체험에만 관심하게 되는 "불건전한 주관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논의되었던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들의 설명들이 신자들을 반드시 "불건전한 주관주의"에로 떨어지도록 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W. Perkins의 구원의 서정 논의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모델은 그의 "사슬 모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불건전한 주관주의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J. Murray의 경우도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 모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적 설명이 충분하게 제시되지 않고, 그 연합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을 지적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Gaffin의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모든 구원의 서정의 요소들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되고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2) 바울의 구원론의 특징인 '종말론적 긴장' 회복

다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델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에서 약화되기 쉬운 "종말론적 긴장"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을 사는 신약시대 성도의 삶의 중요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로 표현되는 종말론적 긴장의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약시대의 종말론적 삶의 특징으로서의 역동성이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논의에서는 희미해질 수 있다. 전통적인 '사슬 모델'의 구조 속에서 신자는 중생의 역사가 완결된 이후에야 믿음과 회개와 같은 회심의 역사를 경험케 되는 것으로(비록 논리적으로 일지라도) 생각하기 쉬우며, 다른 영적 축복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구원의 서정의 각 단계들이 구별되어 제각각 경험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 각각의 요소들 중 어느 한 요소가 시작되어 완결되기 전일찌라도 또 다른 요소의 진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줌으로서, 그 전자의 요소도 여전히 미래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긴장 안에 놓여있게 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특성은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니는 중요한 성격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미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또한 재림시에 온전히 주어질 그 날을 바라보게 되는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연합에 기초하여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델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될 때- 같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를 확보해 준다.

구원의 서정논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방식으로 전개될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논의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구원의 모든 축복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해 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영적 축복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성격들 중, "전포괄적인 성격"이 있다고 지적했던 것은 그 연합 속에 구원의 다양한 축복들이 연결되어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는데, 후크마 교수의 지적 속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전과정의 진행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밝혀주는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는 신자가 "새롭게 살아나는" 사건으로서의 중생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이 주어질 때 발생되는 것이며,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신자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이시라면(고전 1:30), 신자의 거룩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성도의 견인을 이루는 것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이고, 골 3:4을 근거로 영화의 축복도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구원의 서정 안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영적 축복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통해서 설명되어질 때,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조를 형성하게 되며, 따라서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존재는 더 이상 첫 아담의 행정 안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더 이상 육체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으며,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다. 그 대신 그는 마지막 아담의 언약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의의 통치 아래로 들어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이며, 달리 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과거(그의 죽음, 부활, 승천, 그가 성취하신 구속사역의 모든 단계들의 의미들)에 의해서 영향받고 있는 존재인 사실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를 통하여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분과 연합됨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그 분의 과거에 의해서 방향지워진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제시되는 구원의 서정 논의는 또한 그 논의들과 관련되어 제기되어왔던 다른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준다.

개신교 신학의 흐름 속에서 씨름해야할 영원한 과제들 중의 하나는, "오직 믿음"이라는 개신교의 원리를 "행함"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야고보서와 바울서신 사이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갈등은 일반적으로 그 둘 모두가 "행함으로 표현되는 산 믿음"을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서 말하려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그에 대한 답이 제시되곤 한다. 혹은 이 주제는-물론, 완전히 동일한 논제는 아니지만-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관한 논의와도 연결된다. 물론, 일반적인 결론은 그 둘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성을 지닌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의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성화가 칭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 연결성을 확보하는가 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나 칭의를 진공 속에서 제시될 수 있는 주제로 보지 않고, 그 믿음의 소유자 혹은 그 칭의함을 받은 사람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소유자, 칭의함을 얻은 자는 그 믿음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 분과 연합된 자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Gaffin의 말과 같이, 칭의와 성화의 "두 행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단일한 행위의 각기 다른 양상들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로서, 그 연합을 통하여 주어지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부활"의 축복 속에서 칭의의 역사와 함께 성화의 역사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그 연합 속에서 죄 사함 받고 칭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연합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는 죽음을 겪었으므로(롬 6:1 이하),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또한 그와 함께 살아나 하나님께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V. 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논의 방식에서 다소 멀어져왔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서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자의 구원역사가 진행되는 모든 국면들 속에서 핵심적인 주제와 초점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에 대한 재확인 작업인 것이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논의에 대해 제기된 지적들은, 그 구원의 서정 속에서 제시되는 여러 가지 영적 축복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라기보다도, 그 축복들을 성경적인 관점들로 균형 있게 제시해줄 수 있는 "틀(framework)"을 좀 더 성경적인 방식으로 세우려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델을 통하여, 구원의 다양한 영적 축복들을 제시하게 될 때, 우리는 전통적인 논의 속에서 야기될 수 있는 '불건전한 주관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으며, 간과되기 쉬웠던 바울의 구원론적 특성인 '종말론적 긴장'의 성경적 관점을 회복하고, 결국 구원의 서정논의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을 회복케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모델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과 같은, 구원론 논의에서의 영원한 과제들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안목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가 인정될 수 있는 제안이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고 소유되는 "영적 축복들"에 대해서, 더욱 충분히 설명하고 정리해 주어야할 과제가 주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작업의 좋은 사례들 중의 하나가 바로 Gaffin 교수가 제안한 "부활적 구원론"의 함축적 의미들을 좀 더 일관성 있게 제시해나가는 일이라고 사료된다. 그러한 작업이 가져올 실천적인 유익들 중의 하나는, 열매들에만 집착하는 신앙으로 왜곡되어 가는 한국교회의 신앙 형태들을 그리스도와의 교제, 연합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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