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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학서론3-이성의 역할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2. 6. 2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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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서론3-이성의 역할

 

지난 주 까지 계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계시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오늘 강의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1.나는 2.하나님을 3.믿는다. 1번은 신앙의 주체에 관계된 단어입니다. 2번은 신앙의 대상과 내용에 관계된 것이고 3번은 신앙의 방법과 목적에 관계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1번과 3번은 무엇이 전제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까? 2번입니다. 1번과 3번이 강조되면 2번이 무엇이 되던 간에 열심히만 믿고 뜨겁게만 믿으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믿어도 아무 상관없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열심히 내가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님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그 믿음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위의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대상과 내용인 2번입니다. 2번이 바로 되고 나서야 1번과 3번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번인 나에게 2번과 3번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은 무한자이므로 유한자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면 배울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고 믿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신학의 원리는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1번과 3번을 강조하는 것이 자유주의이고 신비주의입니다. 신앙의 주체인 자신의 종교적 경험이 신학의 원천이라고 말한 슐라이어마허의 말을 기억하시죠? 내가 강조되고 내가 믿는 믿음의 강도나 방법이 강조되면 성경적인 신앙이 되지 못하고 종교적 체험이나 지성의 한계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언제나 신앙의 원리와 신학의 원리를 계시로 봅니다. 계시 가운데도 일반계시는 죄의 영향으로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없고 죄를 처리하고 오시는 특별계시인 성경만이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주 까지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러면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1. 이성과 이성의 역할

 

1)이성이 무엇인가?

왜 끊임없이 이성의 문제가 신학에서 대두되는가 하면 계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기관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어떻든 인간이 그것을 감각하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을 이성을 통해서 하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이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성 자체에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해 이성이 어떻게 고장이 났는가? 이성이 그렇게 고장이 나고 문제가 생겼다면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처럼 신학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2)죄로 인한 이성의 타락

폐쇄성과 합리성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어떤 내용을 인식할 때 자신이 경험한 것만 인식하려고 하고 공간과 시간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인식을 못하는 폐쇄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이해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경험한 것 중에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만 인식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경향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며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 계신 분인데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범위 안에서만 인식을 하려고 하는 문제가 이성에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계시된 내용이 초월이라도 그냥 초월로 오면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성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담아서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이성이 자신이 잘나서 계시를 감지했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큰 것이죠.

 

이성은 계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기능이라는 점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그 기능이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합리성과 폐쇄성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보낼 때 배로 실어보냈다고 칩시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물건입니다. 배는 무엇입니까? 운송수단이죠. 운송수단이 없으면 물건을 보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배의 중요한 기능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배가 물건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의 원리라고 할 때 그 계시를 운송하는 수단과 인식하는 수단이 이성이라면 이성이 중요한 기능은 하지만 이성이 계시의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이성이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이성이 계시를 전달하고 인식할 때 곱게 전달하지 않고 합리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조미료도 치고 또 뭘 추가하고 빼기도 해서 전달하고 받는다면 이 물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이성이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신학의 원리는 될 수 없지만 신학의 보조수단이 되는 이성의 역할

그러면 아예 이성을 배제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떻든 계시는 물건이 아니고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하나의 사상이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을 신학의 원리로 인정하지 않지만 신학의 보조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기억하고 그 문제를 극복하면서 신학의 방법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이성은 불신자의 이성이 아니고 중생자의 거듭난 이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자의 거듭난 이성도 타락의 영향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성경계시의 빛 아래서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4)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이성이 신학의 방법으로도 사용되면 안 된다고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극 보수주의인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는 이성은 계시를 운반만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해석은 금지하라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가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부분의 더 많은 풍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A라는 내용은 A로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이성이 계시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계시를 운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반하는 과정에서 이성이 계시를 합리성과 폐쇄성이라는 자신의 가위로 이것은 받을 것, 이것은 못 받을 것 이라고 자신이 제단을 하는 것입니다. (예/부활-기절, 물위를 걸은 것-둑을 걸었던 것, 안개가 끼어서...멀리서 보면....그렇게 해서라도 이런 기록을 한 것은 예수님의 고상한 정신과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이미 신학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창조하고 만들고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인본주의 신학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둘 다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는 신학의 방법으로 둘 다 이성에 대한 극단적 오해이죠.

 

5)계시의존적 방법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성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계시의존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끊임없이 합리성을 가지고 그 범위 안에서만 인식하려고 하는 폐쇄성을 부작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폐쇄성을 자꾸 열어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만큼 열어야 합니다. 즉 말씀계시로 나의 고장난 이성이 어떤 지식을 합리성과 폐쇄성을 동원해서 내 취향대로 고착시키려고 하는 태도를 끊임없이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범위로 인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어도, 더군다나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는 것만큼 그것을 열어서 믿음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이 말씀을 제단하도록 하지 않고 말씀이 이성을 주관하여 새로운 지각을 가지게 하는 것, 그것이 계시의존적 신학방법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상호모순 되거나 서로 충돌되는 개념이 많습니다. 그 때에도 그 내용에 이성으로 손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합리성으로 계시의 내용을 자꾸 닫으려고 할 때 우리는 계시의 내용을 믿음으로 수납해서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픈 마인드이고 계시의존적 신학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죠. 어떻게요?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멈추는 것입니다. 내 경험은 더 가라고 하고 내 경험은 서라고 해도 말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가라고 하면 한 번도 안 가본 것을 가는 것입니다.

 

6)권위와 복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많은 부분 권위를 동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타락한 이성을 가진 인생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최대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계시하지만 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다 납득을 시키지 않습니다.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와 생명과 하나님에 대해 설명해도 그 설명을 다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맞추어서 끊임없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계시하시면 결국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수가 없습니다.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먹지 못하면 포기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택한 자를 반드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이끌어가십니다. 그래서 동원하는 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못난 우리에게 때때로 권위적으로 다가오십니다. 권위가 무엇입니까? 사랑이고 포기하지 않는 열심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압니다. 공부를 안 하면 나중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면하고 독촉합니다. 지금의 공부가 너의 평생을 좌우한다. 너 지금 안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아무리 침을 튀기면서 말해도 자식은 아직 모릅니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당장 공부는 힘들고 노는 것은 좋습니다. 그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안 듣고 열심히 놉니다. 그러면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냥 너는 그렇게 놀다가 나중에 빌어먹어라...이렇게 안합니다. 너 이리와 공부 안 할래 안하면 죽는다! 매를 들고 잔소리를 하고...힘을 동원합니다. 너 맞는다. 너 계속 그러면 죽는다.....그러면 자식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엇으로 여겨십니까? 치 엄마는 걸핏하면 큰소리고 매를 들고....협박한다....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아닙니다. 부모가 맞고 자식이 틀린 것입니다. 자식이 아니라면 공부를 하든지 안하든지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렇게 놀다가 나중에 빌어먹어도 자식이 아니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끝까지 간섭합니다. 못 알아들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하게 합니다. 이놈의 자슥....협박을 해서라도 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권위를 동원합니다. 부모의 권위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많은 부분 권위적입니다. 우리는 다 말해주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이해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포기하십니까? 너희를 모르니까 알아서 해라....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권위를 동원하십니다. 안 믿으면 죽는다! 너 그렇게 하면 삼 사대 까지 저주를 받는다! 우리는 그것이 무섭기도 하고 치사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꼭 하나님이 저렇게 협박을 하셔야 하나?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유치하고 치사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지해서 동원된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열심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냥 어리석음 가운데 내버려져 영원한 고통과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많은 부분 권위적이라면 계시의존적인 신앙은 어떻게 그 권위에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순종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성경이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권위를 오도하게 만듭니다. 속입니다. 무엇으로요? 독재라고 말입니다. 이 시대가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무서운 시대입니다. 성령충만함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엡5:18절 이후를 보십시오. 찬송과 감사와 복종입니다. 은사와 신비와 초월이 아니라 복종으로 나타납니다. 피차에 복종하는 것이 성령충만함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권위자를 주신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피조물 됨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끌어오는 것임을 명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신학 하는 자의 마땅한 겸손입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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