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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학서론5-성경해석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2. 6. 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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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서론5-성경해석

 

1.성경해석의 필요성

개신교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는 유기적으로 영감된 것이며, 완전축자영감 된 것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기계시입니다. 이 성경은 용건만 전달하는 딱딱한 공문서가 아니고 지.정.의를 가진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발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는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후회하셨다는 표현은? 진멸하신다고 해놓고 모세의 기도가 있을 때 금방 바꾸심은 변덕인가? 하나님이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지성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면 곤란. 기계가 아닌 인격은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은 풍성함을 드러낸다. 칼라와 흑백의 차이, 부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혼할 수도 있지만 이해하면 더 풍성함이 될 수도 있다. 남자는 결과 지향적, 여자는 과정지향적. 인간만 해도 이렇게 복잡한데....) 더군다나 성경이 인간기자의 생각과 표현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식으로 주어지지 않고 최대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었을 때, 그 알아먹을 수 있는 형태가 된 그것은 원래부터 우리의 세계 속에 존재했던 그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위해 빌려온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해석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뿐만 아니고 성경의 본질 면에서도 성경해석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계시의 발전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신약에서 구약의 어떤 사건을 인용했을 때는 그 사건자체가 아닌 그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2.성경해석의 원리

대부분의 이단들은 성경해석을 엉뚱하게 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으며, 지금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기복주의와 세속주의와 성공주의의 문제도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바른 성경해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원리로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1)문법적 해석-문맥(文脈)을 따라 해석하라

성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영적언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법칙에 따라는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가장 먼저 문법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적 장르가 있습니다. 역사서가 있고 시가서가 있고 서신서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비유도 등장합니다.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장르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비유를 해석하는데 신문기사처럼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시편을 해석하는데 논문처럼 분석하면 곤란하겠죠. 복음서를 읽는데 전기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을 때 그 장르와 문맥을 고려하라는 뜻입니다. 가장 먼저 근접문맥을 고려하고 그 다음 원접문맥을 고려해야 합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면 이현령비현령식의 해석이 난무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욥기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마치 신앙의 공식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에서 본다면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욥의 친구 빌닷의 말입니다. 이 말은 빌닷의 잘못된 신학이 만들어낸 개인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의 약속인 것처럼 해석한다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①단어에 있어서 부당축의 하지 말라.

자기 의미 아닌 것을 모아서 설명하는 것이 부당축의입니다. 조직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일수록 이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예/마14:30절의 구원하소서. 엡1:17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조식신학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②어원화를 주의하라.

흔히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어원을 많이 찾습니다. 그러나 어원이 항상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롬1:16절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능력의 헬라어가 ‘뒤나미스’인데 이 말이 영어의 다이나마이트와 연결되었다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결론짓는 것은 뿌리를 잘못잡는 오류입니다. nice라는 영어의 어원이 “nescius"(무식한)이라고 나이스의 뜻을 무식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 무식한 해석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어떤 단어의 어원을 추적할 때 그 단어가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통시적 의미)가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 그 시점에서 어떤 의미(동시적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그러나 잠언 같은 지혜서는 앞 뒤 문맥이 없이 격언이나 속담이 외톨이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도 문맥을 강조한다고 없는 문맥을 억지로 짜내어서는 안 됩니다.

 

2)역사적 해석-사맥(史脈)을 따라 해석하라(성경당시로 돌아가라)

성경해석의 제1원리가 앞뒤의 문맥을 살펴서 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제2원리는 성경당시로 돌아가라는 역사적 해석입니다. 이것은 성경기자가 성경을 기록한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의 진공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말씀이므로 역사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예/마태복음2장의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계시뇨? 라는 동방박사들의 물음에 소동하면서 2세 이하의 베들레헴 유아들을 다 죽인 이유는 그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 듬) 그러나 역사적 해석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 잣대로 성경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으므로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이 바벨론 신화에서 발생했다든지 신약성경이 헬레니즘 시대의 혼합종교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3)성경적 해석-경맥(經脈)을 따라(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

성경적 해석은 성경전체의 맥을 잡고 이 맥락 속에서 각 본문을 해석하는 원리입니다. 다른 말로 신학적 해석이라고도 합니다. 이 해석은 로마카톨릭이 교회전통으로 성경을 왜곡되이 해석하는 것에 반대해서 개혁자들이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라고 주창한데서 시작된 성경해석의 원리로 이해가 어려운 구절은 병행구절을 찾아서 해석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전체의 맥이 무엇인가를 규정할 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 언약적 관점, 하나님 나라의 관점.....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모른다면 종말을 다루는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세대주의적 설명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신약의 시각이 없이 구약을 해석하면, 랍비의 율법주의적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과 신약을 해석할 때 구약은 사건적이며 신약은 설명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영화의 화면과 자막, 화면이 강조되는 것이 있고 자막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 있다. 법정싸움 하는 영화, 자막이 없으면 이해 안됨, 전쟁영화는 스케일과 화면이 중요 이런 영화에 자막만 있고 화면이 없으면 스케일을 알 수 없다. 구약의 지진, 문둥병...사건적인 설명, 어떤 것을 설명하는 사건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신약의 문장을 먼저 사건으로 내용을 만드는 것, 이처럼 구약은 사건을 통해 신약의 문장이나 단어가 담을 수 있는 내용을 먼저 만드는 경우가 많음. 그래서 구약의 사건이 없으면 신약의 단어들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4)영적해석-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영맥을 찾아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읽고 해석할 때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은 공부하면 할 수 있는 해석이지만 성경은 공부한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는 해석은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혼에 큰 힘과 은혜가 될 것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성경해석은 자칫 아무런 감동도 없는 메마른 분석과 차가운 이론에 불과한 지적유희가 될 수 있기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할 때는 늘 기도하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그러나 영적해석을 한다고 하면서 문맥과 역사적 배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전인수격의 영적해석은 굉장히 위험한 오석을 불러온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예/비유해석....풍유적해석...비유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일상의 한 장면을 도입하는 것, 그러면 이 때 일상의 한 장면은 그 전부가 어떤 뜻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냥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인데 여기에 하나하나 의미를 영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풍유적 해석이다. 신령하게 보이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을 폭주기관차에 비유했다면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인가? 그런데 그때 기관차는 무엇이며 폭주는 무엇이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했다는 비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는 구약오경을 플라톤의 철학과 합치시키기 위해 그 둘을 우화적 해석으로 조화시켰다-오리게네스는 이것을 고대와 중세교회의 성경해석으로 정착시킨 인물, 종교개혁은 우화적 성경해석을 축출하고 바른 영적해석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고 문자의 의미를 그 시대의 상황에서 제대로 받아 해석하도록 하였다.)

 

3.성경해석의 목표

위와 같은 원리로 성경을 해석할 때 해석자는 엠마로 마을로 가던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던 예수님의 해석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서 뜨거움은 단순한 감상적 뜨거움이 아니라 인격 내면에서 참 생명과의 뜨거운 접촉이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경해석은 낙심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고 그 뜨거움은 신속히 가서 증거 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기록된 성경이 바른 해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해석하고 전하고 설교하는 우리들의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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