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5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무능력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5장의 탐구 논제
1-2장에서 무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결과 ‘허무’라는 결론을 내린 전도자는 3장에서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전도자는 먼저 역사를 완벽하게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허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역사의 종국에는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죽고 난 후의 세계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저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는 것 역시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안에서 즐기는 것이야말로 삶이 가지는 의미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유추한다.
이에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기는 것에서 과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4장에서 시도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을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는 학대가 가득하고, 시기로 말미암아 서로 경쟁하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이 사회는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며 명분은 언제든지 대중들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세상에서 일하며 즐기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 했던 전도자의 기대는 또 다시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사랑도 없고 신의도 없다. 권력이 오용되고 남용된다는 것은 사회 질서가 무너졌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그 내면을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욕망과 경쟁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얻기보다는 고독을 느낄 뿐이며 사람들과의 진실한 관계를 찾을 수 없다. 서로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려 하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돌아서 버리고 마는 것이 이 사회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아래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인 공동체와 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허무를 느낀 전도자는 5장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적인 통치 앞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언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조리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논의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기대는 전도자의 관심이 역사와 사회로부터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 확인으로 향하고 있다는 분위기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먼저 전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즉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이에 전도자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이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철학적 논제를 시작하고 있다.
이 문제는 삶의 의미를 추구해 가는 인생에게 있어 민감한 주제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사회가 순리적으로 경영되지 못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의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능력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전도자가 직면한 사실은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결코 의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제한해 버린다면 지금까지 전개시켰던 모든 논증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따라서 전도자가 계속 철학적 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절대적이어야 하며 결코 어떤 한계 안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그래서 전도자는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절대적인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은 전 포괄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인간의 자세이다.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존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순종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가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는 말속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말을 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서둘러 말을 하는 것은 누가 먼저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하늘의 영역에 계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인간은 땅의 영역에 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절대적인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절대 통치자이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낮은 자로서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과 같다. 우매한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만한 자세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고 경고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이 어떤 일을 하겠다는 계획은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한자인 인간이 비현실적인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할 따름이다. 모든 일을 꿈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말이 많으면 그 안에서 어리석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전도자는 그 예로서 하나님께 서원하는 일을 제시한다(4절).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서원이 그 서원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능력을 동반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자기가 서원한 일을 행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서원은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로 죄를 짓는 것과 같다. 때문에 자신의 능력조차도 분별할 수 없는 상태로 서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 것이거나 미련한 사람이다. 그럴 바에는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롭다(5절).
이에 전도자는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고 경계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이 계획한 일을 모두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인간의 삶과 행동에 있어서 참된 주인은 인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있다(7절).
이러한 전도자의 논증은 결국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한다. 이것은 앞서 사람의 능력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게 한다. 이 사회의 부조리는 사람에게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전도자의 지적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는 말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만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며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 경영하신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끄시는 능력을 가지신 절대자만이 사회 부조리를 타파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이 결론은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전 3:22)는 전제를 부정하고 있는 4장의 결론을 재확인하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앞에서 인간이 자기 일을 즐거워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에는 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3. 인간이 누리는 권력과 부에 대한 논의
위에서 전도자는 4장에서 언급한 사회의 부조리를 타개할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의 무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 볼 때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사회의 부조리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무능력에 대해 이론적인 승복을 할 수 없다. 이에 전도자는 비록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한 인간일지라도 이 세상 안에서 어떤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도구로써 전도자가 제시한 것은 권력과 돈이다.
1) 권력에 대한 탐구
전도자는 먼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관심을 가진다. 권력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권력을 전도자가 바라 볼 때 그 안에도 부조리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전 5:8)는 말은 권력이 정의롭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착취를 당한다는 것은 권력이 오용되거나 부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권력은 하나님의 통치인 공의와 공평을 구현해야 하지만 이 세상의 권력은 고유 권한이 변질되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권력은 본질을 상실하고 남용되거나 오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 위에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것은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고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권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그 위에 또 다른 권력이 있어 타인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은 이 세상의 권력이 제한적이며 상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전 5:9)는 전도자의 진술에서 보는 것처럼 최고의 권력 기관이라고 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땅의 소산으로 유지된다. 이 말은 왕이 땅의 섬김을 받는다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동시에 왕이라 할지라도 땅의 소산에 얽매여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땅으로부터 획득한 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며 어느 누구에 의해 독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을 상징하는 왕권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전도자는 인간의 능력을 행사하는 도구로서 권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절대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2) 돈에 대한 탐구
이어 전도자는 돈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은 돈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라는 전도자의 선언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경제력을 다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실상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11절). 아울러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람이 평안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돈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12절). 많이 있다가도 한 순간에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를 지키려고 노심초사하게 되고 그것으로 병이 들기도 한다(13절).
나아가 사람에게 한 순간에 닥친 재난은 애써 모은 재산을 무력하게 만들뿐이다(14절).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15절).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 수고했다 할지라도 잠시 돈을 소유할 뿐이다. 그러니 돈을 많이 가지려 하는 것도 바람을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16절). 그러므로 일평생 동안 돈을 좇아간다는 것은 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를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17절).
3) 인간이 누리는 쾌락의 본질
여기까지 도달한 전도자는 권력이나 재산을 가지는 것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권력이나 소유는 인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전도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전 5:18)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먹고 마시며 삶의 낙을 누리는 존재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말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누리는 권력이나 재물은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 그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잠시 누리는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19절).
전도자는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범위 안에서 먹고 마시며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20절). 그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전도자는 지금까지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적 논제들에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전도자가 다양하게 펼치고 있는 논증이 계속해서 부정되고 있다는 것은 그 이면에 아직 풀려지지 않은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것이 전도자가 철학적 논제를 전개하면서 그 이면에 숨겨 놓은 복선이다.
전도자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절대 통치권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그리고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권력이든 재물이든, 그것으로 자기 계획을 성취할 수 있거나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도 확인했다.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일은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런 논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제시하며 전도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주어진 권력과 재물을 누리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선의 기쁨이라는 결론을 유추해 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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