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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장> 절대적 무능력 아래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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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장 구속사 강해

절대적 무능력 아래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6장의 탐구 논제

 

 

 

무신론적 세계관(1-2)에 이어 3장에서부터 시작된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삶의 의미에 대한 전도자의 탐구는 매우 조직적이며 실질적인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 전도자는 이미 1-2장에서 자연계의 현상을 관찰하고 해 아래에서 새 것이 없으며(1:10), 인간의 지혜로 진리를 탐구하는데 한계가 있으며(1:17), 인간이 애써 수고하여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조차 허무하다(2:1-26)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어 전도자는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역사에 대한 탐구를 통해 철학적 논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에서 진행되기 때문에(3:1-9)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3:10-13), 부조리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3:14-16), 역사의 끝에 대해 알 수 없다(3:17-22)는 사실로 말미암아 삶에 대한 탐구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좀더 삶의 현장인 사회 공동체로 시선을 옮겨 그 안에서 무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시도하지만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 현상(4:1-6), 이기적인 자기 실현에 얽매인 사람들(4:7-13), 신의와 사랑을 찾을 수 없는 현실(4:14-16) 등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 자체에 대한 한계를 드러낼 뿐이었다.

전도자는 역사와 삶의 현장을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탐구를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시도하지만 이 역시 절대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제한된 인간의 능력(5:1-7)과 소위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치부되는 권력의 부패와 부의 한계(5:8-17) 그리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삶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정한 분량의 즐거움에 불과하다는 사실(5:18-20) 앞에서 허무를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전도자는 계속되는 부정적인 결론을 유추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가 제시한 삶의 의미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전도자는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결론들을 제시함으로써 일반적인 철학적 논제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도자는 일반적인 논제를 부정하고 무언가 특별한 철학적 논제를 통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도자의 의도는 6장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역사와 사회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한계를 느낀 전도자가 5장 말미에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19)는 결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6장에서는 이 결론을 부정하는 이론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도자는 먼저 어떤 전제를 제시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결론을 유추한 후 다시 이 결론을 부정하는 식의 이론을 지속적으로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2. 절대적 무능력 아래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논의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6:1)는 전도자의 말은 5:19-20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5장에서 인간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죽는 것으로 사람이 소유한 재물들을 다 놓고 가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재 주어진 재물과 부요를 삶 속에서 누리고 사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사람이 재물과 부요를 현실 세계에서 누리고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이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6:2)는 전도자의 말처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최상의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별개의 차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아무리 많은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음으로써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는 한 예를 제시함으로써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이나 재물이 절대적인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6:3)라고 말한다. 많은 자녀를 생산하고 오래 산다 할지라도 주어진 권력이나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리고 무덤에도 제대로 묻히지 못한다면 낙태된 자와 비교할 때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즐길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19)는 결론이 매우 제한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낙태된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조용히 왔다가 가는 것이지만 오히려 권력과 재물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인생보다 더 낫다는 주장(4-5)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에 결코 만족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자녀가 많고 권력과 재물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잠시 왔다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낙태된 자는 편히 쉬기라도 하지만 일 천년씩 두 번을 산다 해도 결국 인간은 죽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6).

수 천년을 사는 것이나 어머니의 배속에서 잠깐 있다가 가는 것이나 결국 가는 곳은 마찬가지다. 이 지적은 인생사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권력과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생사가 순탄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수고하는 것은 결국 먹고 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7)고 전도자는 지적하고 있다. 식욕은 사람이 살기 위한 가장 원시적인 욕망이다. 사실 먹고 배부르다는 것은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최소한의 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애써 수고하고 일하는 것은 넓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결국 자기 만족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6:7)는 말처럼 사람이 어떤 성취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자기 뜻대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 욕망을 다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생을 즐기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고 욕망을 채웠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에 대해 잠시 만족하지만 금새 다시 식욕을 느끼는 것처럼 새로운 욕망으로 목말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자기 욕망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지혜자나 우매자가 서로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8).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추구하고자 한다. 특별히 지혜로운 사람은 보람된 인생 길을 알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매자와 구별된다.

하지만 지혜자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절대적 빈곤의 상태 아래 있기 때문에 인생을 보람 있게 경영함에 있어 그의 지혜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인 빈곤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매한 자와 비교할 때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더 나은 것이 없다.

전도자는 절대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도리를 성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혜의 가치와 그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전도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6:9)고 말한다. 전도자는 사람이 자랑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것조차도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아서 허무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의 소유가 그 사람의 능력을 대변하고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그것들을 소유해 보았다는 만족감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사람의 소유는 제한적이며 그것들을 즐기는 것 역시 제한되어 있다. 아무리 권력과 재물과 지혜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사람이 활용함에 있어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절대적 소유권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기의 소유에 대한 절대적 권위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소유권이나 권위는 절대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언제나 제한되며 구속(拘束)되어 있다. 이 사실은 5장에서 논증했던 철학적 논제의 결론인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5:18)는 결론까지도 보편적인 해답이 아님을 지적한다.

 

 

 

3. 제한되어 있는 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대한 논의

 

 

 

 

지금까지 전도자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19)는 전제를 가지고 그 실상을 탐구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한적 소유와 제한적 권위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너무나 무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었다.

이에 전도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좀더 자세한 탐구를 시작한다. 절대자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절대적 무능함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동안 수없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고 했던 철학적 논제에 대한 탐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서 상대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6:10)는 전도자의 독백은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모든 사물의 존재에 대한 본질이 밝혀진 것처럼 인간의 본질 역시 이미 확연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칭한 바 되었다는 것은 본질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졌음을 지시한다. 마치 최초 아담에 의해 모든 사물들에 대한 이름이 붙여진 것과 같다. 사물에 대한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본질이 밝혀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본질도 이미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 본질에 대한 규정을 바탕으로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자이신 하나님과 능히 다툴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은 앞서 3-5장을 통해 충분히 다루어진 바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절대자이시고 세계와 역사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이 사회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6장에 와서도 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인간이 소유한 권력은 절대적인 권력이 아니며 인간의 소유 역시 절대적 소유가 아니다. 이것들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며 사람이 이것들을 누리고자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은 근본적인 절대 빈곤이라고 하는 틀 속에 갇혀 있다. 반면에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절대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강조한다.

때문에 절대자이시며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상대로 인간에게는 다툴 수 있는 능력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이 세상과 역사와 심지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까지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며 운행하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그 앞에서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절대자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수고를 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독자적으로 어떤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전도자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6:11)고 토로하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아무리 철학적 논제들을 제시하고 탐구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인간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철학적 논제들에 대한 탐구가 부질없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유추하고 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6:12)라는 전도자의 질문은 인간의 삶이 한갓 그림자처럼 헛된 삶을 살아갈 뿐이며 그리 길지도 않은 생애 속에서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 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대답은 4장에서 언급한 부조리한 현실과, 5장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그리고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절대 빈곤과 무력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추된 것이다.

12절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누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과 해 아래에서 그 후에 되어질 일에 대해 누가 말해줄 수 있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2중 구조의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본문은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두개의 질문이 모두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두 번째 질문이 강조된다. 그 결과 현재이든지 미래이든지 인간이 무력한 존재임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이 경우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또 다른 해석 방법은 두 개의 질문이 내적인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 번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죽고 난 후에 또는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말해 줄 사람이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관심은 현재의 삶이 지극히 제한되고 무력하다는 지금까지의 논증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어느 경우의 해석을 취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에 죽고 난 후 또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도자가 전개시켜 온 논리적인 논증이 이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가져 왔다는 점에서 이후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3-6장을 통해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분석하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미래 혹은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일어날 일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논증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유신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시도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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