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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8장>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원칙과 그 불가해성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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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8장 구속사 강해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원칙과 그 불가해성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8장의 탐구 논제

 

세속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삶의 의미 추구에 대해서 허무라고 결론(1:2-2:26)을 내린 전도자는 3장에서부터 신앙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와 다스리심에 있어 인간의 삶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는 전도자의 말처럼 비록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지만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름답게 경영하실 것이라는 전제 아래 철학적 논제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였다(3). 이어 4장에서부터 구체적인 내용들을 탐구하며 인간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전개시켜 오고 있다.

전도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역사의 현장에서부터 나타나는 현상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미 2장 말미에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2:24)라고 선언한 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탐구하였다. 이 탐구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력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절대적인 순종만 있을 뿐이며 인간의 한계는 인간의 뜻을 펼치기에 너무나 미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4-6). 전도자는 현실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실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과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는 전도자의 관심을 미래에 있을 역사의 종말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에 전도자는 7장부터 현실의 현장에서 떠나 역사의 종말에 발생할 일들에 대하여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근본적인 인간의 지적, 도덕적, 실천적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미래를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허무감으로 이어질 뿐이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7:29)는 전도자의 토로는 근본적인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찾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들을 역사 속에서 성취하실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8장에서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의 성격을 탐구하며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2. 미래 예측 탐구 가능성에 대한 논의

 

7장 말미에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부패성이 인간의 생각을 악하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실천적으로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능력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 세상에서는 장래 일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지혜자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전도자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자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7)에 대한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일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1) 지혜의 고유한 능력과 미래 예측 능력

먼저 전도자는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8:1)고 지혜를 칭송하고 있다. 미래를 예견함에 있어 지혜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전도자의 심정이 이 말속에 담겨 있다. 이 말은 지혜자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것과 지혜자만이 사리를 판단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지혜의 통찰력만이 사람을 기쁘게 하고 죄의 거친 영향력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는 지혜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에 대한 전도자의 칭송은 앞서 7장에서 말한 미래 예측 기능을 가진 지혜의 불확실성과 반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문을 가지게 한다. 현실 생활에서 지혜는 폭력과 억압 그리고 뇌물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지혜가 비록 유산보다 좋은 것이고 사람을 보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못한다. 지혜자가 성읍에서는 열 명의 유사보다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선을 행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보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가 지혜를 칭송하고 있는 것은 7장에서 지적했듯이 지혜 자체에 어떤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부패성 때문이다(7:28-29). 따라서 순수한 지혜, 곧 인간의 부패성으로부터 분리된 지혜야말로 악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참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입각해 인간이 부패했다 할지라도 지혜는 그 가운데서도 부분적이지만 지혜의 고유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한 예를 제시하기 위해 전도자는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8:2)고 말한다. 비록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온전히 그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지혜의 고유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가 왕을 등장시키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복종하라고 한 것은 왕의 말이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왕의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특히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의 위치는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라는 점에서 구별된다(잠언 16장 구속사 강해 참고). 때문에 전도자는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8:3)고 말한다. 왕 앞에서 물러간다는 말은 왕을 불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4:16; 11:2 참고). 바로 그 행위가 악한 것을 일삼는 일과 관련된다.

반면에 왕의 말은 권능을 가지고 있어서(4) 왕이 마음에 계획한 일을 다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왕은 어떤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왕을 상대로 도전을 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이처럼 왕은 불합리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때문에 왕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은 왕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되며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택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거역하는 것에는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전도자는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8:5-6)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기와 판단’(טפשׁמו תע)은 두 말이 합쳐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이사일의(二思一意) 용법으로 선은 선으로 포상하고 악은 악으로 보응한다는 보응의 때를 지시한다. 즉 모든 일과 행위에는 그에 상응해서 심판하는 보응의 때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언젠가 판단을 받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내다보고 왕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며 반면에 이를 거역할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기다리는 어리석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완벽하게 인과응보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절대적 통치권자인 왕을 앞세워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확대 해석할 때 본문에서 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대리인이며 그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 곧 율법과 계명으로 확장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시기와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그 시기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전도자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언젠가 하나님에 의해 판단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 즉 인과응보의 때가 있다는 점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으며 이로써 미래에 나타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7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2)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와 인과응보 원칙

7장에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완전하심 때문에 그 안에서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앞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한 이유를 분명히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곧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역사의 현실에는 원칙이 없어 도저히 그 되어지는 일들을 알 수 없다는 점과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절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때에 따라 공평하게 상과 형벌을 주시는 인과응보를 행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때를 기다리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래서 전도자는 6절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화(הער)를 받기 마련이므로 지혜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 점은 7-8절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8:7-8)는 구절은 사람이 화를 면치 못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행사하시는 인과응보의 원칙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통치 원칙과 그 불가해성에 대한 논의

 

그런데 전도자는 이 인과응보의 원칙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인과응보 법칙은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이 현실 세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 인과응보 원칙과 반대되는 현실의 결과들

첫 번째 문제는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으며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 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8:9-10)는 전도자의 탄식이 그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주장하여 고난에 빠지게 하거나 죄를 짓도록 하는 경우도 있고 악을 행한 사람이나 선을 행한 사람들이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기도 전에 죽어서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인과응보 법칙이 과연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다”(8:11)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잘 되어야 하고 악인은 잘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악인이 장수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12-13) 하나님의 보응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인과응보의 원칙이 비효율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8:14)는 말처럼 선과 악에 대한 공평한 판결이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현실을 보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선인과 악인이 상급과 보응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사람이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면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고 악하게 살면 그에 따른 보응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는 현실을 볼 때 경건하게 산다는 것 자체 역시 허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신앙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7장에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미래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지적한 전도자가 8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인과응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판단을 바라보는 신앙 안에서도 여전히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때문에 전도자는 경건한 삶을 부여잡고 사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불평을 표시하고 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8:15)는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을 위해 평생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2) 하나님의 통치 원칙과 미래 예측 불가능성

여기까지 이른 전도자는 밤낮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지혜를 추구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아도 도무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16-17).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과 이 세상의 비밀을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런 비밀은 사람이 연구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현실은 인과응보라고 하는 원칙을 비롯해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원칙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사는 것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1절에서 전도자는 지혜자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7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도 지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가지고 8장을 전개시켜 왔었다. 그리고 먼저 전도자는 지혜의 긍정적인 능력을 앞세워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때에 따라 판단하시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 예측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타인의 강력한 힘에 의해 본의 아니게 악을 행하는 경우도 발생하며, 선과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지 않고 선인이나 악인이나 죽음으로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제거된다는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게 만들며, 오히려 선과 악의 결과가 정 반대로 나타나는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인과응보 원칙을 무시하고 악을 행함에 담대한 현실의 부조리가 결국 하나님에 대하여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목적 의식까지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허무를 느끼고 말았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8:17)는 전도자의 결론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지혜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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