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0장 구속사 강해
‘해 아래’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부정적인 속성들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10장의 탐구 논제
거시적인 우주에 대한 관찰과 인간에 대한 탐구 속에서 허무를 발견한 전도자는(전 1-2장)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역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탐구(전 3장)를 지속해 오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역사의 현장을 통해 철학적 논제들을 탐구하였지만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불가능성,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 인간의 도덕적 부패와 무능력으로 제한되어 있는 한계로 말미암아 이생에서의 삶에서 허무를 느꼈을 뿐이다(전 4-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또 다시 역사의 종국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지만 미래에 대한 인간 능력의 한계와 미래 예측의 불가능성 앞에서 또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7-9장). 전도자는 이 세상이 원리 원칙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7장), 하나님의 통치 원칙인 인과응보가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8장), 참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시되고 있다는 점(9장)들을 관찰하면서 미래의 세계 역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참된 가치의 철학적 논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는 아무리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저 세상보다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에 대한 애착을 가져다 준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만이 가치 있는 유일한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려 한다(전 9:7-9).
이에 대해 전도자는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고 말한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에 온 힘을 쏟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도자가 탐구했던 역사의 현장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 역시 확실치 않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인생이 정작 먹고 마시는 일들에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인생이 만족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 시대라고 하는 속성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그 안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또 다시 삶에 대한 고뇌를 느낀다. 도무지 가름할 수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피곤하기만 하다. 또한 계속된 철학적 탐구가 긍정적인 해답보다는 부정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있다는 것은 전도자가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도자가 의도한 딜레마가 숨어 있다. 곧 지금까지 전도자가 탐구했던 철학적 논제들이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곧 ‘해 아래’라고 하는 시, 공간의 틀 안에서 철학적 논제를 거듭 탐구하고 있다는 한계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철학적 논제 속에 숨겨져 있는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탈출하는 길만이 전도자가 추구하고 있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전도자는 바로 이 사실을 그동안 전개시켜 온 탐구들 속에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불합리함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전 9:11-18). 곧 참된 가치가 부정되고 부조리가 지배하고 있는 ‘해 아래’에 대한 상황을 먼저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철학적 논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곧 ‘해 아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2. ‘해 아래’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부정적인 속성에 대한 논의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전 10:1)는 말은 앞선 9:11-18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죽은 파리(들 : 복수형)’는 문자적으로 ‘죽음을 가져다 주는 파리(들)’로 값비싼 향유를 부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등장한다. 동시에 향기름은 참된 가치를 상징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주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부패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매는 죽음과 같은 절대적인 무가치함을, 지혜는 생명과 같은 참된 가치를 그 속성으로 함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매와 지혜는 결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그 간격은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2절). 때문에 우매는 결코 지혜를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우매의 속성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개선될 가능성을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착된 것이다.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전 10:3)는 말처럼 우매한 자에게서는 결코 지혜를 찾아볼 수 없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어리석음만을 보일 뿐이다. 우매의 배타적이고 고착된 성격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부각된다.
더 큰 심각성은 이 세상에서 우매가 언제나 지혜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우매와 지혜는 그 추구하는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 충돌이 야기되기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우매가 지혜를 제압하기 마련이다. 어리석은 자의 말 한마디가 지혜자의 말을 무너뜨리는 것이 현실이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전 9:17)는 말처럼 군주의 어리석은 호령보다 지혜자의 말이 경청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 반대인 것과 다를 바 없다.
‘해 아래’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이처럼 가치가 전도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전도자는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전 10:4)고 이 세상의 가치가 전도되어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비록 주권자가 어리석다 할지라도 그 앞에서 반역을 꾀한다는 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권자(לשׁומה)란 진정한 가치를 제시하고 구현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지배자이며 통치자이다. 따라서 주권자는 스스로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드러내야 한다. 반면에 어리석은 주권자의 명령에 대하여 지혜자는 의당히 그 명령의 부당함을 밝히고 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어리석은 주권자 앞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지혜의 가치가 숨겨지고 그 자리에 어리석음이 대신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가치가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좀더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해 아래’의 적나라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전 10:5-7)라는 전도자의 지적은 참된 가치와 거짓 가치가 뒤죽박죽 얽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권세를 가진 자가 사람들을 등용하는 일을 보니 어리석은 자를 높은 위치에 세우고 방백과 종의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 전도자의 지적이다. 권력과 권위를 맡은 자라면 현명한 사람과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다스릴 위치에, 종은 종의 위치에 있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참된 가치를 드러내게 하는 아주 합당한 통치 방식이다. 그런데 전도자가 자세히 살펴 본 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절대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권세여야 한다. 그러나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권세가 참된 가치를 무시하고 그 자리에 거짓 가치를 대신하게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만큼 부조리한 속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해 아래’라고 하는 영역의 속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한발 더 나가 다른 면에서 ‘해 아래’의 속성을 다시 제시하고 있다. 곧 남을 빠뜨리기 위해 함정을 파는 자가 오히려 그 함정에 빠지게 되고 담을 허는 자가 거기에서 나온 뱀에게 물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8절) 이 세상은 예상치 않은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돌을 떠내는 자가 그 돌로 인하여 다칠 것을 예상하겠는가? 누가 나무를 쪼개는 자가 그 일로 자신이 다치리라고 예상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9절). 이런 것들은 그만큼 이 세상일이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일정한 원칙을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 세상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일에는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장을 잘 관리하고 날을 세워놓지 않으면 그 하는 작업이 힘들기 마련이다(10절). 때문에 평상시 모든 일에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은 앞으로 일을 진행시켜 나감에 있어 유익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예측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그 가능성마저도 부정하고 있다. 그것은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전 10:11)는 말처럼 그 때와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라 할지라도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때와 시기를 사람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성마저도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 전도자의 주장이다.
3. 철학적 논제의 딜레마와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
‘해 아래’라고 하는 영역은 참된 가치가 무시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로 정의된다. 이것은 ‘해 아래’라고 하는 전제가 결국 부정적인 결론을 유발시키는 단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해 아래’라고 하는 영역으로부터 탈출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길임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지혜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릴 수 없다. 비록 ‘해 아래’라고 하는 영역이라 할지라도 지혜만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혜는 예측하기 어려운 온갖 상황에서도 소중한 능력을 발휘하며 참된 길을 제시한다(12절). 그러나 그 지혜마저도 어리석음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어리석음은 처음부터 끝가지 파괴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12-13절). 특히 장래 일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속성이다(14절). 말이 많은 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처럼 간단한 사실조차 알려하지 않는다. 마치 성읍에 들어갈 줄도 모를 정도로 자기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이다(15절).
여기에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이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 있으며 어리석음이 지혜를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자세히 그 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지혜는 그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무리 참된 가치가 전도되고 불확실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지혜의 절대 가치만은 변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자의 관찰은 역사의 불확실성,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무능력,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참된 가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불합리성과 불확실한 현실 등으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허무하다는 지금까지 전개된 부정적인 견해에 비해 긍정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논제에 긍정적인 해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작용되기 마련이다.
전도자는 섣불리 긍정적인 해답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해 아래’에서 모든 철학적 논제들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사람들이 섣부르게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일을 미연에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가능성만 있다면 그것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전도자는 이러한 사람의 속성을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전도자는 철저하게 논리적인 논증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전도자만큼 치밀하게 삶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탐구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지금까지 전도자가 제시한 철학적 논제들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이 지극히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얻어진 만큼 앞서 제시한 긍정적 가능성에 대한 논증 역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전 10:16-17)는 말 역시 전부는 아니지만 긍정적인 원칙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어린 왕’은 아직 통치자로서 미숙한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아침부터 술에 취한 대신들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장래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을 예측하게 한다. 반면에 자격을 갖춘 왕과 때를 따라 먹고 힘을 얻는 방백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튼튼하게 서가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한다.
이것은 지극히 예외적이라 할지라도 일관된 논리적인 예측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는 말 역시 일반적인 원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게으른 손은 집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부지런히 집을 보수하지 않으면 지붕이 새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원칙들은 부지런히 노력하면 그에 상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 10:19)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잔치를 배설하는 것은 먹는 것을 통해 기쁨을 나누기 위함이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결국 즐거움을 위한 것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딜레마가 자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고 해서 그것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전 10:20)는 말처럼 전혀 예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장래를 계획하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공중의 새가 어떻게 말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의외의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침실에서 한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전달된다는 것은 너무도 의외적인 일이다. 따라서 전혀 예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이 지혜의 능력이다. 전도자는 그 안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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