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9장 구속사 강해
원칙과 참된 가치가 무시되는 인류 역사의 속성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9장의 탐구 논제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추구하고 있는 전도자는 우주와 인간이라고 하는 거시적인 안목으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역사의 현장을 탐구하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주관되는 역사의 성격을 규명하고(3장) 이를 근거로 현실 세계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에 대해서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앞서 전도자는 삶의 터전이자 역사의 현장인 이 사회와 그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현상들을 탐구하며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 ‘허무’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4-6장). 이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만 현실의 부조리를 개선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과 도덕적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미래를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7장).
여기에서 전도자는 역사를 이끌고 나갈 절대적인 원칙이 그 안에 없다는 원인을 제시하고 역사 속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판단하시는 ‘인과응보의 원칙’ 아래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였다(8장). 그러나 인과응보라고 하는 절대적인 삶의 원칙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알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비밀을 풀 수 없다는 인간 지혜의 한계로 말미암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전도자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전 8:16)라고 할 정도로 지혜를 탐구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까지 다 살펴보았지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지혜야말로 사리를 해석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응보라고 하는 역사의 절대적인 원칙조차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역사의 미래를 밝히는데 있어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 지혜의 능력이 이 정도라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다’라고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전개시킨 철학적 논제에 대한 전도자의 태도는 철저히 부정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끊임없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최종 목적지까지 탐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9장에서 전도자는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모두의 관심의 대상인 역사의 종국(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것은 철학적 논제를 추구함에 있어 마지막 하나에 대한 기대까지도 저버리지 않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의 탐구는 한 개인의 관심사라고 하기보다는 모든 인류의 관심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역사의 종국과 그 속성에 대한 논의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전 8:17)라고 토로한 전도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산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제시함으로써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지 못하게 못을 박고 있다. 애써 노력해도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없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모든 소망이 닫혀지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둔 역사의 종말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전 9:1)는 전도자의 말은 의인이나 지혜자나 그들의 종국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정하실 지 사람이 알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종국’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의인이나 지혜자는 사실 역사의 끝을 바라보고, 혹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서 과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미움을 받을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종국을 유심히 관찰한 전도자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지금까지 미래에 대한 탐구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전도자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죽음이 똑같이 온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이 의인이든 악인이든, 선하고 깨끗한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을 경외하든 안 하든 마침내 사람에게는 동일한 죽음이 임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나 죄악을 범한 사람이나 맹세하는 사람이나 맹세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나 죽음 앞에서는 다를 바 없다(2절).
이렇게 볼 때 각기 살아 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은 하나의 종국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 사람들이 각기 살아 온 삶의 질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임한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공평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공평성이야말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 가장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죽음 앞에서 동일한 것처럼 부조리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다”(전 9:3)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조리한 일이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미래에 소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성과 예측 불가능한 무원칙한 현실 앞에서 좌절한 바 있다. 이에 하나님의 때, 즉 공평한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것조차도 삶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종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인내하고 탐구했지만 모든 것이 이처럼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그 죽음 앞에서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이처럼 부조리한 일이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질도 없고 윤리도 없다. 죽음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요소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용하지만 결국 좀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것 가체가 그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마는 악을 가져오고 만다. 그래서 전도자는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전 9:4)고 말한다. 죽은 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개처럼 사는 인생이 더 낫다는 것은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역사의 불확실성 안에 갇혀 있는 삶의 허무에 대한 논의
죽음은 미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악한 부조리이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보다는 해 아래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이 유일한 삶의 현장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은 해 아래에서 살았던 삶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5절). 둘째, 죽음은 현재의 삶과 사후의 삶을 완전히 단절시키기 때문이다(6절).
여기에서 전도자는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 있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무지와 무능력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전도자는 7-8장에서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탐구를 시도했지만 결국 인간의 종국이라고 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허무 앞에서 또 다른 허무를 느끼고 만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은 전도자의 관심을 살아 있는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전 9:7-8)는 전도자의 말은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말한다. 역사를 개선하려 하거나 미래에 소망을 가지려 하는 것은 결국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의 환희를 느끼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에서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고 전도자는 말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될 바에는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인생을 즐기라고 한다. 그리고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고 말한다.
저 세상에 가면 수고할 일도 없고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으며 지혜조차 쓸모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이 세상에서 힘써 일하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애써 수고하는 것에 더 이상의 의미를 줄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기대나 환상도 가지지 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앞서 이미 밝힌 것처럼 선과 악의 보응도 언제일지도 모르고 그 결과가 기대한 것과 역시 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에서 명확하게 나타날 것처럼 보였던 인과응보의 원칙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추구할 명분이 없어졌으며, 이 세상의 삶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말았다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처럼 이 세상이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전도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 9:11)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나기보다는 이 세상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우연히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연히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사람은 그 시기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그 결과조차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원칙이 있다 할지라도 그 결과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 9:12)는 말처럼 인생 자체도 불확실한 존재인 것이다. 마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4. 원리 원칙과 참된 가치 인식 부족에 대한 논의
그동안 전도자는 역사의 불투명성(3장)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현상들인 사회 정의의 불투명성(4장), 인간 능력의 불투명성(5장), 인간 본질의 불투명성(6장) 등을 제시했었고 미래와 관련해 미래의 불투명성(7장)과 역사 종국의 불투명성(8장)에 이어 9장에서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불확실성을 제시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로 구성되는 불확실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절대 주권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분명한 원칙에 따라 경영되지만 사람은 그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에(잠 3:11) 현재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조차 가질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전도자가 지혜를 가지고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을 궁구하고 탐구한다 할지라도 역사의 불가해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진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도자가 13-18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곧 아주 작은 성읍이 큰 군대를 이끌고 온 왕에 의해 포위되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성에 살고 있는 아주 가난한 지혜자가 그 성읍을 건져냈지만 전쟁이 지나고 나서는 아무도 그 지혜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내용에서는 큰 힘을 가진 왕과 가난한 지혜자가 극단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 왕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고 그의 군대가 작은 성읍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또한 가난한 지혜자가 그처럼 큰 군대로부터 성읍을 지켜 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읍에 있는 한 사람의 지혜자가 그 결과를 뒤집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예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전도자가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는데 아무도 그 지혜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으로부터 성읍을 건져내었을 때에는 크게 고마워 해야 하고 칭송을 해야 하지만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전도자는 그가 가난하고 미천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암시한다(16절).
사실 지혜는 힘보다 나은 것이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전 9:17)는 말처럼 우매한 지도자가 크게 떠벌리는 소리와 지혜자의 작은 목소리의 말은 그 가치를 결코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크게 떠벌리는 힘있는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면서도 힘없고 가난한 지혜자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전도자는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전 9:18)고 말한다. 곧 지혜로 말미암아 그 사회를 번영하는 일이 나타나기보다는 오히려 죄인 한 사람이 그 사회의 선을 무너뜨리는 일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 현실은 원리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성읍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성읍의 특성이 인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든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촌으로 확대 해석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미련이 지혜를 압도하고 악이 선을 지배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으며 진정한 가치가 인식되지 않는다.
보편적인 원리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참된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3-9장에서 살펴 본 전 역사의 틀 안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전도자는 비록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는 원리 원칙도 지켜지지 않고 참된 가치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 이야기를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도자가 철학적 논제를 추구하여 얻은 잠정적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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