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1장 구속사 강해
불확실성 안에서 찾는 긍정적 가능성과 그 한계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11장의 탐구 논제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전도자의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허무’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 허무라고 하는 한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때에 따라 결정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전 1-2장). 전도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상)는 유신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철학적 논제에 대한 탐구를 전개할 수 있었다.
전도자는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도 아름다운 삶의 결실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첫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하)는 말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는 말처럼 인간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너무도 많은 부조리가 난무하고 있다는 문제이다(전 3:16-18). 넷째, 인간의 종국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거기에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전 3:19-22).
전도자는 이 난제들을 전제하고 인간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고자 시도했다. 역사와 사회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관찰(4-7장)을 통해 그리고 미래에 대한 탐구(8-10장)를 통해 철학적 논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전도자가 탐구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해 아래’의 한계라고 하는 시, 공간의 제한적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전도자가 탐구한 ‘해 아래’의 한계라고 하는 영역은 근본적으로 참된 가치가 부정되고 거짓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부조리와 어떤 원칙도 적용되지 않을 정도로 불확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전도자가 이미 간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전 8:17)는 말처럼 ‘해 아래’의 한계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그것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이에 전도자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대변되는 ‘해 아래’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철학적 논제 해결을 시도하였다. 전도자는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라도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시대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는 적어도 몇 가지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 10:16-18).
이러한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잔치를 배설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나름대로 돈을 벌기 위해 일할 이유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전 10:20)는 말처럼 이 세상은 너무나 의외성이 많기 때문에 그에 따른 다양한 각도의 대책도 마련하라고 권하고 있다.
전도자가 이러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도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함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무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아무리 불확실하고 의외성이 강한 ‘해 아래’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철학적 논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 불확실성 안에서 찾는 긍정적 가능성에 대한 논의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는 말은 10장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빵을 물에 던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이미 벗어나 있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기 위한 목적이라면 몰라도 빵을 물에 던지는 행위는 도저히 그 다음 일을 기대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자는 기꺼이 빵을 물에 던지라고 한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확실성과 의외성으로 난무하는 ‘해 아래’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의외성이 강한 만큼 빵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장 눈앞에 있는 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고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까지라도 만일을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라고 한다.
같은 이유에서 전도자는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2)고 말한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급적 많은 경우의 가능성을 예비한다는 것은 결코 잘못된 생각이 아니다. 때문에 한, 두 가지의 가능성에 매달리기보다는 더 많은 수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곧 모든 일은 그 결과를 보아야만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전 11:3)는 말처럼 구름에 습기가 가득하여야 비가 쏟아지는 것이지만 사실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는 비가 와 봐야 아는 것이다. 또한 나무가 쓰러질 때 남쪽으로 쓰러질지 혹은 북쪽으로 쓰러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무가 한번 쓰러지고 나면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 법이다.
이 말은 1-2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각도의 가능성마저도 사실은 그 결과를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상일이라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일은 우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님을 전도자는 지적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전 11:4)는 말처럼 언제 파종하면 좋을까 하면서 파종의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결코 씨를 뿌리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또한 구름만 쳐다보며 언제 추수하면 좋을까 기다리다가는 결국 추수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세상일을 우연의 결과에만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는 말처럼 어느 때가 가장 적합한 때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아침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저녁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아침에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진정한 가능성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는 원인이 전제된 필연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나의 원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가 언제나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어떤 결과에도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 결과는 필연성과 우연성이라고 하는 복합된 요소에 따라 무작위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사실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그 결과를 가져오는 일조차도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이라고 하는 인간 한계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논리적인 전개는 지금까지 전도자가 수많은 철학적 논제를 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고 했던 처음 제시된 논제로 복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름답게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결과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경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나중을 알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안에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나중을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지만 사람은 끝까지 그 일의 결과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서 전도자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고 강조한다. 사람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는 나타나 봐야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그동안 숨겨져 있던 전도자의 복선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결국 전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수많은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해 아래’에서 사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도 그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나중이 밝혀지는 날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3. 우연과 필연의 무작위성 결과와 그 심판에 대한 논의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자는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 11:7)고 말한다. 즉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난 뒤의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먼저 지금 허락되어 있는 삶의 장으로서 이 세상이 있고 그 안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처럼 소중한 것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전도자가 갑자기 현재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그 삶의 과정이 있어야 결과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불확실하고 의외성이 강한 세상이지만 어찌되었든 삶의 과정이 있어야 그 결과도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대신에 전도자는 미래의 결과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것을 잃지 않는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잠 11:8)는 말은 오래 사는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어두운 날들을 기억하라는 것은 당연한 요구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일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삶에 근거한 것이므로 장래 일에 매달려 지금의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하)는 단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장래 일이 헛되다’는 것은 미래를 소망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아직 오직 않은 미래를 바라보다가 현재 살아 있는 삶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이다. 앞서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는 말과 같은 의도이다.
이 말은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는 말속에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지금 살아 있는 날을 즐거워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삶의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 의미가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원하는 일을 좇아 행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삶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 삶에 대한 결과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현재의 삶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것은 그 결과가 예측 불가능하고, 의외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를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삶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그 결과가 소중한 만큼 현재의 삶에 대한 가치 역시 소중함을 충분히 일깨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는 처음 제시된 논제와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을 통해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시는 결과로 이어져야만 비로소 그 삶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만일 현재의 삶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신 결과와 어긋나게 된다면, 그에 따른 심판이 있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전 3:11하) 하셨을지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연으로 이어지는 삶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삶에는 필연적인 결과와 그에 따른 심판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전도자는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전 11:10상)고 말한다. 현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의 복합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결과는 무작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시는 결과’를 기준으로 현재의 삶에 대한 무작위의 결과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 악의 요소가 가해질 경우 그 결과가 비록 예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사실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전 11:10하)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마음에 기뻐하고 원하는 길과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 산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결과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시는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재의 자의적인 삶의 형태들은 결국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해 아래’라는 한계 안에서 철학적 논제들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해 왔었다. 그리고 불확실성과 의외성으로 대변되는 그 한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전도자가 추구한 다양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라는 첫 번째 논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이 아무리 즐겁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삶의 결과가 우연과 필연의 복합성 안에서 무작위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결과’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의 결론은 결국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심판의 기준으로부터 사람이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전도자가 추구한 철학적 논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전도자의 고뇌가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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