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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장> 하나님의 통치와 궁극적인 삶의 의미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5.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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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통치와 궁극적인 삶의 의미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12장의 탐구 논제

 

 

 

지금까지 전도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 왔었다. 무엇보다도 전도자는 자연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2:24)는 사실을 발견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주력해 왔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 속에서도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에서 인간의 존재는 한갓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종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를 느꼈다. 더불어 인간의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나아가 선과 악이 전도되어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과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 버림으로써 인생이나 짐승이나 그 결국은 같다는 삶의 무가치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궁극적인 인간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시도함으로써 인간의 절대 가치를 찾아보기 위해 모든 철학적 논제들을 일일이 섭렵하며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역사의 성격을 규명하고 사회의 성격과 인생이 존재하는 현재의 삶에 대한 각각의 정황을 규명해 보았다. 나아가 미래와 역사의 종말과 인생의 종국에 대한 탐구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전도자의 모든 탐구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부조리한 현재의 상황이 미래에도 영향을 미침으로써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개선이나 기대조차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앞에 전도자는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도자가 탐구했던 철학적 논제가 해 아래라고 하는 한계 속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이상의 철학적 논제가 아닌 이상 의미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전도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는 근본적인 한계를 인간이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한계 안에 종속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불확실성과 의외성으로 가득 차 있는 해 아래의 한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해 아래의 모든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의외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미래의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는 절대 원칙만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에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전도자의 희망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11:5)는 말속에서 긍정적 결론을 유추하는 단서를 찾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는 말속에서 지금은 분명치 않다 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철학적 논제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상기되었다. 그리고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는 말로써 인생이 추구한 삶의 결과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역사의 결과를 비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전도자는 비록 무작위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삶의 결과일지라도 그 결과가 하나님의 아름답게 하시는 역사의 결과와 같은 것이라면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의 합일을 위해 모든 악으로부터 인생을 철저하게 구별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인해 전도자는 또 다시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 악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것이 전도자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2. 철학적 논제들의 최종 결론에 대한 논의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1)는 말은 악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전도자의 단발마와 같은 외침이다. 역사의 불투명성, 이 세상의 부조리 그리고 미래 예측 불가능성과 해 아래의 불확실성 등으로 말미암아 무력해진 인간이 과연 악의 무게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역부족임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마지막 보루는 창조주이신 하나님뿐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늙어감으로써 점차 기력이 쇠해지고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2)는 말처럼 죽음이 임하기 전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지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빛은 기쁨을 상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지는 은총의 표시이다. 반면에 어둠은 심판과 형벌을 상징한다(3:4; 8:9; 13:10; 4:33; 32:7; 6:12). 같은 의미에서 구름은 고통을 상징한다(13:11-13; 38:22). 전도자가 이러한 상징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청년의 때와 노년의 때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아직 살아 있는 때, 즉 청년의 때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이 삶의 의미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가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3-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청년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자 함에도 기력이 점차 쇠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그 인생도 종말을 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6)는 말로써 답하지 않을 수 없다. 1절과 7절에 등장하는 기억하라는 단어는 수미쌍관법을 이루면서 이 단락을 구분 짖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분이시며 전적으로 우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철학적 논제가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영역은 철학적 논제로서 접근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며 초논리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도자는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모든 철학적 논제가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해 아래라고 하는 자연적이며 논리적인 영역 안에서 그처럼 활기차게 논증을 전개시킬 수 있었지만 초자연적이며 초논리적인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선 한 치도 접근할 수 없는 절대적 무능력이라는 한계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전도자는 철학적 논제에 대한 가치 자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라는 외침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세계가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처음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한 고백은 모든 자연계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1-2)의 결과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전개되는 역사와 삶의 현장에 대한 탐구 역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라는 말로 집약되고 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든 전제하지 않던 인생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헛되다는 말 한마디로 종결됨을 선포한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의 결론이 허무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도자는 이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동안 모든 철학적 논제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유추해 왔던 전도자가 유일하게 이 부분에 와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결론은 허무였다.

 

 

3. 신적 계시에 대한 전도자의 탐구에 대한 논의

 

 

철학적 탐구의 결론으로 제시된 허무속에 전도자의 딜레마가 숨겨 있다. 모든 철학적 논제에 대한 부정이 결국 허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긍정하게 하는 것이 곧 전도자가 지금까지 의도해 왔던 메시지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전도자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12:9-10)는 선언은 지금까지 전도자가 탐구했던 철학적 논제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도자가 지금까지 전개시킨 논증들은 단순히 철학적 논리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고 그 자체가 진리의 말씀과 같은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자의 선언은 지금까지 전개된 탐구의 결론으로 제시된 허무를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쐐기와 같다.

마침내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12:11)고 선포함으로써 지금까지 전개된 논증 자체가 한 목자로부터 주어졌으며 계시와 동등한 것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한 목자는 이스라엘의 목자(80:1)이신 여호와를 지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에게 항상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말씀의 꼴을 주시는 목자이시다(48:15; 49:24; 23:1; 40:11; 31:10; 34:11-12). 이 점에 대해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동의하고 있다.

전도자는 기꺼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들어 쓰셔서 이러한 작업에 동참케 하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전도자의 저술은 다른 영감된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만든 통일된 저작물들과 전도자의 저작물이 동일한 위치에서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이 말은 전도서의 서론인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1)는 선포와 함께 수미쌍관법을 이룸으로써 전도서 1:2-12:8까지 전개된 전도서의 내용이 신적 계시로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이 점에 대해선 전도서 구속사 강해 서론 ‘3. 계시로 주어진 전도서의 신적 권위를 참고하라).

전도자가 이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 이성과 지적 노력의 최후 결론이 허무이며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전도자는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12:12)고 지적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적 논제는 결국 허무로 종결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전도자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는 말속에서 강조하고자 한 결론이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1:2-12:8에 걸쳐 철학적 논제를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은 허무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러한 논리적인 추론이 단순한 철학적 과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였음을 12:9-12에 거쳐 논증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개하였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논제만으로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계시로서 주어진 전도서의 가르침을 통해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인 승인을 전제로 마침내 전도자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핵심을 선포하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이 말씀이 신적 계시의 권위에 근거하여 전도자가 최후로 주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철학적 논제의 최종 결론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는 것은 이것이 곧 결론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곧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도자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할 이유를 명시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4)는 말처럼 인생의 삶은 그것이 드러난 것이든 숨겨진 것이든 마침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심판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동시적이며 지향적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전도자가 발견한 지혜이며 전도서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4.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관계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처음부터 전도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의미의 근원이시다. 비록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대신 하나님은 계명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셨다. 때문에 인생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 사실은 최초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 아담을 거기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명령을 기계적으로 순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행동에 옮기는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그에 따른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꼭두각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 세상이 부조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부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불공평한 것이 죽음이지만 그 죽음으로 인간이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에서 불공평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실 전도자가 바라본 죽음의 불공평성은 해 아래라고 하는 제한된 시, 공간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인간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 아래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해 아래의 삶을 넘어 존재하는 죽음 이후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해 아래에서의 삶은 허무로 종결되지만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 이후의 부활은 해 아래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최종적으로 인생을 해 아래로부터 영생에게로 눈을 돌리게 유도하고 있다. 영생이 없다면 인간은 해 아래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그 안에서 인생이 누리는 영원한 삶을 통해 해 아래에서의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신적인 지혜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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