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난 줄기
본문:11:1-16
요절: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문맥
오늘의 본문 11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배운 것과 잘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무력적인 지배를 꺾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후에, 메시아를 통하여 그들을 평화로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곧 앗수르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도 지금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기억하자.
11장은 물론 9:1-6과도 내적인 관계가 있다. 그곳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왕권을 가지고 왕으로 등극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메시아가 왕권을 행사하시는 방법에, 그리고 그럴 때 그분의 지배가 이스라엘과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해서 서술하고 있다.
11장은 지금까지 이사야서에 나오는 모든 약속, 그중에서도 특히 2:1-4와 4:2-6의 약속이 실현된 것을 보여준다. 이로써 요절 1:27이 최종적으로 성취되었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은 메시아의 통치가 오신 후에야 비로소 새롭게 될 수 있다.
11:1-16은 7:1-9(아하스 왕에 관한 기록)와는 의도적인 대조를 이룬다. 7장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관계를 맺을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드러났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다윗의 아들이 나타나는데, 그는 하나님을 매우 경외하는 자이다. 그리고 11:1-16은 사회적 불의를 고발한 1장과 5장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하나님 스스로가 이 문제를 해결하셔야 한다. 메시아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림으로써 연약한 자를 도우신다. 따라서 지금 심판 아래 놓인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도록 이러한 메시지를 믿음과 찬양으로 영접해야 한다.
문단
1절의 도입 후에 2-3a에서는 그 „가지“가 메시아 사역을 위해 자신을 어떻게 영적으로 무장하는지를 설명한다. 3b-5는 이 영적인 은사가 백성에게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서술한다. 3b-4a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위한 사역을 설명하고 4b는 강한 자와 불경한 자들을 심판한다는 것이며, 5절은 이 두 가지를 요약한다.
6-9는 앞으로 올 왕의 지배가 짐승들 사이에서도(6-7), 인간과 짐승 사이에도(8)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묘사하고, 9절은 이것을 요약한다.
10절은 새롭게 시작하는데, 의도적으로 1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1-9와 10-16은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구원의 왕이 오신다는 것이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11-12는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표적을 세우실 때 일어나는 결과를 나타낸다. 13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심을 돌리는데, 앞으로 이 두 그룹이 하나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통일된 이스라엘은 그들이 사사와 초기 왕정 시대의 가장 큰 적들을 향하여 진군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14,15,16절은 11절에 연결된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스라엘을 앗수르로부터 해방하시는데, 이것을 어떻게 준비하시는지를 설명한다.
해석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하나님은 지금 다윗 왕가를 그 백성과 함께 정화를 위해 심판을 하고 계시다. 이사야는 7장의 아하스 에피소드 이래로 이 사실을 명확하게 선포하였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그들의 죄와 불순종을 제거하기 위해 심판하셔야 했다.
그루터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므로 심판이 거의 뿌리까지 미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근본을 흔드시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신다. 그럼에도 약속은 지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버리고 다른 왕조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을 심판하시면서도 기적으로 그 혈통을 이어가신다.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완전한 기적이다.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는 언젠가는 말라서 죽기 때문이며, 잔가지가 난다 할지라도 나무와 함께 말라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내용으로 보아서도 매우 특이하다. 새로운 가지는 매우 강력한 왕이 되는데, 외적으로 본다면 연약한 가지이다. 이와 같이 사 53:2에서 하나님의 종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줄기와 같다.“ 약한 가지는 겸손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말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우리를 모든 적으로부터 지켜주실 강력한 분이시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다할나위 없이 겸손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완전히 잘린 나무 둥치에서 성장한 가지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은 완전한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지켜나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인간이 여기에 기여할 수 없다. 인간이 완전히 실패한 곳에서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분의 구속사를 진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기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기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자.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a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아하스와 그의 왕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훌륭한 왕이었던 히스기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 모든 왕들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그들은 그들을 왕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다. 이사야는 인간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이 직접 다윗의 아들 위에 강림하셔서 계속 머무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영은 메시아 왕에게 초기의 사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잠시 혹은 큰일이 있을 때에만 머무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 강림하심으로 다윗의 아들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영은 메시아 왕에게 임하셔서 왕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은사와 함께 3번 반복하여 나타나므로(지혜와 총명의 영, 지략과 강함의 영, 여호와를 깨닫고 경외하는 영), 상당히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먼저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지혜는 주어진 환경에 맞게 처신하는 능력이며, 총명(통찰)은 주어진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지금까지 왕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대신(참모)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메시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항상 공평과 정의를 행하실 수가 있고 늘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능력인 지략과 강함(사 9:5; 36:5; 왕하 18:20; 엡 6:10)이라는 말로써 더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을 실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략과 강함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용어는 군사용어이다. 이것은 약한 왕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무너졌으므로 이상적인 왕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러한 강력한 군사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오는 말씀과 연관 지어 볼 때, 메시아의 사역은 군사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용어를 전권(Vollmacht), 대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신약에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는 전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적 표현을 볼 때에 항상 신약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함을 배운다.
메시아는 성령님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을 것인데, 이것이 그분을 교만하게 해서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깨닫는(지식의) 영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삼하 23:3; 사 1:3; 6:9; 잠 1:29; 2:5-6; 행 9:31). 그러므로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세 번째 성령의 은사를 마지막에 두어서 메시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교회가 잘 되고 크게 되어서 교만해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메시아와 결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메시아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상주하므로 그분의 모든 은사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역만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과 같이 자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지 않으므로, 그의 직분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숙이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메시아는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셨으며,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셨다.
3b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a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이제 메시아께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백성을 다스리시는 데에 있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나온다. 먼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가 묘사된다. 그분은 보통 사람들이 건전한 양식대로 하듯이, „그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므로 외모에 현혹되지 않고 „의“로써 판단하고 심판하신다. 메시아는 어떠한 것에도 속지 않고 의롭게 판단하신다. 이러한 공정하게 판결하는 일이 왕의 다스림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메시아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은 지혜, 총명, 깨달음, 경외함, 이 모든 것은 공정한 판결에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에서 처럼, 지배층이 법을 어기고 약한 자를 억누르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공평과 정의 외에도 자비의 의미가 있다. 연약한 자와 무력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메시아는 이들을 부자로 만드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의로운 세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로는 이러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성령님의 은사를 받은 메시아만 가져오실 수 있는 세상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영접하고 메시아를 모시는 나라이며, 세상에서는 세울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이다.
4b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메시아께서 지혜롭게 다스린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메시아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그러한 다스림이 아니다. 메시아의 정의롭고 은혜로운 지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온다. 1:27-28에서처럼, 시온은 공평과 의로 구속이 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고 한다. 메시아가 오셔서 다스리는 데에도 그 다스림에 굽히지 않는 자는 심판받는다. 이것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의 질서가 새롭게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다스림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확장된다. 그러므로 메시아 왕국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교회에 불의가 있다든지, 교회가 불법을 행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공평과 정의가 가장 잘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다. 교회에서 죄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용사와 용납은 다른 것이다. 용서는 용납이 아니라 절차를 거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권능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한다. 그분은 입술의 막대기로, 입술의 기운(영)으로 악인을 죽인다고 한다. 6절 이하에 묘사된 대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메시아 지배 이면에는,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을 심판하시는 다스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것을 무력으로 하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의 권능으로 하신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은 분명한 원칙(계명)을 세우시고, 사람들이 그 계명에 따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방인들까지도 메시아의 계명을 들으러 시온산으로 온다고 했다(2:3,4).
5절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한다.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메시아의 나타나심에 달려있다. 그분의 허리띠는 공의이며, 그분은 신실함 자체시다.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다스리실 이상적인 왕이시다. 이제 이스라엘은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이 메시아를 희망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분을 그들의 왕으로 주실 것이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갑자기 전혀 예상치 않게, 메시아의 지배가 인간의 영역을 떠나 피조물의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가 세상에 오셔서, 인간 사이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신다면, 이 평화가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평화롭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자연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조화와 평화가 깨어졌고, 인간이 심판을 받을 때에 그들도 함께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셔서 죄인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고, 이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세상도 완전히 바뀌어 새로운 질서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맹수가 한때는 그들의 먹이었던 짐승과 함께 평화롭게 누워있다면, 짐승세계 구조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짐승, 사자와 송아지는 적대 관계를 상징한다. 짐승 사이의 적대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맹수 사이의 적대 관계까지도 사라진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저주가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쳐도 두려움이 없고, 맹수를 보아도 두려워 도망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메시아의 통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창조를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낙원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이루실 것은, 아담과 하와가 살던 낙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 사이에는 하나님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공통점이 있다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을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그런 일이 문자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죄가 주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있는 우리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진실되고 순결한 교통이 가능하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그리스도와 항상 이러한 교제 속에 산다면, 우리는 메시아의 통치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사람과의 적대 관계가 자동으로 해소된다. 그러나 완전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가 오기까지는 죄인임과 동시에 의인이라는 역설적인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9 그들은 악하지 않으며 나의 거룩한 모든 곳에서 악행을 행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배가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에서는 „그들은 악하지 않다“고 한다. 인간에게 악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그들이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자기수양을 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간에 근본적인 평화가 없다. 이제 그들에게 악이 제거되었으므로 메시아 나라에서는 더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악이 제거되었으므로(회심을 통해), 이제 거룩한 산 시온(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메시아 백성으로서 올바로 살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배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러므로 이 한 분 메시아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메시아에게 여호와의 영이, 그분의 뜻을 아는 영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까지 그분의 지배가 가득 참이 있다. 6:3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세상에 가득 찬다는 말을 두고 볼 때 이 메시아의 지배가 이방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불의와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식과 공의가 가득차게 되고 이방에도 구원의 빛이 온다.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13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이사야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에게 온 구원이 바로 이방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0장 이후로 이것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이러한 보편주의(이방인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는 앞 부분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날에는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은 만민(이방)의 표시로 설 것이다.“ 메시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고, 그분이 놀라운 사역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방인이, 이들이 비록 이스라엘과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메시아가 이방인에게 하나의 표시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분이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메시아를 찾고 메시아의 하나님을 찾는다. 이들은 직접 하나님께 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 세계를 덮는다는 의미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을 풍성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10절의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는 2:2 이하의 말씀을 좀더 보충해준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시온에는 메시아께서 거하시게 되는데, 그곳으로부터 빛이 나와서 열방이 그에게 순례할 것이다. 당시 세상을 정복한 앗수르가 백성을 그들이 가보지도 않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백성은 스스로 메시아의 영적 권위에 끌려서 시온으로 행진한다.
11-12. 이방인들이 몰려드는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11-12에서 묘사한다. „그 날에“, 즉 새로운 다윗의 가지가 왕이 되는 날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역사를 볼 것인데, 이것은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큰 구속사역과 같이 또 한 번 구원의 손을 펴시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이스라엘을 위한 여호와의 사역은 전형적인 패턴을 가지고 일어나는데, 이스라엘이 과거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다. 여호와는 항상 신실하시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과거에 행하신 일을 근거대기로 사용하신다(„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시온에서 영광스럽게 계신 하나님은 쉬고 계신 분이 아니라, 활동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포로된 백성을 구속하신다. 구속이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하시고 사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백성은 여호와의 소유이다. 남은 자들은 약속의 땅에 남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먼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가서 흩어져 있는 자들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남은 자가 된다. 하나님에게는 거리가 문제 되지 않으므로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섬에 있는 자들도 돌아온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다. 이러한 독특한 귀환은 이방 백성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표적이 될 것이다. 이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시는 일을 깨달음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시온에 오기 전에, 하나님 백성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물질로 도와줄 것이다.
이곳에서 60장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될 사건을 먼저 간단하게 소개한다. 바드로스는 상부 이집트의 다른 이름이다. 나중에 그곳에 있는 엘레판틴이라고 부르는 나일강 섬에 큰 이스라엘 지구가 생길 것이다. 구스는 이디오피아이고, 엘람과 시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왕국이다. 하맛은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변에 있는 도시이다. 이렇게 여러 도시 이름이 열거된 이유는, 유대인이 실제로 그렇게 흩어져 살았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불러내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13.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산산이 흩어진 유대인이 다시 돌아오면서 서로 적이 되어 싸우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적대심도 없어진다. 구속이란 항상 서로 갈라진 자들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14. 이렇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면, 그들의 숙적인 블레셋을 이길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동쪽에 있는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족까지 제압한다. 메시아께서 시온에서 평화롭게 다스리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국경이 확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주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주변 국가인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족이 제압되어야 이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메시아 왕국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에서 만나는 메시아는 이러한 군사적인 분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메시아는 연약한 가지 같으므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분이 아니다. 53장에서도 이러한 메시아가 소개된다. 그러므로 싸워서 승리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묘사는 이스라엘이 지금 외적이 의해 시달리고 있고, 또한 앞으로 바빌론에게 정복당해 외국으로 끌려가게 되므로, 이들이 다시 본국으로 오려면 강력한 왕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에 군사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몇 구절을 보고 문맥을 떠나서 본문을 해석하면 유대인처럼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메시아가 시온에서 다스리게 되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게 되고(10:4), 각국에 흩어진 포로들이 귀환하게 되는데, 이것도 기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에 체험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들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한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15-16에 묘사된 대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앗수르로부터 해방되지도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외세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내용의 골자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안전하게 고향에 돌아오리라는 약속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움직이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신다.
오늘 우리는 매우 아름다운 구약의 메시아 예언을 공부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은 자기의 양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가 회화적으로 아름답게 기술되었다. 그분은 고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고향에 불러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나와 같은) 죄인도 메시아 왕국에 불러주신다는 메타퍼로 이해해야 한다. 그분의 왕국에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써 죄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분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므로,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부지런히 배워서 그분의 다스림에 순복해야 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으로 말미암아 비록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혹은 하나님의 훈련하심으로 우리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이러한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초청을 들어보기를 바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메시아께서 부르심을 듣고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요 10장에 잘 나와 있다.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11)
출처 :개혁교회신앙공동체 Community of Reformed Church 원문보기▶ 글쓴이 : 송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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