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주차. 흩어진 사람들
행8:1~8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1. 순교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석사(돌에 맞아 죽은)가 된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대체적으로 사도행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7장은 초대교회의 탄생과 스데반의 순교까지를 다루고, 8-12장에서는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 결과 이방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기술하며, 나머지 13-28장에서는 복음전파의 결실이 어떻게 맺어지는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방지역으로 확산되는가를 보여주는 초입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순교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순교와 함께 교회역사에 큰 변화를 낳은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교회는 이방선교를 향한 대규모의 진군을 시작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써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피로 인해 교회가 확산됩니다. 유명한 교부인 터툴리안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아펜젤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같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세워지고 자라난 교회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2. 핍박
순교를 계기로 교회에는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들의 눈에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흥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을 제어할 수단은 없습니다.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사실상 기획하고 막후에서 주도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괴펠스라는 이 사람은 군중심리의 대가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군중들을 흥분시키어 나치정권에 추종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고 실행한 사람입니다. 꼭 같은 제복에 ‘하이 히틀러’라는 하나의 제스처와 구호를 만들었고, 집회는 항상 인간이 가장 감성적인 때가 된다는 해거름 무렵에 개최하고, 집회 시에는 불을 피워 군중의 심리를 흥분하도록 자극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수법들은 공산정권들이나 극우파들이 그대로 모방하여 이들은 항상 제복을 입고 붉은 색 등의 자극적인 색깔과 투쟁을 독려하는 깃발, 머리띠, 완장, 독창적인 구호 등으로 일반 민중을 호도하고 맹렬한 짐승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은 닥치는 대로 예수쟁이들을 찾아 돌로 치고 자기네 땅에서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뺀 나머지 신자들은 거의 다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방지역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박해를 주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3절에 보니 바로 ‘사울’이라는 한 청년입니다. 이 사람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그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파의 사람이자 반 예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핍박행위는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했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쟁이들의 집까지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대개 으름장을 놓거나 등을 더밀어 좇아내는 정도이지 남의 집까지 들어가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지는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행위를 성경은 ‘잔멸하다’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뤼마이노마이’라고 하는데 원래 뜻은 사자나 곰, 표범 등 맹수들이 먹잇감을 찢을 대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악독한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사울이라는 한 사람의 포악함이 이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F F,브루스라는 성경학자는 이것을 ‘멧돼지가 포도밭에 뛰어 들어가 잘 익은 포도밭을 짓밟아 으깨어 부수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스데반 집사의 장례를 치루고 큰 울음으로 슬퍼한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무심히 평가해선 안 됩니다. 그냥 동료 한 사람이 죽었으니까 울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 법과 분위기 상, 돌에 맞아 죽은 자에 대해 동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거역하는 죄로 간주되어 그 또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장례 지내는 것은 목숨을 걸어놓고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기록한 누가가 뒤에 나오는 사울의 핍박과의 사이에 이 부분을 삽입한 의도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그들에게 임했던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결과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경건한 사람들은 목숨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이 얼마나 성령 충만했으며,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견고했는가를 상징하는 대목입니다.
3. 복음전파
순교와 핍박으로 사람들이 추방됩니다. 그들은 정처없이 살던 집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야 합니다.
첫째, 누가 떠납니까? 1절에 보니 사도들을 제외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교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남고 나머지 평신도들은 모두 다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난 이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4절에 보니 그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누가가 이 부분에 대해 굳이 기록하고 강조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사도들 같은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정착하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두고 평신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방법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6-29를 보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 왜 핍박을 주어 흩어지게 하십니까? 교회 역사에 있어서 복음 전파를 위해 흩어지는 것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한 곳에 마무르며 안주하는 삶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계획과 생각 없이 부랑자 같은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떠돌아도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떠돕니다. 노숙자라도 같은 노숙자가 아닙니다. 심지어 죄를 지어 사형수가 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자리에 안주하면 편해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행복한 삶을 바꾸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녀들을 통해 하루빨리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자녀들이 스스로 알아서 복음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흩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소나 돼지가 말을 듣지 않고 주저앉아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엉덩이를 때려서 움직이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것입니다. 순종함은 자발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시키니까 하는 것은 명령 복종이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말씀대로 알아서 스스로 즐거워하며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에게 순종할 필요는 엇지만 목사의 목회철학과 방식을 잘 알고 이해하여 담임목사의 뜻과 계획에 발맞추는 성도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일 것입니다.
4. 빌립의 등장
그런데 5절부터 갑자기 누가는 한 사람의 전도자를 등장시킵니다. 그 사람은 빌립입니다. 그는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파가 아니라 헬라파입니다. 브루스는 오늘 본문의 흩어진 사람들이 대부분 헬라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가 헬라파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헬라파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핍박을 했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함께 빌립도 할 수 없이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마리아가 구약에 나오는 사마리아 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사마리아 지역의 한 성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RSV는 ‘a city'로 번역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 돼지처럼 취급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하나였던 이 둘은 솔로몬 왕 이후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로 남쪽은 유다왕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는 데 이후 사마리아 지역에는 외지인들이 이주하여 본토인들과 섞이게 되었고 남쪽 사람들은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족을 비하하고 같은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남과 북의 화해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남의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 때 북쪽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드디어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왕(주전135-104년)의 때에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사마리아인들이 제사지내던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는 등 핍박을 했습니다. 이후 주전 63년에 로마제국이 유대를 점령하자 사마리아는 유대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대담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예루살렘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기에 사마리아인들의 적대감이 덜하였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복음전도의 결과 사마리아가 달라졌습니다. 8절을 보세요.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1천년 동안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동족이면서도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슬픔과 좌절과 한숨으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사마리아인들의 한이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리자 절망과 어둠과 눈물이 사라지고 큰 기쁨이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때를 되돌아 보시지요. 얼마나 감격하고 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까? 지금 사마리아에 이런 기쁨의 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복음은 빛입니다. 빛이 비추자 어둠이 물러가고 저주와 비난과 치욕과 핍박과 절망 같은 어둠의 역사가 멈추어지고 평화와 소망의 밝은 빛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역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아리엘개혁교회를 통해 이런 복음의 역사가 재현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쇠퇴기에 빠진 한국교회에 다시 목음의 빛줄기가 비추어져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어지길 원합니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통일한국의 미래를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사마리아 지역과 같은 북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북한 동포들에게 큰 기쁨을 선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5. 결론
끝으로, 오늘 우리는 빌립의 전도에 대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두루 전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흩어진 사람들, 지도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5절에서 빌립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빌립은 많은 표적을 나타내며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습니다.(6-7절). 그 많은 평신도들 중에서 누가는 빌립의 이야기를 선택하여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과연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빌립이 이와 같은 대단한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빌립이 했다’가 아니라 ‘빌립도 이와 같은 일을 했다’라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개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초점이 빌립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빌립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흩어진 사람들 중에 큰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한 빌립이었지만 그도 하나님에 의해 복음의 능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개인의 공로나 작용에 의해서 교회를 이루고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으며, 하나님은 역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은 사람이 하시는 방식과 다릅니다. 가끔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보고 우리가 ‘저런 사람이 교회의 일을 하면 잘 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자질과 인간적인 조건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소리가 그런 소리입니다. 절대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그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알려주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끄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찬송가 214장(349)의 후렴귀처럼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출처] 29주차. 흩어진 사람들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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