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주차. 스테파노스(면류관)
본문/행6:8-15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 시스템의 실제
이제 초대교회는 가장 기본적인 조직, 즉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와 집사의 직분입니다. 이 두 직분을 통해 교회는 체계를 갖추고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하는 일과 집사가 하는 일 모두 주님의 일이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직무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인데 이는 ‘파송을 받은 자’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바울에게만이 칭호를 사용합니다. 물론 dt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모든 성도들을 모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도직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권을 수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해야 하는 4대 직무는 복음 증거(preaching), 가르치는 일(teaching), 그리고 감독하는 일과 권징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직무는 초대교회 당시에만 존재했던 직무로서 승계되거나 지금도 존속되는 직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생겨난 단회적인 직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직의 계승을 주장하는 카톨릭의 주장은 비성경적입니다. 특히 마16:18-19을 내세워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것과 카톨릭 교회가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집사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보조자’ 혹은 ‘봉사자’라는 뜻으로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의 재정업무를 도맡는 직분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집사의 자격으로 만 30세 이상이며 일정기간 동안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한 기혼자라야 하며, 행실이나 신앙심, 인격 등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집사는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주의 제자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교회 봉사자로 합당치 않습니다. 교회의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그 능력으로 행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초보적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조직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며, 가시적 교회로서 세상에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6:7) 이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말씀이 들려지는 곳일 것입니다. 말씀이 죽은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제자들은 오직 주의 말씀을 가지고 논하고 교제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되도록 세상의 일을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말씀의 위력 앞에 제사장 무리도 복종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유대교의 제사장만큼 자존심이 강한 족속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거꾸러집니다. 세상의 어떤 철학이나 종교라도 진리 앞에는 무력한 법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2. 스데반 집사
자, 이제 오늘은 시스템 사역의 첫 사례를 보는 시간입니다. 그 대표자로 스데반 집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씩 그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의 이름은 원래 ‘스테파노스’이고 뜻은 ‘면류관’입니다.
- 면류관은 충성스러운 제자가 받는 영예의 상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충성스러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당신의 영광의 면류관을 더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름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 뿐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을 받은 주의 충성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둘째, 6장 3절에 나타난 것처럼 집사가 되려면 사도들이 제시한 자격조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거듭났고 구원받았으며 능력의 제자가 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사람의 지혜입니다. 물론 이 지혜도 성령의 은사에 해당합니다.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는 일이 모두 독특하고 감동적입니다. 누가 보아도 기막히게 일처리를 잘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행동합니다. 사람의 능력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지혜의 사람으로 집사로 안수 받은 사람입니다.
- 그리고 칭찬을 받았다는 것은 타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존재여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조롱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본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당하고 사는 운명체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진리를 위한 투쟁으로 받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잘못하여 받는 능욕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룩했지만 질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하고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감성주의에 함몰되었습니다. 특히 잘못된 교리를 배웠거나 교리 없는 신앙생활을 한 결과, 오도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작 중요한 때에는 엉뚱한 소리와 행동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일이 중첩되다 보니 이제 사람들은 교인들을 말을 믿지 못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교회와 교인들에게 ‘뭔가 있나보다’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직접 접촉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정확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해 아는 것이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아 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뭔가 다르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자기들과 별반 다를 게 없고 오히려 타종교인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판정 내린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뼈대 없는 건축을 한 것입니다. 덩치만 큰 바보들을 생산한 것입니다. 이런 때에 교리를 목숨으로 알고 수호하는 개혁교회의 사명이 절실한 것입니다.
셋째,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8절)
- 사람들은 세상살이를 하면서 다양한 삶의 근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근거로 살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살고, 어떤 사람은 덕을 많이 쌓아 그 업적과 칭송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의 삶의 근거는 ‘은혜와 권능’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스데반 집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스데반 집사의 삶의 근거는 세상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삶의 근거는 땅에서 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라는 한 사람의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 이 점에서 우리 각자는 ‘내가 사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요즘 아리엘교회는 ‘하나님의 일곱 가지 질문‘이라는 책을 읽고 토론 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어지는 그 시점에 하나님은 어김없이 자신의 백성에게 찾아와 가장 필요하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죄를 지어 나무 그늘 아래에 숨은 아담에게 찾아와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도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다른 곳에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모든 성도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질문을 대신하여 자기가 자기에게 던지고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를 놓고 볼 때 우리는 ’내 삶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는 세상의 힘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가?‘ 따져 보아야 합니다.
-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먹고 자고 돌아다니고 일하고 건강함을 지키고 사는 모든 것이 사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사람의 근거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이 인식이 세상 사람과 성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의 근거를 모릅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우발성이나 불가지론에 기댄 채 그저 정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권능’입니다. 권능은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이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사람이 노력하여 얻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능력입니다. 은혜에 권능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가장 귀한 선물인 ‘은혜와 권능’을 동시에 받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참 부러운 집사님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 간구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넷째, 기사와 표적을 행한 사람입니다.(8절)
- 은혜와 권능은 세상에서 기사와 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기사는 기이한 일이고 표적은 하나님을 믿게 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기적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아픈 사람에게 안수하여 낫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뿐입니다. 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기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과 구속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가나에서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일을 설명하시고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 예루살렘교회가 점점 풍성해진 이유에는 바로 이런 기사와 표적들이 사도들과 집사들에 의해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등장 이래로 계속해서 위기감을 느끼고 이 새로운 복음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온갖 방책을 사용하며 대비하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모든 새로운 물결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면 복음운동이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이 민간에 더욱 번창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먼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도고 심문하고 매질하여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복음운동을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마 이때 지도자들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가말리엘이라는 유대교 지도자의 중재로 사도들의 사태를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주님과 사도들만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스데반이라는 집사를 통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아연실색할 일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도대체 비가 어디서 새는 거야?” 유대교 지도자들이 복음 앞에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적절히 표현하는 독백일 것입니다.
다섯째,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9-10절)
-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번엔 단단히 작심을 하고 스데반을 불러 따지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변론입니다. 변론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가리기 위해 행해지는 논쟁입니다. 그런데 변론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주체들을 내세웁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9절 맨 앞에 소개되어 있는 ‘리버디노’라고 하는 ‘자유민’(freedom man)입니다. 이들은 주전 63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로마로 포로로 끌려가거나 각 지역으로 디아스포라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폼페이 장군(주전106-48)에 의해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귀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차이로 인해 하나의 회당에서 유대교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자신들만의 회당을 지어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오늘 9절에는 대표적인 자유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구레네’입니다. 구레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시몬입니다. 북아프리카 구레나이가의 수도이며 학술과 분화가 번창했던 도시입니다. 다음으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곳은 당시 매우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지중해 최고의 상업무역 중심지이며 헬라문화가 꽃피던 로마제국 내의 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20만 명의 인구 중 과반수 이상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헬라어를 쓰며 사는 유대인들을 위해만 들어진 성경이 그 유명한 <70인 역>입니다.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가장 유능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명성을 가진 ‘필로’가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다음으로 ‘길리기아’는 소아시아 동남부 연안지대의 작은 성읍입니다. 주전 57년에 로마의 속주가 된 후 발전하였고 중심도시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입니다. 기타 아시아는 에게 해를 끼고 있는 서쪽 해안과 서북부 지역 일대를 지칭합니다. 훗날 동로마제국의 지역입니다.
- 아무튼 유대인들은 남자 열 명만 모여도 회당을 먼저 짓는다고 합니다. 이 회당에서 율법과 탈무드를 직접 배우고 연마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 회당 사람들의 지식수준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보통 시편 전체를 줄줄 외고 탈무드의 이야기를 한 줄에 꿰 차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 집사와 변론하는 이들은 각 회당에서 대표로 선발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수준으로 스데반 같은 무지랭이를 보기 좋게 깔아뭉개 버리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10절을 보시지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라는 평범한 한 사람에게 여러 대표 논객들이 달라붙었지만 당하지 못했습니다. 보기 좋게 KO패를 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이들이 놀라고 창피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줄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떤 자리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 앞에서건 무슨 말을 할지 염려치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말을 예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가 과거에 학문을 하였는지 어떤 매움의 과정에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의 한 사람으로 그냥 평신도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소위 대표논객들이 한 방에 당한 것입니다.
- 제아무리 사람의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겼습니다. 이 사실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고 행하는 능력입니다. 서영의 사람이 아니고선 하나님의 일을 믿지도 못하고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한계이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주님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은 사람입니다.(11-14절)
- 이렇게 당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조금이라도 양심적인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의 술책들이 온당하지 못함을 깨닫고 물러날 것입니다. 적어도 누명을 씌워 소송을 거는 등 악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것을 갚기 전에는 조금도 악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인 이들은 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운명입니다.
- 그들은 즉시로 음모를 꾸밉니다. 먼저 11절을 보니,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그들을 시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니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충동질합니다. 악인들은 항상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히틀러는 선동가였습니다. 역사상에서 좌파들은 언제나 군중을 교묘하게 선동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종북 좌파들도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는 팔을 걷어 부칩니다. 광우병사태를 조장하고 천암함 침몰이나 연평도 포격사건을 호도하고, 세월호 사건 같은 불행한 사태가 터지면 바로 정부를 공격하고 유언비어를 확산하고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주의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땅을 복음이 없는 사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이 목적입니다. 만약 이들의 소원대로 그런 나라가 세워졌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게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붉은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모택동이 제일 먼저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독교의 말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피 땀 흘려 세운 이 대한민국을 이 같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하고 복음운동으로 다시 재무장해야 할 때입니다.
- 그리고 나서 13절에 보니, 마지막 단계로 거짓 증인을 세우고 거짓 죄목을 만들어 스데반 집사를 고소합니다. 이들은 스데반 집사에게 두 가지 죄목을 걸었는데 하나는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14절에 보니 ‘예수가 성전을 헐고’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 했고 이 성전을 너희가 헐면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시며 자신의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교묘하게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왜곡시킵니다. 본질을 이야기하지 않고 몇 마디 말을 싹둑 잘라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창극 총리후보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방송과 신문들이 발언의 본질을 잘라서 왜곡시킨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다음으로, 거짓증인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우리에게 준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율법의 요구는 거룩하고 완전한 인간의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다 지키고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당에 오셔서 자기 몸을 헐어서 그 죄 값을 대속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율법의 완성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율법을 페하신 적이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내세운 두 가지 죄목은 완전한 왜곡이요 모함입니다.
일곱째, 천사의 얼굴을 한 사람입니다.(15절)
- 자, 이제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특징을 볼 수 있는 구절이 바로 15절입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초긴장된 그 순간에 그런 얼굴을 한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얼굴이 누구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입니까? 바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 즉, 스데반을 고소한 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해 모함한 사람들의 눈을 통해 스데반 집사의 은혜와 권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입니다. - 한편으로 ‘천사의 얼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지금 스데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빛과 밝음, 해같이 빛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성도들의 얼굴이 이런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몰두하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삽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눈빛과 얼굴에 나타납니다.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가 나타납니다. 얼굴의 표정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의 삶의 궤적을 통해 그것이 축적되어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지금 오직 하나님에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 안에 거했고 얼마나 하나님이게 몰두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3. 교훈
오늘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주의 제자로서 주의 사역을 하기 위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 스데반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사상으로 무장하고 집중하고 살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어지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성직자보다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훨씬 더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일을 하느라 지치고 낙망하고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지켜보시고 이길 힘을 주시고 그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힘을 내어야 합니다.
둘째, 세상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섞여 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대사란 모름지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대사가 음주운전을 하고 단속에 걸려 창피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대사는 자기 나라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대사직을 훌륭하게 수행해야 할 책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본보기가 되고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어떤 핍박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 한편으로 제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노력하고 정직하게 행한다 해도 세상은 복음과 그 일꾼들을 핍박하는 것이 본질이고 사명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복음 듣기를 거부합니다.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말로 너희들이 싫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을 벌레 씹듯이 쳐다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좌절감이 찾아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스데반 집사처럼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깃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가 보아도 ‘당신은 크리스찬이시군요’라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척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얼굴에 나타나는 은혜와 권능을 가진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26주차. 스테파노스(면류관)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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