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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주차. 내 영혼을 받으소서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7. 27. 22:29

본문

28주차. 내 영혼을 받으소서

 

 

 

 

본문: 7:54-61(8:1)

 

 

 

본문/7:54-8: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1. 맹렬한 분노

 

 

 

 

스데반 집사의 긴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자존심을 이렇게까지 짓밟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고, 구원의 표라고 자랑하던 할례의 의미를 깎아 내렸으며,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만 계시하신 율법의 권위를 바닥에 내리쳤고, 유대인의 심장과도 같은 성전을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핵폭탄과도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반응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54절을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 했습니다. 얼핏 보면 마음에 찔려했으므로 양심적으로 무엇을 느낀 것처럼 번역을 했지만 원어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단어로는 디에프리온토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톱질을 하여 두 조각이 났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앞서 5:33에서 사도들을 체포할 때 크게 노하다, 맹렬한 증오를 나타내는 용어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악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악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도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의 잘못이 들추어지거나 지적당하면 한사코 부인하거나 역정을 내거나 오히려 지적하는 사람을 역으로 공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정 불리하면 침묵하는 것으로 대응하거나 하다못해 유감정도로 마무리하고 맙니다. 일본만 보아도 이런 행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습니다. 아니 않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이 악인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좌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의원이 살인교사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우파였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같은 소속이자 입을 다뭅니다. 특히 한국의 좌파들은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과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고 모든 사회주의 건설을 계급투쟁 끝에 획득하는 것으로 믿고 추종하므로 그들에게 사과 따위는 참 한가한 소리입니다. 참 희한한 것은 종교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다른 종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기독교만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이 공산혁명을 한 뒤에 오직 교회만 불을 지른 사실만 보아도 그 실체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표현은 하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의 현상입니다. 하나같이 이를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원수를 씹어서라도 먹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원수를 죽이고 말겠다는 악랄한 행위의 하나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적으로는 브뤼그모스인데 이는 실망으로 인해 괴로워하다는 뜻의 브뤼포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눅13;28에서 예수님이 좁은 문 설교를 하시면서 행악하는 자들이 밖에 쫓겨나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4절을 원어적인 의미로 다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를 갈았다

 

 

 

 

뿐만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의 그 다음 언행은 더욱 유대인들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55-56절을 보세요. 스데반은 이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야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차원에서 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갖다 놓은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자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독사 데오를 모독하는 자는 율법에 따라 처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석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일 경우엔 39대의 태장으로 벌을 준 후에 추방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공개석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이므로 당연히 돌로 쳐 사형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늘을 우러러

 

 

 

 

잠깐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몇 가지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저는 이 부분에서 영어성경들도 look up이라 하지 않고 pay attension totake notice로 번역했으면 더 실감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무심히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바라보았을 그 하늘이지만 이 때 바라본 하늘은 같은 하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 본 하늘과 성령의 눈으로 바라 본 하늘은 달랐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눈에 비친 하늘은 더 이상 자연의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곳이요,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스데반의 얼굴 표정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정말로 내가 믿던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신 것을 목격했다면 그 기분이 어떤 것일까요? 왜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스데반에게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보통 다른 성경에서는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카테조마이) 예수님으로 묘사됩니다(7;13, 110, 14:62 ) 그런데 여기서는 유일하게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 계시다(히스테미)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세대주의적인 해석은 스데반이 서 게신 예수님을 본 것은 예수님이 아직 하나님 우편이 있는 보좌에 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인 윌리엄 캐리라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예수님이 서 계신 때는 과도기이다. 즉 예수님이 보좌에 앉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이다. 혹시라도 회개하면 이 회복의 기간에 다시 내려오시려는 하나의 표시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가장 은혜로운 해석은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최초의 순교자를 맞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택한 백성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택자들의 구원을 기다렸으면 안지도 앉고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을까요? 정말로 우리도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바라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F.F 브루스는 서 계신 예수님을 증인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스데반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으므로 이제 주님께서 스데반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기 위해 스데반의 증인이 되시어 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마땅한 자세는 서 잇는 자세입니다. 참으로 깊이 있는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돌로 치다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 곧바로 돌로 쳐 죽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산헤드린 공회는 지금까지 세 차례 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위협하는 정도로 끝내었고(4:17,21), 두 번 재는 채찍질로 끝났으나(5;40) 이번에는 돌로 쳐 죽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에는 처음에는 약간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던 바리새인들의 변화가 한몫을 거들었습니다. 예수 부활을 주장하는 사도들 및 주의 제자들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는 입장이라서 처음에는 온건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에는 신성모독죄로 판단하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까지 합세하여 일제히 스데반을 끌고 나가 즉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군중들이 재판장에 의한 선고의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스데반을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요셉 클라우너의 견해에 다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은 재판을 제멋대로 끝내버린 광적인 청중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의 규정에도 제아무리 신성모독자라 해도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으면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음에도 군중들은 법률상의 규례를 무시하고 스데반을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불법적인 행위입니다. 제아무리 산헤드린 공회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직접 사형을 시키는 것은 로마제국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형이 집행된 것은 당시 유대사회의 정치적인 환경을 알아야보아야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는 두 가지의 가설을 내세웁니다. 하나는 이 사건이 빌라도총독이 퇴임한 36년 직후부터 그 후임자인 마르셀루스가 부임하는 사이 총독의 자리가 비어있는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스데반의 사건이 결코 빌라도 총독이 사임한 36년 이후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가설은 빌라도 총독의 시기에 이 사건이 일어났지만 빌라도가 충분히 눈 감아 줄 수 있는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빌라도는 대개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가이사랴에 살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왠만한 소동이 일어나도 그것이 쉽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편 사형 시 돌을 제일 먼저 치는 사람은 재판에서 증언을 한 증인입니다. 17:7을 보니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하였습니다. 또 주후 2세기경의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에는 재판이 끝나면 정죄 받은 자를 돌로 치기 위하여 그로 나가라. 돌에 밪는 장소는 법정 밖이어야 한다. 10 규빗 뒤에서 사형수에게 이렇게 말하라. ’자백하라, 자백하는 자는 누구나 모든 세상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그리고 돌에 맞는 장소에서 4 규빗 벗어난 곳에서 죄수의 옷을 벗기라. 돌을 던지는 곳은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 증인의 한 사람이 죄수의 뒤에 가서 고개를 수그리도록 밀치라. 그리고 그의 뒤에서 돌을 던져 넘어지게 하라. 한 번 던져 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죽지 않으면 두 번째 증인이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치라. 그래도 죽지 않으면 회중이 돌로 칠 것이다라고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들은 돌을 들어 치기 전에 자신의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58)

 

 

 

 

그런데 누가는 이 당연한 일을 왜 굳이 기록하였을까요? 누가는 그 옷이 한 청년의 발 앞에 두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한 마디로 스데반의 사건을 정리하면서 누가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역사에 뒤에 바울이 된 사울이라는 한 청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이 청년은 신성모독죄를 범한 한 죄인의 처형장면에 대해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도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훗날 위대한 주님의 사도가 되어 기독교를 전 로마제국으로 전파한 장본인이 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즐기는 악인으로 성경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8;1을 보세요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는 사울의 패악한 모습을 우리는 분면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4. 내 영혼을 받으소서

 

 

 

 

이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갑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스데반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살려달라는 비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채 죽어가면서 두 마디를 하고 숨을 거둡니다. 먼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 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러나 여기엔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부탁했지만 스데반은 그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 맡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었다고 하는 것을 유추할 수가 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돌을 맞는 그 순간에도 스데반은 하늘의 법정에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이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몸이 완전히 부셔져 죽음의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돌에 맞아 죽은 또 한 사람의 신실한 하나님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인데 그는 바로 성전 뜰에서, 누가복음에는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11:51)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대하24;22) 같은 순교이면서 두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이 둘의 차이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자신의 죄를 신원해 달라고 했지만 스데반은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중보 기도하엿습니다.

 

 

 

 

이제 성경은 스데반의 죽음을 잤다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잔인한 사형에 의해 죽은 스데반의 죽음을 두고 성경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단어로 이 죽음을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주님께서 영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는 부활체를 입을 때까지 잠시 자는 것입니다. 자다 깨어나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모든 보고 싶은 얼굴들을 다 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원합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증거할까를 궁구하며 살아가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그냥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한대로 사는 날까지 사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권력이 높고 돈이 많고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소용없는 짓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꾸로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음을 초월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이 땅에서 더욱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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