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주차. 스데반과 유대주의
본문 행 7: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1. 거짓고소
억울하게도 스데반 집사는 지금 거짓증인을 앞세운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성전을 헐라고 말했다고 스데반이 증언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고 또 스데반이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변론자들은 스데반을 공격하면서 ‘성전과 율법’을 그 증거로 삼았습니다.
알다시피 성전과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임을 자부하였습니다. 그 표로 할례를 행하는 것임을 자랑삼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들에게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모세를 통해 율법과 성전을 주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과 할례와 율법과 성전이 이 네 가지가 유대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주의를 거스르는 새로운 주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입니다. 이 새로운 사상이 갑자기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을 휩쓸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 일은 전에도 가끔씩 일어났다가 이내 사라지곤 했기에 별반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예수의 일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킴 복음의 새바람은 온 유대 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이방지역에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이대로 두다가는 언제 유대주의가 무너질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뒤에도 이 바람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이 나서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 투옥시키고 매질하고 공갈 협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사라는 사람이 나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새로운 돌풍의 주인공을 잡아들이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거짓 죄목을 씌워 재판을 하고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스데반 집사의 그 유명한 변증설교가 사도행전 7장 전체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2. 변증설교
이 설교는 우선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먼저 궁금한 것은 누가는 과연 이 설교를 누구로부터 전해 듣고 이 긴 설교를 모두 기록했을까요? 대다수는 누가에게 이 사실을 전해 준 사람은 스데반 집사의 재판 전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이며 뒤에 누가와 매우 절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단연 바울을 지칭합니다. 바울이야말로 회심하기 전까지 스데반 집사의 재판과 처형장면을 끝까지 목격한 사람이며 훗날 누가와 함께 선교의 현장으로 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설교를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스데반 설교를 통해 나타난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유대주의’ 즉. 잘못된 유대주의적 구원관, 신앙관 등이었던 것입니다. 이 설교 한 편을 통해 당시 기독교회가 유대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장벽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 설교의 특징과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스데반은 2절부터 50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길게 설명합니다. 물론 이 역사는 스데반의 입장에서 선택한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단지 아브라함, 요셉, 모세, 그리고 성막에 집중됩니다.
1) 아브라함(2~8절)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땅을 기준으로 아브라함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언급합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결국 이방지역에 살았던 유대인의 후예입니다. 요즘 말로 아브라함은 이민세대요 그 후손입니다. 유대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유대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는 것이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란에 머문 것(4절상)과, 유대 땅(이 땅=팔레스타인)에 거주한 것(4절하)을 다룹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거주지는 변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스데반이 끄집어 낸 것은 땅이 절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성소가 서 있는 땅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가 전체적으로 성전논쟁과 관련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은 설교 초반부터 마지막 부분에까지 이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변론을 종결합니다(49절).
결국 스데반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란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으로 거처를 옮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땅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48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손으로 지으신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스데반이 얼마나 하나님중심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세야 합니다.
참고적으로, 유대주의는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타민족이 가지고 있지 못한 율법을 가지고 있기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을 하나님이 세워주셨기에 이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회사는 바로 이런 행위구원론이 항상 정통 역사적 교회의 구원론에 대항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게 어떤 선행을 하고 공로를 쌓았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할례를 받고 성전에서 제사를 잘 드리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율법대로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무슨 수로 율법을 다 지키고 율법대로 살아갑니까?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유대인들이 미화하고 칭송하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을 고백하기 전에는 단지 어리석고 죄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부름 받은 창12장부터 신앙고백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인정받는 15장 6절까지 아브라함의 행적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한 인간의 죄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왔습니까? 아내와 조카와 식솔들과 재산들을 가득 싣고 약속의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바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기 전에 하나님에게 뜻을 묻는 기도를 했다거나 하나님의 듯을 구하기 위해 고심을 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했다는 반증입니다. 심지어 애굽에 가서는 마누라를 누이로 속이고 그것도 모자라 마누라를 팔아 한 몫 두둑이 챙기는 나쁜 인간이었습니다. 창12:6절을 보세요.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느니라” 차마 부끄러워 읽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대목입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람이 믿음의 조상입니까? 이것을 두고 바울은 로마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2) 요셉(9~16절)
스데반의 설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족장들 즉, 이삭과 야곱과 열 두 조상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요셉의 이여기로 진전합니다. 이곳에서 스데반은 요셉의 형제들을 등장시키면서 그 형제들이 요셉에게 얼마나 완악했는가를 증명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두 가지 사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는 요셉을 시기했고, 다른 하나는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요즘 말로 인신매매입니다. 이 설교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상들이 의인들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을 핍박하는 악한 자들이었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악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요셉이 이중적인 불의한 일을 당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은혜를 스데반은 네 가지로 풀이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9절), 둘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셨다(10절 상), 셋째,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다(10절 중), 넷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과 바로의 온 집을 위한 치리자로 세우셨다(10절하)입니다. 즉, 스데반의 설교는 의인이 비록 억울한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3) 모세(17~43절)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잠깐 스데반은 요셉에서 모세로 넘어가기 전에 그 사이를 메울 수 있는 상황을 17~19에서 설명합니다. 스데반의 눈에는 모세의 등장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진행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개입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17상)”
스데반은 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때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했고, 다음으로 애굽에 새로운 왕이 일어나 백성을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핍박은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바로 이런 상황 하에서 모세가 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때, 카이로스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일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40년을 기준으로 나누면서 모세의 일생을 정리합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23), ‘사십 년이 차매’(30) ‘사십 년간’(36)이 이어집니다. 이 곳에서 스데반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적과 불순종입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한 일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출애굽을 지도한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고,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고, 그리고 광야교회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적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스데반은 백성들의 사악함이 점층적으로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일곱 가지로 설명하비다. 즉, 모세에게 순종할 뜻을 버리고, 거절하고, 마음으로 애굽을 사모했고, 아론에게 악한 것을 요구했고, 우상을 만들었고, 제사를 드렸고, 기뻐하였다(39-41절)고 증언합니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얼마나 모세에게 완악한 존재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2절에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에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다”고 결론짓습니다.
4) 성전(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44~50절)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그것은 성전(성막)에 과한 살교입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스데반이 이 설교를 하는 배경에는 성전논쟁이 갈려 있습니다. 성전을 모독했다고 유대인들이 일고 고소를 했기에 당연히 진짜 성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붙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에 관련된 네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가 본 그대로’(44절) 증거의 장막을 지었고, 여호수아는 그 장막을 가나안에 가지고 들어갔고, 다윗은 성전을 지을 것을 간구하고 준비했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말하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막의 발전입니다. 전체적으로 스데반은 성막과 성전을 구분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성막과 관련이 있다면 다윗과 솔로몬 성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공간에 하나님이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성막을 만든 동기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성전은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응답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과 성전은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사람이 만든 것에 제한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사야의 글을 통해 변론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게시지 않는다”(48절. 사66:1-2)
3. 결론
이제 스데반은 긴 역사를 설명한 다음 51~53절에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이곳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 가혹한 호칭을 사용합니다. 51절을 보세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목이 곧고’라는 표현은 출33:3에서 모세를 거역하고 금송아지에게 경배했던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붙여진 비유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누차 할례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 가르쳐 주셨음을 근거로 불순종한 백성을 빗대어 나타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할례에 대해 ‘표면적 할례’와 ‘이면적 할례’를 비교함으로서 진정한 마음의 할례란,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롬2;28-29)
스데반이 이렇게 강하게 지적한 것은 유대인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조상들과 같이 선지자나 의인을 핍박하고 살해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52절을 보세요.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다”고 적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모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자부심으로 알고 믿어왔던 중요한 중심축을 스데반은 지금 뿌리 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유대주의, 특히 유대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의인이 아니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할례를 받았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성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오직 자신들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선민이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52하)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의인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넘겨 죽게 만든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했다고 지적합니다.(53). 이 율법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말합니다. 유ㅐ인을등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율법을 거절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냉혹하게 유대인들을 꾸짖습니다. 비록 짧은 적용에 지나지 않았지만 단어단어와 구절구절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사릿발 같은 준엄한 비판이 이어지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는 이러한 냉혹한 비판의 결과로 유대인들의 미움과 분노를 받아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변론에 대해 자유주의자나 무신론자들은 스데반이 지혜롭지 못하다거나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 출신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무신론자였던 ‘버나드 쇼’라는 사람이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한 참을성 없는 젊은이가 공회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우선 공회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나서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라는 가장 모욕적인 말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을 지루하게 하고 괴롭힌 것에다 종국에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이것의 태도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그를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쳐 죽였다. 이것은 조심성 없고 지루하게 속여먹으려는 합동에 대해서 좀 가혹한 형벌이긴 하지만 가난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살해한 것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고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또 어떤 복음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는 것이라 평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심각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눈을 인간에게 고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스데반 집사가 너무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마치 의인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듯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존재인가를 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바로 이 점을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주지시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라면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늘 그랬듯이 회개는커녕 다시 손에 돌을 주기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일본의 극우파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씻지 못할 엄청난 범죄에는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조센징’ 운운하며 주먹 쥐고 침을 튀기는 것과 어지 그리 같은 모습인지 새삼 느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이런 악인들의 행동을 끝까지 눈 감고 계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공의의 심판이 잇을 것입니다. 우리 택한 자들이 견딜 수 없다고 여겨지는 그 때에 하나님의 불이 그들 머리 위에 덜어질 것입니다. 악인은 멸망의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생의 심판을 받는 것이 하늘의 법칙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통해 얻어야 하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성령 충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 충만하고 기도 충만하고 사랑 충만해야 합니다. 아리엘 성도 모두에게 이 세 가지 충만의 복이 있으시길 기원 드립니다. 아멘.
[출처] 27주차. 스데반과 유대주의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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