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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섭리 신앙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8. 2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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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부활주일을 보냈다. 매주일이 부활주일이지만 왠지 오늘만 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사람이기 때문에 분위기를 타는 것인지 아니면 이 시기가 특별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부활 신앙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부활주일을 어떤 자세로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과거의 부활주일에 대한 개념과 자세와 단절되지도 말아야 하지만 바꾸지도 말아야 한다. 단지 발전되거나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흔히들 부활주일이면 삶은 계란을 나눠준다. 외국에서는 계란 모양의 초콜릿을 나눠준다. 또 부활주일에는 토끼를 상징적으로 떠올린다. 모두 다산(多産)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본연의 의미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습관과 풍습대로 진리를 문화에 적용시켜 발전시킨다. 이제 본래의 부활주일에 대한 자세는 어떠해야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 본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기독교인의 임무이다. 항상 우리는 본연의 의미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종 문화에 단순히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기생충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문자적 의미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금요일 오후에 죽으신 후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다. 이 의미를 준수하기 위해 초대교회 때부터 앞으로도 매주일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린다. 매주일 부활주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매번 드리기 때문에 습관적일 수 있겠으나 습관은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1차적인 의미는 그분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2차적 의미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부활의 삶을 맛본다. 비록 현재는 힘들더라도 언제든 일으키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세였다. 아이를 잉태하거나 출산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활 신앙이다.
하지만 이런 부활 신앙을 맹신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일어나곤 한다. 자신이 직면한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보고 섭리의 하나님을 맹신하여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영적 일에 몰두한다는 식으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데까진 좋지만 지나쳐서 하나님과 협력한다(synergy)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좌파에 해당된다. 이렇게 우편으로도 좌편으로도 기울어지는 경향을 우리는 늘 직면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염세적이거나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태양계에서 조금의 오차가 생기거나 핵무기들을 지닌 자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경우 세상은 종말이 임한다고 인식하지만 망각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긴장과 평정 사이에 우리는 잘 헤쳐 살아가고 있다. 부활의 삶이란 그분의 섭리를 늘 인식하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동시에 자신의 책임과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그분에 대한 지식을 필수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도요한에게 말씀을 기록하라고 했다. 그분의 말씀은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 절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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